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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융캉의 죄악 및 그가 직면한 말로

글/향명(向明)

[밍후이왕] 최근, 보시라이가 조사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발표된 후 보시라이 막후의 검은 손(黑手)이자 중공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의 총 두목인 저우융캉(周永康)의 죄악이 잇따라 신속히 폭로되고 있다. 저우융캉이 장쩌민의 의도에 따라 잔혹하게 파룬궁을 박해한 죄악 역시 더욱 많은 사람의 주목을 일으키고 있다.

1. 저우융캉의 실체

(1) 박해에 의거해 장쩌민의 환심을 사고 피를 이용해 승진

해외 언론의 폭로에 따르면 저우융캉의 승진은 주로 초기에는 뇌물 제공, 후기에는 장쩌민의 발탁이라고 한다.

저우융캉은 전처와 줄곧 관계가 좋지 않았다. 늘 아내 앞에서 “사업으로 매우 바쁘다.”라고 자신을 표현하곤 했는데 실제로는 실업호텔에서 여러 번 여직원을 강간하고 다녔다. 한 번은 쓰촨성 인민대표회의 기간에 저우융캉은 술집에서 공개적으로 기생을 모집했다. 이후에 전처는 기이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내부인의 폭로에 따르면 저우융캉이 암살했다고 한다.), 얼마 안 되어 저우융캉은 장쩌민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았다.

저우융캉은 중공 쓰촨성 성위원회 서기로 있던 적이 있다. 쓰촨 사람들은 모두 그를 ‘큰 깡패(大流氓)’로 불렀다. 그는 늘 자신이 장쩌민의 친척이며 “중앙에서 나를 파견했다.”, “나는 장주석 신변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저우융캉이 중공 쓰촨성 서기로 있을 때 그는 암살, 고문과 실종 등 수단으로 그의 관할 범위 내의 파룬궁 수련자를 위협하고 제거하는 것을 감독했고 잔혹한 연좌 정책을 실행해 “부모가 수련하면 자식들을 해고하고 자식이 수련하면 부모를 해고하며 퇴직금 지급을 중지하고 경제 내원을 끊어버리겠다.”고 기고만장하게 떠들었다.

저우융캉은 쓰촨성 사람들에게 ‘인권 살인자’로 불리고 있다. 쓰촨성에 있던 몇 년 사이에 근 1억 인구를 가진 쓰촨성을 파룬궁 박해가 가장 심한 성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는 파룬궁 박해에 의거해 선량한 사람의 피로 자신의 승진을 개척했다.

(2) 장쩌민에 의해 뤄간(羅幹)의 후임자로 선택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고, 냉혈하며, 탐욕하고, 호색하며, 사악하고 잔인한 저우융캉은 중공 당두목 장쩌민과 단번에 부합됐다.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 정책을 추종한 이유로 저우융캉은 빠르게 승진했다. 2002년 11월에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 서기처 서기로 선출되고, 아울러 중앙 정법위원회 부서기 관직을 맡았으며, 같은 해 12월 공안부 부장직을 넘겨받았다. 홍콩 ‘쟁명(爭鳴)’에서 보도한 적 있는바, 전 중공 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웨이젠항(尉健行)은 저우융캉이 공안부장직을 맡음을 명확히 반대하면서 공안사업에는 그의 특수성이 있으므로 저우융캉은 적임자가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장쩌민은 오히려 저우융캉을 적극 두둔하면서 저우융캉은 대기업과 중앙 부위에서 사업한 적이 있으므로 공안부장직을 맡아도 압력이 없을 것이며 신 사유를 지녀 일을 잘할 수 있다고 했다.

2003년 3월 3일, 저우융캉은 국무위원으로 임명되고 계속 공안부장, 무장경찰 부대 제1 정위를 겸임했다. 2007년 10월에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정법위 서기로 승진해 중공 정치법률 사업을 전면 장악하게 됐다. 장쩌민은 저우융캉을 뤄간의 직책을 이어받는데 배치하려 했다.

2003년 5월부터 2004년 2월에 이르는 7개월 가운데서 저우는 공안부장 신분으로 12차례나 각종 장소와 회의에서 파룬궁을 모욕 비방하고 파룬궁 탄압과 방비를 강조했다.

