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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7.22’ 사건으로 본 중공의 사악함

글/ 중국 파룬궁수련자

[명혜망] 올해 일흔이 넘은 나는 1996년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수련 전에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수련 후 새사람이 된 듯했다. 그러나 1999년 7월부터 시작된 중국공산당(중공)의 파룬궁 박해는 수많은 선량한 파룬궁수련자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공의 사악함을 완전히 드러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은 기습 공격으로 파룬따파 연구회와 각 성, 시의 보도소 소장들을 불법적으로 납치했다. 7월 22일 오후 중앙TV를 통해 이른바 금지 통지가 방송되면서 전국적으로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대규모 박해가 시작됐다. 나는 ‘7.22’일부터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25년 전 ‘7.22’의 경험을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운명이 험난했다. 어머니는 40대에 날 낳으셨는데 젖이 거의 없었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영양가 있는 음식을 살 수 없어 길거리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삼촌 댁에 가서 요리하고 남은 국물을 매일 조금씩 얻어먹었다. 나는 영양 섭취가 매우 부족한 데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다 보니 발육이 극도로 부진했고, 팔은 어른 엄지손가락만 했으며 해골처럼 말랐다. 울어도 가냘픈 소리만 낼 수 있었다. 나를 본 사람은 누구나 괴물 같다며 무서워했다.

내가 너무 말랐기에 어머니는 날 작은 바구니에 담아 들고 다니셨다. 나는 숨만 붙어 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다. 친척과 이웃들은 날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에게 날 버리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 아이도 생명이라며 차마 그렇게 하시지 못했다. 나는 네 살이 되어서야 이가 나고 말을 하고 걷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닌 후에도 몸이 허약하고 병에 자주 걸렸으며 머리는 항상 흐리멍덩하고 아팠다. 성적도 좋지 않아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집에서 1년간 소를 돌보다가 가정 성분이 가난한 농부였기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중공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중공은 대중을 선동해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었고 결국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다.

나는 홍위병 신분으로 처음 베이징에 연락하러 갔었고 나중에 ‘8.15’라는 지역 반군 단체에 합류해 ‘끝까지 반대’라는 또 다른 조반파(造反派) 단체와 무장 투쟁을 벌였다. 양쪽의 구호는 ‘당 중앙을 수호하고 마오(毛) 주석을 수호하자’였지만 서로 대치하며 칼과 총으로 무자비하게 서로를 죽였다.

내가 아는 한 여학생이 총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돼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른 파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도 그녀를 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너도나도 가서 발로 찼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이 사건 이후 나는 공산당에 의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九評共産黨)’을 읽고 나서야 공산당의 사악한 본질을 깊이 인식하게 됐다.

나는 어릴 적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후 독학으로 의학을 열심히 공부해 시골 의사가 됐고, 나중에 마을에 있는 진료소를 계약했다. 1980년대에 전국에 기공 열풍이 불었다. 나는 기공에 큰 관심을 갖게 됐고 기공을 배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후로 열 가지가 넘는 기공을 배웠지만 만족할 만한 기공을 찾지 못했고, 몸도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1996년 파룬궁을 접하고 나서야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임을 깊이 느꼈다.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사라지고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건강해진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로 아프거나 약을 먹은 적이 없다. 나는 파룬궁의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수련했다. 참말을 하고, 참된 일을 하며 진(真)을 수련하고, 남을 친절하게 대하고 일을 할 때 남을 먼저 생각하며 선(善)을 수련하고, 인내심을 갖고 관대하며 환자를 배려하며 인(忍)을 수련했다. 환자를 진료할 때는 저렴하고 효과가 빠른 약을 사용해 환자의 부담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많은 환자들이 많은 돈을 써도 치료할 수 없었던 병이 내 진료소에서는 적은 돈으로 치료됐다. 그리고 나는 환자가 가난하든 부자든,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꾸준히 모두 똑같이 치료해 주었다. 치료비를 지불할 돈이 없으면 외상 기록을 남겼지만 절대 재촉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돈을 내지 않으면 청구서를 태워버렸다. 특별히 어려운 환자에게는 오랫동안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의사로서 갖춘 나의 도덕성과 의술은 환자들에게 높이 인정받아 사람들이 아플 때 가장 먼저 날 찾았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마을 보건소는 나보다 의료 환경이 좋았지만 내 진료소만큼 환자가 많지 않았다. 나는 밤낮으로 바쁘게 일했고 환자가 끊이질 않았지만 보건소는 매우 조용했다.

