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원(靜遠)
[명혜망]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는 1939년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면,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목요일은 추수감사절),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당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 오스왈드는 당시 케네디 암살범으로 체포된 인물이다.
사건 발생 이틀 후(24일 일요일), 오스왈드는 경찰의 엄중한 경계 속에 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나이트클럽 업주 잭 루비(Jack Ruby)에 의해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당시 24세였다. 미국인들은 텔레비전 생방송을 통해 오스왈드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충격 속에 지켜봤고, 오스왈드를 죽인 루비는 나중에 암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루비는 죽기 전 자신이 독살당해 암에 걸렸다고 주장했다.
1964년 9월 발표된 미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인 ‘워렌 보고서’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이 텍사스주 교과서 창고 건물의 직원이었던 리 하비 오스왈드이며, 그가 해당 건물 6층 창문에서 오픈카를 타고 건물 아래를 지나가던 대통령을 향해 3발의 총을 쏘았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암살이 오스왈드 한 사람의 단독 범행이었으며, 루비 또한 개인적 행동이었다고 단정 지었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많은 사람들은 케네디 암살 사건의 진상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오스왈드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소련으로 망명했던 경력은 어떻게 된 것일까?
1. 공산주의를 사랑했던 오스왈드
자료에 따르면, 오스왈드의 어머니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고, 오스왈드의 생부와는 오스왈드의 형과 오스왈드를 낳았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해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고,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다.
중학교를 마친 후 오스왈드는 1956년 10월 미국 해병대에 입대했다. 군대에서 그는 성적이 우수했고, 200야드 밖의 표적을 정확히 맞출 수 있었으며, 한 번은 반신 크기 표적 시험에서 만점인 50점을 받기도 했다. 동시에 조용했던 그는 분명히 친소련, 친공산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왜 친공산주의였을까? 1953년,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한 소책자가 출간됐다. 그 감동적인 언어가 소년 오스왈드의 마음을 움직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큰 열정을 갖게 했다.
1959년, 조기 전역한 오스왈드는 관광객 신분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현지 행정부서를 찾아가 소련 국적 취득을 신청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망명 요청이 승인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소련 관리들은 거절했다. 이후 오스왈드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구조됐다. 퇴원 후 그는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 가서 미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때 소련 당국은 그의 요청을 수락하여 민스크의 한 전기공으로 일하도록 했으며, 월급은 700루블이었다.
그 후의 나날 동안, 미국인으로서 오스왈드는 소련 당국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의 주거지는 엄밀한 도청을 받았고, 오가는 편지는 반복적으로 검사를 받았다. 그의 소련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이 KGB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왈드는 벨라루스 여성 마리나 프루사코바(Marina Prusakova)와 결혼했다.
3년 후인 1962년 6월, 소련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 실제 느낌을 받은 오스왈드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정착하기로 했다. 오스왈드가 사망하기 얼마 전, 부부는 둘째 딸을 낳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자주 공산주의 선전 전단을 직접 인쇄해 배포했고, 이로 인해 경찰과 기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1963년, 한번은 거리에서 몇 명과 함께 전단을 배포하다가 기자의 인터뷰를 받았는데, 공산주의자인지 질문을 받았다. 오스왈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기자가 추궁했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자입니까?” 그는 “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공부했고, 다른 철학도 공부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기자가 말했다. “당신은 이전에 라디오 인터뷰에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했습니다.” 오스왈드는 말을 받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 기자가 물었다.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소문으로 ‘공산주의를 사랑했던’ 오스왈드는 단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공부했을’ 뿐이었고, 인터뷰에서 그의 태도, 어조, 발언 내용은 선전에서 말하는 편집증적이고 극단적인 이미지와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케네디 암살 사건 직전, 그는 텍사스주 댈러스의 교과서 창고 건물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교과서 창고 근처의 딜리 광장에서 그 유명한 암살 사건이 발생했고, 오스왈드는 체포됐다. 