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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과 중공(中共)이 서로 이용하여 파룬궁을 박해함을 논평한다.

【명혜망 2004년 11월 27일】

들어가는 말

장푸전(張付珍), 약 38세의 여자로 원래 산둥(山東)성 핑두(平度)시 센허(現河) 공원 직원이었다. 그녀는 2000년 11월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납치당했다. 내막을 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공안(公安)은 강제로 장푸전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깍은 후, 그녀를 학대하고 모욕하였다. 「大」자 형으로 침대에 묶어놓은 후, 대소변을 몽땅 침대에서 보게 하였다. 그런 후, 공안은 강제로 그녀에게 이름 모를 독약주사[毒针]를 놓았다. 주사를 맞은 후, 장푸전은 극도의 고통을 느꼈으며 마치 미친 사람과 같았고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610’――역주: 중공의 전(前) 독재자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위해 설립한 나치의 게쉬타포와 유사한 초법적인 조직이다. 1999년 6월 10일 설립되어 보통 610사무실로 불린다.―― 관리들이 모든 과정을 현장에서 참관하였다.(명혜망 2004년 5월 31일)

양리룽(楊麗榮), 34세 여자로 허베이(河北)성 바오딩(保定) 지역 딩저우(定州)시 베이먼가(北門街) 사람이다.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가족들은 늘 경찰의 소란과 협박을 받았다. 2002년 2월 8일 밤, 경찰이 떠나간 후, 계량국(計量局) 운전수인 남편이 해고될까 두렵고, 압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이튿날 새벽,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신 사이에, 아내의 목을 졸랐다. 양리룽은 이렇게 10살 난 아들을 남겨두고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후, 남편은 경찰에 자수했다. 경찰은 현장에 도착한 후, 아직도 체온이 남아있는 양리룽을 해부하고는 많은 장기들을 가져갔다. 내장을 꺼낼 때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었으며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바오딩시 공안국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게 어디 죽은 사람을 해부하는 것인가, 원래 산 사람을 해부한 것이었구나!”(명혜망2004년 9월 22일)

헤이룽장(黑龍江)성 완자(萬家) 노동교양소――역주:중국의 노동교양소는 정식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고 공안 당국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최고 3년까지 감금할 수 있는 곳이다. 파룬궁 수련생들 중 상당수가 이곳에 감금된 채 온갖 고문과 함께 비인간적인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임신 6~7개월 된 한 임신부가 두 손이 강제로 대들보에 묶여진 후, 발밑에 있던 의자마저 치워져 온 몸이 공중에 둥둥 드리워져 있다. 대들보는 땅에서 3미터 정도 높이에 있었는데, 굵은 밧줄의 한 끝은 대들보의 도르래에 있었고, 다른 한쪽 끝은 악경(惡警)의 손에 있었다. 악경이 손을 잡아 당기면, 매달린 사람은 허공에 둥둥 떴고, 손을 놓으면 급속히 아래로 떨어졌다. 이 임신부는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 시달리다가 결국 유산하였다. 더욱 잔인한 것은, 경찰이 그녀의 남편더러 옆에서 그녀가 혹형 당하는 장면을 보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이런 참혹한 사건들이 지금 중국에서 박해 받는 파룬궁 수련생들의 몸에서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사실은 5년이 넘게 지속된 박해 과정에서 발생한 무수한 참혹한 사건들에 비하면 이것은 빙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공은 국제 사회에서 정면(正面)적이며 개명(開明)한 형상을 부각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파룬궁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비이성적인 박해는 그 광범위성, 심각성, 잔인한 수단 때문에 국제사회에 다시 한번 중공의 진실한 일면을 보여주었으며 중공 최대의 인권 문제로 부각되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책임이 중국 경찰의 자질이 낮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미루는데 습관이 되어, 중공은 좋게 변하고 있으며 진보하고 있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을 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전면적이며 체계적인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박해는, 사람들의 환상을 철저히 깨뜨려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황당한 박해가 중국에서 발생할 수 있었는지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20년 전에 문화대혁명의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을 회복’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오늘 또 다시 역사의 사악한 순환에 빠져 들어갔는가? ‘진선인(眞善忍)’을 원칙으로 하는 파룬궁이 세계 60여 개 나라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중국에서만 박해를 받고 있는가? 이 박해 속에서 장쩌민과 중공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장쩌민은 무덕(無德)하고 무능(無能)하다. 만약 중국 공산당이라는 정교하고 정확하며 전문적으로 살인과 거짓을 일삼는 폭력기계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전 중국 심지어 해외에까지 파급된 집단학살을 발동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중국 공산당에 장쩌민과 같은 고집불통의 사악한 독재자가 없었다면, 중공은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 장쩌민과 공산당이라는 사악한 영체(靈體)가 서로 호응하고 공명하여, 마치 눈덮인 산에 등반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적설(積雪)이 공진(共振)하여 눈사태가 발생하는 식의 재난(災難)이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장쩌민과 중공은 서로 이용하여 탄압과 사악의 정도를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지경에까지 확대하였다.

1. 유사한 과거사가 동일한 위기감을 가져오다.

장쩌민은 1926년에 태어났다. 중공이 줄곧 인민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과거사[發家史]를 속인 것처럼, 장쩌민도 줄곧 중공과 인민들에게 그 자신의 매국노[漢奸] 역사를 덮어 감추었다.

장쩌민이 17세 되던 해, 세계 반(反)파쇼 전쟁――역주:제2차 세계대전을 말한다――은 이미 불같이 타올랐다. 애국청년들이 잇달아 전선으로 달려나가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할 때, 장쩌민은 도리어 왕징웨이(汪精韋) 괴뢰정부가 1942년 난징(南京)에 설립한 중양(中央)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각 방면의 조사에 의하면, 그 원인은 장쩌민의 생부(生父)인 장스쥔(江士俊)은 일본이 장쑤(江蘇)를 점령했을 때, 일본군의 반중(反中) 선전기구 고급관리로서 진정한 매국노였던 것과 관계가 있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의 노예가 되는 방면에서, 장쩌민과 중공은 동일한 전철을 밟았는데, 중국 인민에 대한 감정이 결핍하여 함부로 중국 인민을 도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공이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장쩌민은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 섞여 들어갔다. 나중에 숙부인 장상칭(江上靑)이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토비(土匪)들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숨지자, 이 관계를 이용하기 위하여 자신은 일찍이 숙부에게 양자로 보내졌다고 거짓말을 하여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처장(處長)급 간부에서 전자공업부 부부장(副部長 역주: 한국의 상공부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위관직)으로 승진하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장(江)의 승진은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이용해 권세에 빌붙은 것이다. 장쩌민이 상하이(上海)시 위원회 공산당 서기로 있던 기간에, 매년 상하이에 와서 구정을 보내던 리센녠(李先念), 천윈(陣雲) 등 공산당 원로들에게 아첨하는 장기를 보여주었다. 일찍이 리센녠에게 생일 축하떡을 보내기 위하여,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라는 신분으로, 대설(大雪)에도 불구하고 몇시간 동안 밖에 서서 리센녠을 공손히 기다린 적도 있었다.

