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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리쥔 사건과 천상의 계시

글/ 덕원(德元)

[밍후이왕] 고서에 이런 말이 있다. ‘낙엽이 지는걸 보면 세월이 다 저물어 감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걸 보면 가을이 이미 당도했고 1년도 거의 다 지나간다는 것이다. 병 속의 물이 어는 걸 보면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물을 가까운 데로부터 먼 곳을 보아낼 수 있다는 이치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가을이 다가옴을 알다(一葉知秋)”란 이 성어는 바로 여기로부터 변화 발전해 온 것인데, 국부적, 미세한 현상으로부터 사물의 발전 변화의 추세를 추측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최근 로이터 통신사 기자는 중공 양회 기간에 질문했다. “충칭시 전 부시장 왕리쥔(王立軍)이 청두주재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가 보호를 받으려 시도했는데 중공 정부에 보시라이에 대해, 충칭 지도자에 대해 여전히 믿음이 있는지” “왕리쥔 사건이 금년 말에 열리게 될 18대 교체 등 문제에 영향이 있는지” 등을 질문했다.

3월 2일 오후 3시, 중공 정치 협상회의 뉴스 대변인 자오치(趙啟)가 마침 언론에 이번 관련 상황을 소개하고 아울러 왕리쥔 상황에 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변하고 있었다. 그는 “왕리쥔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일부 매체에서 보도를 했는데 이런 보도는 모두 ‘조각그림 맞추기’다. 자료가 전면적이 못되기에 부족한 곳은 상상으로 그려낸 것이다. 때문에 이런 ‘조각그림’은 모두 정확하지 못하고 심지어 황당한 것이다. 왕리쥔 사건은 고립된 한 가지 사건이므로 너무 과다하게 상상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다.

과연 이러한가? 홍콩 언론 보도에 따르면, 3일 전 기자가 회의당 앞에서 충칭시 정협주석 싱위안민(邢元敏)을 만났는데 ‘왕리쥔’ 세 글자를 입 밖에 내자마자 싱주석은 재빨리 달아났다. 기자가 쫓아가서 묻자 싱위안민은 갑자기 상당히 피곤해 하는 표정을 보이면서 “예절을 모른다”, “사람을 존중하는 걸 배워야 하겠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 밖에, ‘충칭시 인대(인민대표대회의 간칭)’가 웨이보에 발표하는 소식 내용은 모두 심사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중공이 이렇듯 왕리쥔 사건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려 시도하는데 그럼 왕리쥔 사건 배후로 뻗어나간 의의는 무엇이겠는가? 사실 역사와 최근의 천상 변화는 이미 답안을 주었다.

부급(部級) 관원의 영사관 진입, 백 년 후 다시 재연

약 백 년 전인 1911년 10월, 대청국 자정원(大淸國資政院 – 당시의 ‘전국 인대’)의 백여 명이 투표 표결 방식으로 한 가지 결의를 통과시켰는데, 대청국 우전부 부장이며 정부급(正部級) 관리인 성선회(盛宣懷)의 사형을 즉시 집행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성선회는 미국 대사관에 도망쳐 보호를 요청했다.

당시 청조는 한창 성선회의 강력한 주장으로 천한(川漢), 오한(粵漢)선 철도 부설권을 공개적으로 외국에 팔아먹어 사천(四川)지역의 보로운동(保路運動)과 그 후 무창(武昌) 봉기를 유발하게 된다. 성선회가 미국 영사관으로 도망간 그 달 마침내 ‘신해혁명’이 폭발해 나라를 근 300년 유지해 나가던 대청조가 신속하게 역사 무대에서 물러나게 됐다.

백 년 후인 2012년 2월 6일, 중공의 부부급(副部級) 관리인 왕리쥔이 또 성선회의 극본을 재연해 쓰촨성 청두 미국 영사관으로 잠입했다. 이는 중공에 대해 말한다면 좋은 징조가 아닌 것 같다.