이틀 후 오스왈드는 텔레비전 생중계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앞에서, 많은 경찰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앞으로 다가온 한 사람(잭 루비)이 꺼낸 총에 복부를 맞고 케네디 대통령을 응급 치료했던 바로 그 병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가 사망하기 전, 댈러스 시청에서는 기자회견이 열렸고 기자들이 몰려들어 방과 복도를 가득 메웠다. 자정이 막 지난 시각, 지친 기색이 역력하고 약간의 상처를 입은 오스왈드는 많은 경찰들의 호송을 받으며 기자회견장에 도착했다. 미디어의 조명 속에서 그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자신이 법적 대리인을 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매우 짧고 달콤한 청문회에서 저는 이 상황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제게 말해주지 않았고, 아무도 제게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을 살해했다고요? 제가 아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누군가 나서서 법적 도움을 제공해주기를 바랍니다.” 기자가 물었다. “당신이 대통령을 죽였습니까?” “아니오, 저는 그런 혐의를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무도 저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들은 것은 복도에서 신문기자가 그 질문을 했을 때입니다.” 한 기자가 앞으로 나왔다. “당신은 확실히 대통령 살해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오스왈드는 고개를 들어 눈을 크게 뜨고 그 기자를 쳐다봤고, 곧 경찰들에게 끌려나갔는데, 그의 표정은 입장할 때보다 훨씬 더 또렷해 보였다. 당시 방송국 기자의 나레이션은 다음과 같았다. “오스왈드는 자신이 이 일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리 오스왈드의 어머니는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경찰에 연행된 후 아들이 경찰들에게 여러 번 ‘내가 하지 않았다, 내가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면회가 허락됐을 때 아들에게 암살을 저질렀는지 물어봤냐는 질문에 대해 어머니는 “저는 이 일(대통령 암살)에 대해 감정이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으로 제 아들을 모욕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이미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여러 번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법적으로) 유죄가 입증되기 전에는 그가 무죄라고 가정합니다. 이것이 우리 미국인의 생활방식(American way of life)입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어머니는 회상했다. “그는 항상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퀴즈에서도 즉시 답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일에 대해서도 다른 아이들은 관심이 없을 수 있지만 그는 관심을 가졌습니다. 만약 누군가 한 장소에서 (비행기로) 다른 장소로 날아가려 한다면, 그는 거의 즉시 두 지점 사이의 마일 수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냥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훨씬 넘어서는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집이 있을 때는 그가 이웃 아이들과 함께 놀았고, 학교에서는 축구를 하고 뛰어다녔지만, 그는 항상 자신이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을 알아낼 시간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다. “그가 읽은 그런 고급 서적들을 기억하시나요? 예를 들면요?” 그의 어머니는 대답했다. “오, 그는 빈센트 필(Vincent Peale, 미국의 개신교 목사이자 작가)을 읽기를 좋아했고, 또 많은, 오, 헤밍웨이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면, 우리는—아들들, 나, 리—결코 읽지 않았어요… 가치 없는 것들은 읽지 않았어요.” 기자가 물었다. “리가 역사 관련 서적을 읽는 과정에서 그가 ‘특별한 역할’(special role in life)에 대해 당신에게 표현한 적이 있나요?” “없어요.” 그녀는 자신이 일을 해야 하는 어머니였고, 아이들은 오후 3시에 하교하면 그녀는 6시나 6시 반에야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일을 해야 했고 아이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했지만, 이것이 가정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작은 일들을 했지만, 역사와 같은 심오한 주제를 논의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총에 맞아 사망했고, 오스왈드도 총에 맞았으며, 루비도 죽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 러시아에 호감을 가졌던 글렌 M. 사우더와 미국 정부에 충격과 불만을 느낀 윌리엄 H. 마틴
리 하비 오스왈드가 소련으로 망명한 유일한 미국인은 아니었다. 공산당원들의 눈에는 모든 탈주자들, 특히 숙적 미국에서 온 탈주자나 망명자들은 어느 정도 이용 가치가 있더라도 의심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사랑하는 미국인이 소련으로 망명한 후의 인생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인디애나주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의 미국 해군 정보전문가 글렌 M. 사우더는 청소년기부터 러시아 문화에 매료되어 있었고,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우더의 러시아에 대한 호감은 점차 공산주의에 대한 인정으로 발전했다. 1975년, 사우더는 미국 제6함대의 니미츠호 항공모함에서 근무하던 중 자발적으로 KGB의 무료 정보원이 되었고, 그때부터 미국 해군의 기밀이 그의 손을 거쳐 모스크바로 끊임없이 전달되었다. 1986년 5월, KGB의 계획에 따라 사우더는 이탈리아로 ‘휴가’를 떠났다가 갑자기 소련 항공기를 타고 소련으로 갔다. 오스왈드와는 달리 사우더는 순조롭게 소련 국적을 취득했고, 소령 계급을 받아 KGB에서 근무했으며, 모스크바 대학의 한 여교수와 결혼했다. 