나는 진선인으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며 항상 환자를 생각했기에 대중의 한결같은 칭찬을 받았고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출했다. 정부에서도 여러 번 표창하며 나에게 ‘쌍문명호(雙文明戶: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을 모두 갖춘 가정을 의미)’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환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환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수입이 높아지기를 바란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내가 원했던 것은 돈을 더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건강해지고 병에 걸리는 사람이 줄어들기만 바랐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파룬궁을 소개했고, 많은 환자가 수련을 통해 병이 나아 더 이상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게 됐다. 수입은 줄었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행복했다.

나와 수련자들은 파룬궁을 널리 전하기 위해 여러 마을과 농촌 생산대를 자주 방문했는데, 인구가 1~2백 명에 불과한 일부 생산대에 수련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파룬궁 수련을 통해 사람들이 건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치료할 수 없었던 많은 질병이 사라졌고 도덕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 파룬궁 수련 전에는 도박꾼, 알코올 중독자, 흡연자였던 사람들도 수련 후 담배, 술, 도박을 끊었다. 성미가 급하고 남을 때리거나 욕하던 사람 중 일부는 수련 후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파룬궁수련자의 가정이 더 화목해지고, 노인을 존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주운 돈이나 물품을 돌려주고, 공정하게 장사하고,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돕는 등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마을에 수련자가 많아지면서 치안과 질서가 더 좋아지고 사회 분위기가 더 좋아졌으며 정부가 이전보다 훨씬 관리하기가 쉬워졌다. 정부 지도자들도 매우 기뻐하며 파룬궁수련자들이 수련할 수 있도록 회의실과 학교 교실을 제공하는 데 앞장서서 적극 지지했다. 서기와 시장을 포함한 지역 공무원 중 일부도 파룬궁을 수련했다. 우리 마을에는 1,000명 이상, 현 전체에는 약 3,000명이 파룬궁을 수련했다. 지역 장날일 때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연공하고 법을 전파했는데 길 양쪽이 파룬궁수련자들로 가득 찼다.

1999년 설 기간 현 정부는 새해 첫날부터 10일까지 광장에서 문화 공연을 주최했다. 파룬궁수련자들도 정월 초닷새 날 공연에 초대됐다. 다른 모든 단체는 현에서 공연 보조금을 받았지만, 수련자들만 현에서 주는 공연 보조금을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다. 500명이 넘는 수련자들이 자발적으로 공법 시연에 참여했는데, 사전에 리허설을 하지 않았지만 질서정연하게 진행됐다. 구경꾼이 많았기에 주최 측은 수련자들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을 추가로 배치하고 사람들이 공법 시연 행렬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수련자들의 이 공법 시연은 현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현 텔레비전 방송국도 수련자들의 단체 연공 장면을 방송했다.

파룬궁 박해가 없었다면 우리 지역은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면서 덕과 선을 존중하는 사회의 도덕성 향상을 향해 점차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며, 정치적 화합과 인류 평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1999년 7월, 예기치 않게 갑자기 정세가 급변하면서 전국에서 파룬궁에 대한 전례 없는 잔혹한 박해가 시작됐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은 파룬따파 연구회와 여러 성, 시의 보도소 소장들을 납치했고 나는 수련자들과 함께 시 정부에 가서 납치된 수련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1999년 7월 22일 오후, 이른바 금지 통고가 중앙TV를 통해 방송된 후 지역 정부 서기와 시장이 찾아와 수련자들에게 단체 연공하러 우리집에 오지 말라고 통지하라고 했다. 저녁 8시에 경찰차 여러 대와 많은 경찰이 우리집을 포위하고 날 공안국으로 끌고 가 심문을 시작했다. 그들은 나에게 파룬궁에 대해 나쁜 말을 하게 하려고 했지만, 나는 파룬궁이 나와 수련자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었는지 말하며 협조하지 않았다. 경찰은 나를 햇빛도 들지 않고 수심이 30cm가 넘는 악취 나는 물 감옥에 가뒀고 3일 후 구치소에 수감했다. 경찰이 “당신이 뭐라고? 공산당이 다스리지 못할 사람은 없어. 펑더화이(彭德懷), 류샤오치(劉少奇) 같은 지도자도 괴롭혀 죽였는데, 당신은 개미 죽이듯 할 거야… 고집을 부리면 죽을 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내가 구치소에 갇히던 날, 경찰은 수감자들에게 “이 파룬궁수련자는 완고하기 짝이 없으니 마음대로 때려도 좋고, 때려죽여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한 무리의 수감자들이 내 주위에 모여 “이 파룬궁 놈을 때려죽여라!”라고 외치며 날 감방으로 끌고 가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경찰이 시켰기에 죄수들은 거리낌 없이 잔혹하게 박해하며 온갖 방법으로 날 고문했다.