2003년 12월 공안부장을 막 겸임한 저우융캉은 중국 공안부 부속 각 국급(局級) 단위 주요 책임자 회의에서 파룬궁 박해 정책을 지속해서 추진하면서 말했다. “파룬궁을 호되게 타격하는 것은 여전히 중국 공안사업의 중점이다.”

저우융캉은 장쩌민의 파룬궁에 대한 소멸정책을 진력 추진하고 시행했는바 이는 그가 일약 공안부장으로 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었다.

저우융캉이 공안부장과 정법위 서기를 맡은 이래, 중국의 법제(法制) 건설은 급격히 뒷걸음쳤고, 사회 치안은 급속히 악화돼 심각한 형사사건 발생이 늘어났으며, 마피아 세력이 판을 치고 인권은 아예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일찍 베이징 모 정협위원은 인터넷에 메모지를 발송해 “오늘날 치안 질서가 어떠하면 오늘날 어떠한 공안부장이 있다!”라고 했다. 그때 중국의 형사사건은 매년 17% 내지 22%로 상승했고, 공안부문은 국민이 공인하는 가장 부패하고 암흑한 관청이었다. 인터넷에는 “폭력배 두목 저우융캉이 중공 공안부장과 정법위 서기를 맡았다.”란 말이 돌았다.

(3) 장쩌민은 박해를 유지하기 위해 저우융캉이 17대 ‘상무위원’에 들어가도록 힘썼다

저우융캉과 장쩌민의 관계는 다쳐도 같이 다칠 정도로 보통이 아니다. 저우융캉은 장쩌민과 한 패거리로 2007년 중공 17대 최대 인사 논쟁점은 바로 저우융캉이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는 문제였다. 비록 저우융캉은 그의 매 관직 임기 내에 악행으로 얼룩졌고 끊임없이 검거 적발됐으며 심지어 몇 번이나 핍박에 못 이겨 공안부장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장쩌민의 강력한 관여로 유임할 수 있었다.

17대 전의 인사변동 교체가 있은 후 장쩌민파 세력은 진일보 위축됐다. 권력을 철저히 잃은 후 청산당할까 걱정이 된 장쩌민은 악행만 골라하는 저우융캉을 적극 결책층(決策層)에 밀어 넣어 이로써 공안, 사법계통을 통제해 파룬궁 박해 정책을 계속 유지하려 했다. 중공 정법계통을 장악한 저우융캉은 중공 내부투쟁에서 열세에 처한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를 유지하도록 하는 ‘구명의 지푸라기(救命稻草)’가 됐다.

2007년, 청산될까 두려웠던 장쩌민은 격렬한 내부투쟁을 통해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중의 심복 인원을 유지하려 했고 저우융캉의 17대 ‘상무위원 진입’을 적극 서둘러 성사시켰다.

해외 언론 보도에 따르면, 17대 내부투쟁의 초점은 저우융캉이었고 18대 내부투쟁 초점은 보시라이였다. 17대 당시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 정책을 계속하기 위해서 중공 최고층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서 사법계통을 책임졌던 뤄간에 이어 파룬궁 탄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심복을 찾아야 했다. 중공 내부의 격렬한 투쟁, 소탕을 거쳐 장쩌민은 저우융캉을 중공 정치국 상위에 밀어 넣었다.

2. 정법위의 사악 세력이 극에 달하게 한 저우융캉

1999년 장쩌민이 박해를 발동할 때 중공 정법위서기는 뤄간이었는데 뤄간은 정법위를 줄곧 2007년까지 조종했고, 그 후엔 저우융캉이 계승했다. 저우융캉은 장쩌민과 뤄간이 사퇴한 후 박해 정책을 유지한 최고 두목이다.

저우융캉은 파룬궁 탄압 운동을 주관하는 과정에 정법위의 사악한 세력을 끊임없이 팽창시켜 극에 달하게 할 정도였다.

