– 공산당과 나치(8)
글/ 한메이
[밍후이왕] ‘중국 기적’과 ‘독일 기적’은 모두 기형적인 번영이고 왜곡된 발전으로서, 전문가의 말로 한다면 모두 ‘저(低) 인권 우세’의 기초 위에 건립한 것이다. 때문에 나중에는 진정으로 국민에게 복을 마련해 줄 수 없는 것이다. – 머리말
(‘사고하지 않다’와 ‘당의 말을 듣는’ 위의 문장에 이어)
2011년 2월 15일, 중국의 각 대형 매체는 모두 뚜렷한 위치에, 중국 GDP(국민총생산)가 일본을 초과하여 세계 2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실었다.
일본 내각이 14일 공포한 수치에서 밝힌 바로는, 2010년 일본 국내 생산 총생산량(GDP)은 달러로 환산하면 5.4742조 달러이고 중국은 5.8786조 달러인데 이는 중국 경제 총생산이 처음으로 일본을 초과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본은 1968년 이래 처음으로 ‘제2경제대국’ 지위를 내놓게 되었다.
이 소식을 보도함과 동시에 중국 관방의 많은 매체들은 또 어느 외국 매체가 중국을 치켜세운 평론을 앞다투어 인용하였다. ‘노령화 및 통화 긴축 등의 영향을 받아 일본 GDP 증가 속도는 느리다. 하지만 중국은 고속 증가를 유지하고 있는데 두 나라 간의 격차는 앞으로 반드시 끊임없이 크게 벌어질 것이다.’ ‘중국 경제는 활기차게 발전하고 있으며, 아울러 지금 바로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 중국은 현재 세계상 가장 큰 자동차 시장이며, 동시에 최대 에너지를 소모하는 국가다. 중국이 지금의 경제 증가율을 유지한다면 2020년~2030년 사이에 중국은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제1 경제 대국으로 될 희망이 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개혁개방’ 후의 중국을 마오(毛)의 시대와 비교해보면 경제상 확실히 거대한 변화가 발생했고, GDP의 지속적인 증가, 재산 케이크의 급속한 증대로 경제 순위가 점차 앞으로 움직이게 되었으며, 이번에는 GDP 총량이 일본을 초과하여 세계 두 번째로 된 것이 돌출한 표지로 되었다. 이와 동시에 경제 발달 지역, 특히 연해 도시와 중심 도시에는 고층건물들이 땅을 차고 즐비하게 세워졌고, 고속도로가 사면팔방으로 통했으며, 승용차들이 물결처럼 다닌다. 오늘의 베이징, 상하이, 선전, 광저우 등 중국 1선 도시의 그 번화한 정도는 뉴욕, 파리, 런던 등 서양 대도시들과 거의 별반 차별이 없는데 이것이 바로 중공(중국공산당)이 흐뭇해하는 것이고 동시에 일부 서양 매체와 저명인사가 떠들어대는 이른바 ‘중국 기적’이다.
하지만 문외한은 번화함을 보지만 전문가는 비결을 본다. 중국 내정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모두 이른바 ‘중국 기적’은 실은 일종의 쇼윈도 식의 기형적인 번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일치하게 여기고 있다. 기형이란 바로 기형에 있는 것으로서 이런 경제의 지속적인 쾌속 발전은 완전히 자원을 무리하게 소모하여 환경을 오염시키고, 도덕을 상실하며 재산분배가 심각하게 불공평하고, 빈부 차이가 급격히 커지며 국민 권리를 무리하게 짓밟은 기초 위에 건립한 것으로서 바꾸어 말한다면 절대 다수의 이익을 희생하고, 중화민족의 전도와 자손 후대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을 대가로 한 것이다.
분배의 불공평함과 빈부 차이를 놓고 말해 보자. 각국 정부는 모두 중국 은행의 거액의 국민 저축을 몹시 부러워하고 있는데 이런 저금 중의 80% 이상의 자금은 20%의 중국 국민 소유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중국인의 80%, 은행에서의 1인당 평균 저금액은 놀랍게도 5000위안(약 90만원)도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또 한 가지 수치가 있는데, 중공 정권 건립 60주년 경제 총생산은 77배로 증가하고 1인당 평균 국내 총생산 수치는 32.4배 증가했지만 국가 재정수입은 도리어 985배 증가하였다. 2008년의 국민 총생산은 30조 670억 위안인데 재정 수입은 도리어 6조 670억 위안에 달하여 놀랍게도 국민 총생산의 20%이상을 점했다. 이건 아직 중앙정부의 재정수입뿐이고 성, 시, 현, 향을 비롯한 4급 행정기구의 지방 재정 수입의 총합은 계산할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해서 중국 경제는 줄곧 급속하게 발전했지만 벌어들인 돈은 주로 정부, 기업과 부자들의 손에 들어가고 일반 국민의 주머니에 남은 것은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게다가 천문학적인 숫자의 의료비용과 형편없이 비싼 집값으로 인하여 다수 중국 사람은 모두 빚더미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라는 부유해지고 소수인이 부유해졌으나 국민은 도리어 가난해진 것이 현재 최대의 중국 특색으로 되었다!