1989년의 ‘6.4’ 톈안먼 학살사건[屠城]은 장쩌민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바른 소리를 하는『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를 폭력으로 탄압하였으며, 중국 인민들의 신망이 높던 인민대(人民大) 위원장 완리(萬里)를 연금(軟禁)시키고, ‘6.4’를 탄압하여 중공 총서기가 되었다. 학살 직전, 장쩌민은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을 땐 ‘당도 망하고 나라도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89년 정권을 잡은 이후 15년 동안, 장은 ‘안정이 일체를 압도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일체 인사와 독립적인 신앙단체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과 학살을 진행하였다.

중국과 러시아 쌍방은 1991년부터 시작하여 국경을 확정짓기 시작했는데, 장쩌민은 제정(帝政) 러시아와 구(舊) 소련의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전면적으로 승인하였으며, 전면적으로『아이훈조약(愛琿條約)』―― 역주 : 1858년 5월 중국 헤이룽장성 북쪽 헤이룽강 연안의 아이훈에서 러시아와 청(淸)나라가 영토 확정을 위해 맺은 조약이다. 내용이 일방적으로 러시아 측에 유리하게 되어 있어 중국에서는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이 때문에 양국간에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중러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팔아먹은 중국 영토가 백여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장쩌민의 경력을 간단히 살펴보면,

1) 그는 매국노의 장자(長子)로 태어나 열사(烈士)의 고아를 사칭하여 공산당의 ‘속일 편(偏)’자 비결을 직접 실천하였다.

2) 6.4 학살을 지지하고 민주화 운동인사와 신앙인들을 탄압하여, 직접 공산당의 ‘죽일 살(殺)’자 비결을 실천하였다.

3) 중국 공산당이 일찍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극동지부로서 곳곳에서 소련의 명령을 들은 것처럼 장쩌민은 무상으로 러시아에 국토를 헌납하여 직접 공산당의 ‘팔 매(賣)’자 비결을 실천하였다.

이와 같이 장쩌민과 중국 공산당은 모두 부끄러운 과거사가 있었기에, 양자 모두 필연적으로 권력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장쩌민과 중공은 공동으로 ‘진선인(眞善忍)’을 두려워 한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는 1억이 넘는 사람들의 피로 쓰여졌다. 거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모두 스탈린 식의 숙청이 있었다.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는데 걸핏하면 백만, 천만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에서 급변이 일어난 후, 공산진영은 하룻밤 사이에 절반의 강산을 잃어버렸다. 중공이 여기에서 얻은 교훈은 바로 탄압을 정지하고, 언론자유를 인정하면 공산당은 저절로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언론을 풀어놓으면, 피비린내 나는 폭행을 어떻게 덮어감추겠는가? 의식형태 방면에서의 속임수는 어떻게 둘러댈 것인가? 만약 탄압을 중지하면, 인민은 공포의 위협이 없어지게 되어, 감히 공산당이외의 생활방식과 신앙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공산당이 의지하여 존재하는 사회기초는 어떻게 되겠는가?

중공이 아무리 변해도 그 본질을 개변하지는 못한다. 때문에 민중에 대한 속임수는 끝까지 유지해야 하며, 인민에 대한 탄압도 끝까지 해야만 한다. ‘6.4’ 후 ‘일체 불안정한 요소를 맹아(萌芽)상태에서 소멸시키자’는 외침이 나오게 된 것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장쩌민이 얻어낸 결론이었다.

마침 이때, 중국에서는 파룬궁(法輪功)이 나타났다. 비록 초기에 파룬궁은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데 특수한 효과가 있는 기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점차 파룬궁의 핵심이 간편하고 배우기 쉬운 5가지 공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선인(眞善忍)’을 지도사상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될 것을 가르치는데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1)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을 중시하고, 공산당은 ‘거짓, 사악, 투쟁(假惡鬪)’을 중시한다.

파룬궁은 ‘진(眞)’을 제창하는데, 이는 참된 말을 하고, 진실한 일을 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중공은 줄곧 거짓말과 세뇌에 의거하였다. 만약 사람마다 참된 말을 하게 되면, 민중은 중공이 원래 소련에 의지하여 살인, 납치, 도망, 아편재배, 거짓 항일투쟁 등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알게될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 일을 해내지 못한다.”고, 정권을 건립한 후 또 여러 차례 운동에서 수많은 피의 빚[血債]을 졌는데, 이는 중공으로 놓고 말하면 그야말로 종말이 눈앞에 닥친 것이다.

파룬궁은 ‘선(善)’을 제창하는데, 일에 부딪히면 항상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언제나 선하게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줄곧 ‘잔혹한 투쟁, 무정(無情)한 타격’을 제창해 왔다. 중공의 모범영웅 레이펑(雷鋒)은 “적에 대해서는 엄동설한처럼 냉혹하고 무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중공은 적에 대해서만 그렇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사람에 대해서도 잘 대해주지 않았다. 중공의 개국(開國)원로, 원수, 국가주석을 포함하여 모두 인정사정 없는 비판을 받았고, 악독하게 구타 당했으며, 혹형을 당하였다. ‘계급의 적’에 대한 도살은 더욱더 사람을 몸서리치게 한다. 만약 ‘선(善)’이 사회에서 우세를 보이게 되면, ‘악(惡)’을 기초로 하는 그런 군중운동은 나타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는 “지금까지 일체 사회의 역사는 모두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공산당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대표한 것이다. 파룬궁은 모순이 나타났을 때 안으로 자신의 잘못을 찾으라고 제창하는데 , 이런 세계관은 의심할바 없이 안으로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밖을 향해 투쟁하는 중공의 철학과는 뚜렷이 대립되는 것이다.

투쟁은 확실히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주요 수단이다. 주기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정치운동을 발동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끊임없이 충전시키고, ‘혁명투지를 흘러넘치게’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폭력과 거짓말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끊임없이 익숙하게 하는 과정은 , 바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새롭게 하고, 통치를 유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의식형태상에서 말할 때, 공산당이 의지하여 생존하는 ‘철학’과 파룬궁의 가르침은 뚜렷이 대립되는 것이다.

(2)믿음은 사람을 두려움이 없게 만들지만 중공은 도리어 공포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한다.

