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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 유가수련의 경지

[밍후이왕] 중용사상은 유가에서 가장 정화적인 부분이다. 후세 유생들이 수신양성(修身養性)의 모범으로 받들고 있다. 그럼 무엇이 중용인가? 중공 당(黨)문화의 심한 피해로 많은 중국인은 중용의 진실한 함의를 모르고 있다. 중용에 대해 현재 사람들은 용속하고 무능하며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물결 따라 흘러가고 세상 물정에만 밝은 것 등으로 여기고 있다. 실은 그렇지 않다.

‘중용’은 ‘예기’ 제31편에서 유래된다. 글의 처음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수도지위교(修道之謂教)’라 했다. 무슨 뜻인가? 도를 닦음을 가르침이라 했다. 유가 교육은 도를 닦는데 사용된 것이다. 무슨 도를 닦는 것인가? 자연에서 부여받은 성품대로 행하는 것을 도라 했으며 ‘지천명’을 닦아내 ‘마음에 따라 행해도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 도에 이르는 것이다.

유생은 그럼 어떻게 도를 닦아야 했는가? 선대의 유학자는 ‘치중화(致中和)’라고 대답했다. “희노애락이 일지 않았음을 중(中)이라 한다. 이것이 일었으나 절제할 수 있음을 화(和)라 했다.” 만일 유생이 정서가 늘 충동되고 질서가 없다면 ‘중화(中和)’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희노애락에서 ‘중화’는 선비가 ‘물질로 기뻐하지 말고’, ‘스스로 비애에 빠지지 말며’, ‘온유함을 유지하면서 우아’해야 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기쁘나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속으로 이를 갈면서 얼굴은 환하게 웃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치중화’는 ‘중’과 ‘화’ 두 부분을 포함

‘중’은 주요하게 유생의 내심의 요구로 ‘중립이나 기대지 않고’, ‘희노애락이 일지 않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지초, 성본선(人之初,性本善-사람은 처음부터 품성이 선량하다)’하니 사람이 태초의 선(善)으로 돌아가려면 ‘성자가 정을 잊는(太上忘情)’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또한 후천적으로 형성된 편견, 선입견, 정서로 문제를 보지 말며 심태가 순정하고 집착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보시다시피 전통문화에서 말하는 중용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자신의 양심이 아는 심성 수련이다. 이렇게 엄숙한 어휘를 어찌 편액이나 밀수품 판매하는데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이 중용에 처해 있는지 가늠하려면 그 사람 내심에 본성의 선량함이 있는지, 순정한 정념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 또 문제를 보는 기점이 천지신불(天地神佛)이 인정하는 ‘중’을 견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모종 관념 혹은 모종 사람이 인정하는 ‘중’인지를 봐야 한다. 어떤 사람이 ‘중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나 중용이다. 나는 두루 잘하여 처세에 능하고 일이 순조로우며 누구도 불쾌하지 않게 한다. 예를 들면 중공과 파룬궁 사이의 일에 나는 관계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나도 아주 중용이다. 중공의 선전을 전부 믿지 않으나 그렇다고 전부 믿지 않을 수는 없잖은가?”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나도 아주 중용이다. 파룬궁이 억울함을 당했다 하더라도 당을 믿어야 하며 정부를 믿어야 한다. 표어를 붙이고 현수막을 펼치는 방식은 너무나 격한 일이다” …이러한 것이 진정한 중용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공자왈 “군자는 중용을 지키나 소인은 중용을 어긴다. 군자가 중용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군자는 늘 적중함을 잃지 않고 넘치지 않기 때문이다. 소인이 중용을 어기게 됨은 소인은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이고 늘 극단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공자는 군자와 소인은 모두 자신의 중용관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인의 ‘중용’은 곧바로 중용의 도와 어긋나는 것이라 했다. 군자의 내심은 시시각각 모두 수련하고 있으며 ‘천명(天命_’과 ‘취중(取中)’에 순응하려 하기에 그는 편견이 없고 중공의 원한을 날조하는 거짓 선전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은 상반된다. 입으로는 중용을 말하고 있으나 속은 강렬한 천명이나 천량(天良)의 개념이 없으며 심법의 제약이 없다. 오히려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하며 소위 ‘중용’은 단지 개인의 이익과 주입된 관념에 부합하고 있다. 일부 중국인이 중용에 정확한 관념을 갖지 못함은 그런 중국인의 본질이 악해서가 아니라 ‘성상근, 습상원(性相近,習相遠-사람들이 타고난 것은 서로 비슷하지만, 후에 어떻게 학습하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짐)’이며 중공이 중국인에 대한 독해가 너무나 심하기 때문이다.