또 자원의 지출에 대해 말해보자. 중국 경제의 증가는 전형적인 허술함이 증가되는 방식으로, 소모되는 에너지원 비례는 중국GDP가 전 세계 GDP 총량 중의 배당량보다 훨씬 높으며, 2009년 중국GDP는 세계의 8.6%를 점했으나 도리어 세계 46.9%의 석탄과 10.4%의 석유를 소모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미국 GDP는 세계의 24.3%를 점했고 석탄과 석유 소비량은 각기 15.2%와 21.7%였다. 중국 국가 환보국 총국의 정보에 따르면 매 생산 가치가 만 달러인 상품에 중국이 현재 소모한 원재료는 일본의 7배, 미국의 6배, 심지어 인도보다도 2배 더 높다. 중앙 텔레비전 제2채널 보도에 따르면, 중국에서 해마다 만들어낸 GDP 중의 18%의 GDP는 생태환경 파괴와 자원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 한다.
환경오염 정도는 더욱 사람을 놀라게 한다. 자료가 밝힌 데 따르면 중국 1/5 경작지가 심각하게 중금속으로 오염되었고, 도시 구간 하류의 70%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중국 사람의 식수 안전은 진작 심각한 문제로 되었다. 세계은행은 환경오염이 가장 엄중한 세계 10대 도시 가운데 중국이 6개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사막화되는 국토가 매년 2,600여 평방킬로미터의 속도로 서에서 동으로 밀고 나가고 있으며 전국 수토유실 면적은 국토의 38%를 차지하며 18개 성(구)의 471개 현, 근 4억 인구의 경작지와 집이 사막화 위협 속에 있다.
전문가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은 미래에 1.5억 인구가 생태난민으로 될 것이라 한다. 2006년 8월 26일 중국 인대 상위회 환경수사 보고에 ‘물이 있어도 다 더럽고 늘 산성비가 내리며 오염이 심각하여 보기만 해도 몸서리친다.’ ‘더는 끌어갈 수 없다.’란 글로 오염의 심각성을 형용하였다. 위성으로 찍은 지구 사진에 많은 나라는 녹색에 뒤덮였지만 중국은 황토로 뒤덮였다. 중국 토지가 이렇듯 유린당하는데 대하여, 중공이 아직도 ‘궐기’를 외치는 걸 보면서 많은 중국 동포는 매우 낙담하였다. 분명한 바, 환경문제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중국의 경제 기적은 재빨리 지나간 일로 되고 말 것이다.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기적이 나치 독일에서도 발생했었다!
나치라고 언급하면 사람들은 모두 2차 세계 대전, 수용소, 분시로, 게슈타포와 친위대를 생각할 것이지만 히틀러가 권력에 올라앉은 후 짧디짧은 몇 년 사이에 한동안 경제 침체에 빠졌던 독일을 재빨리 부흥시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주 적다. 이는 당시 나치당 자신뿐만 아니라 일부 서양 경제학자마저 모두 ‘기적’이라 불렀다.
1929년부터 1939년 사이, 한 차례 경제 대공황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번의 경제 대공황의 영향은 역사상의 그 어느 경제 공황보다 모두 심각하였다. 자본의 결핍은 모든 공업화 국가에 모두 수출과 국내 소비의 급감을 가져다주었는데, 그중 세계 국제 무역은 1929년의 686억 달러에서 1930년에는 556억 달러, 1931년엔 391억 달라, 1932년의 269억 달러, 1033년엔 242억 달러로 감소되었는데 감소 정도는 종전의 국제무역의 최대 감소 수치인 7%의 몇 배나 되었다. 모든 국가에서 경제 쇠퇴 후의 결과는 모두 대규모의 실직이었다. 미국은 370만, 독일은 560만, 영국은 280만이었다. 추산에 따르면 경제공황시기, 전 세계의 재산 손해는 2,500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고 경제를 회복, 발전하기 위하여 서양 각국은 분분히 여러모로 좋은 대책을 궁리하였는데, 나치 독일은 대공황 시기 가장 먼저 부흥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짧은 4년 사이에 1932년부터 1937년까지 독일의 국민 총생산은 102% 증가하였고, 국민 수입도 한 배 증가하였다. 독일의 실업률은 원래의 30%에서 거의 0에 도달하였고 1936년 가을에 와서는 실업률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어 사람마다 거의 모두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독일은 또 전국 고속도로 망의 건설을 완수하여 중공업의 기초 체계를 재정비하게 되었다.
