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4년 12월 2일 】
[명혜망2004년12월2일] 대기원신문 12월 1일에 사이트에 발표한 《중국공산당의 살인역사를 평하다.》의 논평문장이다. 이하는 발췌한 문장이다.
들어가는 말(前言)
중공(中共) 정권 수립 55년의 역사는 피와 거짓으로 쓴 역사다. 그 흘린 피와 배후의 이야기는 참혹하기 그지 없으나 오히려 아는 사람이 드물다. 지금 중국인들은 5천만 이상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당하고 있으며 더 많은 가정이 파탄된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중공이 무엇 때문에 살인을 하겠는가?’하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중공은 여전히 파룬궁 수련생들을 도살하고 있으며 심지어 보름 전 한위안(漢源)에서 항의하는 민중들을 총으로 진압했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어느 날이 되어야 중공이 살인을 중지하고 대화로 해결하고 총으로 해결하지 않을 시기가 있을까?’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총결산하면서 “천하가 크게 혼란해야 천하를 크게 다스릴 수 있으며 7~8년마다 또 한번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명백하게 말하면 7~8년 주기로 또 다시 운동을 하고 7~8년만 또 다시 살인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공산당의 살인은 이론 근거가 있으며 또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론상으로 말한다면 공산당은 ‘무산계급 독재정치(역주: 공산주의 이론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한다)’과 ‘무산계급 독재 하의 계속적 혁명’이론이 있다. 그러므로 정권을 잡은 후부터 ‘지주를 살해하는’ 방법으로 농촌의 생산관계를 해결하였고, ‘자본가 계급을 살해’하여 상공업 개조를 완성하고 도시의 생산관계를 해결하였다. 이 두 계급을 살해하니 경제적인 토대 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상부구조를 만드는 문제에서도 역시 살인으로 해결하였다. ‘후펑(胡風) 반당 집단[역주: 후펑은 중국의 저명한 문필가로 중국작가협회 이사이자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였으나 1955년 당의 문예영도를 방해하고 부르조아 유심주의 노선을 걸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으며 무려 2,100명의 사회 저명인사들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비판을 받았다. 후펑은 55년부터 25년간 감금되었다가 1980년 3월에 석방되었으며, 반혁명․반당의 누명을 벗기고 명예가 회복되었다.]’과 ‘반(反) 우파 투쟁[역주: 1957~58년 마오쩌둥의 지시로 고위 당간부, 예술가, 과학자, 지식인 등 290만 명을 비판 고발하고 이 중 55만 명이 공직에서 추방당한 사건으로 이중 나중에 공산당에서조차 잘못으로 인정한 것이 54만 5천명에 달한다. 이들은 변방의 농촌으로 쫓겨났으며 이후 중국 인민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무조건 공산당을 따를 것을 강요받게 된다.]’으로 지식인들을 숙청하였고, ‘종교문파를 살해’하여 종교문제를 해결하였으며, ‘문화대혁명 살인’으로 문화 및 정치에 있어서 당의 절대적인 영도권 문제를 해결하였다.
‘6.4(역주: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살인으로 정치적인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민주화 요구를 해결하였고, ‘파룬궁 박해’로 신앙과 신체단련 운동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중공이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고 권력을 수호하는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경제위기(건국 후 물가상승이나 문화대혁명 후의 경제 붕괴 등), 정치위기(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나 당의 권력을 분할하자고 요구하는 사람) 신앙위기[쑤둥보(蘇東波)사건, 파룬궁 사건]를 처리하면서 나타난 필연적인 반영이다. 파룬궁 사건 이외에 앞의 모든 정치 운동은 모두 중공의 사악한 영체[邪靈]를 충전하여 혁명투지를 증가시키는 과정이었으며 당 조직을 검열하여 당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당원을 도태시키는 것이었다.
공산당이 살인을 하는 데는 또한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초기에 깡패[流氓] 무뢰배들의 살인에 의지해 당을 일으켰다. 애시당초 시작부터 살인을 했기에 중간에 손을 뗄 수 없었고 필연적으로 공포를 조성하여 인민들을 벌벌떨게 만들어 상대방의 힘이 강대하기에 마지못해 복종시킨 것이 현실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는 많은 시기에 공산당이 ‘피동적으로 살인’ 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사회에서 ‘우연한’ 사건이 ‘우연하게’ 중공의 사악한 영체와 중국 공산당의 조직적인 살인 매커니즘을 건드린 것같다. 그러나 사실 ‘우연’의 뒷면에 가려진 주기적인 살인은 중공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필연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처가 낫고 나면 통증을 잊는다.’는 말처럼 이년 정도 살인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중공이 이미 개량했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심지어 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때 많은 이상(理想) 청년들처럼 민주를 요구할 수 있다. 7~8년마다 한번씩 살인을 하고 사람들에게 공포의 기억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며 또한 성장하는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즉, 누가 만약 공산당과 대립하고 공산당의 절대적인 영도를 부인하며 역사의 진실한 면모를 회복하려 한다면 그는 곧바로 ‘무산계급독재 철권(鐵拳)’의 맛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볼 때 살인은 중공이 통치를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수단의 하나이다. 피의 빚[血債]이 점점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도살용 칼을 내려 놓는 것은 곧 민중들에게 자신을 맞겨 빚을 청산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당은 단지 들판에 시체가 널리고 강물이 피로 물들 정도로 살인을 할뿐만 아니라 아주 잔인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정권 초기에는 더욱 심했으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민중을 두려워 떨게 할 수 없었다.
기왕지사 공포를 조성하기 위하여 살인을 했다면 그렇다면 누구를 죽이고 죽이지 않는 것은 아무런 이성(理性)이 없는 것이다. 역대 정치 운동 중 중공은 종래로 모두 ‘집단학살’ 정책을 사용하였다. ‘반혁명 탄압’을 예로 들면 중공은 반혁명 ‘행위’를 탄압한 것이 아니라 반혁명 ‘분자’를 탄압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국민당 군대에 잠시 있었으며 중공 정권이 수립된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똑같이 죽여버린다. 왜냐하면 그가 ‘반혁명 역사’에 속했기 때문이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중공은 심지어 ‘풀을 벤 후에 뿌리를 뽑는’는 멸절(滅絶) 방식으로 지주를 살해했을 뿐만아니라 지주의 가족도 모두 같이 살해하였다.
1949년 이후 중국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중공의 박해를 받아 대략 5천만에서 8천만의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는데 이것은 두 차례 세계 대전의 사망자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이다.
세계의 다른 공산국가와 마찬가지로, 중공은 대량적으로 민중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에 대해서도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진행했으며 그 수단도 매우 참혹하였다. 목적은 ‘인성(人性)’이 ‘당성(黨性)’을 넘는 부류의 당원들을 깨끗이 제거하는데 있었다. 공산당은 인민을 공포에 떨게해야 했을 뿐만아니라 자기 내부의 사람도 겁을 주어야만 이른바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는 전투보루’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문화 속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심과 사랑 및 생명에 대한 존엄 및 신(神)에 대한 은혜와 감사가 충만되어 있다. 동양인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己所不慾 勿施於人].’고 하며 서양인들은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유독 공산당만은 ‘지금까지 일체 사회의 역사는 모두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주장하며 투쟁(鬪爭)의 ‘투(鬪)’란 한 글자를 유지하기 위하여 인민 속에서 원한을 선동하며 중공 자신이 살인할 뿐만아니라 군중을 동원하여 서로 살인하게 한다. 인민들은 연속적인 살인 속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무시하고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게 되며 비인간적인 잔인한 폭행 앞에 습관이 되어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또한 폭행을 모면하면 자신이 가장 행운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이를 통해 참혹한 탄압으로! 중공의 통치를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중공은 몇십년의 학살 중에서 무수한 생명을 훼멸시켰을 뿐만아니라 더욱이 중화 민족의 정신을 훼멸시켰다. 많은 사람들은 참혹한 투쟁 중에서 일종의 조건 반사가 형성되었다. 중공이 도살용 칼을 들기만 하면 사람들은 즉시 일체 원칙을 포기하고 판단력을 포기하며 손을 들고 투항한다. 어떤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들의 정신은 이미 사망한 것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사망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다.