진리를 인식하고 장악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거의 3백년에 가까운 박해를 거쳤다. 로마황제는 무수한 기독교도들의 머리를 자르고, 불에 태워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이고, 심지어 직접 사자우리의 먹이로까지 던지게 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도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역사상 불교가 법난(法難)을 겪을 때도, 모두 유사하게 굳건한 표현이 있었다.

무신론을 선전하는 중요한 목적의 하나는 바로 사람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없으며, 선악에 보응이 없다는 것을 믿게함으로써, 양심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며, 방향을 바꾸어 현실의 영화(榮華)와 향락(享樂)을 중시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이때 인성(人性) 중의 약점에 대해 능히 조작할 수 있으며, 협박과 재물에 의한 유혹도 충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인은 생사를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속세를 간파할 수 있으므로, 이때 속세의 유혹과 생명의 위협은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공산당이 사람을 통제할 힘을 잃게 만든다.

(3)파룬궁의 높은 도덕적 표준은 중공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1989년 ‘6.4’이후, 중공의 의식형태는 철저히 파산되었다. 특히 1991년 8월 소련공산당이 와해된 것과 잇따른 동유럽의 거대한 변화는, 중공에게 극도의 공포와 압력을 가져다 주었으며,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형세는 그 통치의 합법성과 생존에 전에 없던 도전을 받게하였다. 이때 중공은 이미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의 원래 교지(敎旨)로는 당원들을 바로 잡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면적인 부패를 통해 당원들의 충성심을 얻는 데로 방향을 바꾸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나 당을 따라가기만 하면 당은 탐오(貪汚) 등의 방식을 통해 당원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이익을 얻게 허용하였다. 특히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南巡)이후에, 중국은 관청 브로커에서부터 부동산과 주식 투기까지 횡행하였고, 첩을 얻는 데로부터 도처에서 밀수를 하고 음란물, 도박, 마약이 만연하였다. 비록 ‘훙둥현(洪洞縣) 안에는 좋은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수 없겠지만, 민간에서는 중공의 반(反)부패에 대해 일찌감치 신심을 잃어버렸으며, 중간 및 고급간부의 부패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여긴다.

이때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선인’을 수련하면서, 펼쳐보인 도덕풍모는 민중들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던 내심의 선량함을 움직였으며 억만 민중들이 존경하고 수련에 참여하게 하였다. 파룬궁이라는 이 도덕 거울은 중공의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비추었던 것이다.

(4)파룬궁의 발전방식과 관리방식이 중공의 질투를 자아냈다.

파룬궁의 발전방식은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었으며, 취한 관리방식은 오고가는 것이 자유롭고 느슨한 관리였다. 이는 중공의 엄밀한 조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렇지만, 중공의 매주 한 차례 심지어 여러 차례 정치학습과 조직생활은 유명무실하였다. 공산당의 의식형태에 대한 당원들의 동일감[認同]은 거의 영(零)에 가까웠지만, 파룬궁 수련자들은 자각적으로 ‘진선인’을 실천하였다. 동시에 파룬궁의 심신건강 개선효과는, 수련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했으며, 수련자들은 자발적으로 리훙즈(李洪志) 선생의 저작을 학습하게 했고, 자비(自費)를 들여 법을 널리 전하게 하였다. 불과 7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무(無)에서부터 시작하여 1억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중국의 거의 모든 공원에서는 아침마다 파룬궁 연공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산당은 파룬궁이 중공과 군중을 놓고 ‘다툰다’고 여겨, ‘종교’라고 하는데, 사실 파룬궁이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일종의 문화이며, 중국사람들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조상들의 문화와 전통의 뿌리였다. 장쩌민과 공산당이 파룬궁을 이렇게 무서워하는 이유는, 이런 전통적인 도덕이 일단 군중과 하나로 융합되는 날이면, 어떠한 힘도 그 신속한 확장추세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중국 백성들의 이런 타고난 전통을 몇 십년 동안 억지로 단절시키거나 왜곡시켜 왔는데, 다시 새롭게 전통을 만회하는 자체는 바로 역사의 선택이자, 광대한 군중들이 고난을 겪은 후 스스로 선택한 회귀였다. 이런 선택의 필연적인 결과는 바로 시비를 똑똑히 가르고 사악을 버리는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공산당의 한 세트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과 버림이었다. 이것은 중공의 사혈(死穴)을 찍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 수가 중국 공산당 당원수를 초과했을 때, 중공의 마음속 공포와 질투는 생각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중공은 사회에 대해서는 끝까지 통제해왔다. 농촌에는 ‘마을마다 공산당 당지부가 있고’, 도시에서는 당지부가 가도(街道) 판사처까지 깊이 들어와 있으며, 군대 및 정부와 기업의 가장 기층까지 모두 당조직이 있다. 이런 절대적인 독점성과 배타성은 중공이 정권을 유지하는 중요 수단인데, 『헌법』에서는 “당의 영도를 견지한다.”는 미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자는 분명하게 공산당의 영도보다는 ‘진선인’을 표준으로 할 것을 더 원했다. 중공이 볼 때는 이는 완전히 접수할 수 없는 것으로 ‘당의 영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5)공산당은 파룬궁이 ‘유신론’을 믿는 것은 집권의 합법성에 위험하다고 여겼다.

진정한 유신론(有神論) 신앙은 중공으로 놓고 말할 때, 중대한 도전임에 틀림없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합법성의 내원은 바로 이른바 ‘유물역사주의’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 천국(유토피아)’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선봉대’인 ‘공산당’의 영도(領導)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동시에 ‘무신론(無神論)’은 도덕과 선악을 공산당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되게 했으며 이 때문에 근본적으로 진정한 도덕과 선악을 말하는 것이 없었다. 민중은 오직 당이 영원히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하다(偉光正)”는 것을 기억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유신론은 민중에게 변하지 않는 선악의 표준을 알려주었으며, 파룬궁 수련자를 놓고 말할 때, 한가지 일의 옳고 그름은 ‘진선인’으로 가늠한다. 이것은 중공의 일관적인 ‘통일사상’에 분명한 장애로 되었다.

만약 총결론을 도출해 내려면, 아직도 많은 원인이 있다. 그러나 상술(上述)한 5가지 원인 중 어느 하나도, 중공으로 놓고 말하면 모두 아주 치명적이다. 사실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하는 것도 똑같은 원인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장쩌민은 경력을 속여서 일어났기에, 당연히 ‘진(眞)’을 무서워 한다.또 민중을 탄압하는 것으로 벼락출세했기에 당연히 ‘선(善)’을 싫어한다. 서로 물어뜯고 아귀다툼 하는 당내투쟁으로 권력을 유지하기에,당연히 참을 ‘인(忍)’자도 듣기 싫어한다.

