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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과 시위는 중공의 정권 찬탈 무기였다

—장쩌민·뤄간·류징·저우융캉이 파룬궁 청원을 증오한 역사적 원인 간략 분석

글/ 고망(顧望)

[명혜망] 1만 명 파룬궁 수련자가 동참했던 1999년 ‘4·25 중난하이(中南海) 청원’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유일한 이성적이고 평화로운 청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왜 이렇게 말할까?

먼저 중국공산당(중공)이 국민당과 벌어진 내전에서 어떻게 ‘청원’과 ‘시위’를 이용해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베이징을 손에 넣었는지 살펴보자.

1945년 항일전쟁 승리 후,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 함께 중국을 통치할 준비를 마쳤다. 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자유민주주의 중국이 탄생했을 것이지만 중공은 곧바로 내전을 일으켰다. 내전이 가장 치열할 때 공산당은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대학생들을 선동해 과격한 청원과 시위를 벌이게 해 국민당의 힘을 분산시켰다.

상하이교통대학 홈페이지 소개를 보면, 1947년 5월 13일, 대학내 중공 총지부의 지휘 하에 학생 약 3천명이 직접 기차를 운행하여 난징(南京)에 가서 국민당 정부에 청원하고 항의했다. 그들은 국민당 정부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여러 대학을 합병하는 데 반대한다는 명분을 댔는데, 직접 철도 차량을 모으고, 제거된 철로를 다시 연결한 후 기차를 운행해 난징에 갔다. 생각해보라, 전시 상황에서 국가의 중요한 전략물자를 이처럼 멋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가?

비슷한 시기인 1947년 5월 22일, 중공 지하당은 우한(武漢)에서 ‘반(反)기아, 반내전, 반박해’ 대학생 시위를 발동했다. 당시 학생들은 후베이성 국민당 정부 청사로 쳐들어가 사무실 집기와 장제스(蔣介石) 초상화를 부수고, 재정청과 교육청 현판에 ‘괄민청(刮民廳, 백성을 갈취하는 곳)’, ‘우민청(愚民廳, 백성을 우매하게 만드는 곳)’이라고 낙서했으며, 벽마다 풍자만화와 구호를 가득 붙여 놨다.

중공의 선동으로 시위대가 극단적 행동을 일삼으면서 결국 격분한 국민당 군경이 총격을 가해 학생 3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중공 지하당은 즉시 ‘6·1학살의 진상’이라는 전단을 전국에 뿌려, 국민당 정부를 여론 공격에 휩싸이게 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라디오방송도 이 사건을 전 세계에 방송했다. 이후 전국 각 대학교의 조문과 성원이 이어지고, 비판 여론이 들끓으면서 국민당 정부는 큰 압박을 받았다.

1년 후인 1948년 7월 5일, 중공 지하당은 베이징에서도 ‘반기아, 반내전, 반박해’ 대학생 시위를 발동했다. 당시 대학생 6천여 명은 창안(長安)거리에 있는 정부청사로 돌진했는데, 대문에서 그들을 가로막는 군경을 흩어놓고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일부는 담장을 뛰어넘거나 담장을 허물고 들어갔으며, 담장 벽돌과 각목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청사 정원에 있던 헌병과 경찰들은 머리 위로 공포탄을 쏘면서 학생들을 간신히 대문 밖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이날도 결국 1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중공은 또 다시 여론 공세에 나섰다. 당시 동북 지역의 22개 대학과 톈진, 탕산 등 화북 지역의 13개 대학은 국민당 정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옌징대와 칭화대는 교내에서 참사 규탄 대회를 개최했다. 7월 9일, 동북 지역의 16개 대학과 베이징 9개 대학 재학생 1만여 명은 베이징대학에 모여 ‘민중 진압 반대, 학살 반대’ 청원 대회를 개최했다. 이 청원은 동북과 화북 지역의 파업으로 확대되어 국민당 정부는 갈수록 궁지에 내몰렸다.

이 같은 역사를 보면, 중공은 학생 시위, 불법 점거, 군경에 대한 폭력, 유혈사태 유발, 여론 공세 등 수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정권을 찬탈하기까지 중공은 도덕과 문화를 무시하고 틈만 나면 악랄한 짓을 했다. 당시 수차례 벌어진 학생들의 폭력 시위에서 국민당 군경의 진압으로 발생한 사상자 수는 100명을 넘지 않았지만, 1989년 6·4천안문 학생 시위(천안문 사태)에서는 중공이 탱크를 동원해 진압하면서 약 2,600명이 사망하고 3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는 베이징 적십자사가 발표한 수치일 뿐, 영국과 미국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실제 사망자는 1만 명 이상에 이른다. 이는 평화적 시위대를 무차별 학살한 최악의 사건으로 남았다.

따라서 우리는 중공이 베이징 점령을 위해 청년 학생들을 반복적으로 이용하고 희생시켰으며, 폭력적인 청원과 시위는 정권 찬탈의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쩌민이 1999년 파룬궁 수련자들의 4.25평화적 청원을 모함하여 권력 강화의 기회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쩌민은 6·4 천안문 학생 시위 진압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국가주석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보면, 파룬궁의 ‘진선인(眞·善·忍)’ 원칙은 중공의 이념과 맞지 않았으며, 특히 파룬궁 창시자에 대한 장쩌민의 질투는 하늘을 찔렀다. 장쩌민이 4·25 중난하이 청원을 그처럼 증오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파룬궁수련자들의 4.25청원은 중국에서 ‘6·4 참사’의 여파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중공 또한 체제 안정에 큰 공을 들이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당시 파룬궁수련자들은 베이징으로 출발하기 전, 주변에서 많은 충고를 들었다. 이번에는 중공이 관대하지 않을 것이니 가지 않는 게 좋겠다는 충고였다. 그러나 선량한 파룬궁수련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기공 수련으로 심신이 개선되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수련자들은 정치적 요구도 없고, 다른 그 무엇을 원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정상적인 연공 환경과 진선인을 따를 권리를 되찾기를 원할 뿐인데,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 베이징 수련자에 따르면, 당시 중난하이 주변의 각 대형 병원들은 부상자를 받을 준비를 마쳤다. 중공의 흑수(黑手)인 장쩌민, 뤄간(羅幹), 류징(劉京), 저우융캉(周永康)이 6·4 때와 같은 유혈 진압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제 1만 명에 이르는 파룬궁수련자가 중난하이에서 청원할 때, 실탄을 장착한 군경들이 주변에 배치돼 있었다. 이들은 스파이들이 갈등을 유발해 군경을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파룬궁수련자들은 길가에서 베이징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고 정부와의 소통 결과를 조용히 기다렸다.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고상한 경지 앞에서 중공은 어떤 틈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이 1999년 4·25 청원이 중국 근현대사에서 유일한 이성적이고 평화로운 대규모 청원(실제 참가인원은 3만 명 이상)으로 평가받는 이유이며, 자비와 선량함의 기념비를 세운 사건으로 불리는 이유다.

중공 치하의 중국에서 4·25 평화적 청원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파룬궁수련자들의 소박하고 진실된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무리조차도 방아쇠를 당길 수 없게 했다. 우리는 이 특별한 날을 기억해야 한다. 1989년 6·4 학살로 대규모 학생이 희생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4·25 청원 사건 왜곡으로 피해를 입은 파룬궁수련자 수는 그 보다 훨씬 더 많다. 이 같은 진실이 밝혀진다면 전 세계가 놀라고 비통함을 느낄 것이다!

 

원문발표: 2025년 4월 9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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