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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사례’는 어떻게 조작되었는가

글/ 중국 파룬따파 수련자 둥메이

[밍후이왕] 중국공산당 정부의 ‘1400사례’ 관련 선전은 파룬궁(法輪功)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부추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밍후이 편집부가 보도한 바 있다.

1990년대 내내 파룬궁은 중국에서 널리 행해졌다. 그런데 중공 당국은 1999년 7월 파룬궁 수련자들이 “파룬궁 수련으로 인해 14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출판물과 대변인이 반복하게 되면서 심각한 인권 침해의 희생자가 된 파룬궁 수련자들에 향한 지지를 약화했다.

무책임한 중국공산당(중공) 당국은 아무런 증거도 제출하지 않으면서도 독립적인 조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중공이 주장하는 파룬궁이 일으킨 ‘사망’ 사건은 개인의 조사로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파룬궁이 자유롭게 행해지는 중국 밖에서는 어떤 나라에서도 이런 ‘사망’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그렇다면 ‘1400사례’는 어떻게 발생했는지 한번 살펴봐야 한다.

밍후이왕은 최근 산둥성 린이시 멍인현 타오쉬현 수이자수잉 마을에서 스정산의 둘째 딸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내부 정보를 입수했다.

스정산은 군대에서 8년을 보낸 후, 은퇴하여 마을의 서기 겸 회계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심장병과 위염으로 이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의 아내 마칭란 역시 몸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위염, 장염, 관절염, 자궁종양 등을 앓았다. 그녀는 1995년에 수술을 받았지만, 수술 부위가 잘 아물지 않고 절개 부위에 커다랗게 혹이 생겨 통증이 심했다. 배로 바람이 쉽게 스며들어서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면 조끼를 입어야 했고 집안일도 할 수 없었다.

1997년 1월 28일, 스정산의 아내는 친구의 추천으로 파룬궁 9일 강의를 시청했다. 5일째 되는 날, 절개 부위는 더는 아프지 않았고 큰 혹은 사라졌다. 스정산의 심장병과 위염도 사라졌다. 이 엄청난 경험은 그들에게 파룬궁을 계속 수련하게끔 동기를 부여했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 정권은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탄압이 시작된 지 7개월 후인 2000년 2월 16일, 타오쉬 파출소 부국장 리장샹과 경찰 두 명이 스정산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경찰들은 그의 팔을 비틀고 목을 조른 채 경찰차에 밀어 넣었다.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던 스정산의 둘째 딸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공격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으로 쓰러졌다. 응급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그녀는 3일 후에 사망했다.

멍인현 선전부는 정부 자금을 얻기 위해 파룬궁에 대한 혐의를 날조하는 특수 집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스정산의 딸이 파룬궁을 수련했고, 투약과 주사를 거부하다가 숨졌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방송용으로 녹화하기 위해 스정산에게 대본을 읽어 현지 텔레비전 방송국에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처음에 스정산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양심을 저버리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강제로 굴복시키기 위해 마을 공안은 전담팀을 조직했다. 전담팀은 스정산의 옷을 벗기고 나무 의자로 때렸다. 너무 세게 때려서 의자가 부러졌다. 그들은 스정산이 기절할 때까지 나무 막대기로 계속 때렸다. 스정산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얼굴은 보랏빛으로 멍들었고 눈은 피투성이였다. 다치지 않은 부위가 없어서 혼자서 눕거나 일어날 수 없었다. 구타를 더는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텔레비전 방송국과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조작된 영상이 2000년 7월 멍인 TV와 산둥 TV로 방송된 몇 달 후, 중국 중앙TV 기자는 스정산의 마을에 와서 딸에 관한 이야기를 촬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파룬궁은 사람들이 약을 먹고 주사를 맞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의 증거로 사용될 계획이었다.

중국 중앙TV 기자가 인터뷰하러 온다는 통보를 받은 스정산은 더는 파룬궁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자리를 피했다. 파룬궁 수련은 그에게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양심은 파룬궁에 또다시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을 간부들은 스정산이 사라지자 당황했다. 기자가 일을 끝내지 못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스정산을 찾지 못한 기자는 하는 수 없이 상사에게 그의 인터뷰 거부를 알렸다. 상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찾아라!”라고 지시했다. 마을 간부들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동안 기자는 사흘을 기다렸다. 이들은 동네를 돌며 친구, 가까운 친척, 먼 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스정산을 찾지 못했다.

스정산의 아내는 기자에게 말했다. “남편이 왜 숨을까요? 왜냐하면 우리 딸에 관한 이야기가 조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잔인하게 구타를 당하고 1만6천 위안(한화 약 311만 원)의 벌금을 문 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딸은 경찰의 폭력에 놀라 죽었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사람들을 속일 생각이 없으며 파룬궁과 파룬궁 창시자 리 사부님께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기자는 나중에 스정산을 찾았지만, 보도에 단지 몇 줄의 글만 쓸 수 있었다. 기자는 “스정산은 과수원을 보고 씁쓸했다. 풍년이 들어서 기뻤지만, 다시는 둘째 딸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라고 썼다.

기자는 또 마을의 많은 이웃 노인들 모두가 스정산의 말대로 파룬궁이 좋다고 말했다고 썼다.

 

원문발표: 2022년 6월 17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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