1. 삼대를 베듯 살인하다[殺人如麻]
마오쩌둥은 정권을 건립하기 전에 “우리는 반동파와 반동 계급의 반동행위에 대해서 절대로 인정(仁政)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중공은 정권을 잡기 전부터 ‘폭정(暴政)’할 결심을 내리고는 거기에 ‘인민민주독재’라는 미명을 붙였다. 아래에서는 공산당이 펼친 일부 운동을 예로 들어 본다.
(1) 진반(鎭反)과 토지개혁[土改]
중공은 1950년 3월 『엄격히 반혁명분자를 탄압하는 지시』를 발표했는데 역사에서는 이것을 진반(鎭反 역주 : 반동을 탄압한다는 의미)운동이라고 한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정권을 잡은 후 대사면을 내린 것에 반해 중공은 정권을 잡자마자 도살용 칼을 높이 들었다. 마오쩌둥은 한 문건에서 “많은 지방에서는 소심하게 겁을 먹어 감히 기치를 높이 들고 반혁명 분자들을 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51년 2월 중공 중앙은 저장(浙江)성과 환난(皖南)지역을 제외하고 또 지시하였다. “기타 살인을 적게 한 지방, 특히 대도시나 중(中)도시들은 마땅히 계속적으로 한 무리를 붙잡아 한 무리씩 살해해야 하며 너무 일찍 중단하면 안 된다.” 또한 “농촌에서 반혁명 분자를 살해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마땅히 인구 비례의 천분의 일을 넘어야 한다. ……도시에서는 일반적으로 천분의 일이 못되게 해야 한다.” 그 당시 중국인구를 6억으로 계산하면 마오쩌둥의 한마디 말, 이른바 ‘성지(聖旨)’에 적어도 60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도대체 이 ‘천분의 일’이란 숫자는 어떻게 나온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마 마오쩌둥의 생각에 60만명의 생명을 기초로 하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초보적인 규모를 형성한다고 여겨 이런 지표를 하달한 것 같다.
살해당한 사람이 죽을 만한 죄를 지었는가 하는 이것은 전혀 중공이 고려할 문제가 아니다. 1951년 공포한 『중앙인민공화국 반혁명 탄압조례』중의 규정에는 “요언(謠言)을 전한 자도 즉각 ‘살해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기세좋게 타오른 진반 운동과 동시에 ‘토지개혁 운동’ 역시 마찬가지로 사나운 기세로 타올랐다. 실제적으로 중공은 20세기 20년대 말부터 점령구에서 ‘토지개혁’을 시작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태평천국’이요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이상을 실현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상 진정한 목적은 이런 명의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중공 당내 서열 제3위의 지도자였던 타오주(陶鑄)의 토지개혁 구호는 “마을마다 유혈이 낭자하고 집집마다 투쟁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마을마다 지주를 총살하는 것이었다.
본래 토지개혁은 사람을 살인할 필요가 전혀 없다. 대만 정부에서 실행한 것처럼 매매하는 방식으로 할 수도 있었으나 도적 출신의 중국 공산당은 ‘약탈하는’ 방법밖에 몰랐다. 남의 것을 약탈하고는 그들이 원한을 품을까 두려워 풀을 베고는 뿌리까지 제거했던 것이다.
토지개혁 당시 가장 흔한 살인 방법은 투쟁회(鬪爭會)였다. 지주나 부농들에게 없는 죄명을 뒤집어 씌우고 군중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군중 속에 배치한 공산당원이나 또는 열성분자들이 ‘죽어도 싸다!’라고 구호를 외친다. 이런 다음 지주와 부농들을 그 자리에서 처단한다. 당시 농촌에서 땅만 가지고 있으면 모두 ‘패(霸 역주: 농민들을 수탈한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인정되었다. 평상시에 백성들을 못살게 군 지주는 ‘악패(惡覇)’, 늘 길과 다리를 수리하고 이재민들을 돕는 사람은 ‘선패(善覇)’라고 했으며, 아무것도 안 했으면 ‘불패(不覇)’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실제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어떤 ‘패(霸)’도 결국은 모두 같은 처분을 받았는데, 바로 현장에서 죽이는 것이다.
중공에서 공포한데 의하면, 1952년 말까지 소멸한 ‘반혁명 분자’는 2백4십만명이고 실제로 살해당한 국민당 현장(縣長)이하 지방 갑장(甲長)을 포함한 인원은 적어도 5백만명 이상이다. 토지개혁 때 살인한 총 숫자는 일천만명 정도이다.
이런 진반과 토지개혁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1, 과거 중국의 기층 권력 조직은 기본적으로 향촌의 종족자치였고 향의 신사(紳士) 계층은 지방자치의 수령이었다. 중공은 진반과 토지개혁을 통해 기존 체계의 관리인원을 몰살시키고 촌마다 공산당 지부를 만드는 것을 실현하여 농촌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2, 토지개혁과 진반을 통해 대량의 돈과 재물을 약탈했으며, 농촌 간부들은 이 틈을 이용해 지주 부농의 처와 딸들을 간음하였다.
3, 지주 부농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통해 백성들을 두려워 떨게 하려는 목적에 도달하였다.
(2)‘3반(反)’과 ’5반(反)‘
진반과 토지개혁이 주로 농촌 기층을 상대로 했다고 한다면 연이은 ‘3반’, ‘5반‘운동은 곧 도시에서 벌어진 학살 운동이다.
‘3반(反)’은 1951년 12월 중공 내부의 부패간부를 겨냥하고 전개한 것으로, ‘반 탐오(貪汚), 반 낭비, 반 관료주의’ 운동이다. 당시 부패한 간부들을 처치했을 뿐만 아니라 잇따라 간부들을 부패하게 만든 것은 모두 자본가들이 유혹한 결과라고 여긴 공산당은 그 다음 해 일월부터 ‘5반’을 시작하였다. 즉, ‘반 뇌물증여, 반 탈세(脫稅), 반 국가재산절도, 반 부실공사, 반 국가경제정보절취’ 등 5가지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5반’은 실제상 자본가의 돈을 약탈한 것으로 심지어 재산을 빼앗기 위해 목숨까지 해친 것이다. 당시 상하이 시장 천이(陳毅)가 매일 저녁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고는 한가하게 질문한 것이 “오늘 낙하산 부대는 얼마나 되는가?”였다. 실제 의미는 얼마나 많은 상인들이 건물에서 뛰여내렸는가? 하는 것이다. ‘5반’ 운동에서 거의 모든 자본가들은 겁난(劫難)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른바 ‘반 탈세’의 경우 광서(光緖)년간 상하이 개항 때부터 계산하니 자본가들은 재산을 몽땅 바쳐도 ‘세금’을 다 갚을 수 없었다. 죽고 싶어 황포강에 뛰어들고 싶어도 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홍콩으로 건너갔다고 세금을 매겨 가족들이 계속 세금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건물에서 뛰어 내려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공산당이 시체를 보고 더 이상 박해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고층 건물 양 쪽의 길은 누구도 지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갑자기 위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에게 압사(壓死)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중공 중앙 당사(黨史) 연구실 등 4개 부문이 연합하여 편집한 『건국이후 역사정치 운동 사실』보고에서는 ‘3반’, ‘5반’ 중에 32만3천1백여 명이 체포되어 280여 명이 자살 혹은 실종되었다고 한다. 1955년 반후펑(反胡風) 운동 중에는 5천여명이 연루되어 5백여명이 체포되었고 60여명이 자살하였으며 12명은 비정상적으로 사망하였다. 그후 ‘숙반(潚反 역주: 반동분자를 숙청한다는 의미)’ 운동 중에 2만천여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고 4천3백여명이 자살 혹은 실종되었다.
