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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융캉(周永康)은 파룬궁을 박해한 수괴 중 하나

글/순스샌(孫思賢)

[밍후이왕] 현임 중공 중앙정치법률위원회(이하 정법위) 서기 저우융캉(周永康)은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규합한 이른바 ‘중앙파룬궁문제처리소조’의 현임 두목이다. 정법위는 중공의 기구로서 정부를 간섭하고 사법의 독립성을 파괴하는 전형적인 조직이 되었다. ‘종합사무처리(綜治辦)’, ‘안정유지사무(維穩辦)’, ‘610사무(防範辦-경비사무)’는 모두 중공사당중앙위원회(이하 중공당위)의 정법위가 조종하고 있고, 정법위와 합하여 공무를 보며 몇 개 기구가 한 개 그룹으로서 파룬궁을 박해하는 과정에서 정법위와 610이 함께 박해계획을 수립하였고, 구체적인 박해를 실시하였다.

정법위는 중공당위가 1980년 이후 설립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응당 정부에 소속되어야 하는 공안, 검찰원, 법원, 사법, 국안(國安), 무장경찰이 오히려 정법위의 조종을 받게 되었다. 정법위가 존재하는 그 자체가 ‘헌법’ 제126조의 “인민법원은 법률의 규정에 따라 독립적으로 심판권을 행사하며, 행정 기관, 사회단체와 개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의 조항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법위는 법률의 근거가 없고 사법의 독립을 파괴한 범죄조직이다.

저우융캉은 사악한 본성으로 정법위 두목이 되었다

저우융캉은 쓰촨(四川)성 위원회 서기로 있을 때 여러 차례 부녀를 강간했고, 자기 부인을 그가 연출한 차 사고로 죽게 한 후(사람들은 그렇게 여긴다) 장쩌민의 질녀와 결혼하였다. 저우융캉은 냉혹하고 사악하여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것이 곧 장쩌민이 그를 파룬궁박해의 도구로 삼은 주된 원인이며, 권력으로써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정책을 지속하는 집행자가 되게 하였다.

저우는 90년대 말 국토자원부장에서 쓰촨성 위원회 서기로 승임했다. 16대에 중공 정치국에 진입했고, 200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으로 승임했는데 모두 장쩌민이 등용시킨 것이다. 장쩌민이 손수 저우를 정치국에 발탁했으며 현재 정법위 서기이다. 장은 저우융캉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극력 밀어 넣어 뤄간(罗干)에 이어 정법위를 주관하고 박해 정책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저우융캉은 파룬궁을 박해하면서 도덕과 법률을 말하지 않았다

쓰촨원촨(四川汶川)의 대지진 상황을 중공은 보고하지 않았는데 무너진 학교 건축은 대다수가 두부비지(허술한) 공정으로서 사실 국내외 인민들의 원망의 초점이 되었다. 특히 저우융캉은 일찍이 쓰촨에서 임직하였기에 그 책임을 밀어버리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국내외로부터 사회와 여론의 강한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우는 위기를 전가하려고 기도하면서 계속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 비방하였는데 그 시간은 9년 남짓 된다.

저우융캉의 의도 하에 중공 특무는 해외에서 포위공격, 매도, 위협, 구타 등 문화혁명방식의 폭력으로 해외 파룬궁 수련생을 습격하였으며, 국난을 당하여서도 국내외 매체를 이용하여 파룬궁에 대해 선동하고 적대시하며 화를 전가하였다. 저우는 ‘화교신문’을 통해 파룬궁 수련생들이 제기한 “천멸중공, 천우중화(天滅中共,天佑中華)”를 억지로 “천멸중국”으로 뜯어고쳐 중국 인민들이 파룽궁에 대해 증오하도록 선동하였다. 국내의 매체 대변자들이 “천멸중국”을 보도할 때면 이것은 미국 화교신문의 보도에 의한 것이라고 보도하기를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그들 자신도 이 요언이 실제와 너무 동떨어졌고 너무나 무섭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질의하기를 “파룬궁이 이런 구호를 외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파룬궁이 ‘천멸중공’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믿을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흑룡강성 이춘시 금산촌 파룬궁 수련생 친워밍(秦月明)은 2011년 2월 26일 쟈무스(佳木斯)감옥에서 박해를 받아 사망하였다. 친워밍의 아내 왕슈칭(王秀青)은 두 딸을 데리고 갖은 곤란을 이겨내면서 여기저기 상방하여 남편의 억울함을 씻으려고 했다. 하지만 상고는 활로가 없었다. 2011년 11월 13일 왕수칭과 작은 딸 친메이룽이 다시 노동교양소에 잡혀갔고 집에는 큰 딸 친룽챈만 남게 되었는데 그녀는 부모와 동생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친룽챈은 일찍이 베이징의 정의로운 변호사의 도움으로 노동교양소에 가서 법에 따라 여동생을 만나겠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변호사와 친룽챈이 떠난 후 소장 왕뢰는 베이징에 전화를 걸어 “나는 저우융캉, 당 중앙을 대표하여 반드시 변호사를 엄하게 처리하겠다. 변호사를 압박하여 더는 이 일에 참여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