‘소변 마시기’, ‘목욕시키기’, ‘관장하기’, ‘딱딱한 조개(90도로 허리를 굽힌 다음 팔꿈치로 등을 세게 때리기)’, ‘부드러운 조개’, ‘천심련(穿心連, 주먹으로 심장 때리기)’, ‘전화하기(머리를 벽에 박기)’, 벽에 군인 자세로 서 있기, 눈에 만금유(萬金油) 넣기, 마구 등을 짓밟는 등 수많은 고문 방법을 썼다. 하나하나가 매우 잔인했고 매일 다른 방식으로 고문당해 왼쪽 가슴의 네 번째 갈비뼈가 부러졌다. 수감자들은 “네가 파룬궁 수련을 고집하니 맞아 죽어 마땅해!”라고 말했다. 매일 너무 모질게 맞아 눈앞이 캄캄하고 어지러워 얼빠진 사람 같았는데 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생각해도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우리는 파룬따파의 법리에 따라 엄격하게 수련하며 올바른 길을 가고 있었기에 경찰은 내가 법을 어기거나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나와 수련자들이 파룬궁 수련을 통해 마음을 닦은 후 좋은 일을 한 것과 일반인들의 칭찬만 들을 수 있었다. 현 ‘610 사무실’(파룬궁 박해 전담 조직)은 먼저 나에게 ‘미신을 이용해 사람을 죽게 했다’라는 혐의를 씌우고 거짓 증거를 수집하는 악랄한 수법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각 마을에 경찰과 마을 정부 직원을 보내 사망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사망자의 가족이 내가 사망을 초래했다고 증언하는 편지에 서명하면 200위안의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대다수의 양심적인 사람들은 양심을 저버리고 위증할 의사가 없었으며, 오직 두 가족만이 증언하겠다고 나섰다. 현 610은 어느 생산대의 왕 씨 할머니와 어느 마을의 황 씨가 내가 약을 먹지 못하도록 협박해 죽었다고 날조하며 크게 떠들어댔다. 사실 나는 이 두 사람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들은 파룬궁 수련을 한 적도 없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파룬궁과는 더더욱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610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문에 이런 비방 소문을 게재해 세상 사람들을 세뇌했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이 이 두 사건을 위에 보고해 중공이 조작한 이른바 ‘파룬궁으로 인한 사망 사례 1,400건’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나중에 현장 방문을 통해 그 두 사람의 진짜 사망 이유를 알게 됐다. 왕 씨는 원래 심각한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고, 아들이 계획생육 정책을 어겨 계획생육 사무실에서 거액의 벌금을 부과해 가족이 가난해졌고 치료비도 마련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조카 집에서 돼지를 잡아 그녀에게 고기 한 덩이를 주었다. 그녀의 가족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기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녀는 서둘러 고기 요리를 위해 무를 뽑으러 밭으로 갔다가 밭에서 기절했고 집으로 업혀 와 곧 사망했다. 황 씨는 말기 간암 환자였고 파룬궁을 수련한 적이 없었으며 치료 효과가 없어 질병으로 사망했다.

나는 어떤 고문을 당하더라도 파룬궁 명예훼손에 협조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고, 그들이 소위 살인 사건을 조작해 죄를 뒤집어씌워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5천 위안의 보증금을 갈취한 후 나를 ‘처분보류’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석방하기 전에 610은 구치소에서 TV 기자가 나와 인터뷰를 하도록 안배했다. 나는 파룬궁은 좋은 것이며, 나는 파룬궁의 혜택을 입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TV에서 방송할 때 내가 파룬궁에 속았다고 조작할 줄은 몰랐다. 이것이 바로 중공의 날조 선전이다.

그 후 나는 여러 차례 노동수용소에 갇혔고 여러 차례 세뇌반에 갇혀 온갖 잔인무도한 고문을 당했다. 처음 노동수용소에 들어가면 ‘절차를 밟아야’ 했다. 나무 몽둥이로 20대 맞기, 3일간 바닥에 머리 박고 있기, 7일간 서 있기 등이었다. 수용소에서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종종 ‘돼지 잡는 집회'(수감자를 묶고 매달고 때려서 돼지처럼 비명을 지르게 하는 고문)를 열기도 했다. 나는 묶이고, 매달리고, 수갑을 채우고, 구타당하고, 발로 차이고, 어두운 방에 갇히고, 콘크리트 침대에서 자고, ‘시체 침대(고문 도구)’에서 자고,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벌서기, 작은 의자에 앉아 벌 받기, 쪼그리고 앉아 벌 받는데 움직이지 못하고, 움직이면 구타를 당했다.