(3)대기근
중공 정권 수립이후 가장 사망자가 많았던 운동은 이른바‘대약진’ 후의 대기근 시기이다. 홍기(紅旗) 출판사 1994년 2월에 출판한『중화인민공화국 역사 기록』에 의하면 ‘대기근’ 관련 문장에서는 “1959년에서 1961에 비정상적인 사망과 출생 인구의 감소는 대략 4천만명 정도이다. …중국인구가 4천만명이나 감소되었으며 아무도 금세게 최대의 기근일 것이다.”
이 대기근을 중공은 ‘3년간의 자연 재해’ 탓으로 돌렸는데 실제로 그 3년간은 기후가 순조로웠던 해로 심한 홍수나 가뭄, 회오리 바람, 해일, 지진, 서리 , 추위, 우박, 벌레 등 대규모 자연 재해가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던 해로 완전한 인재(人災)였다. ‘대약진’ 때 강철을 만든다고 전 국민을 동원하여 들판에서 대량의 곡식을 수확할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썩혀버렸다. 동시에 중국 각지에서는 지역별로 벼 생산량 ‘신기록 경쟁’이 불붙어 류저우(柳州)지역 공산당위원회 서기 허이란(賀亦然)은 심지어 일방적으로 환장현(環江縣)의 벼 생산량이 한 무(畝)당 무려 13만 근이라는 기사를 조작하였다. 마침 루산(廬山)회의 후 중공이 전국에서 ‘반(反)우경’을 하고 있을 때라 일관적인 정확성을 체현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허위 보고한 대로 식량을 바쳤야 했다. 결국 농민들의 식량 , 종자, 사료까! 지 몽땅 징수하였다. 징수량이 부족하자 여전히 농민들이 식량을 숨겼다고 모함하였다.
허이란은 “류저우 지역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더라도 전국 제일을 쟁취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농민은 곡식을 몽땅 빼앗겨 오줌통에 숨겨놓은 몇 줌의 곡식밖에 없었다. 환장현 산하 구위원회에서는 식량이 있어도 먹지 못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불을 끄고 솥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병(民兵)들이 야간에 순찰할 때 불빛이 보이면 집을 수색하고 사람을 체포하였다. 수많은 농민들은 채소와 나무껍질조차도 감히 익혀 먹지 못하여 산채로 굶어죽었다.
과거에 대기근이 발생하면 관에서는 죽을 끓이는 곳[粥廳]을 만들고 창고를 열고 곡식을 풀어 구휼하였으며 난민들에게 살길을 찾아 멀리 이주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난민들이 이주하면 ‘공산당의 위신(威信)’이 내려간다며 민병을 파견하여 향촌의 교통길를 막고는 굶주린 난민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기아에 시달린 사람들이 참을수 없어 식량창고에 가서 양식을 꺼내면 총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총에 맞아 죽은 난민들을 반혁명분자로 취급하였다. 당시 간쑤(甘肅), 산둥(山東),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쓰촨(四川), 광시(廣西) 등 많은 성에서 기아에 굶주린 난민들의 시체가 온 들판에 깔렸다고 한다. 또한 굶주림에 지친 농민들을 “대규모 수리(水利)사업”, “대규모 강철 제련”에 동원해 강제노역을 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쓰러져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나중에는 사람이 죽어도 묻을 기력마저 없었으며 많은 마을에서 가족이 한 명 한 명씩 모조리 죽어 나갔다.
중국 역사상 기근이 가장 엄중했던 시기에 일찍이 ‘자식을 팔아 식량을 구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중공이 통치한 시기에 다음과 같은 일들이 발생하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가르고 삶아서 먹었을 뿐만아니라 또 다른 지역에서 기아를 피해 온 난민을 잡아 먹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이까지도 잡아 먹었다.
“한 농가에서 마지막에 아버지와 아들, 딸 3명 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딸을 문밖으로 내쫓은 후 한참이 지나 딸이 집에 돌아와 보니 남동생이 없어졌다. 솥에는 하얀 기름기 있는 물건이 있었고 솥 옆에는 한 무더기 뼈가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또 솥에다 물을 붓고는 딸을 불렀다. 딸은 놀라서 문밖에서 크게 울면서 애걸하였다. “아빠 저를 잡아먹지 마세요. 제가 아빠를 위해 나무를 하고 불을 때는데 저를 잡아 먹으면 아빠를 위해 일해줄 사람도 사라집니다.”(작가 사칭(沙青)의 보고 문학 『아득한 대지만(依稀大地湾)』중에서)
이러한 인륜비극이 얼마나 발생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수한 인륜비극을 만든 죄악의 우두머리 중공은 당이 인민을 이끌어 자연 재해를 극복했다며 찬송하였고 계속해서 공산당을 “위대, 광명, 정확(偉光正)”하다고 하였다.
1959년 루산회의 때 인민을 위해 바른 말을 한 펑더화이(彭德懷)가 숙청 당했으며 감히 참말을 하는 간부들은 파직당하거나, 감금되었고, 심사당하여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이미 진실한 말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이 굶어죽는 진상을 은폐하였고 심지어 간쑤성의 경우 산시(陝西)성에서 적극적으로 식량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자 자신들은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식량이 많다는 구실로 거절해 버렸다.
이번 대기근은 또한 중공 간부들에 대한 한 차례의 검열이었다. 중공의 표준에 따르면 이런 간부들은 모두 합격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천만 사람들이 굶어 죽어도 바른 소리를 하지 않았고 그 어떤 인정이나 천리(天理)도 그들이 당을 따라가는데 있어 아무런 양심의 부담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기근 후 잘못을 저지른 성(省)급 간부들은 형식적인 검토를 한 것으로 일을 끝냈다. 쓰촨에서 몇백만명을 굶어 죽인 성위원회 서기 리징취안(李井泉)은 심지어 다시 발탁되어 서남국(西南局)의 제일 서기로 선임되었다.
