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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펑민

펑민(彭敏), 남, 27세. 후베이성 우한(武漢) 대법제자. 2001년 4월 6일 박해로 사망.

이것은 장쩌민 범죄집단이 빚진 또 하나의 혈채(血債)다. 2001년 4월 8일 이른 아침, 대법제자 펑민이 억울하게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 대법제자가 우한시 제7병원에 도착했을 때 펑민의 시신은 이상하게 실종되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아본 결과, 펑민은 2001년 4월 6일에 사망했고 시신은 옮겨졌으며 그의 가족도 경찰에게 잡혀갔다고 했다. 펑민의 부친과 여 동생은 지금도 감옥에 있으며 펑민이 사망한 소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펑민은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고 진상자료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불법 체포되어 우창(武昌) 칭링(青菱)수감소에 갇혔다.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하고 감방의 죄수들에게 대법을 홍보하여 경찰에게 맞아 온 몸에 상처투성이였다. 2001년 1월 9일 펑민은 사악에게 박해당해 5번 척추가 분쇄성골절되고 경추가 압착골절되어 전신이 마비되었다. 그의 모친이 이 소식을 듣고 펑민을 집으로 데려와 매일 ‘보도, 제세’ 음악을 틀어주었고 그에게 법공부를 시켰다. 이로 인해 펑민의 몸과 정신이 좋아질 무렵 공안국폭력방지대대에서는 경찰 30여 명을 파견해 우한시 제7병원으로 그를 강제로 납치해 소위 ‘치료’를 받도록 했다.

7병원에서 경찰은 610인원과 함께 펑민을 병원2층 뼈외과 끝의 한 작은 방에 격리시켰다. 밖은 병풍으로 막고 그의 어머니와 동생 펑량(彭亮)을 강요해 간호하게 했는데 소식이 새나가는 것이 두려워 간호하라는 명의로 연금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외부와 연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창중난제(武昌中南街)파출소의 경찰을 옆방에 심어놓고 그들을 24시간 감시했다. 또 가족이 대법음악과 녹음테이프를 트는 것을 금지했고 펑민이 법공부하는 것을 막았다. 병원에 있는 기간 병원 측은 610사무실과 시공안국의 지시 하에 생명이 위급한 펑민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에게 ‘퇴원하려거든 펑민이 죽은 다음에 하라, 펑민이 죽지 않으면 그날은 퇴원할 수 없다!’고 공언했다. 이 무렵 펑민은 머리아래로 모두 감각을 잃었으며 수감소에서 받은 박해로 등은 썩어서 큰 구멍 하나가 생겼다.

2001년 3월 9일, 중앙TV방송국초점탐방촬영팀과 우한TV방송국 사람이 병원에 와서 펑민과 가족을 ‘취재’했다. 이때 병원 측은 태도가 180도로 변했다. 카메라 앞에서 펑민에서 약을 발라주고 얼굴이 잘 잡히도록 그를 도와 몸을 뒤집어 주며 취재원에게 “그들은 제일 좋은 의사, 가장 선진적인 설비, 효과가 가장 좋은 약으로 펑민에게 치료를 해줍니다.”라고 말했다. 펑민과 그 가족은 즉시 병원 측의 거짓말을 폭로했다. 그리고 펑민은 자신이 부상당하고 마비된 과정을 상세히 말했다. 그는 연공을 해서 마비가 된 것이 아니라 사악이 박해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연속 강조했다. 그러나 방송국 기자들은 들은 척도 안하고 틀에 박힌 말만 계속 물어보며 진상을 덮어 감추려는 눈치였다. 그들은 펑민의 어머니에게 질문했다. “아들이 이렇게 되어 후회 합니까?” “후회 안 합니다!” 나중에 어머니는 우리에게 “아들은 바른 법을 수련하여 박해 받아 이렇게 된 것이다. 내가 후회하지 않는 것은 아들이 바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라고 알려주었다.

2001년 3월 12일 펑민이 위급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련생들은 병원에 도착해 얼굴이 창백한 펑민을 보았다. 그는 말은 많지 않으나 의식은 또렸했다. 펑량의 도움하에 사부의 신경문 ‘강제로는 사람마음을 개변시킬 수 없다’를 읽고 있었다. 어머니는 수련생들을 1층으로 불러 수일전 수련생 천(陳)씨가 펑민을 보러왔는데 옆방의 경찰이 발견하고 전화로 패거리를 불러 천 씨를 강제로 납치해 갔는데 행방불명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들이 안전하게 병원을 떠나기를 바랬고 중앙방송국에서 취재하러 왔던 사실도 알려주며, 방송국에서 방송하기 전에 사람들이 속지 않도록 진상을 알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별할 무렵 어머니는 또 펑민이 연속 며칠간 고열이 내리지 않으며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지만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을 잊지 않고 조건만 되면 법공부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펑민의 방에서 다른 공간의 음악을 들었는데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우는 것 같기도 하고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하다며 마치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주려는 것 같다고 전했다. 2001년 4월 6일 펑민은 박해받아 사망했다.

2002년 전 우한시 ‘610’ 1처장 후사오빈(胡紹斌)은 ‘전국을 뒤흔든 펑민 사건은 내가 처리한 것이다’라고 떠벌렸다. 펑민의 어머니 대법제자 리잉슈(李瑩秀)도 2001년에 박해로 사망했다.

펑 씨네 다섯 식구는 모두 대법제자다. 1999년 7월 22일 이후 온 가족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었고 모두 각기 다른 정도의 박해를 받았다.

우창 610세뇌반은 우창2교부근의 장강변에 있다. 한 무리 설득자와 하수인을 고용해 ‘진선인(真善忍)’ 신념을 견지하는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하고 있다. 파룬궁 수련생 40여 명을 납치했고 차이밍타오와 펑민의 어머니 리잉슈가 그곳에서 박해 받아 사망했다.

펑민의 아버지 펑웨이성(彭偉勝)은 불법노동교양기한이 반년 초과된 후 현재 또 세뇌반에서 계속 박해받고 있다. 가족 두 명이 받해 받아 사망한 상황에서 사악의 잔혹한 학대 하에서 그는 한 대법제자의 반석과 같이 견고한 바른 믿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사악의 허완(何灣)노동교양소에서 그는 시종일관 신념을 견지하여 사부의 제자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2월 중순, 우한시의 일부 대법제자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현재 가오비전(高碧珍), 우커옌(吳可豔)등 15명이 불법체포된 걸로 알고 있다.

갱신일: 2010-7-23 8:52:00

원문위치: http://library.minghui.org/victim/i17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