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신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

​글/ 지린시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무신론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부터 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할 때의 경험을 자주 들려주셨다.

어머니는 당시 마차를 빌려 모든 가산을 싣고 고향을 떠나셨다. 그런데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사하면서 왜 나만 집에 두고 가느냐”라는 소리가 들려서 매우 의아하게 여기며 아버지께 빠뜨린 게 없냐고 물어보셨다. 아버지는 빠뜨리지 않았다며 가던 길을 재촉하셨다.

​어머니는 잠시 후 또 같은 소리를 들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뭔가 빠뜨린 게 틀림없어요”라며 마차 주인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돌아가서 아버지는 몇 번이고 안팎을 살펴보시다가 “텅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어”라고 하셨다.

막 다시 떠나려 할 때 부뚜막 위의 ‘조왕신(灶王神)’ 초상화가 떠오른 어머니는 ‘조왕신’을 빠뜨렸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하며 초상화를 잘 간직하신 후에야 다시 길을 떠나셨다. 나는 이 그림이 우리집 부엌 위에 항상 모셔 있고, 어머니가 항상 그 앞에서 공양하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1950~1960년대 이른바 ‘대기근’ 때 어머니는 우리집에 식량이 거의 끊기지 않았던 것은 모두 ‘조왕신’이 보호해주신 덕분이라고 하셨다.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에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자’는 운동 때문에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조왕신’ 초상화를 내리셨다.

​1980년대에 나는 무급휴직을 하고 창업을 준비했지만 수중에 1천여 위안(약 20만 원)밖에 없어서 물건을 구매할 돈은커녕 점포 임대료도 없었다. 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한 지역에서 주민들이 운영하던 의류 공장에 주문이 없어서 직원들이 쉬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연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늘의 뜻이었다. 나는 공장장을 찾아가서 상황을 파악한 후 도급을 맡기로 했다.

다시 공장장을 찾아가 내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공장장은 매우 기뻐하며 매년 1만 위안의 도급비만 내면 된다고 했다. 나는 내 조건에 관해 이야기했다. 전체 공장 직원 78명 중 작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직원은 실질적으로 30명도 안 되므로 나머지 사람은 맡지 않겠다고 했다. 공장장은 그들에게 계속 휴가를 줄 수 있다며 동의했다. 이렇게 순조롭게 계약을 체결해 이후 전 직장, 병원, 학교 등과 연락해 작업복과 학생복 등을 주문받으며 순조롭게 사업을 할 수 있었다.​

1988년 여름, 나와 남동생은 북쪽의 가장 큰 도매시장인 시류(西柳)에 가서 옷감을 들여오려 했다. 우리는 미리 기차표를 샀는데 투먼(圖們)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는 기차였고, 우리 좌석은 13번째 객차, 즉 뒤에서 세 번째 객차였다.

떠나는 날 남동생은 새로 산 자전거 뒷자리에 날 앉히고 기차역으로 갔다. 막 100미터쯤 갔는데 뒤 안장이 부러지면서 나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순간 전날 밤 꿈에서 내가 탄 비행기가 아래로 곤두박질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즉시 동생에게 오늘 가지 말고 다음에 가자고 했다. 남동생은 자전거 대신 택시를 타면 된다고 했다. 나는 시간 문제가 아니라며 꿈 내용을 들려줬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이 열차의 마지막 세 객차가 탈선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어머니는 즉시 신께서 보호해주셨다고 하셨다!

​두 번째는 1989년 가을이었다. 학생복을 가공하게 되어 이번에는 지린에서 시류까지 직행버스를 타려 했다. 버스가 배송 및 수령이 편리하고 사람과 물건이 같이 도착하기 때문이다. 나와 남동생은 저녁 6시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샀다. 시간이 아직 이르기에 우리는 버스에 앉아서 기다렸다. 몇 분 후, 나는 멀미하기 시작했다. 버스가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멀미를 한다는 것은 이상했지만, 증세가 점점 심해져 눈앞까지 아찔했다.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승무원에게 너무 힘들다며 다음 버스를 타겠다고 했고 환불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녀도 내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다면서 환불을 해줬다. 동생이 부축해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이상하게도 택시를 타자 모든 증상이 사라지고 어지럽지 않았다.

며칠 후, 우리는 지난번 그 승무원의 버스를 탔다. 출발 시간이 다 됐는데 매번 만석이었던 버스에 승객 6~7명밖에 없어서 승무원에게 “오늘은 왜 이렇게 사람이 없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승무원은 “아주머니는 정말 복이 많네요”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물었더니 지난번에 그 버스가 선양을 지나자마자 복면강도들이 뛰어올라 승객들의 돈, 목걸이, 시계 등 모든 값어치 있는 물건을 빼앗았고, 또 누구는 핸드폰을 빼앗겼다고 했다. 내가 의류 공장을 하는 것을 아는 그녀는 지난번에 돈을 얼마나 갖고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20만 위안(약 4천만 원)이라고 말했다. 남동생은 또 지난번에 우리가 어떻게 기차 탈선을 피했는지 이야기했다. 그녀는 신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는데 우리의 경험으로 신을 믿게 됐다며 놀라워했다. 나는 “맞아요, 어둠 속에서 신은 항상 우리를 보호해주셨어요!”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1990년 11월이었다. 중국 북부의 11월은 이미 매우 춥고 게다가 1일에 비가 한차례 내리더니 저녁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는 친구의 새 차를 빌렸고 저녁 5시에 출발할 계획이었다. 6시간 남짓 운전하면 시류까지 갈 수 있었고, 숙박하고 아침 일찍 물건을 구매하면 저녁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또 멀미하기 시작했고 구토까지 해서 결국 운행이 지연돼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가는 도중 아직 날이 밝지 않아 100m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몽롱한 가운데 전방에 무언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운전기사는 나중에 말했다. “100m 정도 떨어진 곳부터 미리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했는데, 빙판길에다 눈까지 덮여 차가 전혀 멈추지 않았어요. 결국 차가 멈추기 전에 두 다리를 시트에 올린 채 앞 차량과 충돌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앞서서 사과를 실은 트럭이 전복돼 길이 막혔고, 어두운 날 길이 미끄럽자 차량이 연속 한 대씩 추돌했는데, 우리 앞에 이미 100대도 넘게 사고가 나 있었다. 우리 차도 앞뒤 두 문이 눌려 납작해졌다. 기사가 다리를 시트에 올리지 않았다면 아마 크게 다쳤을 것이다. 나도 언제부터인지 뒷좌석에서 반쯤 누워있었고, 동생도 언제부터인지 두 다리를 시트에 올리고 있어서 우리 셋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차도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서 보험회사가 배상해줬다.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내가 멀미나 구토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 차는 12시쯤 도착했을 것이고, 그럼 처음 크게 추돌한 차량 몇 대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럼 차도 망가지고 우리도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것이다.

​내 경험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신의 보호를 이미 세 번 이상 받았다. 당신이 신의 존재를 믿으면 신의 보호를 받게 된다. 만약 당신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신의 보살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당신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신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건 아니다.

​2023년 1월 20일,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는 밍후이왕과 해외 매체에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발표하시어 전 세계 중생에게 우주와 인류의 천기를 처음으로 공개하셨다. 리훙쯔 사부님께서 어떤 천기를 밝혔는지 모두들 알아보시길 바란다! 진지하게 읽어보면 정말로 당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당신의 경지를 승화시킬 수 있으며, 당신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원문발표: 2023년 4월 11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4/11/458680.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3/4/11/458680.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