(4)문화대혁명, 6.4운동부터 파룬궁까지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 기간을 중공 자신도 ‘10년 대재난[浩劫]’ 이라고 부른다. 후야오방(胡耀邦)은 나중에 유고슬라비아 기자에게 “당시 대략 1억인이 연루되었는데 중국 인구의 10분의 일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중공 중앙 당사 연구실 등에서 편집한 『건국이후 역사정치 운동 사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84년 5월 중공 중앙이 2년 7개월 간의 전면적인 조사, 사실확인 , 새로 통계한데 의하면 문화대혁명 당시에 420만명이 갇혀서 심사 받았으며, 172만8천여 명이 비정상으로 사망하였고 13만5천여 명이 현행 반혁명죄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무장투쟁에서 23만7천여 명이 사망했고 703만여 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7만천2백여 개의 가정이 완전히 훼멸되었다.”
사람을 때려죽인 것 외에도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에서는 자살 열풍이 나타났다. 많은 저명한 지식인, 예를 들면 라오서(老舍), 보레이(傅雷), 젠버짠(翦伯贊), 우커우(吳□), 추안핑(儲安平) 등은 모두 문화대혁명 초기에 자살의 길을 걸었다.
문화대혁명 시기는 중국 역사상 ‘좌경’이 가장 미친 듯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살인은 대개 혁명성을 과시하는 표현으로 출현하였다. 이로 인해 ‘계급의 적’에 대한 살인은 지극히 참혹하고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개혁 개방’은 소식의 유통에 거대한 발전을 가져왓다. 이로 인해 해외의 많은 기자들이 베이징에서 직접 1989년의 6.4 유혈사건을 보았으며 탱크가 학생을 추적하여 몸을 짖눌러 피투성이가 되는 도살 장면을 녹화하여 해외 텔레비전에서 방송하였다.
10년 후 장쩌민은 1999년 7월 20일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2002년 연말 대륙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7천여 명이 각지 구류소, 노교소,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참혹하게 치사당했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하루 7명의 수련생을 살해한 셈이다.
지금 중공이 살인하는 숫자는, 걸핏하면 백만 내지 천만명을 죽인 과거보다 심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는 실제상 두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 하나는 인민들이 중공의 당문화에 이질감을 느껴 더욱 냉소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 가지는 중공이 거대한 횡령과 국고 도용으로 이미 수혈(輸血)형 경제로 되어 외래 자본이 경제성장을 유지하고 사회 안정을 보증하는 중요한 지주(支柱)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공은 6.4 이후 경제제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지금 시기에 공개적으로 살인하면 외국 자본이 겁에 질려 철수하게 되어 자체 통치를 위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공은 암암리에 여전히 살인을 계속하고 있으며 겉으로는 피의 흔적을 극력 은폐하고 있다.
2. 지극히 잔인한 살인수단
중공이 하는 모든 것은 권력을 탈취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살인은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는데, 방법이 잔인하고 살인한 숫자가 많을수록, 더욱더 인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이런 식으로 인민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은 항일전쟁시기 및 심지어 그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1)항일전쟁시기 화베이(華北)의 폭행
미국 대통령 후버는 전 세계에 레이전위안(雷震遠) 신부의 저서『내재적 적』이란 책을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이 책은 공산주의 행동상에서 공개적인 공포 진상을 폭로한 것이다. 나는 전 세계에 분포한 이런 마귀 세력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전국 인사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레이전위안 신부는 책에서 중공이 어떻게 폭행을 이용하여 민중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지 일부 이야기를 썼다. 어느 하루 중공은 모든 사람들을 마을 광장에 모이라고 했는데, 어린이들은 교사 인솔하에 데리고 갔다. 목적은 그들에게 13명의 애국 청년들이 목이 잘려 죽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죄행(罪行)을 낭독한 후 공산당은 놀라서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한 교사에게 명령하여 아이들을 인솔하여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부르게 하였다. 노래하는 중간에 걸어나온 사람은 춤추는 연기자가 아니라 손에 큰 칼을 잡은 망나니였다. “망나니는 흉악하게 생긴 공산당 청년 병사로 팔힘이 센 자였다. 그 병사는 최초 희생자의 뒷면에 서서 두 손으로 넓고 잘 드는 큰 칼을 들고는 번개같이 휘둘렀다. 소리와 함께 희생자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자 머리가 구르면서 선혈이 샘솟 듯 올라왔다. 어린이들의 외치는 듯한 노래소리가 불협화음의 울음 소리로 변했다. 교사들은 박수를 치면서 질서를 정돈하려 했고, 혼잡한 속에서 나는 또 종소리를 들었다.”
“살인자는 연속 13번이나 큰 칼을 휘둘러 13명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그러자 중공의 사병들이 함께 손을 써서 죽은 자의 배를 가르고 심장을 도려내 숙영지에 가서 먹어 치웠다. 이 폭행은 모두 아이들 앞에서 벌어졌고 “아이들은 놀라서 얼굴이 백짓장처럼 되었으며 몇몇은 구토하기 시작하였다. 교사가 욕을 하면서 한편으로 아이들을 집합시켜 학교로 되돌아 갔다.”
이후 레이 신부는 어린이들이 핍박에 의해 살인장면을 관람하는 것을 늘 보게 되었다. 어린이들이 이런 살인 장면이 익숙하게 되어 살인장면에 무감각해지거나 심지어 자극적인 쾌감을 느끼게 될 때까지 이렇게 하였다.
중공은 살인이 더 이상 공포적인 자극을 줄 수 없다고 느끼면 각양각색의 혹형(酷刑)을 발명하였다. 예를 들면 강제로 대량의 소금을 먹게 한 다음 물 한 방울 주지 않아 사람이 목말라 죽을 때까지 그대로 고통을 준다. 다른 한 가지 혹형은 옷을 홀딱 벗기고 깨진 유리 파편 위에 딩구는 형벌을 가한다. 또 다른 혹형은 한겨울에 얼음이 언 강에서 얼음에 구멍을 내고 피해자를 얼음 구멍에 집어넣는데 얼어죽거나 물에 빠져 죽을 때까지 지속한다.
“산시(山西)의 한 공산당원은 아주 무서운 형벌을 발명하였다. 어느날 그가 한 식당의 문앞에 서서 밥을 끊이는 큰 가마솥을 물끄러미 쳐다 보더니 몇개의 큰 가마솥을 주문했다. 즉시 반공(反共)인사를 붙잡아 와서는 간단히 심문하는 동시에 솥에 물을 붓고 끊인 다음 심판이 끝나자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옷을 벗겨 끓는 솥에 밀어 넣었다. 산채로 끓는 물에 삶아 죽인 것이다. ……핑산(平山)에서 나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산채로 피부가 벗겨져 죽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공산당은 아들을 핍박하여 직접 두 눈으로 이 참상을 보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부친이 고통스런 신음 속에서 죽는 장면, 중공이 그 부친의 몸에 식초와 산(酸) 류의 물질을 발라 인피(人皮)가 재빨리 벗겨지게 한 장면, 처음에 등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두팔 및 전신의 피부가 벗겨졌다. 전신의 껍질을 벗기자 머리가죽만 남았고 그의 부친은 전신의 피부가 벗겨진 후 몇분 만에 사망하였다,”
(2)‘홍(紅) 8월’ 홍색(紅色) 공포와 광시(廣西)에서 사람을 잡아먹은 사건
중공은 강산을 차지한 후에도 추호도 폭행을 멈추지 않았고 문화대혁명 때 이 폭행은 진일보로 발전하고 확대되었다.