장쩌민이 속이 좁고 질투심이 강하다는 것은 작은 일로부터도 보아낼 수 있다. 저장성 위야오현[浙江省 余姚縣 현재는 시(市)로 승격됨]에는‘허무두 유적지 박물관(河姆渡遺址博物館)’이 있는데, 중국의 중점문물보호단위이다. 당시 ‘허무두유적지박물관’의 현판 제사(題詞)는 차오스(喬石)가 쓴 것이었다. 1992년 9월, 장쩌민이 참관할 때 차오스가 쓴 제사를 보더니, 얼굴이 무섭고 음침하게 변했다. 수행원들은 아주 긴장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장쩌민이 차오스를 용납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방면에서는 그가 잘난 체하는 것을 좋아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江)은 어디를 가든지 제사(題詞)를 썼는데, 심지어 ‘지난(濟南)시 공안국 교통 지대(支隊)’와 ‘정저우(鄭州)시 퇴직 엔지니어 협회’에까지 제사를 썼다. 박물관장은 도량이 좁은 장쩌민을 감히 등한시 하지 못하고, 1993년 5월, 박물관을 정돈하고 다시 대외에 개방한다는 것을 구실로, 장쩌민의 글로 바꾸었다.

마오쩌둥은 ‘웅문4권(雄文四卷 역주: 힘있고 뛰어난 문장이 4권이나 된다는 뜻으로 마오쩌둥의 문필력을 평가한 말이다.)’이라고 불리며, 『덩샤오핑문선』에도 「고양이론(猫论)」이라는 실용주의 사상이 있다. 장쩌민은 기껏 머리를 짜내어 세마디――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원래 작자는 왕후닝(王濩寧)이라고 한다―― 말을 생각해 냈는데, 또 ‘3강(三講)’이라고도 한다. 책으로 찍어낸 후, 중공 조직계통을 거쳐 널리 보급하였고, 강제로 주문하게 해야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원들은 장쩌민에 대해 조금의 존경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도처에서 여가수와의 섹스스캔들 및 그가 외국에서 ‘나의 태양’을 마구 불러댄 것과, 스페인 국왕 앞에서 머리를 빗은 것과 같은 여러 가지 더러운 일을 널리 전하였다. 그러나 파룬궁 창시인은 평민 출신임에도 설법할 때면 여러 분야의 교수, 전문가, 유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고, 많은 박사와 석사들이 심지어 만리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와 설법을 들었다. 리훙즈 선생은 거침없이 유창하게 몇시간 동안을 이야기해도 초고가 필요 없었으며, 설법한 녹음을 막바로 종이에 베껴쓰면 곧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 이는 허영심과 질투심이 많고 속이 좁은 장쩌민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쩌민의 생활은 극히 방탕하고 부패하여, 9억 위안을 소비하여 자신의 전용 호화비행기를 사들였고, 걸핏하면 국고의 몇백억 인민폐를 아들에게 주어 사업하게 했으며, 사돈친척관계를 이용하여 모든 친척과 측근들을 장관급 이상의 고급관리로 선발하였고, 측근들의 탐오와 범죄를 감싸 주었는데, 나쁜 일을 하는데 모든 수단을 다 썼다. 때문에 장쩌민은 분명히 파룬궁의 도덕역량을 아주 무서워 했는데, 파룬궁이 말하는 천당, 지옥과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것이 정말일까봐 더욱 무서워하였다.

장쩌민은 비록 중공의 최고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정치적인 업적과 재능이 부족했기에, 수시로 자신이 중공의 잔혹한 권력투쟁 속에서 쫓겨내려갈까봐, 그 ‘핵심’권위에 대해 아주 민감하였다. 견해가 다른 사람을 없애기 위하여 장쩌민은 음모와 계략을 꾸며 정적(政敵)인 양상쿤(楊尙崑), 양바이빙(楊白冰) 형제를 제거했다. 1997년 중공 15대(大)부터 2002년 16대까지, 장쩌민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내쫓았으나, 자신은 도리어 관련규정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틀어쥐고 물러나지 않았다.

1989년 ‘6.4이후, 중공의 새로운 총서기 장쩌민 등은 언젠가 한 번 국내외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하였다. 프랑스기자가 한 여자 대학생이 6.4 때문에 쓰촨성의 농장에 귀양가서 벽돌운반 일을 배치받았으며, 현지 농민들에 의해 여러 차례 강간 당한 사실을 질문하였다. 장(江)은 “당신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폭도입니다.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문화대혁명 때 장즈신(張志新)은 중공 감옥에서 윤간당하고 후두(喉頭)를 잘렸다. 이런 것이 장쩌민이 볼 때는 모두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로부터 장쩌민의 깡패[流氓]같은 변태적이고 잔혹한 인격을 볼 수 있다.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장쩌민의 음침하고 어두운 심리, 독재권력욕, 잔인하고 포악한 인격과 ‘진선인’에 대한 공포가 장쩌민이 이유없이 파룬궁을 탄압한 원인이 되었다. 이점은 공산당 조직과 고도로 일치하는 것이다.

3. 장쩌민과 중공의 상호이용

장쩌민은 한마음으로 파룬궁을 ‘소멸(消滅)’시키는 것으로 개인적인 분노를 발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쩌민이 자신을 뽐내고 정치적인 권모술수를 피우는데 열을 올렸지만, 그의 무능력과 무식하고 재주가 없는 것은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에 뿌리박고 있으며, 광범위한 사회적 기초가 있는 연공하는 군중들에 대해 장쩌민 한 사람으로서는 거의 무능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 중공이라는 이 폭정(暴政)기계가 이미 연마 성숙되어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파룬궁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산당 총서기로서의 장쩌민은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식으로, 탄압을 시작하는 버튼을 가볍게 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파룬궁 탄압에서 양자(兩者)의 호응과 공명은, 마치 등산객이 크게 외친 소리에 눈사태가 발생한 효과와 똑같았다.

