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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쥐: 나는 왜 션윈 자원봉사자가 되어 관광지에서 일하게 됐나

글/ 왕진쥐(王金菊, 캐나다)

[명혜망] (편집자 주: 왕진쥐는 중국의 유명 농구선수 출신으로, 1980년대 중국에서 가장 먼저 부유해진 세대에 속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해 이 수기의 말미에 실었다.)

저는 1996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로, 20여 년간 수련해왔습니다. 제 인생 여정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군인 출신 농구선수에서 코치가 되고, 전업해 지방으로 와서는 가난 속에 살다가 부유해졌다가, 명예와 금전을 추구하다 하반신마비가 됐고, 수련 후 하반신마비가 기적적으로 나았으며, 수련을 견지하다 중국공산당(중공)에 세 차례나 체포됐습니다. 지금은 해외에서 션윈(神韻) 자원봉사자가 됐는데, 그 과정의 이야기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上图:王秋菊在加拿大
캐나다에서의 왕진쥐

1. 왜 자원봉사자가 됐나

저는 중국에서 법을 얻고 2004년에 해외로 왔습니다. 2007년 토론토에서 첫 션윈 공연을 관람했는데, 공연이 끝난 후 너무나 흥분됐습니다! 첫 느낌은 중국인이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중국 문화가 심오하고, 5천 년 문명국이며, 신전문화(神傳文化, 신이 전한 문화)의 고향이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도리로 사람됨을 강조한다고들 했지만, 저는 이런 것들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가 없었습니다.

중화문화가 어떻게 심오한지, 진정한 신전문화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 몰랐습니다. 하지만 션윈을 본 후에는 갑자기 눈이 밝아진 것 같았습니다. 션윈이 5천 년 동안 신이 인도해온 문화를 국제무대에 올린 것입니다. 제가 션윈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얼마나 행운인지 모릅니다! 션윈의 모든 프로그램이 저를 깊이 매료시켰고, 정말 너무나 좋았습니다. 제 마음은 신전문화의 심오함과 자비로움에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그래서 2007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공연장에서 관람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션윈 자원봉사를 하면서 미력하나마 션윈을 홍보하여 더 많은 사람이 션윈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션윈 공연 전후로 포스터를 붙이고, 집집마다 션윈 홍보물을 나눠주며, 중공 특무(스파이)의 방해를 막기 위해 보안요원으로 션윈 차량을 지키고, 때로는 인접국가에 가서 션윈을 홍보하기도 합니다. 션윈 자원봉사자가 될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만약 션윈이 중국에서 공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곳의 수많은 민중이 션윈 공연을 직접 본다면 얼마나 기뻐할까요. 그곳의 대법제자들도 모두 앞다투어 션윈 자원봉사를 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것은 인생에서 더없이 큰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훌륭한 공연을 중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중국인들은 중공의 거짓말에 속아 신에 대한 신앙을 잃었고, 자신들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전통 중국문화의 위대함과 힘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중국인들은 아직 션윈을 통해 신전문화를 이해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국내에서는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고 있으며, 대법제자들이 감옥과 노동수용소에 갇혀 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장기를 적출당하고 있어 박해는 여전히 매우 잔혹합니다.

2. 관광지에서 진상 알리기

저는 해외에 와서 줄곧 관광지에서 진상을 알리며,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중공이 조작한 ‘천안문 분신’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리고, 해외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우리와 함께 이 박해를 저지하고, 사악한 장기적출 범죄를 중단시키며, 중국에서 불법 구금된 대법제자들을 석방하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계절 내내 관광지를 다니며 소중한 중국인들과 인연 있는 모든 이들을 찾고 있습니다.

20여 년 동안 저는 수련자들과 함께 비바람 속에서 많은 고생을 했고, 수많은 관광지를 돌아다녔으며,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4~5시간을 왕복 운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을 마주하며 그들에게 진상을 들려주고 공법을 가르쳐주는데, 어떤 관광객들은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현수막을 걸고 공법을 가르치나요?”라고 묻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제가 하반신마비였을 때 파룬궁 덕분에 며칠 만에 기적적으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일어선 그 순간 맹세했죠. 반드시 제 이야기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 모든 사람이 대법의 복음을 얻을 수 있게 하겠다고요…”

관광지에서는 자주 중국인들을 만나는데, 저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중국 내에서 ‘7·20’ 때 대법제자들이 납치되고 탄압받았을 때,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기 위해 저는 몇 차례 천안문에 갔다가 세 번이나 납치됐고 가족들도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고요. 이 길을 걸어오면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저는 단 1초도 대법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사부님의 은혜는 하늘보다 크십니다!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일은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치가 있습니다.

수년간 관광지에서 진상을 알리면서 때로는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심지어 우한(武漢)대학 강사 수십 명에게 둘러싸여 공격당한 적도 있었지만, 저는 단지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공산당이 무엇이고 파룬궁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요구는 박해를 중단하라는 것이며, ‘파룬궁은 잘못이 없다’는 신념으로 당당하게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3. 천안문 분신은 가짜 뉴스

천안문 분신은 가짜 뉴스입니다. 중공은 파룬궁을 음해하고 증오를 선동하기 위해 중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속였습니다. 만약 정말 분신이라면, 파룬궁은 자살을 허용하지 않는데 대체 누가 그들에게 분신하라고 했을까요? 만약 누군가 불로 그들을 태워 죽여 증오를 조장했다면, 누가 이렇게 파룬궁을 증오하며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요?