‘문화혁명’ 후 중공 어떤 지도자, 예를 들면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차오스(喬石) 등은 본래 법제 계통을 세워 ‘법에 따라 치국’하며 아울러 한때 정법위를 제거했다. 하지만 ‘6.4천안문사건’의 총성은 이 진행을 중단시켰고 1990년에 장쩌민은 정법위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러하긴 했지만, 중공의 법률은 아직 그래도 한 장의 백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적어도 일부 시기, 일부 지방, 일부 사건에서는 그래도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1999년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후 형세에는 돌려세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왜냐하면, 파룬궁을 수련하는 인원이 1억에 달했고 이런 사람은 또 모두 법을 지키는 양민(良民)이었기 때문이다. 파룬궁을 박해하려면 반드시 현 사법 체제를 철저히 부숴야 했다. 오직 사회 정의를 회복할 수 있는 어떠한 역량도 없어야만 비로소 파룬궁 박해를 유효하게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장쩌민은 부서를 초월한 치외 법권 기구 ‘610 사무실’을 만들었고, 아울러 정법위를 통해 ‘610 사무실’을 중요 집행기구로 삼았으며, 모든 공안, 검찰, 법원, 사법, 국가안전, 외교, 재정, 위생 등 각 부문은 모두 ‘610’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일체는 모두 억지 탄압을 위해 길을 비켜야 했다. 정법위 직권은 끝없이 팽창되고 16대 정법위서기 뤄간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으며 아울러 저우융캉으로 이어졌다.

저우융캉은 정법위 세력을 급격하게 팽창시켰다. 중공은 매년 ‘안정유지’에 7천억 위안이 넘는 돈을 썼는데 자금 증가속도와 예산은 모두 군대를 초과했다. 이런 돈은 모두 정법위 관할 하의 공안, 무장경찰 등이 써버렸다. 그러하기에 어느 평론가는 “정법위의 세력이 군대를 초과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로 저우융캉이 장악한 정법위 세력이 팽창했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감히 보시라이와 ‘모반’해 보시라이를 중공 18대에 중공 정치국 상위로 승진시키며 아울러 정법위를 접수 관리하게 한 다음 기회를 엿보아 중공 최고 권력을 탈취하려 음모했던 것이다.

저우융캉이 정법위를 급격히 팽창시키고 있을 시기 역시 중국사회 법제가 전면 후퇴하고, 도덕이 전면 손상될 때이며, 또한 중공 정법위가 중화를 어지럽히고 인류를 가장 심각하게 해친 시기이기도 하다.

3. 저우융캉은 파룬궁 박해 원흉 중 하나

저우융캉은 파룬궁을 박해한 4대 원흉 중 하나다[기타 3명의 원흉은 장쩌민, 뤄간, 류징(劉京)이다.]

저우융캉이 쓰촨성 서기와 공안부장을 맡고 있을 당시 박해 죄행은 이미 극히 엄중했고, 뤄간을 계승해 중공의 정치국 상위가 된 후에는 박해가 원래보다 더욱 심해졌다.

저우융캉은 파룬궁을 박해하는 각급 정법위 계통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로 가서 직접 현지의 ‘610’, 국가안전부, 공안, 지역사회 특무를 지휘해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했다. 그가 가는 곳이면 그곳 파룬궁 수련생이 납치당했고, 박해가 더욱 심해졌거나 세뇌반을 꾸려 심한 정신적 손상을 주었으며 그곳 국민이 독해 됐다.

2009년 말부터 2010년 초에 저우융캉은 전문 파룬궁을 겨냥해 법원 등 부문에 파룬궁 수련생을 모함하는 사건을 빠르고 엄중히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010년 충칭 시위서기 보시라이는 2012년에 ‘상무위원’인 정법위 서기를 넘겨받으려 시도했는바, 저우융캉이 충칭으로 올 즈음, 충칭의 ‘지역사회 경계와 통제(社區防控)’ 성과(군중을 박해한 능력 수준)를 나타내기 위해 왕리쥔(王立軍-충칭시 공안국국장)과 함께 충칭에서 충칭 사당(邪黨)의 ‘610’, 국가안전부, 공안, 지역사회 특무를 조종해 탄원인, 반체제 인사, 종교인사 및 파룬궁수련자를 감시하고 참혹한 살육을 일으켰다. 11월 16일 충칭 사당의 ‘610’, 국가안전부, 공안, 지역사회 특무는 저우융캉과 보시라이 환심을 사기 위해 조직적으로 몇 십 명 파룬궁 수련생을 납치했다.