장(江)이 탄압명령을 내리기 전에, 파룬궁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토벌(討伐), 감시, 조사와 죄명을 꾸미는 작업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원인은 중공이라는 이 사악한 영체, 사교(邪敎)조직 고유의 사악이 본능적으로 ‘진선인’이 그것의 존재에 위협적임을 느꼈고, 더욱이 이렇게 방대하고 꾸준히 빠르게 늘어나는 연공인들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4년부터 중공 공안의 요원들이 파룬궁 수련생 대오에 잠입해 들어왔으나,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고, 심지어 많은 요원들이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1996년『광명(光明)일보』는 기공에 대해 ‘선전도, 간섭도, 탄압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3불(三不)’정책을 어기고 문장을 발표하여, 사상영역에서 파룬궁을 무단적으로 비판하였다. 그후, 공안과 ‘과학자’의 직함을 가진 정객(政客)들의 파룬궁에 대한 교란은 줄곧 그치지 않았다. 1997년 초, 중공 중앙 정법위원회 서기 뤄간(羅干)은 직권을 이용하여 공안부문에게 전국적으로 파룬궁에 대해 한차례 조사를 진행시켰는데, 죄명(罪名)을 꾸며 파룬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각지에서 “아직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린 후, 뤄간은 1998년 7월 또 중국 공안부 1국(정치보위국이라고도 부름)을 통하여 공정(公政)[1998] 제555호『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펼치는데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 여기서는 우선 파룬궁이 ‘사교(邪敎)’라고 미리 죄명을 정하고 나서, 전국 각지 공안부문에 체계적인 ‘잠입조사’를 진행하여, 증거를 수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사결과 여전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사악한 영체조직으로서 중공이 이미 손을 쓰려고 시작했을 때, 또 하나 제일 관건적으로 탄압기계를 시동시킨 사람이 있다. 이때 중공 지도자의 해결은 아주 중요한 작용을 일으킬 것이었다. 한 개체로서, 중국 공산당의 우두머리는 동시에 인성(人性) 중의 선(善)과 악(惡)을 구비하고 있는데, 만약 ‘선(善)’을 선택한다면, 그럼 잠시 중공의 사악한 당성의 발작을 억제할 것이며 만약 ‘악(惡)’을 선택한다면, 그럼 중공의 사악한 당성이 충분히 폭로되어 나올 것이다.

6.4 때, 중공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학생들을 탄압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중공을 장악한 8명의 원로는 탄압을 고집하였다. 덩샤오핑은 당시 “20만명을 죽여서, 20년의 안정을 바꿔오자.”라고 말했다. 이“20년의 안정을 바꿔 오는 것은” 실질상 20년 간 중국 공산당 정권을 더 유지한다는 것으로, 이는 중공 독재 전제(專制)의 근본목적에 부합되었기에, 중공에 접수되었다.

파룬궁 문제에서, 당시 중공 중앙 정치국의 7명 상무위원 중, 장쩌민만 탄압을 고집하였다. 장쩌민이 제기한 구실은 ‘당이 망하고 국가가 망하는’데 관계된다는 것으로, 이는 중공의 제일 민감한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장쩌민은 개인권력을 수호하고 공산당은 일당 독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고도의 통일을 얻을 수 있었다.

1999년 7월 19일 밤, 장쩌민은 중국공산당 고층(高層)회의를 열고 직접 사회를 보면서, 권력으로 법률을 대체하여 자신이 직접 인식을 ‘통일’하였으며, 스스로 전면 탄압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또 중국정부의 명의(名義)로 전면적으로 파룬궁을 단속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였다. 이리하여 중공 및 중공이 통제하는 중국의 국가정권과 폭력기계는 전속력을 다해, 천지를 뒤덮는 기세로 무고한 파룬궁 민중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만약 당시 중공 총서기가 장쩌민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이번 탄압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공산당이 장쩌민을 이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만약 공산당이 그 피의 빚과 위기감 때문이 아니라면, 그 10가지 악(惡)을 두루 구비한 깡패적이며 천리(天理)에 반하고 인성을 멸절시키는 본성이 없었다면, 그것도 절대 파룬궁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사회에 대한 빠짐없는 전면적인 통제가 없었다면, 장쩌민의 탄압의지도 조직의 보장, 재정의 보장, 문화선전부문의 보장, 외교적인 보장, 인원 보장, 설비 보장 및 감옥, 경찰, 국가안전부, 군대와 이른바 종교, 과학기술, 민주당파, 공회(公會), 단위(團委), 부녀연합 등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각도에서 본다면, 장쩌민은 공산당을 이용하였다.

4. 장쩌민은 어떻게 중공을 이용하여 파룬궁을 박해했는가

장쩌민은 중공의 ‘전당(全黨)은 중앙에 복종’해야 한다는 조직원칙과, 군대, 매체, 공안, 경찰, 무장경찰, 국가안전부, 사법계통, 인민대표대회, 외교, 사이비종교 단체 등을 포함한 중공이 장악한 국가기계를 이용하여 파룬궁 박해에 복무시켰다. 중공의 군대, 무장경찰, 공안경찰은 파룬궁 수련생을 납치하고 체포하는데 직접 참가하였으며, 매체는 장씨 집단을 대신하여 거짓말을 퍼뜨려 파룬궁의 명예를 더럽혔고, 국가안전부 계통은 장쩌민 개인을 위해 복무하였는데 자료를 제공하고 수집하였으며,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거짓 정보를 제공하였다. 인민대표대회와 사법계통은 장쩌민과 중공의 범죄행위에 ‘합법(合法)’, ‘법치(法治)’등의 외투를 걸치게 하여, 각계 인민을 기만하여 장쩌민의 도구와 보호 우산으로 타락했다 . 외교계통은 국제적으로 거짓말을 퍼뜨리고, 정치와 경제이익을 이용하여 일부 외국정부, 정계요인 및 매체를 유혹하거나 매수하여, 파룬궁 박해에 대해 침묵을 지키게 하였다.

장쩌민은 1999년 파룬궁 탄압을 배치하는 중앙사업회의에서 “나는 공산당이 파룬궁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전반적인 탄압의 배치에서, 이른바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적으로 소멸하라’는 3대방침을 실시하였으며, 이로부터 전면적인 탄압운동을 펼쳤다.

(1)매체를 이용하여 소식을 봉쇄하다.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의 실시는, 중공이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매체로부터 진행되었다. 1999년 7월 22일, 파룬궁 수련생들을 체포한지 3일째 되는 날, 중공이 통제하는 매체들은 천지를 뒤덮는 반(反) 파룬궁 선전을 시작하였다. 베이징의 중앙텔레비전방송국(CCTV)을 실례로 든다면, 1999년 기간에, 중앙 TV는 매일 7시간 동안 여러 가지 사전에 제작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파룬궁 창시인 리훙즈 선생의 설법을 대량의 속임수로 뜯어 고치고 왜곡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이른바 자살, 타살, 병이 있어도 치료를 거부하다가 사망한 사건 등으로, 온갖 능력을 다하여 파룬궁 및 그 창시인에 대해 부정적인 모함선전을 진행하였다.

가장 유명한 실례를 든다면, 리훙즈 선생이 한 차례 공개장소에서 말씀하신 “이른바 지구가 폭발한다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에서 ‘않는다[不]’를 잘라버려, 텔레비전에서는 “지구의 폭발은 존재하는 것이다.”로 변하게 하였다. 더욱 심한 것은, 남몰래 교묘한 수단을 써서 바꿔치기 하는 등의 수단으로, 일반 형사범인들의 범죄행위를 파룬궁 수련생이 했다고 모함하여,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였다. 예를 들면, 베이징의 미치광이 푸이빈(傅怡彬)이 살인한 것과, 저장성의 거지독살사건 등등 정신병자나 살인범의 죄를 모두 파룬궁에 뒤집어 씌웠다.