또한 초강도 신체 훈련과 장시간의 초강도 작업도 있었다. 가장 비인도적인 것 중 하나는 ‘밧줄 묶기’였다. 여러 사람이 날 땅바닥에 넘어뜨리고 머리와 손발을 각각 한 명씩 잡고 나를 바닥에 누르고 옷을 벗긴 다음 두 명의 경찰이 각각 새 갈색 밧줄을 들고 내 양손을 묶었다. 그들은 힘을 들여 팔을 묶기 시작했고, 팔을 묶을 때마다 두 발로 팔을 힘껏 누르고 위쪽으로 끌어당겼고, 밧줄은 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밧줄이 부풀어 오른 살로 덮였다. 새 갈색 밧줄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기에 경찰은 장갑을 끼고 묶은 다음 철봉을 사용해 밧줄을 비틀었는데 손가락과 팔이 즉시 보라색,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밧줄을 풀었을 때 밧줄에는 피부와 살이 묻어 있었고 팔 전체가 피범벅이 됐으며 피와 고름이 열흘 동안 계속 흘렀다. 3~4개월이 지나서야 아물었고, 7~8년이 지난 지금도 밧줄에 졸린 흔적이 선명하게 보이며 지금도 손가락과 팔이 자주 저린다. 어떤 고문을 당해도 나는 사악에 굴복하지 않았다.

노동수용소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610은 세 사람을 보내 내 집에 살면서 날 감시하도록 했고, 나는 밤에 침실 문을 열어놓고 자야 했다. 세 남자는 우리집에 어머니, 아내, 딸 등 다른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강제로 거주했다. 그들은 1년 넘게 내 집에 머물렀다. 현 610과 국보대대 경찰도 늘 소위 방문이라는 구실로 우리집에 찾아와 평범한 시민의 집을 감옥으로 만들었다.

중공의 파룬궁 박해는 파룬궁수련자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박해에 가담한 사람들도 온갖 불운을 겪게 만들었다. 사실 진짜 피해자는 박해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 마을에서는 수년 동안 파룬궁을 박해하고 업보를 치른 수십 건의 사례가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다음은 몇 가지 예시다.

◎마을 서기인 장(張) 씨는 원래 파룬궁을 매우 지지했고 몇 차례 연공하러 왔었다. ‘7.22’ 이후 그는 형세가 바뀐 것을 보고 즉시 박해에 적극 가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혈관염에 걸려 먼저 손을 절단했고, 나중에 발을 절단하려다 수술대 위에서 사망했다.

◎마을 서기 리(李) 씨는 원래 파룬궁 지지자였지만 ‘7.22’ 사건 이후 태도가 급변해 수련자들의 책을 적극적으로 압수했다. 그는 한 회의에서 “파룬궁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한번 건드려 보겠어”라고 말했다. 그는 한 달 정도 후 사망했다. 그가 죽기 전에 조카가 “파룬궁은 당신을 건드리지 않았는데 왜 그들을 괴롭히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그는 말문이 막혀 후회의 눈물만 흘렸다.

◎파출소 경찰 쑤(蘇) 씨는 집안 배경이 없어서 파룬궁 탄압으로 승진하려 했다. 파룬궁 박해에 가담해 승진에는 성공했지만 몇 년 후 건강하던 그는 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치료할 의미가 없다며 집에 가라고 했다. 그가 날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거의 원한을 잊고 그의 집에 찾아가 진상을 알렸다. 문을 두드리자 거실에 그를 보러 온 경찰관 10여 명이 있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고 그는 날 침실로 데려갔다. 나는 그가 박해에 가담한 것을 회개하고 공산당에서 탈퇴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열흘 후 사망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암 진단을 받은 또 다른 파출소 부소장은 파룬궁수련자가 전하는 진상을 받아들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암에서 회복됐다. 정말 뚜렷한 대조였다!

◎마을에 파룬궁수련자가 옆집에 사는 한 가족이 있었는데, 610은 그에게 수련자들을 감시하도록 지시하고 전화기를 줬다. 그는 수련자들을 열심히 감시했고 610에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주었다. 불과 몇 년 만에 그의 가족은 죽거나 미쳐버려 집안이 망했다.

◎한 찻집 주인이 한 사람을 신고하면 500위안의 현상금을 받는다고 하자 그는 20명이 넘는 파룬궁수련자를 한꺼번에 정부에 신고했다. 며칠 후 그는 손님에게 차를 따르던 중 쓰러져 사망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많이 있지만 지면의 제한으로 자세한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 사악한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지 25년이 지났다. 이 25년 동안 중공은 파룬궁수련자들을 잔인하게 박해하기 위해 온갖 사악한 수단을 동원했지만, 파룬궁수련자들은 눈 속의 매화처럼 온갖 시련을 견디며 대법의 불굴의 정신을 보여줬다. 중공의 박해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진상을 깨닫고 있으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원문발표: 2024년 8월 1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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