고속도로를 예로 든다면, 세계상의 고속도로는 바로 당시의 독일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1939년에 와서 나치 독일은 이미 고속도로 3천여 킬로미터를 건설하였는데 이런 고속도로는 전국의 모든 주와 도시를 연결하였고 또 주변 국가에도 통하였다. 히틀러가 무너질 때에 이르러 나치 독일은 이미 최초 규모의 총 길이 7,000킬로미터 중의 4000킬로미터를 건설하였다. 오늘, 독일의 고속도로는 모두 1만 2천 400킬로미터이고 그 중 1/4은 히틀러 시대에 부설한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까지도 그것을 ‘히틀러길’이라고 부른다.
그 해, 히틀러는 고속도로의 공정 질량에 시공 품질을 극히 엄격하게 지시했다. 보통 차 4대 너비인 34미터이고 중간에 약 5미터 간격대가 있는데, 풀과 나무를 심었다. 가로등을 설치하지 않으며 200미터마다 금속을 씌운 콘크리트 기둥을 세웠는데 밤에 차의 전조등이 비추면 빛이 반사되어 길 전체에 빛이 환하게 된다. 길은 특수 처리를 하여 손가락 크기만큼 패인 곳이 정연하게 줄지어 있어 비가 와도 미끄러지지 않는다. 경사도는 될수록 적게 하고 충분한 시야를 갖게 하기 위해 커브의 반경은 될수록 크게 하는 등등이었다. 긴급 정차 지대, 고가 다리, 입체 교차로까지도 매 일정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주유소, 연결된 식당 등의 설치마저 다 생각하였다. 히틀러는 심지어 고속도로는 군용차량이 하루 내에 독일의 동서와 남북을 관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길 구간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하였다. 고속도로가 건설된 후 연도의 경치가 아름답고 기술이 선진적이어서 히틀러는 각국 매체를 널리 초청하여 선전보도를 하게 하였는데 미국 사람마저,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길만 있어서는 안 되고 또 달리는 차가 있어야 했다. 히틀러의 다른 한 중요한 계획은 독일 국민마다 차를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 자동차 역사상의 명차인 비틀즈의 유래이다. 사람마다 다 살 수 있는 이런 승용차를 생산하기 위하여 유명한 대중 자동차 공장이 설립되었다.
나치 독일의 이런 경제 성과는 거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 아주 기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경제 성과는 모두 전체 독일 국민의 자유 권리가 야만적으로 박탈당하고, 그들의 사업과 생활이 전례 없이 강제로 통제당하고, 그들 대대손손이 창조한 독일의 우수한 문화가 심한 파괴를 당한 기초 위에 건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또 있을 수 있다. 신속히 회복한 독일 경제는 국민의 복지를 실현한 도구로 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전쟁기기를 기동하기 위한 광적인 준비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나치 독일의 경제는 여전히 명실이 부합된 군사 공업을 기초로 하고 지탱해온 전쟁 경제라는 것이다. 독일 군사경제 참모부장관 게오르그 토마스 소장은 당시 솔직하게 말했다. ‘한 나라가,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에 핍박으로 한 것과 같이, 평화시기에도 의식적으로 절차 있게 그것의 전부의 경제 역량을 다 전쟁 수요의 적응 준비에 썼는데 역사상 이런 상황은 아주 적었던 것이다’ 그가 한 말은 틀리지 않는다. 다만 경제를 전쟁의 궤도로 몰고 간 것은 ‘핍박’이 아니라 히틀러가 의식적으로 결정을 한 것일 뿐이다. 전쟁을 발동하지 않으면 ‘대포를 요구하지 버터는 요구하지 않는다.’는 이런 경제는 절대로 한 나라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지탱할 수 없으며, 진정 국민을 위해 복을 마련한다는 것은 더구나 불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해보자. ‘대포를 요구하지 버터는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나치 당국은 극력 양식과 부식품 수입을 제한하였다. 1929년, 독일 수입 양식은 182.9만 톤, 동물 기름은 12.5만 톤, 치즈 6.4만 톤, 계란 16.8만 톤이었다. 1939년에 와서는 양식 수입이 126,8만 톤, 동물기름이 4.2만 톤, 치즈 3.2만 톤, 계란 10.2만 톤이었다. 이로부터 조성된 결과란 바로 1939년 나치 당국은 야채, 감자 이외의 모든 식품을 정량 공급하였고, 아울러 진일보 원유의 양식과 부식품의 소비 정량을 줄였다. 결과적으로 독일 국민 1인당 양식 정량은 매일 겨우 343g으로, 키가 작은 일본 사람이 절반 굶주릴 때의 양식 정량(350-390g)보다도 못했다.
이처럼 ‘중국 기적’과 ‘독일 부흥’은 모두 기형적인 번영이며, 왜곡적인 발전으로서 전문가의 말로 한다면 모두 ‘저(低) 인권 우세’의 기초 상의 것이다. 때문에 최종에는 진정으로 국민에게 복을 마련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문장발표 : 2012년 6월 27일
문장분류 :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6/27/2594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