중공이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2천개의 신문사, 일천여 개의 잡지사, 수백개의 지방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국은 전부 과다하게 가동되어, 전력을 다해 파룬궁을 모함하는 선전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런 선전은, 다시 관방(官方)인 신화사(新華社), 중신사(中新社), 중통사(中通社)와 해외 중공매체 등을 통하여, 해외 모든 국가에 퍼뜨려졌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짧디짧은 반년 사이에, 중공매체가 중국 국내외에서 파룬궁에 대해 보도한 모함보도와 비판문장이 놀랍게도 30여만 차례에 달한다.

외국에 주재하는 중국 대사관과 영사관에서도 대량의, 이른바 파룬궁을 폭로비판[揭批]하는 화보, CD와 단행본을 비치해 두었으며, 중국 외교부 사이트에도,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이른바 폭로비판하는 전문코너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1999년 말, 장쩌민은 팔을 걷어 부치고 탄압에 나섰는데, 뉴질랜드에서 거행된 아태정상회의에서, 중공이 제작한 파룬궁 모함 소책자를 십여개 국가 원수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장쩌민은 프랑스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외국매체를 통해 파룬궁이 사교(邪敎)라고 선포하였으며, ‘명예를 실추시키’는 목표에 도달하고자 시도하였다.

한동안 검은 구름이 꽉 덮여, 문화대혁명이 다시 오는 스산한 위세였다.

가장 악랄한 것은, 바로 2001년 1월 이른바 ‘분신자살’ 웃음거리를 연출하고, 신화사를 통해 전례 없는 속도로 전 세계에 퍼뜨린 것이다. 이 웃음거리는, 후에 UN 국제교육발전조직을 포함한 여러 국제조직에서 거짓으로 날조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질의에 직면하여,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한 직원은, 중앙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방송한 일부 장면은, “나중에 보충해서 찍은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사람들은 의문을 금치 못했다.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파룬궁 제자들”이 어떻게 중공당국과 이처럼 합작할 수 있단 말인가?

거짓말이 두려워하는 것은 햇빛에 폭로되는 것이다. 유언비어를 퍼뜨려 중상하는 동시에, 중공은 전력으로 소식을 봉쇄하였고, 파룬궁에 관한 모든 해외소식과 여러 가지 파룬궁 수련생들의 합리적인 해명에 대해서는 모두 무정(無情)하게 봉쇄하고 없애 버렸다. 모든 파룬궁 서적과 기타 자료들은 전부 소각시켜 버렸고,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생을 인터뷰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외국 뉴스매체에 대해서는, 전부 극단적인 대응조치를 취하거나, 혹은 기자를 중국에서 추방했으며, 혹은 해외매체를 위협하거나 시장이익을 미끼로 자율적인 단속이란 미명하에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핍박하였다.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 및 당국의 잔혹한 탄압자료를 해외에 전달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서, 중공 당국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탄압수단을 취하였다. 단지 베이징의 칭화(淸華)대학만 예를 들더라도, 10여 명의 교수와 학생들이 이로 인해 중형(重刑)을 판결받았다. 충칭(重慶)대학의 여자 대학원생이자 파룬궁 수련생인 웨이싱옌(魏星艶)이 경찰에게 강간당한 사건이 폭로된 후, 7명의 충칭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형을 판결받았다.

(2)벌금부과 재산몰수로 생존권을 박탈하다.

‘경제적으로 파탄시키는’ 것은 전체 중공 국가기계가 진행한 것이다. 5년이 넘는 탄압 기간에, 수십만 명의 중국 파룬궁 제자들이 위협조로 벌금을 부과당했는데, 적으면 몇천 위안에서 많은 경우 몇만 위안에 달했다. 이런 벌금 부과는, 그 어떠한 법률조문에도 근거하지 않은 것이며, 지방정부, 직장 조직 및 파출소, 공안국에서 임의로 진행한 것이다. 벌금을 부과당한 사람은 어떠한 법률문건으로 된 영수증도 받지 못했다.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다른 일종의 경제약탈 방식이다.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는 수련생들은 수시로 경찰의 재산몰수에 직면해야 했는데, 재산을 몰수해 가는 자들은 현금과 재물을 가져갔으며, 어떤 때는 심지어 농촌의 저장식량까지 빼앗아갔다. 벌금부과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몰수해 간 재물에는 어떠한 영수증도 없으며, 대개는 재산몰수를 집행하는 사람들이 중간에서 착복한다.

동시에, 파룬궁 수련생들은 직장에서 실직당할 위험에 직면했으며, 농촌에서는 토지를 회수 당하는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중공은 심지어 이미 퇴직한 노인마저도 가만두지 않았는데, 많은 은퇴 노인들의 퇴직금을 주지 않거나 거주하는 집을 회수하였다. 일부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파룬궁 수련생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은행예금을 동결당했다.

이런 정책을 집행할 때, 중공은 연좌제를 실시하였다. 직장에 파룬궁 수련생이 있으면, 직장상사나 직원들은 상여금을 타지 못하거나 승진을 정지시켜, 사회적으로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원한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파룬궁 수련생의 가족들도 해고의 위험에 직면했고, 어린 아이들의 학업을 중단시키거나, 집을 회수 당하는 등등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모든 파룬궁 수련생들의 경제수입을 끊어, 믿음을 포기하도록 핍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3)혹형으로 학대하고 제멋대로 살육하다.

가장 피비린내 나는 ‘육체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안, 검찰, 법원 계통에서 집행하였다. 명혜망의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99년 7월 20일 이래 5년이 넘는 시간에, 민간(民間)을 거쳐 전해온 소식 중 박해를 받아 사망한 것이 실증된 파룬궁 수련생들은 적어도 이미 1128명이나 된다. 박해받아 사망한 사례는 전 중국의 30여 개 성, 자치구, 직할시에 분포되어 있다. 2004년 10월 1일까지, 사망사례가 높은 지역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허베이성, 산둥성, 쓰촨성, 후베이성 등이다. 사망자 중 나이가 제일어린 경우는 겨우 생후 10개월에 불과했으며, 최고령 사망자는 72세였다. 또 여성이 51.3%를 차지했으며, 50세 이상의 노인이 약 38.86%을 차지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 중공 관리가 밝힌데 의하면, 박해받아 사망한 파룬궁 수련생들의 숫자는 실제로 이 숫자를 훨씬 더 초과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룬궁 수련생들의 몸에 가해진 여러 가지 혹형은, 더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구타하기, 채찍으로 때리기, 전기고문, 냉동시키기, 줄로 묶기, 장시간 족쇄와 수갑 채우기, 불로 태우기, 지지기, 매달아놓기, 장시간 서있게 하기, 꿇어앉게 하기, 대바늘과 철사로 찌르기, 성학대, 강간 등이다. 2000년 10월, 랴오닝성 마싼자 교양원의 간수들은 18명 여자 파룬궁 수련생들의 옷을 몽땅 벗긴 후, 그들을 남자감방에 밀어넣고, 남자 범인들에게 마음대로 성폭행하고 짓밟게 하였다. 이 모든 일체와 얼룩진 피눈물은, 필설로는 이루 다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정신병 치료’의 남용(濫用) 역시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하는 많은 혹형 중의 하나이다. 정상적이고 이지적이며 건강한 파룬궁 수련생들이 불법적으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중추신경계통을 파괴하는 이름 모를 약물을 주사당한 후, 어떤 사람은 전신 혹은 국부가 마비되었고, 어떤 사람은 두 눈이 실명되거나 두 귀가 멀었다. 어떤 사람은 신체 근육과 기관이 썩어서 문드러졌고, 어떤 사람은 일부 혹은 전부의 기억을 상실하여 바보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내장기능이 엄중하게 손상되었고, 어떤 사람은 박해받아 미쳤다. 또 어떤 사람은 약물발작으로 아주 빨리 사망하였다.