그 후 그는 한때 소련의 무상교육제도, 전민의료제도 등에 대해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지만, 소련의 물자 부족, 체제의 경직성, 민중의 불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1989년 6월,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동유럽의 격변 속에서 32세의 사우더는 자택 차고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수학 전공 출신의 암호 전문가 윌리엄 H. 마틴은 주일 미 해군에서 암호해독 업무에 종사했으며, 1957년 미국 국가안보국에 입사했다. 안보국 입사 후 그는 당국의 일부 행위를 이해할 수 없어 충격을 받았고 고뇌에 빠졌다. 1960년 6월, 29세의 마틴은 3주간의 휴가를 얻었다. 그는 함께 군 복무를 했고 함께 안보국에 입사했으며, 마찬가지로 정부의 일부 행위에 충격을 받은 동료와 함께 미국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한 소련 화물선에 올랐다. 한 달 후 마틴은 모스크바의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 소련으로 망명한 것이 “피난처와 소련 국적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마틴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곧 자신의 러시아어 이름을 지었으며, 소련 여성과 결혼했지만 이 결혼생활은 3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소련 측의 의심스러운 태도 때문에 그는 단순 잡일만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매우 실망했다. 1979년, 자신의 소련 망명이 너무 경솔했음을 깨달은 마틴은 신청서를 제출해 미국으로 돌아가 친척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지만 허가되지 않았다. 이후에 그는 소련을 떠나는 데 성공했다. 1987년 1월, 마틴이 멕시코에서 암으로 사망한 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그의 유해는 마침내 그가 한때 등진 고향에 안장되는 것이 허락되었다.
3. 증오와 편향은 공산주의의 독소
오늘 리 하비 오스왈드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온라인에서 자신을 ‘틱톡 난민’이라고 강하게 선언한 일부 미국 청년들 때문이다.[역주: 미국 내 ‘틱톡 금지법’ 발효를 앞두고 중국판 인스타그램 샤오훙수(小紅書, 영문명 레드노트·Rednote)로 몰려간 미국 청년들] 이른바 한 청년은 온라인 영상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와 공산당을 사랑하며, 중공의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국가”라고 격렬히 외쳤다. 한 여성은 온라인 영상에서 분노를 표출하며 미국과 중공국 사이에서 주저 없이 중공을 선택할 것이며, 중공이 미국의 모든 군함을 파괴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공산주의 중국에서 30년을 기다려 미국으로 이민 갈 기회를 얻은 미국인들이 듣기에는 “뭐라고?! 그럼 빨리 중국으로 가봐!”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은 많은 사람에게 타고나는 미덕이 아니라 가정교육의 결과이며, 전통적 가치관을 존중하는 학교교육으로부터 온다. 현실적으로 Y세대에서 Z세대, A세대에 이르는 미국인들은 디지털 미디어와 스마트폰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생활방식에서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전통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어릴 때부터 정상적인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전통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감상할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세상 물정을 모른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언론의 자유를 가졌으며, 공산주의의 기만과 통제, 철권을 맛보지 못했다.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이른바 ‘깨어남 문화(Woke Culture)’(역주: 사회적 부정의와 차별에 대해 ‘깨어있는’ 상태를 강조하며, 극단적인 정치적 올바름과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문화 현상)를 추진하기 위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이간질되고, 부모의 자녀 교육권이 도전받고 있다.
머스크의 아들이 성전환 후 온라인 영상에서 생부에 대한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현할 때, 틱톡의 극좌 청년들이 단지 스파이웨어 앱이 애플 스토어에서 내려졌다는 이유로 온라인 영상에서 자신의 조국에 대한 증오를 공개적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한때 익숙했지만 피하고 싶었던 그런 환경을 떠올리게 된다. 증오, 악의, 폭력—이는 중국의 분노한 청년들의 공통된 특징이자, 중국의 샤오펀훙(小粉紅,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빠져 공산당을 추종하는 중국 젊은이들)과 우마오(五毛, 친공산당 댓글부대)들, 소위 ‘중국 꼰대들’(中國大爺中國大媽)의 공통된 특징이며, 중공의 세뇌가 주입한 가장 큰 특징이다.
맺음말
리 하비 오스왈드의 생애는 매우 짧았고 그의 죽음은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지만, 그의 비극은 명백하다. 그가 청소년기에 가졌던 공산주의에 대한 사랑은 분명히 공산주의가 미국 민간에서 행한 선전의 결과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그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틱톡 난민’들은 어떨까? 이 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미국을 떠나 중공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그들에게 정상적인 사랑(방종과 오도가 아닌)을 주고, 건전한 가정을 지지하며, 신이 전해준 가치관을 존중하고 회복하는 것일 것이다.
원문발표: 2025년 1월 19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19/488626.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19/4886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