1966년 8월 18일,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에서 ‘홍위병’ 대표를 접견하였다. 쑹런춍(宋任窮)의 딸인 쑹빈빈(宋彬彬)이 마오에게 ‘홍위병’ 완장을 달아주었다. 마오는 쑹의 이름이 문채날 빈(彬)임을 알고 나서 “무(武)가 필요하다”고 하였고 쑹(宋)은 이때부터 이름을 쑹야오우(宋要武)로 개명하였다.
바람에 불이 거세지듯이 ‘무장 투쟁’은 곧장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중공이 무신론(無神論)으로 교육한 젊은 세대들은 그 어떤 고려와 두려움도 없이 공산당의 직접적인 영도하에 마오쩌둥의 지시를 준칙으로 삼았다. 그 미친 정도, 우매함 및 무법천지는 중국 전역에서 사람을 때리고 집을 수색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많은 지방에서 ‘검은 5부류 즉, 지주, 부자, 반동, 악인, 우파’를 뿌리 뽑는 멸절 정책을 실행하였다. 다싱현(大興縣)은 그 중에서도 특별하였다.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현내 13개의 공사(公社)와 48개 대대에서 전후로 325명을 살해했는데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80세였고 가장 어린 사람은 태어난 지 겨우 38일 된 갓난아기였다. 또한 22가구는 가족 전원이 몽땅 죽임을 당했다.
“사람을 산채로 때려 죽이는 것은 가는 곳마다 볼 수 있어서 이상한 일로 치지도 않는다. 사탄가(沙灘街)에서 한 무리의 남자 ‘홍위병’들이 쇠사슬과 혁대로 한 할머니를 때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한 여자 ‘홍위병’이 할머니의 배를 짓밟았는데 할머니가 숨을 거둘 때까지 고통을 가하는 것이었다. ….. 이번 활동 중에서 베이징의 충원먼(崇文門) 부근 한 지주집 할머니(혼자 사는 외로운 과부)를 수색할 때 부근에 사는 주민들을 강제로 핍박하여 집집마다 끊인 물을 보온병 에 담아와서는 이 할머니의 목에서부터 부어 살이 익을 때까지 잔인한 형벌을 가하게 했다. 며칠 후 집안에 있는 시신에서는 구더기가 많이 기어 다녔다.……당시 살인방식은 천태만상이었다.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 작두로 작두질하기, 노끈으로 졸라매기 등이 있었다. 어린이에 대해선 더욱 잔인하여 한쪽 다리를 발로 밟고! 다른 다리를 잡아당겨 강제로 아이를 두동강 냈다.” [우뤄원(遇羅文)의 『다싱 학살 조사』]
다싱 학살보다 더 야만적인 것은 광시(廣西)에서 사람을 잡아 먹은 사건이 있다. 정이(鄭義)는 이 과정을 3단계로 분류하였다.
1. 시작 단계:특징은 몰래 숨어서 공포적인 음침한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모 현(縣)의 사건 기록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다. “심야에 살인 흉악범들이 살인 현장에 도착하여 죽은 사람의 배를 가르고 심장과 간(肝)을 꺼낸다. 당황하고 혼란한 데다 경험도 없어서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꺼내놓고 보니 폐(肺)였다. 할 수 없이 또 다시 벌벌 떨면서 갔다.……다 익자 어떤 사람은 술을 가져오고 어떤 사람은 소금 등을 가져와 희미한 등불 밑에서 먹기 시작하였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
2. 고조(高潮) 단계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면서 대대적으로 행한다. 이 기간에는 심장과 간을 도려내는데 상당한 경험이 쌓였고 또 인육(人肉)을 먹은 경험이 있는 노(老) 유격대원의 전수로 기술이 아주 숙련되었다. 예를 들면 산채로 배를 가르는데 갈비뼈 연골 부위에 칼로 人 자 모양으로 가른 다음 발로 배를 밟으면서(살해당한 사람이 나무에 묶여 있으면 무릎으로 배를 누른다) 심장과 간을 동시에 꺼낸다. 두목이 심장과 간, 생식기를 가져 가면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대로 가져 간다. 붉은 기는 휘날리고 구호를 높이 외치는데 장면이 성대하고 웅장하다……
3. 대중적으로 미친 단계:그 특징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사람을 잡아 먹는 대중 운동이다. 예를 들면 우쉬안(武宣)에 큰 돌림병이 발생했을 때 시체를 먹어 눈이 빨개진 개떼처럼 사람들은 끝내 미친 듯이 인육을 먹었다. 한 차례 한 무리 사람들을 끌어내 ‘비판 투쟁’한 후 매 비판마다 죽인 사람을 먹었다. 사람이 쓰러지면 숨이 붙어있는지 개의치 않고 사람들이 한 무리 씩 덤벼들어 사전에 준비한 칼과 비수로 닥치는 대로 살을 벤다.……이렇게 일반 군중들마저 인육(人肉) 먹는 운동에 휘말려 들어갔다. 이전에 남아있던 죄책감이나 인간성은 이미 ‘계급투쟁이라는 12급 태풍’에 깨끗이 사라졌다. 사람을 잡아 먹는 큰 돌림병이 우쉬안 대지에 몰아쳤다. 고? 떡藪〈?조금의 과장도 없이 ‘인육 파티’까지 있었다. 사람 고기, 사람 심장과 간, 사람 허리, 사람 팔목, 사람 발, 사람 발의 인대……볶고, 삶고 , 불에 굽고 ,기름에 지져 아주 성대한 파티를 열어 술을 마시면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인육을 먹는 극성기에는 심지어 최고 권력 기구인 우쉬안(武宣)현 혁명위원회 식당에서도 사람고기를 삶아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먹는 파티는 절대로 민간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독재권력 조직인 중공이 사회를 통제하여 사회의 매 세포에까지 스며들어 중공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부추기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중공이 늘 자신에게 노래하는 것이 “낡은 사회는 사람을 귀신으로 만들지만 새로운 사회는 귀신도 사람으로 만든다.”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성대한 사람고기 파티는 중공이 사람을 승냥이나 마귀로 변하게 할 수 있음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공산당 자체가 승냥이나 마귀보다 더 흉악하고 잔혹하기 때문이다.
(3)파룬궁 박해
중국인들이 전자(電子) 시대 및 우주 비행선 시대로 들어 서면서, 사사로이 인권문제와 자유민주를 담론할 수 있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전에 머리칼이 곤두서고 역겨운 그런 극도의 폭행은 이미 과거의 일이며 중공도 문명의 외투를 걸치고 세계와 접촉한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한 단체가 그것들의 혹형과 공포에도 겁을 먹지 않자 공산당은 더욱 미친듯한 수단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박해받은 단체가 바로 파룬궁(法輪功)이다.
만약 홍위병의 무장 투쟁과 광시의 사람 잡아먹기가 상대방의 육체를 소멸하는 것이 목적이라 몇분 내지 몇시간 만에 한 생명을 끝내는 것이라면 이에 반해, 파룬궁 수련자를 박해하는 목적은 수련생들에게 ‘진선인(真善忍)’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잔인한 혹형의 정도는 며칠, 몇달, 심지어 몇 년 씩 계속되는 것이다. 만명이 넘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이로 인하여 생명을 잃었다.
죽음의 고비를 구사일생으로 넘기고 살아 남은 파룬궁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몸에 가해진 백가지가 넘는 혹형 사실을 기록하였다. 여기서는 간단히 몇가지만 예로 든다.
