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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을 통해 본 중공과 중국

글/ 효어(曉語), 일언(一言)

[명혜망] 중공(중국공산당)의 이른바 초한전(超限戰, 무제한 전쟁)은 솔직히 말해서 인류가 인식하는 모든 한계선을 무시하고 비인도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것의 사악한 본성이 결정한 것이다. 사실 중공이 중국에서 자행한 역대 전민(全民) 운동은 모두가 중국인에 대한 ‘초한전’의 단편이자 오늘날 국제 초한전의 축적물인데, 단지 그때는 ‘초한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대대적인 유언비어 유포와 모함 및 잔혹한 탄압, 이른바 ‘천안문 광장 분신 조작 사건’으로 파룬궁을 모함한 것, 폭리를 취하기 위해 파룬궁수련자의 장기를 적출한 것 등이 모두 ‘초한전’의 전형적인 사례다.

무신론의 최대 선동자이자 수혜자인 중공은 다윈의 진화론인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을 강조하며 중국인을 세뇌해왔다. 따라서 중공에 길들여진 중국인들은 자유세계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믿기 어려운 조건반사적 언행을 많이 한다. 무신론적인 중공이 인간을 짐승과 동일시할 때 그들은 사람에게 인도주의나 선(善)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짐승처럼 길들여진 사람들도 인격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인격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다윈의 진화론을 강력히 옹호한 영국 생물학자)는 자신을 다윈의 ‘불독’이라 했고, 장칭(江靑,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이자 문화혁명의 주요 지도자)은 자신을 ‘마오쩌둥 주석의 개’라고 했다. 이런 종류의 개는 쓸모가 있다고 여겨질 때는 일정한 ‘신분’은 있지만 인격은 없다. 하물며 버려지고 쓸모없다고 여겨질 때는 어떻겠는가? 한 사람이 약육강식만을 아는 동물에게 인격과 인간의 상식, 이념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오판일 뿐이다.

당시 중공의 마수가 노린 것은 동물의 세계가 아니라, 본래 도덕과 양심, 선량한 본성으로 가득했던 중화민족이었고, 본래 5천 년의 문명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중시하는 예의의 나라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의 마음속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후예이자 수입품이며, 독재와 폭력, 유혈이 뼛속까지 가득 찬 중공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본성이 사악한’ 이익 집단인 중공이 중국에서 살아남고 세력을 키우려면 국민의 양심을 없애고 선량함을 파괴하며 5천 년의 문명 전통을 전복시켜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폭력과 거짓말이라는 사악한 수단에 의존해야만 했다.

동시에 중공은 기반을 다지고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가면과 허황된 약속을 교묘하게 사용했으며, 선량한 사람들의 감정과 선량함을 인질로 삼아 이용했다! 이는 또한 필요할 때 중공의 사악함을 매우 은밀하고 유혹적으로 만들었다.

거짓말과 폭력에 위장까지 더해져 중공의 불량배 수법이 성공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중공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합법화할 수 있게 됐다. 반면 중공에게 이용당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거짓과 사악함을 스스로 방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중공의 ‘폭력혁명’과 역대 전민 운동에서 사용한 수단은 모두 그들이 목적을 달성한 후 사악한 본성이 반복적으로 폭발한 것이며, 오늘날 국제 초한전을 위한 연습과 축적이었다.

‘토지개혁’ 당시 중공은 지주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약탈하고도 불량배 짓을 잘해서 지주들에게 ‘착취자’라는 모자를 씌웠는데, 이로써 중공이 사유재산을 약탈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그러나 중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칼을 빌려 사람을 해치고 민중을 선동하여 수십 년 동안 지주를 투쟁했으며, 그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다. 지주의 자손까지도 모두 화를 당해 ‘흑오류(黑五類)’, ‘개자식’이 됐고, 또다시 뿌리까지 뽑아버렸다! 농촌에서는 향신(鄕紳)을 중심으로 한 문화, 교육, 도덕과 경제 환경이 완전히 사라졌다.

‘반(反)우파 운동’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지식인들은 모두 문화 엘리트들로, 그들은 지식이 있고 교양이 있으며 역사를 이해하고 도덕과 전통을 중시하며 선악을 분별할 줄 알았고, 중화 5천 년 문명 전승의 주자들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중공은 그들을 두려워했기에 ‘뱀을 굴 밖으로 유인하는’ 불량배극을 연출하여 이 지식인들을 모두 속여내 타도하고 소 우리에 가두었으며, 심지어 일부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지난날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하룻밤 사이에 ‘우귀사신(牛鬼蛇神)’으로 몰려 인격을 잃고, 가정을 잃고, 사회적 지위를 잃고, 경제적 기반을 잃었다.

