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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 칭허현 상인 박해로 세상을 뜨자, 간난의 나날 보내는 가족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베보도) 허베이(河北) 칭허 현(清河縣) 파룬궁 수련생 자오바오성(趙保省)은 캐시미어 장사를 했는데, 7차례나 중공(중국공산당) 당국에 불법 감금박해를 당해 심신에 극심한 상해를 입었다. 나이 겨우 48세인 그는 결국 음력 2011년 10월 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집의 아내와 아이들은 간난(艱難)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자오바오성의 아내는 8차례나 납치박해를 당해, 본래 행복하던 가정은 박해로 집과 가족을 잃었다. 90세에 가까운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형과 누님이 보살펴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자오바오성 부부는 칭허 현 거셴좡 촌(戈仙莊村) 사람으로, 1999년에 대법수련에 들어섰고 심신의 건강을 얻었다. 대법을 수련한 뒤, 고상한 품성과 인격으로 이웃과 장사 관계가 있는 상인의 존중을 얻었다. 중공 사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그가 구치소로 납치당하자, 많은 이웃은 모두 그를 면회하러 갔으며, 상인들도 구치소에 가서 그와 장사를 상담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서 정상적으로 거래할 수 없었던 이유로, 경제적으로 아주 큰 손실을 입었다.

1999년 ‘7.20’에 중공 장쩌민 사악집단이 천지를 뒤엎을 듯이 파룬궁을 모독하고 박해한 뒤, 자오바오성 부부는 1999년 섣달 그믐날에 베이징으로 대법을 위호하러 갔다가, 현지 공안에게 납치당해 구치소에 갇혀 비인간적인 학대와 욕설을 당했고, 다리는 구타로 가지처럼 멍들었다. 50여 일 동안 불법 감금을 당했고, 또 3만 위안을 갈취당해서야 풀려났다.

이로부터 자오바오성은 현지 중공 인원의 눈엣가시로 되었다. 매년 설이나 명절 때면 곧 그들이 탄압하는 대상으로 되어, 밤에 집에 기어올라 정원을 뛰어넘어 그들을 납치했고, 몇 차례 가택을 수색하고 재물을 갈취했다.

2000년 12월 29일, 자오바오성은 베이징으로 가서 현수막을 펼치고 대법을 실증했다가, 납치돼 베이징 시 순이 현(順義縣)공안국 사링(沙嶺)분국에 불법 감금되어, 5명의 악독한 경찰에게 구타당해 오른 팔은 불구가 되었다. 경찰은 삼동(겨울)에 그의 옷을 모조리 벗기고 정원 안의 나무 위에 채워 놓고 그의 몸 위에 냉수를 끼얹고 크고 작은 전기봉으로 전기충격을 가했는데, 큰 전기봉을 여러 차례나 생식기 위에 놓고 전기충격을 가했다. 두 손을 수갑 두 개로 나눠서 연결된 의자 위에 채우고, 나눠서 두 개의 침대 위에 채워 그가 쭈그려 앉을 수 없게 했다. 전기봉, 천연고무 몽둥이, 경찰봉 등 흉기로 4시간 동안이나 괴롭혔다(대략 저녁 6시부터 10시가 넘을 때까지).

자오바오성은 칭허 현 불법 경찰에게 납치돼 현지로 돌아온 후 구치소에 갇혔다. 구치소 안에서 그의 순정하고 선량한 거동을 보고 주변의 죄수들은 감동했다. 그가 부상을 입은 뒤, 죄수들은 그의 부상당한 팔을 들어주며 그를 도와 연공하게 했다. 칭허 현의 악인(惡人)은 그를 허베이 성 세뇌반에 가두었다. 그가 보내져 왔을 때는 몸에 돈 한 푼도 없고, 다만 팬티와 런닝만 입었을 뿐, 갈아입을 옷 한 벌마저도 없었다. 10여 세인 두 아이는 많은 고생을 겪고서야, 스자좡(石家莊)에서 몇 백리 떨어진 칭허에서 세뇌반을 겨우 찾았다. 부친을 면회하러 했으나, 오히려 면회일이 아닌 이유로 악독한 경찰에게 거부당했다. 두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갔다. 날씨가 추웠지만 자오바오성은 옷이 없었다. 그러나 세뇌반의 ‘근무 인원’ 중에 캐묻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세뇌반에서 풀려난 파룬궁 수련생이 옷을 사서 그제야 자오바오성에게 보내주었다.

