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궈(王金國), 남, 34세. 헤이룽장성 솽청시 눙펑(農豐)진 중학교 역사 교사. 중등사범학교 졸업. 통신으로 대학 교육 받음. 늘 시, 진의 모범근로자로 평가되었고, 시 일급 논문 평가에서 2등을 했으며, 해마다 교육 상금을 탔고 시에 가서 강의하거나 견학했다. 매년 진학율은 96%에 달했고 노래, 글 쓰기, 악기 다루기, 그림 그리기를 잘했다.
눙펑진에서는 모두가 인정하는 좋은 남편이고 존경 받는 사람이다.
1996년부터 그들 세 식구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1999년 7.20 파룬따파가 탄압받기 시작하자 그들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파룬따파가 그들의 도덕 경지를 높여주고 신체를 건강하게 해주며 영혼을 정화해주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이토록 큰 좋은 점이 있고 생명을 더욱 의의가 있게 하는데 왜 단속을 받아야 하는가?
2000년 6월 왕진궈는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려다가 솽청시 제2수감소에 갇혀 19일 후에 석방되었다. 그는 수감소에서 고문을 받아 생명이 위태로웠다.
2000년 11월 8일 파룬따파를 위해 정부에 청원하러 가려고 온 식구가 다시 베이징으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서 솽청시 제2수감소로 다시 잡혀와 보름 동안 갇혔다. ‘610’은 석방할 예정이었으나 눙펑진 지도자가 “한달을 더 수감해도 문제없다. 노동교화시키면 더 좋다”고 하여 그들은 거짓 문서를 만들어 ‘610’에 ‘노동교양에 동의한다’는 서류를 제출했다.
2000년 12월 3일 왕진궈는 제3감방에 갇혔다. 교도관 리화이신(李懷欣)은 죄수에게 이 사람은 내 고향사람이니 ‘잘 보살펴라’고 지시했다. 그 보살핌 덕에 왕진궈는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잔인한 박해를 받았다.
죄수들은 그와 다른 대법제자를 45일간 시멘트바닥에서 자게 했고 매번 저녁 식사 후 어김없이 구타했다.
한번은 왕진궈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자 부밍싱(卜明星), 류즈궈(劉志國) 등 죄수 3명이 굶주린 늑대처럼 함께 달려들어 왕진궈를 널판자 위에 누르고 있다가 다시 들었다 꽝하고 놓았다. 왕 씨는 입가에 많은 피가 났다.
또 한번은 죄수들이 구슬치기 하듯 왕진궈의 눈을 손가락으로 튕겼는데 왕 씨는 아파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왕진궈는 또 죄수들의 구두발에 가슴을 차여 아파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가 많았다.
가장 심했던 한번은 감옥의 왕초(교도소 내에서 우두머리 짓을 하며 다른 수감자들을 업신여기는 죄수) 부밍싱이 왕진궈의 양쪽 뺨을 온 힘을 다해 때린 적이 있다. 얼마나 때렸는지 왕 씨는 앉아 있지도 못하고 구토를 했는데 4일간 물도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매일 구토만 했다. 왕진궈는 심장, 폐, 신장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고 머리가 커졌으며 호흡이 곤란했고 혈뇨를 보며 피가 옷에 가득 묻어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왕진궈가 박해 받은 수 많은 고문 중의 단지 몇 가지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전한 바에 따르면, 왕진궈는 선량하여 학대를 받으면서도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밀라레빠부처가 산굴에서 수련할 때 사냥꾼 세 명이 들어 왔는데 그를 괴물로 보았다. 그 중 두 명은 나쁜 마음을 품고 밀라레빠 부처를 들었다가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고통이 심했지만 밀라레빠 부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자비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마치 그들이 악한 일을 한 뒤 감당할 더욱 비참한 결과를 본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악인은 정말로 더욱 비참한 결과를 얻었다.”
수감소는 610에 알린 뒤 왕진궈 가족에게 현금 2천 위안을 받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했다.
2001년 정월 보름 전후, 왕진궈의 가족은 그를 베이징에 데려가서 치료하려 했으나 지방정부는 사람을 파견해 하얼빈에서 막고 가지 못하게 하고 그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리하여 가족의 마지막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2001년 5월 23일 왕진궈는 내상이 너무 중하여 세상을 떴다.
가족은 솽청시 눙펑진 지도자에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베이징에 가서 진실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무엇 때문에 거짓 자료를 만들었는가?
무엇 때문에 왕진궈의 가족이 그를 베이징에 데려가 치료하지 못하게 하는가?
수감소 리화이신 교도관에게도 묻는다. 대법제자가 당신들 감옥에서 각종 고문을 받을 때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당신의 지시가 없었다면 그들이 감히 제멋대로 했겠는가?
왕진궈는 떠났다. 박해 받아 사망했으나 그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세인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안고 떠났다. 그는 유언에서 말했다. “만약 내가 인간세상을 떠난다면 그들이 박해해서이다. 나는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善)으로 돌아갈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전력을 다해 그들을 구도해야 한다. 나를 박해하는데 참여한 자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가 임종 전에 녹음한 테이프는 불행히도 유실되었다.
1999년 7월~2001년 4월 장쩌민 집단은 대법과 대법제자에게 사악한 박해를 가했다. 헤이룽장성 솽청시 눙펑진의 사악한 무리 몇 명은 장쩌민을 따라 망나니 수단으로 대법제자를 박해했다. 그 중 진 당위원회서기 바이런둥(白仁東), 당군서기 마광루(馬廣如), XX촌서기 지창칭(記張青), 파출소임시공 푸차오양(付朝陽), 교육부주임 리청광(李成光)은 대법제자를 박해한 주요 범죄자다.
갱신일: 2010-7-2310:37:00
원문위치: http://library.minghui.org/victim/i21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