‘반우파’ 운동은 ‘공포’를 수단으로 한 중국 지식인 길들이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지식인들은 전체적으로 문화와 문명을 전승하는 기능을 상실했고,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는 정신에서 사고팔 수 있는 존재가 됐으며, 권력과 색정, 탐욕, 도박, 마약을 영광으로 여기게 됐다. ‘다섯 말의 쌀을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정신에서 ‘지폐는 아무리 많아도 좋고 염치는 아무리 적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도를 추구하던 것에서 수단과 권모술수만을 논하는 데로 전락했다. 한 민족의 지식계층이 완전히 타락하여 기꺼이 중공의 앞잡이가 되어 스승을 배신하고 조상을 말살하며 문화와 문명, 양심을 학살하는 데 가담하고, 심지어 진선인(眞·善·忍) 진리와 신앙을 탄압하는 음모가가 됐을 때, 이 민족과 사회는 쇠락하여 종말에 이르게 되고 문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문화대혁명’ 당시 중공은 홍위병을 이용해 ‘때려 부수고 빼앗고 불태우고 살인하며, 사찰을 부수고 경전을 훼손’했다. 공자를 ‘역사를 후퇴시키는 복고 광신자’라고 비판했다. 아들이 아버지와 싸우고, 부부가 서로 싸우고, 학생이 교사와 싸우고, ‘군중이 군중과 싸우도록’ 선동하여 전국이 온통 투쟁, 투쟁, 투쟁이었다. 이는 중공이 ‘다음 세대’를 파괴하여 중화의 자녀들이 중화문명과의 혈맥상통을 단절하고 잘못하여 자신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자손’으로 여기게 만든 운동이었다. 비유하자면 인간의 아이를 늑대가 납치해 갔는데 자라서 도리어 늑대를 어미로 인정한다면, 슬프고 가련하지 않은가?

샤오펀훙(小粉紅,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빠져 공산당을 추종하는 중국 젊은이들)과 극단주의자들이 도처에 있는 현대 중국을 보면, 중공의 이른바 ‘문혁’과 그 이후 계속된 정치운동은, 정신적으로 중화의 자손들을 강탈해 통제하는 효과를 거뒀다.

1999년에 시작된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역사상 전례 없는 사악함으로, 그 수단은 일방적인 거짓말을 조작하는 것이었고, 더욱 독악한 것은 ‘천안문 광장 분신’이라는 조작극으로 모함하여 파룬궁에 대한 증오를 선동한 것이다. 이런 집단 소멸성 박해는 근 26년간 지속됐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진선인에 대한 이러한 박해로 중국 사회의 전반적인 도덕 수준은 역사상 최저점으로 추락했다. 10여 억의 사람들이 진선인 앞에서 양심을 저버리고 돈과 지위를 얻기 위해 비판하고 저주할 수 있다면, 그들이 감히 저지르지 못할 악행이 또 있겠는가? 이런 상태의 민족이 두렵고 슬프지 않은가?

중공의 파룬궁 박해 수단은 중국인의 인성을 완전히 말살했다. 강제노동, 납치, 불법 판결, 강간, 세뇌반, 각종 고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수많은 사람이 학대로 살해됐다(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명혜망이 확인한 바로는 지금까지 5,000명 이상이 박해로 사망했다). 중공의 당과 정부, 군대, 의료 시스템이 공모하여 살아있는 파룬궁수련자의 장기를 적출하여 ‘이 지구상 전례 없는 악행’(캐나다 변호사의 말)을 저질렀다. 중국 사회의 도덕 수준 또한 중공의 파룬궁 박해가 지속되면서 댐이 무너질 때의 홍수처럼 일사천리로 무너져 내렸다

중공의 파룬궁 박해가 얼마나 사악한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깊이 느끼고 있지만, 모두가 감히 파룬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감히 파룬궁을 정면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감히 파룬궁 박해의 진상을 정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중공의 사악한 위협으로 인한 공포가 초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공의 파룬궁 박해 역시 그 본성이 결정한 것이다. 이는 경제적 수요도, 민생의 수요도 아닌, 중공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인들이 모두 진선인을 말하고 인심이 선으로 향하며 전통으로 회귀한다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자손들(거짓말, 폭력, 유혈)이 설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른바 초한전으로 돌아가 보자. 중공이 지금 국제사회를 향해 히스테리컬하게 초한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이미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필경 중국인의 문명의 불씨는 완전히 꺼질 수 없으며, 파룬궁수련자들이 진선인에 대한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끈기 있게 진상을 알리고 선량함을 일깨우는 것 또한 잔혹한 박해로도 멈출 수 없다. 이에 따라 중공의 위선과 기만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간파되고 있으며, 많은 이의 마음속 양심이 깨어나고 있다. 양심이 깨어난 사람들은 더는 중공과 한패가 되거나 중공에게 이용당하려 하지 않으므로, 중공의 몸체는 점점 더 위축되어 지속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초한전을 벌이며 또다시 ‘최후의 일전’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매번 생존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중공의 ‘최후의 일전’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26년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진상을 알리는 파룬궁수련자들의 노력과, 이미 4억 명에 달하는 탈당 선언자를 배출한 탈당운동, 그리고 미국과 국제사회가 점점 더 중공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과정 속에서, 중공이 아무리 발버둥 치고 사악한 수단을 천변만화하게 쓴다 해도, 정의는 결국 악을 이길 것이며 중공의 종말은 더는 미뤄지지 않을 것인데, 이는 역사와 천리의 필연이다.

중국인은 문명과 전통을 다시 누려야 하며, 중국 사회는 진선인의 구원을 받을 가치가 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7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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