왕리쥔 사건에 따른 천상변화

‘천인감응’, ‘천인합일’은 중화 전통문화 중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다. 사람들은 하늘이 인간 세상의 역사의 흥성쇠락 및 인간의 화복을 좌우한다고 여겼다. 군왕은 천명을 받는데 만약 군왕이 하늘의 뜻대로 행동하지 못해 착오와 과실이 있다면 하늘은 괴이한 천상과 이상한 천재(天災)로 경고와 질책을 가한다. 그러므로 자고로 총명한 임금은 모두 ‘천의(天意)’를 몹시 중시했다.

중국의 옛 사람은 천인감응, 즉 천체변동은 인간의 변혁에 대응한다고 생각했다. ‘사기-천관서‘(史記-天官書)에서는 “성추지지,즉석야(星墜至地,則石也)”라 했다, 다시 말해서 유성이 지상에 떨어지면 운석이 된다는 것으로 일찍이 3천여 년 전 중국에서는 유성과 운석에 관한 많은 기재가 있었고, 도가에서는 밤에 천상을 보아 군주가 나라를 운영하는 흥쇠를 보아내고 임금의 권위, 생사 등 국가대사를 예견했다고 한다.

1976년 3월 8일, 하늘에서 운석 비가 내렸는데 그 중에는 큰 운석 세 개와 무수한 작은 운석이 있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이 소식을 들은 후 멍하니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죽을 때가 오래지 않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역사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호원 멍진윈(孟錦雲)에게 역사상 수많은 큰 인물이 죽기 전이면 모두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것으로 조짐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당시 중공의 무신론 독해로 아무것도 다 믿지 않던 멍진윈은 마오쩌둥의 이 말에 대해 의아해하면서 이해할 수 없어하며 자신은 그런 것을 믿지 않으며 모두 옛날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중얼거렸다. 옛 사람은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까?

하늘의 뜻은 바로 하늘의 뜻인지라 사람이 믿고 안 믿는 것과 상관없이 믿어도 발생하고 믿지 않아도 발생하는 법이다. 1976년 중공 마오쩌둥,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잇달아 사망했고 중국 정계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탕산(唐山)에도 대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1997년 2월 15일 산둥성 쥐안청(鄄城)에 또 운석 비가 내렸는데 열흘이 되기 전인 1997년 2월 19일에 덩샤오핑이 사망했다. 덩샤오핑이 사망한 사실은 운석 비의 천상 예보의 정확성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천문관 운석 전문가 장바오린(張寶林)의 서술에 따르면 그 후 몇 년 동안 중국에 더 이상 운석 비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2012년 2월 11일 오후 1시 40분, 칭하이(青海)성 시닝(西寧)시 황중(湟中)현에 또 대형 운석 비가 발생해 몇 백개의 운석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가장 큰 것은 15kg이었다. 현장 고찰을 통해 초보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는데 이번 운석 비 현상은 1997년 2월 15일 산둥성 쥐안청 뒤를 이어 중국에서 처음 발생한 운석 비 현상으로 그 운석의 크기와 많음은 1976년 3월 8일 지린성에 나타난 운석 비에 버금간다. 장바오린에 따르면 이번 운석 비는 규모가 1997년을 초과하고 1976년에 버금간다고 한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왕리쥔이 영사관으로 진입한 후 5일내에 발생한 천상 예고는 중공의 한 지도자가 사망하는 문제와만 관계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중공을 버려야만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중공이 정권을 세운 후, 당(黨) 문화를 통한 세뇌 교육은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개변시켰다. 당 문화 중의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사람에게 (사:邪)당의 말을 듣고 (사)당을 따라 가는 것이다. 당원은 어떠한 환경 하에서든 일체는 ‘당 조직’의 명령을 들어야 하고, ‘조직’의 배치에 복종해야 하는데 사상, 생활, 작풍, 혼인, 교육, 사업 등등을 포함해 제때에 ‘조직’에 사상을 보고해야 하고 ‘조직’을 믿고 ‘조직’에 의거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 왕리쥔은 감히 자신의 ‘당 조직’을 믿지 못했고 ‘당 조직’에 의거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적에게 투항해 반역자’라는 죄명을 쓰면서까지 미국 영사관에 진입해 보호를 구했는데 실제로는 황당무계한 것이다. 왕리쥔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당 조직’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을 것이고, 대체적으로는 미국이 중공보다 믿음직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중공 고위급 관리의 행위는 보아하니 아주 비정상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중공도 왕리쥔에게 ‘간헐성 정신병’이란 모자를 급급히 씌워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왕리쥔은 중공 계통이 어떻게 운행되고 있으며, 중공이 어떻게 내부 투쟁을 하고 있고, 견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제거해 버리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그 본인에 대해 가장 유리한 사고를 했는바, 바로 국제사회에 진상을 폭로해 그로부터 중공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왕리쥔 본인은 중공 계통 중 하나의 부속품으로서 그는 많고 많은 부속품들이 중공에게 이용당한 후에는 버림받는 것을 보았다. 예를 들면 그가 직접 체포해 사형에 처하게 한 전임 원창(文强)이 바로 중공 내부투쟁의 순장품이었다. 중공은 그가 이용했던 사람에 대해 책임과 도의를 운운한 적이 없었는데, 사람 표면에 대한 통일전선과 열정은 다만 아직도 이용가치가 있어서일 뿐이지 일단 어떠한 사람이든 이용가치를 잃거나 중공 체계에 위협을 조성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해친다.