악독한 구타는 파룬궁 수련생을 학대할 때 가장 상습적으로 쓰는 혹형이다. 경찰과 감방 두목이 직접 때리거나 다른 잡범들을 시켜 때리게 한다. 어떤 수련생은 구타로 귀가 먹었고 귀가 떨어져 나갔으며 눈알이 튀어 나오고 이빨이 부러졌다. 두개골, 척추, 가슴뼈, 허리관절, 손발이나 팔다리의 뼈가 구타로 골절하는 것은 보편적이다. 이외에도 남자 수련생의 생식기를 꽉 움켜 쥐거나 여자 수련생의 음부를 발로 차기도 한다. 수련생들이 그래도 굴복하지 않으면 연달아 혹형을 가하는데 가죽이 찢어지고 살이 터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데 나중에는 얼굴이 변형되어 피투성이가 된다. 그런 후 소금물을 몸에 뿌리고, 고압전기봉으로 온몸을 지져 피비린내와 고기타는 냄새가 동시에 코를 찌르고 신음소리는 심장이 터지고 폐가 갈라지는 듯하다. 폭행하는 동시에 비닐 주머니를 머리에 씌워 숨을 ! 쉬지 못하게 하면서 수련자들에게 질식의 공포 중에서 굴복할 것을 강요한다.
전기 고문도 중국 노교소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사용하는 보편적인 혹형의 한 가지이다. 경찰은 전기충격기로 수련생들의 민감한 부위를 지진다. 즉, 입안, 정수리, 앞가슴, 음부, 여자 수련생들의 유방과 남자 수련생들의 생식기, 엉덩이, 넓적다리, 발바닥 등인데 어떤자들은 온몸을 전기로 지진다. 여러개의 전기충격기를 동시에 지져 피부가 타고 살이 익을 때까지 한다. 이때문에 살이 타는 냄새를 도처에서 맡을 수 있고 상처는 시꺼멓게 된다. 어떤 때는 동시에 머리와 항문에 전기를 통과시킨다. 경찰은 동시에 10개의 전기충격기 혹은 더 증가해서 오랜 시간을 폭행한다. 일반적으로 전기충격기는 몇만 볼트에 달한다. 연속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때는 파란 불이 튀고 귀를 자극하는 “파파”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전기로 몸에 혹형을 가할 때는 불에 탄 것과 같고 뱀에 물리는 느낌이다. 매번 전기로 지질 때는 뱀에게 물린 것처럼 아프다. 전기에 지진 피부는 붉게 변하고 파손되거나 타서 고름이 흘러 내린다. 머리를 지질 때는 망치로 머리를 치는 느낌이다.
담배불로 손이나 얼굴, 발바닥, 가슴, 등, 젖꼭지 등을 지지거나 라이터로 손을 태우거나 음모(陰毛)를 태우고 쇠를 전기난로에 벌겋게 달군 후 두 다리 위에 놓고 지져댄다. 벌겋게 단 석탄 덩이로 수련생의 얼굴을 지지고 혹형받아 생명이 위험하지만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수련생을 산채로 태워 죽이고는 외부에는 ‘분신자살’했다고 한다.
전문적으로 여자 수련생의 앞가슴과 유방, 하반신을 악독하게 때리거나 강간, 윤간하며 전기충격기로 유방과 음부를 지진다. 라이터로 유방을 태우고 전기충격기를 질에 집어넣거나 4개의 치솔을 한데 묶어 여자 수련생의 질에 넣고 손으로 돌리기도 한다. 불로 음부를 태우고 여자 수련생의 두 손을 뒤로 묶고 전기줄을 젖꼭지에 연결하여 전기를 통과시킨다. 여자 수련생들을 발가벗겨 남자 감방에 집어넣고 남자 죄수들이 마음대로 모욕하게 한다.
‘공포의 약속의(約束衣)’라는 옷을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입히고 수련생의 팔를 뒤로 힘껏당겨 교차하여 묶은 다음 두 팔을 어깨넘어 앞가슴까지 끌어온 후 또 두다리를 묶어 쇠창살 문에 달아 맨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아 파룬궁을 모욕하는 녹음을 듣게 하고, 입은 천으로 막는다. 이 형벌을 받으면 두팔은 즉각 불구가 되고 우선 어깨, 팔꿈치, 관절부위의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진다. 형벌을 오래 받은 사람은 척추가 모두 부러져 산채로 고통스럽게 죽는다. 허난성(河南省) 스바리허(18里河) 여자노교소에서 4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이 옷을 입혀 잔혹하게 살인하였다.
또 다른 혹형으로 파룬궁 수련생들을 더러운 물이나 똥물에 담가 놓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물감옥’이라고 한다. 다른 고문으로는, 예를 들자면 손톱밑을 대나무 꼬챙이로 찌르기, 천정, 바닥과 벽에 온통 적색, 녹색, 황색, 백색의 곰팡이가 피는 감방에 가두고 사나운 개나 독사 및 모기로 물게 하기.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약물을 주사하기 등이 있다. 이외에도 천백가지 다양하고 기괴한 방법으로 수련생들을 괴롭히고 있다.
3. 잔혹한 당내 투쟁
공산당은 당성(黨性)에 의거하고 도의(道義)적으로 결합한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최고 지도자에 대한 당원 및 당 고급간부들의 충성심이 어떠한가가 문제로 된다. 그러므로 당내에서도 살인을 할 필요성이 생겼으며 또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최고 독재자가 누구를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는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내부 투쟁은 아주 유명하다. 러시아 공산당의 경우 이전 두 차례 당 정치국 위원을 지낸 사람들은 레닌이 병으로 죽은 후, 스탈린을 제외하고 모두 사형되거나 자살했다. 또 당시 5명의 군(軍) 원수(元帥) 중에서 3명이 총살되었으며, 5명의 최고 군사령관 중 3명이 총살 당했고, 2급 군사령관 10명은 전원이 총살 당했다. 85명의 군단장 중 57명이 총살 당했고 195명의 사단장 중에서 110명이 총살 당했다.
중국 공산당도 일관적으로 ‘참혹한 투쟁, 무정(無情)한 타격’을 주장하였다. 이런 투쟁과 살인은 당외(黨外)를 겨냥했을 뿐만아니라, 일찍이 장시(江西)에 있을 때, 중공은 AB단(團)을 죽인다고 하여 마지막에는 전투를 할만한 사람이 몇 남지 않았다. 옌안(延安) 시기 정풍(整風)활동, 정권을 잡은 후 가오강(高崗), 라오수스(饒漱石), 후펑(胡風), 펑더화이(彭德懷)를 숙청하고, 줄곧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공산당 내부의 원로 당원들은 거의 남은 사람이 없었다. 중공 역대 총서기들의 뒤끝도 모두 좋지 않았다.
류샤오치(柳少奇) 전(前) 국가주석은 일찍이 마오쩌둥에 이어 중국의 제2인자로 군림했으나 아주 비참한 상황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다. 그의 70세 생일 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来)는 특별히 왕둥싱(汪东興)을 시켜 류샤오치에게 생일 선물──라디오를 주었다. 목적은 그에게 공산당 제8기 12중 전회(全會)의 다음과 같은 공식보고[公報]를 듣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역자, 내부 간첩, 노동자의 적 류샤오치를 영원히 출당시키고 계속해서 류샤오치와 그 동료들의 반당(反黨), 반국가(反國家) 죄행을 청산하자!”