2010년 11월, 파룬궁 수련생은 랴오닝성 다롄 교통 방송국에 성공적으로 진상 방송을 삽입했는데 중공 당국은 이를 극히 두려워했고 저우융캉은 다롄에 진주해 모든 경찰력, 심지어 부대까지 동원해 직접 파룬궁 수련생 납치를 감행했다.

이 밖에, 2012년 3월 23일 저우융캉이 자신에 대한 유언비어를 해명하느라 모습을 드러낸 동시에, 일찍이 저우융캉에 의해 최고 봉쇄 단어로 지정됐던 ‘생체 장기적출’ 관련 단어가 최대 인터넷 검색사이트 ‘바이두’에서 한 때 해금 됐다. 바이두 사이트에는 중공이 파룬궁 수련생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한 폭행을 폭로한 문장이 대량 등재됐다. 이 생체장기 적출 참극은 바로 정법위 계통이 관리하는 중국 각 대도시 노동교양소에서 발생했고, 충칭 전 공안국장 왕리쥔이 직접 이 일에 참여했다. 선양(瀋陽) 육군 총병원에서 파룬궁 수련생을 산채로 장기를 적출한 일이 폭로된 후 저우융캉은 선양에 가서 직접 파룬궁 수련생 박해를 지휘했다.

4. 저우융캉, 박해 죄행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고소돼

이하는 저우융캉이 세계 여러 장소에서 고소된 일부 사례다.

2001년 8월 27일, 미국 보스턴 파룬궁 수련생인 허하이잉(何海鷹)이 미국 일리노이주 북부 법원에 중국 쓰촨성 서기 저우융캉을 고문박해. 파룬궁 수련생 암살, 반인류죄 등 죄행으로 고소했다.

2004년 11월 12일, 저우융캉과 장쩌민, 뤄간, 류징, 리란칭(李嵐淸) 등 사람을 밴쿠버 파룬궁 수련생이 캐나다 검찰에 고소했다.

2005년 5월 30일, 유럽 ‘파룬궁의 벗’에서 영국 이민부에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한 40명의 가장 중요한 중국 고위급 관료 명단 및 그 죄행과 증거를 직접 건네주면서 그들이 영국에 입국하지 못하도록 신청했다.

2005년 7월 19일, 벨기에 파룬궁 수련생 두 명이 소란죄로 ‘610 사무실’ 및 뤄간, 저우융캉, 류징과 국가 안전부장 쉬융웨(徐永躍)를 고소했다. 2009년 5월 28일, 벨기에 고등법원은 두 파룬궁 수련생이 기소한 중공 사당 ‘610사무실’의 전화소란 사건에 대한 증언을 청취했다. 사건은 여전히 계속 진행될 것이다.

5. 안팎으로 곤경에 빠져 추궁당하는 저우융캉

2월 초, 충칭에서 왕리쥔 사건이 폭발했고 3월 중순에는 보시라이가 면직됐으며, 4월 10일에는 보시라이가 입안 조사를 당한다고 했다. 이 급격한 변화 가운데서 저우융캉은 처음부터 보시라이를 보호하려 시도했으나 오히려 자신의 감춰진 죄행이 갈수록 더욱 많이 폭로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것을 포함해 강간, 아들의 탐오와 방종, 피비린내 나는 파룬궁 박해, 보시라이와 밀모해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죄행이 날마다 모두 대량 폭로되고 있어 지금 저우융캉은 자신마저 보호하기 어렵게 됐다.

저우융캉의 죄행이 폭로되어 널리 알려짐에 따라 그의 박해 죄행은 반드시 추궁당할 것이다. 우리는 저우융캉이 반드시 법에 따라 처리될 것이며 좋은 결말이 없으리란 것을 믿고 있다. 아직도 맹목적으로 장쩌민, 저우융캉 무리를 따라 파룬궁을 박해하는 자들은 거울로 삼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2년 4월 15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4/15/2556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