저우융캉은 팔을 걷어 부치고 파룬궁을 탄압

중공 정법위 서기 저우융캉은 각급의 파룬궁 박해 부문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당지의 610, 국안, 공안, 지역 사회 특무들이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하는 것을 친히 지휘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파룬궁 수련생들이 납치되었고, 박해가 가중되었으며, 세뇌반을 꾸려 수련생들을 정신적으로 학대했고, 그 곳의 민중들은 독해되었다.

2009년 말부터 2010년 초까지 저우융캉은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겨냥하여 법원 등에 파룬궁 수련생을 모함하는 안건에 대해 빨리 엄중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하였다.

2010년 충칭시 위원회 서기 보시라이는 2012년 정법위 서기를 이어 받으려고 시도하면서 저우융캉이 충칭에 간 기회에 충칭지역에서 정치적 업적(군중을 박해하는 수준을 높이는 것)을 쌓기 위해 충칭시 공안국장 왕리쥔과 함께 참혹한 살육 바람을 일으켰다. 보시라이는 충칭 사당의 610, 국안, 공안, 지역사회 특무를 통제하여 이의인사, 종교 인사 및 파룬궁 수련생들을 엄밀히 감시하였다. 11월 16일 중공악당 610, 국안, 공안, 지역 특무들은 저우융캉과 보시라이에게 잘 보이고 환심을 사기 위해 조직적으로 음모하여 몇 십 명 파룬궁 수련생을 납치하였다.

2010년 11월 파룬궁 수련생들은 랴오닝성 다롄(遼寧省大連) 교통방송국에 파룬궁 진상을 삽입 방송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공당국은 지극히 당황해 하였고 중공 정법위 서기 저우융캉이 직접 다롄에 가서 모든 경찰, 심지어는 부대까지 동원하여 친히 인원을 배치하고 감시하면서 파룬궁 수련생들을 납치하였다.

그밖에도 2012년 3월 23일, 저우융캉이 말한 요언을 반박함과 동시에 일찍이 저우융캉에 의해 봉쇄됐던 가장 민감한 단어 “생체장기 적출”과 관련된 단어들이 한때 바이두(百度) 사이트에서 검색금지령이 해제되었다. 지금 바이두 사이트에는 중공이 파룬궁 수련생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한 만행을 폭로하는 문장이 대량으로 등재되고 있다. 이런 참극은 정법위 계통 관리하의 중국 각 성, 시의 노동교양소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 충칭시 공안국장 왕리쥔은 직접 이 일에 참가하였다. 선양(瀋陽) 육군 병원이 파룬궁 수련생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데 참여한 일이 폭로된 후에도 저우융캉은 선양에 가서 친히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박해를 지휘하였다.

저우융캉은 파룬궁을 박해하여 하늘에 사무치는 큰 죄를 지었기에 필히 중공의 해체와 함께 청산될 것이다. 사람들은 중공내부 투쟁 중 저우융캉이 세력을 잃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이 표상의 배후는 ‘선악에는 필히 응보, 응징이 있다’의 체현이며, 하늘이 이런 방식으로 극악무도한 사악도들을 도태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 중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파룬궁을 박해하는 장씨 집단과 중공의 죄악을 이해하게 하여 그것을 똑똑히 알고 그것들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문장 완성: 2012년 3월 26일
문장 분류: 시사평론
원문 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3/26/2547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