한 단락 시간이 지났으나, 사람을 석방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한단(邯鄲)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노동 능력을 잃었다는 이유로, 한단 노동교양소에서 수감을 거부해 또 현지로 되돌아왔다. 6천 위안의 돈을 갈취당한 뒤에야 그는 집으로 되돌아왔다.

2001년 11월 17일 저녁 6시가 넘어서, 칭허 현 파출소 소장 류젠궁(劉建功)은 한 무리의 악독한 경찰을 거느리고 자오바오성의 집에 불법으로 들이닥쳐, 말로는 그들 부부에게 파출소로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이 협조하지 않자, 류젠궁은 핸드폰을 걸어 칭허 현 정보과 과장 류바오안(劉保安)에게 물어본 뒤, 4명의 악독한 경찰은 들어서 강제로 그들 두 부부를 집에서 납치해 갔다. 그들 아이가 다가가서 가로막다가 또한 폭력당해 아이들은 울었다. 어린 나이에 마음과 정신적인 손상을 입었다. 어떠한 법률적 절차를 밟지 않은 상황에서, 악독한 경찰은 두 부부를 칭허 현 구치소에 불법 감금했다. 구치소 안의 인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구치소 소장(한 사람은 쉬(許)가이고, 한 사람은 위안(阮)가 였음)은 죄수를 시켜 강제로 자오바오성에게 죄수복을 입혀 사진을 찍게 했다. 그는 단호하게 사악에게 협력하지 않다가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자오바오성은 47일 동안 불법 감금당해 47일 동안 단식을 했다. 한 방울의 물도 넘기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악도는 그의 생사도 돌보지 않은 채 그를 뒷짐결박으로 16일 밤낮을 채워두었다. 2002년 1월 20일에 풀어줬을 때, 그의 두 손의 손목은 문드러졌고 손바닥은 색이 변한 동시에 찐빵만큼 부어올라, 죄수마저도 감히 알아보지 못했다. 두 손은 마비되어 지각이 없었다. 단식을 한 반달 사이에 강제로 위에 호스를 모두 7차례나 꽂았다. 두 차례 입 안의 호스에선 많은 피가 나왔다. 소장 주쩡신(朱增新)은 다른 죄수에게 지시해 그에게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하게 했는데, 막 받아온 아주 뜨거운 밥과 국물을 주사기로 위 안에 넣어 그를 데웠고 이어서 또 차가운 물을 주입해 그를 자극했다. 이렇게 뒷짐결박으로 18일 동안 묶어놓고, 음식물을 주입하는 호스를 시종 뽑아주지 않았다. 수갑은 살 속까지 패여 들어갔다. 위에 호스를 꽂고 음식물을 주입해 소화가 되지 않아 주입한대로 몽땅 배설했으며, 입술은 말라서 모습이 없었다. 구치소에서는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그를 병원으로 보냈다. 의사는 호스를 몸 안에 18일 동안 꽂아 호스가 위에 붙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감히 호스를 뽑지 못했다. 그 후 악도들은 그의 생명의 위중함을 보더니, 구치소에서 죽을까 두려워 그제야 가족에게 데려 가라는 통지를 내렸다.

자오바오성은 몸무게가 90kg이 넘었는데 당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60kg밖에 남지 않았다. 손목 위에는 또 수갑에 패여 들어간 상처흔적이 있었다. 그가 출소한 뒤, 칭허현 정보과 과장 류바오안은 또 악독한 경찰을 거느리고 그의 집과 그의 부친의 집으로 가서 교란을 감행했다.

2005년 음력 정월 14일 저녁 8시가 넘어서, 싱타이(邢台)지역의 자오X원(趙X文)이 칭허 현으로 뛰어갔다. 공안국 천수위안(陳書元)을 우두머리로 한 몇십 명의 사람이 자오바오성의 집에 들이닥쳐 집을 뒤졌고 전화기를 강탈해 갔다. 게다가 아이의 핸드폰과 대법서적을 강탈해갔으며 동시에 자오바오성과 그의 아내를 공안국으로 납치했다.

7차례나 불법 감금박해를 당해 자오바오성의 심신은 극심한 상해를 받아, 생활은 극히 어려워졌다. 나이 겨우 48세인 자오바오성은 2011년 음력 10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3년 2월 15일
문장분류: 대륙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2/15/2700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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