조사결과가 드러내다시피, ‘정신병 치료’ 수단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한 사례는 중국의 23개 성(省)․시(市)․자치구에 널리 분포되었으며, 몇백개 성·시·현·구의 정신병원이 박해에 참여하였다. 사안의 수량 및 분포범위로 볼 때,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향정신성 약물을 남용한 박해는, 계획적으로 위에서 아래까지 체계적으로 실시한 정책이다. 적어도 일천여 명의 정신이 멀쩡한 파룬궁 수련생들이 강제로 정신병원과 마약중독 치료센터에 감금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여러 가지 중추신경을 파괴시키는 주사를 맞거나 혹은 음식물을 주입 당했으며, 장시간 줄에 묶여 있거나, 전기고문 등의 혹형을 당하였으며, 적어도 15명이 이렇게 박해받아 사망하였다.

(4)법률체제를 초월한 610사무실

1999년 6월 7일, 장쩌민은 중공 정치국 회의에서 전면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하는 문제에 관해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중앙파룬궁문제처리 영도소조를 설립하였다. 6월 10일에 성립되었기에, 대외로는 ‘610사무실’이라고 불렀다. 그후, 이 ‘610’ 사무실은 위부터 아래까지 전국 각급 정부에 퍼졌으며, 파룬궁을 공격하는 모든 사무를 구체적으로 책임졌다. 중공 당위원회 지도 하의 정법(政法)위원회, 매체 및 정부기관의 공안, 경찰, 법원과 국가안전부 등은 모두 그 졸개였다. ‘610사무실’은 명목상으로는 국무원에 소속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와 정부체제 밖의 당무(黨務)조직으로 어떠한 법률조문 및 국가정책 규정의 제한을 받지 않고, 국가법률체계와 정부체제를 초월하여 국가자원을 최대한 관리하고 배치할 수 있는 초권력 기구로, 나치 독일의 게쉬타포와 비슷하였다. 장쩌민이 명령을 내려 파룬궁을 탄압한 후, 1999년 7월 22일, 신화사는 중공 중앙 조직부 책임자와 중공 중앙 선전부 책임자 등 사람들의 강화(講話)를 발표하여,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는데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하였다. 이 일체는 모두 공산당의 엄밀한 조직상에서, 장쩌민의 사악한 계획의 실시에 협조한 것이다.

많은 사례가 증명하다시피 파룬궁과 관련된 모든 안건은, 모두 공안국과 검찰원 및 법원에서 독립적으로 처리할 권리가 없으며, 반드시 ‘610사무실’의 명령을 들어야 했다. 많은 붙잡히고, 감금되고, 학대받아 사망한 파룬궁 수련생들의 가족이, 공안, 검찰, 법원 계통에 문의하고 고소할 때, 전부 ‘610사무실’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통지받았다.

그러나 이 ‘610사무실’의 존재는, 어떠한 법률적인 근거도 없다. 610이 중공의 모든 체제내 기구에 명령을 하달할 때, 대다수는 서면명령이나 통지가 없으며, 오직 구두(口頭)전달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듣고 전달하는 자는 녹음이나 녹화를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 기록도 못하게 했다.

이런 임시 독재정치 기구는, 바로 중공이 역대로 사용해 온 관용적인 수법이다. 중공의 역대 정치적인 숙청운동에서, 모두 이런 비정상적인 수단과 비정상적인 임시기구로 지도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중앙문화혁명소조는 문화대혁명 당시에 공산당의 폭정을 전국적으로 추진했었다.

중국 공산당은 장기적인 폭정과 고압적인 통치과정에서, 폭력과 거짓말, 소식을 봉쇄하는데 있어서 세계에서 제일 강대하고, 제일 사악한 국가공포주의를 몸에 익혔다. 그 잔혹함과 거짓으로 기만함을 운용하는 것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파룬궁 탄압의 규모와 정도는 더욱 전무후무(前無後無) 한데, 역대 정치운동 중에서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며 죽이는 방법과 경험 및 잔혹하고 교활하며 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방법을 체계적이며 효과적으로 경험을 쌓았다.

국가군대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통제는 군대로 하여금 인민을 탄압할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하게 하엿다. 이번 파룬궁 탄압에서 장쩌민은 경찰과 무장경찰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1999년 7~8월에 전국의 몇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평화적인 백성들이 파룬궁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위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갈 때, 장쩌민은 직접 무장한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베이징으로 통하는 중요 도로에는 실탄을 장착한 총을 든 군인들이, 경찰과 협조하여 청원하러 가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가로막고 붙잡았다.

국가재정에 대한 중공의 통제는,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는데 경제적인 배경이 되었다. 랴오닝성 사법청 고위관리는 일찍이 랴오닝성 마싼자 ‘노동교양원’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승인한 적이 있다. “파룬궁에 대한 재정투입은 이미 전쟁 비용을 초월하였다.”