제 둘째 언니 왕진량(王金良)은 지역 공소사(供銷社, 협동조합)의 회계사였습니다. 언니는 원래 온몸이 아팠는데 파룬궁 수련으로 곧 병이 없는 몸이 됐습니다. 언니는 대법에 매우 감사했고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했지만, 불법적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한 8년간의 박해 속에서 그녀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중공이 강요하는 이른바 ‘삼서, 오서’(수련 포기 각서)에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제 생명을 구해주신 사부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또 제 여동생 왕진샹(王金香)은 국가 1급 배구 코치였습니다. 그녀는 우리 가족 중 처음으로 천안문에 가서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하라,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고, 그 결과 여러 차례 납치됐습니다. 강제노동 판결을 받은 후에도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세 차례나 독약 주사를 맞았고, 50대 나이에 박해로 사망했습니다.

저는 해외에 와서 줄곧 관광지 최전선에서 뛰어다니며 매일 중국인들과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고, 파룬따파가 전 세계 150여 개 국가에서 전해지고 있으며, 5천여 개의 표창을 받았고, 파룬궁 수련서 《전법륜(轉法輪)》이 50여 개 언어로 번역됐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대법이 전 세계 이렇게 많은 나라에서 전해지고 모두가 하나의 법에 따라 수련하는데, 어째서 단 한 명의 분신자나 자살자도 없을까요? 오히려 ‘5·13’ ‘세계 파룬따파의 날’에는 여러 정부가 파룬따파 깃발을 게양하며 축하하고, 리(李) 대사님께서 인류에게 가져다주신 복음에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정부들이 중국의 인권 문제에 주목하자고 호소하고 있으며, 우리도 선량한 사람들에게 우리와 함께 박해를 저지하자고 호소합니다.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은 빨리 진상을 알아야 하며, 선악을 구분하여 선택하고, 중공을 탈퇴하여 순장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진선인 불법(佛法)을 증오하면 생명은 구원받을 희망을 잃게 됩니다.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제 사명이며 저는 반드시 이 신성한 사명을 완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

왕진쥐는 1948년 산둥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일곱째였다. 서예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찬 바람과 서리를 이겨내는 마당의 국화를 보고 그녀에게 진쥐(金菊, 금빛 국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녀가 고난 속에서도 고결하고 강인한 품성을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린 시절, 전국적인 대기근이 왕진쥐의 고향까지 휩쓸었다. 마을에서는 매일 10여 명씩 굶어 죽었고, 살아남기 위해 언니는 그녀를 데리고 동북으로 가서 일자리를 구했다. 왕진쥐는 공장의 최연소 아동노동자가 됐다.

19세 때 왕진쥐는 프로 농구팀에 발탁되어 고향을 떠나 해방군 총후근부 농구팀, 지난군구(濟南軍區) 농구팀[현 제군천마(濟軍天馬)클럽 농구팀]에 들어갔고, 26군 농구팀에서는 여자팀 코치를 맡았다. 그녀는 농구장에서 10여 년간 땀 흘리며 분투했고, 선수에서 코치가 되어 수많은 상을 받으며 높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남겼고, 이후 그녀의 인생에 큰 고통을 가져왔다.

1980년대, 왕진쥐는 전업하여 베이징의 한 영상회사 부사장이 됐다. 노력 끝에 그녀는 큰 집과 좋은 차, 전담 운전기사를 두게 됐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고향의 친척들도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됐다. 하지만 1995년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하반신마비가 됐다! 친척들이 그녀를 업고 곳곳을 다니며 명의를 찾았지만 끝내 치료받지 못했다.

1996년이 됐다. 그해 왕진쥐의 친구가 그녀에게 《전법륜》을 건네주며, 주변에 심각한 질병이나 불치병을 앓던 많은 사람이 파룬궁 수련 후 회복됐다고 알려줬다. 이 소식은 왕진쥐에게 새 생명의 희망을 가져다줬다. 그녀는 단숨에 《전법륜》을 읽어내려갔고, 이 책이 그녀 인생의 모든 의문을 풀어줬다고 느껴 파룬궁 수련을 결심했다.

한 달 후 왕진쥐는 건강을 회복해 다시 일어섰다! 그녀의 기적 같은 경험을 목격한 많은 친척과 친구들도 파룬궁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왕진쥐는 말했다. “예전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친척들에게 돈을 주고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게 하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들에게 금산(金山)을 하나 준다 해도 파룬따파의 복음을 전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이를 위해 왕진쥐는 특별히 부대로 돌아가 전우들과 지도자들에게 파룬따파를 소개했다.

그녀는 매우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 “파룬따파는 저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게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처음으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1월 25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25/4892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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