중공이 파룬궁 박해로 해체될 것은 이미 결정된 일

중공과 장쩌민은 서로 이용하면서 인성을 말살하는 수단으로 파룬궁을 박해했다.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며 심지어 산채로 장기를 적출하는 정책을 취했다. 왕리쥔은 랴오닝 진저우시 공안국에서 ‘현장심리연구센터’를 주관할 때 파룬궁수련생 생체 장기 적출과 생체 인체시험에 참여한 혐의가 있다. 당시 랴오닝성장이었던 보시라이에게도 같은 혐의가 있다. 중공은 가장 사악한 수단으로 선량함을 박해할 때 저지른 악행은 최저선이 없다. 중공은 내부투쟁에서도 자연히 최저선이 없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보시라이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왕리쥔 신변의 기사, 요리사, 경호원, 비서 등 19명을 체포하고 그 중 두 사람을 때려죽이고 한 사람을 자살하게 했다. 아울러 몇 가지 방안을 제정해 왕리쥔을 암살하려 했다. 또 무장경찰과 경찰을 움직여 미국 영사관을 포위했는바, 의도는 즉시 왕리쥔을 살해하여 입막음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 수단의 악독함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알게 했으나 밖으로는 거짓말로 태평함을 꾸몄다. 충칭시 정부 신문사무실은 신화망 웨이보를 통해 소식을 발표했다. “소식에 따르면 왕리쥔 부시장은 장시기 동안의 초부하적 사업으로 정신이 고도로 긴장되고 신체가 심하게 불편해 동의를 거쳐 현재 병가(病暇)를 접수했다.” 한 차례 살기로 차고 넘친 중공 고위층 권력투쟁이 언론에 의해 ‘병가’로 변했으니 이는 중공이 파룬궁 박해 중에서 언론의 거짓말로 잔혹한 박해를 덮어 감추는 수법과 매우 비슷한 것이다.

왕리쥔으로부터 유발된 중공의 격렬한 내부 투쟁은 중공 정치국 9명 상무위원들이 모두 연루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저우융캉, 보시라이 및 그 배후를 지탱해 주던 장쩌민의 몰골이 드러나게 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미국 정보부의 한 직원은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에 넘긴 정보에 중공 고위층에 파벌 투쟁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중공은 역사상 있어본 적 없는 사악한 수단으로 파룬궁을 박해했지만 파룬궁은 쓰러지지 않았다. 파룬궁은 불법(佛法) 수련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신(神)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중공 말기 정권의 내부투쟁에서 사용하는 것은 모두 파룬궁을 박해하던 수단과 유사한데 병이 고황에 든 중공이 이를 견뎌낼 수 없다.

선악에 보응이 따름은 천리이고, 중공의 박해는 파룬궁을 넘어뜨리지 못할 것은 필연으로 자신의 사악한 수단으로 인해 내부로부터 해체될 것이다. 왕리쥔 사건의 발생은 사람들에게 머지않아 중공이 도태되리란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문장발표: 2012년 3월 6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3/6/2537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