비록 지금 중공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국가경제자원과 인민의 피땀으로 거둔 수입을 유용하여 파룬궁을 박해했는지 아직 분명하진 않지만, 생각해보면 천문학적인 숫자임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다.2001년, 중공 공안 내부로부터 나온 소식에 의하면, 톈안먼 한 곳만 해도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하루에 인민폐로 170만 내지 250만 위안인데, 이것을 1년 지출로 환산해보면 6억2천만 내지 9억1천만 위안이 된다. 전국적으로 도시에서부터 구석진 농촌에 이르기까지, 파출소 경찰로부터 공안국, 다시 각급 ‘610사무실’의 인원까지,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을 대략 계산해도 적어도 몇백만 명이 되는데, 이 사람들에 대한 임금지불은 매년 몇천억 인민폐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장쩌민은 거액의 경비를 써 가면서 파룬궁 수련생들을 감금하는 노동교양소를 확대건립하고 세뇌센터와 기지 등을 건립하였다. 예를 들면 2001년 12월, 장쩌민은 일차적으로 42억 위안을 투입하여 파룬궁 수련생을 전향시키는 세뇌센터와 기지를 건립하였다. 장쩌민은 또한 금전을 이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도록 자극하고 고무격려 했는데,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할 때마다 몇천에서 몇만 위안의 보너스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가장 사악한 랴오닝성 마싼자 노동교양소에 대해서, 중공은 일차적으로 소장 쑤(蘇) 모(某)에게 인민폐 5만 위안, 부소장인 샤오(邵) 모에게는 3만 위안을 보너스로 주었다.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은 이 사악한 박해의 개시자이며 기획하고 지휘한 자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 매커니즘을 이용하여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하였으므로, 이 역사적인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만약 중국 공산당 및 공산당이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잔혹한 매커니즘이 없었다면, 장쩌민도 근본적으로 이런 사악한 박해를 발동하고 진행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장쩌민과 중공은 서로 이용하여, 온 세상의 비난도 꺼리지 않고, 자기한 몸과 공산당 일당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진선인을 반대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번 죄악과 황당무계한 탄압이 발생할 수 있었던 진정한 원인이다.

5. 장쩌민은 내부로부터 중공을 타도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 공산주의를 이식(移植)하기 위하여, 중국의 전통문화를 뿌리까지 절단시켰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참패가 공산주의가 황당한 오류임을 실천으로 증명한 후에도, 중공은 도리어 중국을 다시 전통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비(非)공산주의적인 양성(良性)사회로 과도시킬 능력과 패기 혹은 바람이 없었다. 원인은 중공의 일당독재 자체가, 다른 정치단체가 국정(國政)에 참여하는 것이나 혹은 중국의 통치권력을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중국은 오직 공산주의라는 악성 종양이 전면적으로 발작하고 붕괴되어, 중공과 함께 해체될 때까지 기다리는 듯하다.

90년대 갑자기 나타난 파룬궁이라는 비정치적인 민간수련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켰고, 중국의 전통 문화와 군중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면서, 소리없이 중국인의 뿌리를 되찾아왔다. 파룬궁의 전파는 가히 중국사회의 안정과 선해(善解)에 대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많은 중공 당내의 지식인들도 파룬궁의 전파는 근본적으로 사회 안정에 유익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개인의 사리사욕 때문에 공산당 고유의 사악을 이용하여 중국에서 수련인을 대상으로 박해를 하였고, 사회에서 이런 선(善)을 향하고 국가사회에 이익만 있지 해(害)가 없는 수련인에 대한 토벌을 발동하였다. 이 박해는 국가와 인민을 죄악과 재난 속에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최후에는 근본으로부터 공산당 자신을 타도하였다.

장쩌민은 중공을 이용하여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일체 사악한 수단을 모두 이용하여 파룬궁에 대처하였고, 법률, 도덕과 인성(人性)은 모두 큰 파괴를 당했는데, 이는 근본으로부터 국가정권의 통치기초를 훼손시킨 것이다.

장쩌민 집단은 일체 사용가능한 모든 재력, 물력(物力)과 인력(人力)을 투입하여 파룬궁에 대처하였으며, 국가와 사회에 커다란 부담을 조성했는데, 중공은 근본적으로 이런 박해를 장기간 진행할 수 없다.

중공과 장쩌민은 박해 중에서 깡패[流氓], 잔혹, 사기 등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였고, 중공의 사악한 경험들을 집대성하였는데, 파룬궁 박해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부각되었다.

중공과 장쩌민은 일체 선전도구를 동원하여 파룬궁을 비방하고 날조하였으며 탄압과 박해를 위한 구실을 조작해냈다. 일단 최후에 거짓말이폭로되고, 이 일체 사악이 박해의 실패로 인해 폭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거짓을 날조한 선전 도구는 더 이상 민중을 속일 수 없으며, 중공은 철저히 신뢰를 잃을 것이며 민심도 잃게 될 것이다.

장쩌민은 1999년 파룬궁을 탄압할 초기에, ‘3개월’만에 파룬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공은 파룬궁의 역량을 과소평가했으며,전통과 신앙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였다.

5년이 지나갔다. 파룬궁은 여전히 파룬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더욱 광범하게 전파되었다. 장쩌민과 중공은 도리어 이 정사(正邪)의 대결에서 크게 실패했으며, 자신의 깡패적이고 잔혹하며 사악한 본성을 남김없이 폭로하였다. 장쩌민은 현재 평판이 너무나 나빠져서, 당 안팎으로부터 궁지에 몰렸는데, 많은 법률소송과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고 법의 심판을 받게하라는 외침에 직면하고 있다.

중공은 본래 이 탄압을 이용하여 그 폭정(暴政)을 공고히 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실현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까지 모두 소모해 버리고 말았다. 현재 중공은 이미 너무나 악화되어 약으로는 구할 방법이 없다. 마치 한 그루 썩은 고목나무처럼, 바람이 불어 풀을 흔들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결 론

99년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장쩌민은 이 사악한 박해의 개시자이자 기획하고 지휘한 자이다.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의 권력, 지위, 사람을 괴롭히는 수단, 운행 매커니즘을 충분히 이용하여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하였으므로 이번 역사적인 죄악에 대해 벗어날수 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

다른 한 방면으로, 만약 중국 공산당이 없었다면, 장쩌민도 근본적으로이 사악한 박해를 발동하고 진행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탄생한 그날부터 시작하여 정의와 선량을 적으로 삼았고, 탄압을 수단으로 삼았으며, 박해를 장기로 삼았고, 일당독재라는 사상통제를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공산당은 본성에서 출발하여, 진선인을 무서워하고 파룬궁을 증오하였는데, 파룬궁에 대한 탄압과 박해도 우연 중의 필연이다.

중공과 장쩌민의 상호 이용은, 양자의 운명을 하나로 연계시켜 놓았다. 파룬궁은 마침 장쩌민을 기소하고 있다. 장쩌민이 법에 의해 처리될 때, 중공의 말로(末路)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진선인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들에 대해, 인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박해를 진행한 것은 하늘이 용납하지 못한다. 장쩌민과 중공의 악행은 인류에게 영원히 심각한 교훈을 남겨줄 것이다.

(대기원시보 ‘9평 공산당’ 시리즈 중에서)

문장완성:2004년 11월 26일
문장발표:2004년 11월 27일
문장갱신:2004년 11월 27일 17:23:07
문장분류 :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11/27/9017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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