류샤오치는 당시 단번에 정신적으로 무너졌다. 그날부터 그의 병은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장기간 침대에 고정적으로 묶여 있어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그의 목부위, 등부위, 엉덩이, 발뒤꿈치에는 모두 고름이 흐르는 욕창(蓐瘡)이 생겨 동통을 참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가 너무 아파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면 놓지 않았으므로, 그를 지키는 사람들이 그의 손에 단단한 플라스틱 병을 쥐여 주었다. 그가 죽을 때 그의 양손에 쥔 두 개의 비닐 병은 마치 호로박처럼 가운데가 움푹 패여 있었다고 한다.
1969년 10월 류샤오치의 온몸은 썩어서 고약한 냄새가 품겼고 장작처럼 말라 약간의 숨만 붙어 있었다. 당에서 특파한 인원이 목욕도 못하게 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으며 옷도 갈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도리어 그를 홀딱 벗겨서 이불 채 둘둘말아 비행기에 태워 베이징에서 카이펑까지 싣고 가서는 견고한 토치카 형태의 지하실에 가두어 놓았다. 그가 고열로 괴로워할 때는 약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사들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죽을 때 류샤오치는 이미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헝클어진 백발머리는 두 자나 자라있었다. 이튿날 밤 열성 전염병 환자라고 화장하면서 그의 이불, 옷들을 몽땅 불에 태워버렸다. 류의 사망기록카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성명 : 류웨이황(柳韋黄), 직업:무직, 사인:병사(病死)
공산당은 이렇게 당당한 국가 주석도 박해로 죽일 수 있으며 그것도 암암리에 몰래 죽인 것이다.
4. 혁명 수출과 해외 살인
중공은 국내와 당내 살인을 함부로 신바람 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한 것 외에도 혁명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해외 화인(華人)을 살해하는데 참여하였다. 크메르루즈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는 캄보디아에서 4년간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975년에서 1978년 까지 인구 800만도 되지 않는 조그만한 국가에서 200만의 사람들을 살해했는데 그중에는 화인 20만명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시 크메르루즈의 죄행을 낱낱이 말하기에 앞서 그것과 중공과의 관계부터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폴 포트(Pol Pot 1925~1998)는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숭배자였다. 1965년부터 시작해서 4차례나 중국에 와서 직접 마오쩌둥의 교시를 들었다. 1965년 11월, 폴 포트가 3개월간 중국을 방문할 때 천보다(陳伯達)와 장춘챠오(張春橋) 등이 그에게 “정권은 총끝에서 나온다”는 것을 논술했으며, 계급투쟁, 무산계급독재 등의 이론과 경험을 소개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나중에 정권을 탈취하고 정권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린 바탕이 되었다. 캄보디아로 돌아간 후 그는 원래의 당을 캄보디아 공산당이라고 개명하고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방식으로 혁명근거지를 건립하였다.
1968년 캄보디아 공산당은 정식으로 군대를 만들었다. 1969년 말에는 3천명 밖에 안 되었으나 1975년 진볜(金邊)을 공격할 때는 이미 “우수한 장비와 용감한 작전을 펼치는” 8만의 무장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완전히 중공의 지지에 의한 것이었다. 왕셴건(王賢根)의 『월남지원과 반미항전 실록』 기록에 의하면 1970년 중국은 폴 포트의 3만 부대에게 무기장비를 지원해 주었다. 1975년 4월 폴 포트는 캄보디아 수도를 공략했으며, 두달 후에는 베이징에 와서 중공을 만나 지시를 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크메르루주의 살인은 중공의 이론과 물질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전혀 발생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예만 들겠다. 시아누크 국왕의 두 아들이 캄보디아 공산당에게 살해당한 후 저우언라이(역주: 중국의 총리)의 한 마디 말에 캄보디아 공산당은 시아누크를 순순히 베이징으로 보냈다. 캄보디아 공산당이 살인할 때는 뱃속의 태아조차 풀을 베고 뿌리를 뽑는 방식으로 죽여 버린다. 앞으로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우언라이의 요구에 대해서는 두말없이 집행한 것이다.
저우언라이(周恩来)의 한 마디가 시아누크를 구하긴 했으나, 캄보디아 공산당이 20만 화인을 도살할 때 중공은 한 마디 항의도 없었고 화인들이 중국 대사관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어도 대사관은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1998년 5월 인도네시아에서 대규모로 화인(華人)을 살해하고 강간했어도 중공은 아무 말도 없었고 구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국내에서는 온갖 방법으로 소식을 봉쇄하였다. 마치 해외 화인들의 생사는 중국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인도적인 원조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5. 가정의 훼멸
중공이 역대 운동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우리는 정확한 통계숫자를 낼 방법이 없다. 민간에서는 자료의 결핍, 지리, 민족, 언어의 차이 때문에 근본적으로 통계를 낼 방법이 없다. 중공 또한 이런 식의 자기 무덤을 파는 통계는 더욱이 진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공은 영원히 자신의 역사에 대해 ‘대강만 알고 세밀하게 조사하지 않는’ 방법을 쓰고 있다.
중공이 해친 가정의 숫자는 더욱 알기 힘들다. 어떤 경우는 한 사람이 죽음으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었다. 어떤 집은 한명 한명씩 전부 다 죽임을 당했다. 설사 죽은 사람이 없더라도 강제로 이혼시키고 부모 자식 간에도 협박에 의해 선을 가르거나, 사람을 불구로 만들거나 미치게 하고, 사람을 괴롭혀 중병을 얻게 하여 요절한 경우 등등이 있다. 이런 것들도 역시 고통스런 가정의 비극이지만 이와 관련된 통계는 더욱 적다.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중국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중공의 박해를 받았다고 하니 중공이 훼멸시킨 가정은 적어도 일억이 넘을 것이다.
장즈신(張志新) 여사의 보고 문학은 그녀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혹형과 윤간, 정신적 시달림을 받았으며 최후에는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칼로 기도를 절단당한 다음 총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이 한차례 비극의 배후에는 더욱 잔인한 이야기가 있다.──『사형수 가족의 학습반』
장즈신의 딸 린린(林林)의 기억에 의하면, 1975년 초봄 어느 하루 선양(瀋陽)법원에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선양법원의 사람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당신의 모친은 매우 반동적이고 개조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위대한 지도자 마오(毛)주석을 완고하게 반대하며, 백전백승의 마오쩌둥 사상을 반대하고, 마오주석의 무산계급혁명노선을 반대하여, 수많은 죄를 지었다. 정부에서는 형벌를 가할 생각인데 만약 극형으로 처리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놀라서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고 가슴이 단번에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억지로 진정하면서 눈물을 참았다. 아버지는 전에 ‘남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어머니와 경계선을 잘 가르지 못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가 나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만약 확실히 그런 정황이라면 정부가 어떻게 처리해도! 상관없습니다.’ 법원 사람이 또 묻기를 ‘극형으로 처리하면 시체를 가져갈 것인가? 장즈신의 옥중 물건들은 당신들이 가져가겠는가?’ 내가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자 아버지가 대신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현(縣) 초대소에서 나오자마자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하여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간신히 집으로 왔다. 밥도 하지 않고 아버지는 집에 남은 옥수수 떡 하나를 두 조각 내서 나와 동생에게 주시면서 ‘먹고 빨리 자거나’라고 하셨다. 내가 조용히 바닥에 누워있자 아버지는 혼자 작은 의자에 앉아 등불만 뚫어지게 바라보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우리들이 잠이 들었다고 여기시곤 천천히 일어서더니 가볍게 선양에서 가져온 상자를 열었다. 어머니의 사진을 보고 또 보셨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단번에 아버지의 품에 안겨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나를 다독거리시면서 ‘이러지 말거라. 옆집에서 들으면 안 된다.’ 울음소리에 동생도 깨어나자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품에 힘껏 끌어 안으셨다. 이날 저녁 우리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며 또 감히 크게 울지도 못했다.”