‘화(和)’는 주로 유생의 행위에 대한 요구다. ‘조화를 잘 이루되 그렇다고 주견 없이 무리에 휩쓸리지 말며’, ‘희노애락이 일었으나 절제’하라고 했다. 공자는 군자가 세속에 처해 있으면서 타인과의 교제에서 행위가 실상해서도 안되고 주견 없이 무리에 휩쓸리지 말며 일마다 극단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군자는 또 비뚤어진 이치로 황당무계한 일을 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날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군자의 내심의 수련이 어떤 경지에 있는지 몰라야 하며 뿐만 아니라 군자는 스스로 내심으로 ‘도에 따라 행해야’ 하며 일생토록 후회가 없어야 한다. 효과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해서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공자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자’라야 할 수 있다고 했다.

만일 ‘화(和)’가 오직 수련에 소질 있는 성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수는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더욱 옅은 각도에서 보도록 하자. 유가경전에서 숭상하는 것은 ‘화’이다. 그렇다고 비도덕한 ‘무원칙적인 조정’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함의가 깊은 ‘좋은 것을 택하여 따르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오늘날의 많은 사람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는 순황제와 안회가 처세에서 중용을 해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공자가 숭상하는 ‘넘치는 것과 미치지 못하는 것에서 적중한 것을 택하는’ 진실한 함의는 ‘타인의 부족한 점은 가리고 타인의 좋은 점을 널리 알리라는’ 것이다. 타인의 나쁜 것을 따라 하지 말며 그것을 거울로 삼아 같은 착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종용이 아니라 타인에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도록 권해야 한다. 급히 부정할 것이 아니라 묵묵히 타인의 부족함을 완전하게 미봉해줘 관용으로 그가 바르게 고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악이 자양할 곳이 없게 되며 점차 종적을 감추게 된다. 다른 사람의 선함을 보았을 때는 질투심이 일지 말게 하며 그것을 탄복하고 학습해 자신도 그와 같이 좋게 되어야 한다. 선함을 말살하고 덮을 것이 아니라 도처에 선전하고 널리 알려 선행이 천하에 미치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선행은 갈수록 뿌리가 든든하게 성장할 수 있고 갈수록 크게 될 것이다. 악과 선에 대한 각종 표현에 있어서 사람은 각종 처리방식이 있다. 악에 대해서는 가리고 선은 널리 알리는 것이야말로 중용이다. 반대로 선악의 구분이 없이 ‘객관적인 중립’, ‘차별 없이 똑같이 대하는’ 것을 표방하는 개인이나 매체는 실제로는 극단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이야기한 중용은 정신상에서의 끊임없는 승화를 체현해냈다. 그러나 일반인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용은 ‘위와 비기면 부족하고 아래와 비기면 남음이 있다’이다. 보기에 무슨 인생의 지향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사람이 정신과 물질에 대한 부동한 처리 방식은 곧바로 중용의 체현이다. 사람이 정신상에서의 추구는 마땅히 끝이 없다고 봐야 하는데 이는 중용의 일면이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의 추구에서 또 마땅히 자연에 따라야 한다. 이것도 중용의 다른 일면이다. 그런 가짜 중용을 하는 사람은 정신상에서 선악을 분별하지 않으며 진실을 추구하고 선을 지향하지 않는다. 물질이익에서는 서로 다투고 빼앗으며 심하게 밝힌다. 중용을 치장하는 기점도 모 사람 모 집단의 이익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이것이 무슨 중용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속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일반인은 수련할 수 없으나 만일 중용을 본받을 수 있다면 물질에서 좀 담담하게 대하고 그렇게 많은 욕망과 집착이 없을 수 있다. 스스로 위에 비기면 부족하고 아래에 비기면 남음이 있다고 느낄 것이며 인생의 행복감도 그로부터 자연히 생겨날 것이다.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동시에 물극필반(物極必反)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 사악한 중공 당문화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적잖은 극단적인 착오와 편견을 주입했다. ‘중용’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 파룬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진상을 똑똑히 알려면 맹목적으로 중공의 언사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며 자발적으로 진상을 찾고 진리를 탐색해야 한다.

문장완성: 2010년 8월
문장분류: 시사평론
문장위치: http://zhoubao.minghui.org/mh/haizb/174/A05/72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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