모(某) 대학의 한 교수는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우파(右派)를 바로 잡을 때 그의 집은 한차례 재난을 만났다. 그의 처는 원래 반(反)우파 시기에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우파로 몰리면서 먼 변강지대로 추방당해 고생을 수없이 하였다. 젊은 처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이 교수에게 시집을 왔던 것이다. 원래 연인이 고생끝에 집으로 돌아오자 이미 몇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자신의 무정(無情)함과 애인에 대한 배반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해 지금의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 양심의 죄값을 치르려고 하였다. 이런 갑작스런 변동에 50여 세가 된 대학 교수는 감당하지 못하여 정신이 이상해져서 발가벗고 온 들판을 헤매면서 새로 몸을 안신할 자리를 찾았다. 결국 아내는 그와 아이들을 떠나 버렸다. 공산당이 만든 고통과 이별은 해결할 수 없는 방정식이며, 그 한쪽의 찢어짐이 다른 쪽의 찢어짐을 대신하지 못하는데 사회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 증상이다.
가정은 중국 사회구성의 기본적 요소이며 또한 전통문화는 당(黨)문화에 대한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파괴는 중공의 살인역사에서도 더욱 잔혹한 악행이다.
중공이 사회 자원(資源)을 모조리 차지하여, 한 사람이 독재의 공격대상이 될 때면 즉시 생활상의 위기, 사회적인 질책 및 존엄성이 박탈당한다. 이런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억울한 것이다. 가정은 그들이 위안을 찾을 유일한 곳이다. 그러나 중공의 연좌제는 가족 구성원조차 서로 위로하지 못하게 한다. 가족도 독재의 공격대상堅?때문이다. 장즈신은 곧 이렇게 이혼했던 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면 가족의 배반, 고발, 반대, 적발과 비판은 정신을 붕괴시킨 최후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마지막 길을 걸었다.
6. 살인 방식과 결과
(1) 공산당의 살인이론 지도
공산당은 종종 자신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천재적이며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창조적으로 고금(古今)과 중외(中外)의 일체 사악을 발전시킨 것이다. 공산당은 공산주의의 대동(大同)사상으로 민중과 지식인들을 기만하였고, 공업혁명으로 신앙을 훼멸시키고 철저한 무신론을 주입시켰다. 공산주의로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였고 레닌의 폭력혁명 이론과 실천으로 국가를 통치하였다. 동시에 중국문화 중 전통을 이탈한 가장 사악한 부분을 더욱 진일보로 악화시켰다.
중공은 자신이 발명한 한 세트의 무산계급독재 하에서의 ‘혁명’ 및 ‘계속혁명’ 이론과 방식으로 세계를 개조해 공산당 일당 독재를 하고자 한다. 그 이론은 무산계급독재 하에서의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경제적인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상부구조는 토대에 반작용을 한다. 상부구조, 특히 당의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경제적인 토대로부터 혁명을 진행해야한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1. 지주를 살해하여 농촌의 생산관계 해결.
2. 자본가를 살해하여 도시의 생산관계 해결.
상부구조에서도 반복적인 살인을 진행해야 하는데, 목적은 의식형태에서 절대적인 통치를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1. 당에 대한 지식인의 정치태도문제 해결
중공은 장기간 반복적으로 몇 차례 ‘지식인 사상개조 운동’을 발동하였다. 자본가계급의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가계급의 사상과 초(超) 정치적인 관념, 초(超) 계급사상, 자유주의 등을 비판한다. 세뇌하고 속마음을 비판하여 지식인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한다. 일부 지식인 중의 자유사상과 좋은 품격, 의리를 지키고 바른 말을 하며 몸을 바쳐 의리를 지키는 것, “가난해도 동요하지 않으며,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부귀에도 현혹되지 않는다”,“천하의 근심은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거워한다.”,“천하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군자가 벼슬을 하면 천하를 선(善)하게 대하고, 등용되지 못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노라”와 같은 이런 전통을 중공은 모두 없앤 것이다.
2. 문화와 정치상으로 절대권력을 위해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고 살인
처음에는 당내에서 당외로 군중을 동원하여 문학, 예술, 희극, 역사, 교육 등 영역에서 살인하였다. 먼저 전국에서 몇명을 살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는데, 예를 들면 ‘삼가촌(三家村)’, 류샤오치, 우한(吳晗), 라오서(老舍), 젠보짠(翦伯贊) 등에서 발전하여, ‘당내의 한 무리’, ‘군대 내의 한무리’를 숙청하였고 더 발전하면 전당(全黨) 전군(全軍) 전국 인민이 서로 살해하게 하며 무장투쟁으로 육체를 소멸시켰고 문화투쟁으로 영혼을 소멸시켰다. 그때는 당이 통제한 혼란과 극도의 폭행시기였다. 인성(人性) 중에서 악(惡)의 방면이 당의 위기를 구실로 충전되어 최대한도에 도달하였다. 매 개인마다 모두 ‘혁명이란 이름’과 ‘당과 마오 주석의 혁명노선을 보위한다’는 구호 아래 마음대로 살인할 수 있었다. 역사상 종래로 없었던 무산계급이 인간성을 멸절시킨 전민 운동이었다. !
3. 문화대혁명 후 사회의 민주화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6.4 총격 살인
이것은 인민해방군이 처음으로 인민을 살인한 것이다. 인민들의 반 탐오(貪汚), 반 관상(官商)결탁, 반부패, 신문 자유, 언론 자유, 결사 자유의 목소리를 없애기 위하여, 군대의 상호 억제와 군대가 군중을 미워하는 결과를 얻고자 심지어 군용차를 불 태우고 병사들이 살해된 거짓 장면을 연출하여 인민들의 아들인 병사들로 하여금 군중을 학살하게 한 참혹한 사건을 만들었다.
4. 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살인
신앙영역은 중공의 생명줄이다. 중공의 왜곡된 사설(邪說)이 한 시기를 기만하기 위하여 중공은 건국 초기부터 각종 종교 신앙인과 신앙 체제를 소멸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기의 정신신앙인 ──파룬궁 군중들을 향해 중공은 다시 한번 도살용 칼을 높이 쳐들었다. 파룬궁이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고 “독(毒)을 쓰지 않으며”,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지 않음”을 이용하여 파룬궁을 탄압한 경험을 살려 다른 일체 신앙 단체를 소멸시킨다는 책략이었다. 이번에는 장쩌민과 공산당이 직접 살인을 하였다.
5. 소식을 봉쇄하기 위해 살인
중공은 소식을 봉쇄하기 위하여 살인한다. 과거에 ‘몰래 국외 소식’을 들어도 감옥에 가두었다. 현재 각종 텔레비전에 진상을 삽입하는 것에 대해 장쩌민은 “무조건 살인하라”는 밀령을 내렸다. 진상방송을 삽입을 한 류청쥔은 바로 이렇게 혹형에 시달리다 치사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