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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쿵칭황

쿵칭황(孔慶黃),남,33세,이족,윈난(雲南) 젠수이(建水) 사람. 윈난대학 경제학과 학사, 경제사, 공무원, 젠수이 현 린안(臨安) 진 부 진장으로 5년 근무. 그는 1997년 8월에 수련을 시작했고 법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겸손하고 온화하여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없으면나도 없다. 대법이 우주의 중생을 만들었다. 나의 건강한 신체와 선(善)을 향하는 깨끗한 마음은 모두 사부님이 주셨다. 대법은 또 자신을 훼멸시키는 일은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했다.나는 사부님의 법에 따라 심성을 엄격히 지키고 자신이 연공인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쿵칭황은 7.20 이후에도대법 수련을 견지했고 수시로 선혈과 생명으로 대법을 수호할 준비를 했다.

2000년 4월 7일 진 인민대표대회에서쿵칭황은 산아제한계획 회의를 마친 후, 사람들에게 대법을 홍보하고 자신의 심득체험을 얘기했다. 연공 후 병이 제거되고, 도덕, 인생관, 세계관이 크게 변하여 자신이 속인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또 법공부하는 중에서 심성을 제고하여 사회의 부패한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고 했다. 파룬궁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신체를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심성을 엄격히 지키고 자발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일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아야 한다… 이런 것은 모두 리훙쯔(李洪志) 사부가 대법에서 말씀한 것이다.사부는또 사람에게 선을 향하고 반본귀진(反本歸眞)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쿵칭황은 사람들에게 파룬궁은 불법(佛法)이고 세계에서 가장 현오하고 초상적인 과학이라고 했다. 쿵칭황은 또 현재 언론에서 대법과 사부에 대한 보도는 모두 날조한 것이라며, 사부는 자비하고 중생을 구도한다고 했다. 그는 선량한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정확히 대하기를 바랬다.

회의에서 그는 선량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따라온 것은 그에 대한 감금과 사상 전향작업이었으며 재산을 몰수당해 사부의 책과 사진, 비디오 테이프, 녹음 테이프를 빼앗겼다. 4월 9일 그는 불법으로 수감소에 감금되어 부 진장 직위를 박탈 당했다.

4월 중순, 쿵칭황의 부친은 아들이 갇혔다는 말을 들고 충격으로 그날 사망했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쿵칭황이 가족도 몰라보고 마비되어 감각이 없다며 대법, 사부와 연공인을 욕하기 시작했다. 쿵칭황은 부인이 하는 이런 말을 듣고 일시적으로 미혹되어 5월 초에 연공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5월 9일 그는 회사에 돌아가서 신문을 배포하고 잡일을 했다. 쿵은 회사의 직업 변동에 대해 태연하게 마주하고 미소로 대했다.

6월 9일 쿵칭황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부인 왕자웨(王伽月)는 쿵칭황이 청원하러 가기 전 그의 영향을 받아 수련을 시작하고 남편이 청원하러 가는 것을 지지했다. 쿵칭황이 떠난 후 왕자웨는 집에서 감시 당했고 세뇌교육을 강요 받았다. 6월 23일 부인 왕자웨는 청원하러 가는 도중에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구치소에 갇혔다. 이날 젠수이 현의 다른 수련생 10여 명도 불법적으로 체포되었다.

6월 28일 쿵칭황은 집에 돌아온 후 불법체포되어 구치소에 갇혔다. 정부는 연공인을 통제하고 격리시켰다. 쿵은 체포된 후 줄곧 단식하여 정부가 파룬궁이 사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 했다. 단식 10여일 째 구치소는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고 그 후에는 4~5일에 한번씩 주입했다. 8월 초 구치소는 더 이상 음식물을 주입하지 않고 5 ~ 6일에 한번씩 그에게 강제로 링거를 맞혔다. 구치소에서는 8월 25일경 쿵 씨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고 무슨 원인인지 매일 피를 한 투 통 뽑아서 검사했다. 쿵칭황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9월 1일 쿵 씨는 음식을 먹겠다고 동의했고 9월 2일 혼미상태에 빠졌으며 9월 3일에 사망했다. 이튿날(9월 2일) 쿤밍(昆明)에서 전문가를 파견해 함께 검사했는데 쿵 씨의 피부가 노란색이었고 무슨 일인지 몰라 그가 중독된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거의 한 달간 대량 채혈한 결과였다.

쿵칭황의 생명이 위급할 때 지방정부는 선을 최대한도로 베풀었다며 ‘인도주의’ 기치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 전에 가족이 현 위원회에 쿵칭황을 석방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를 풀어주었더라면 그는 밥도 먹었을 것이고 그의 생명도 지켜냈을 것이지만 그들은 ‘안 된다’고 거절했다. 쿵 씨가 위급한데도 부인을 연공한다는 이유로 강제세뇌반에 감금하여 만나지 못하게 했고 임종할 때 2분밖에 보지 못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한 소위 ‘인도주의’다. 쿵칭황이 60여 일을 단식하여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병원에서는 몸을 보전해주기는커녕 매일 그의 생명을 유지하는 피를 대량으로 뽑아냈다.(5cc ~ 10cc) 그들이 의학상식을 몰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인지 쿵 씨를샘플 삼아 실험했다. 그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파쇼의 수단으로 그를 박해해 죽인 다음, 그를 치료해주기 위해 돈을 얼마를 썼다고 떠들어댔다.

그 후 부인 왕자웨가 관련 부문 간부에게 왜 쿵 씨의 피를 대량으로 뽑아서 검사했는지 질문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병원의 부서기에게도 이 일을 물어봤으나 그는 ‘모른다’고 했다.

쿵칭황이 박해 받아 사망한 후 그들은 오히려 쿵 씨가 ‘파룬궁에 빠져 법률법규를 범했고, 어리석어 깨닫지 못했으며, 잘못을 고수하며 회개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국민들과 관계를 끊었다’고 했다. 이 사건은 문화대혁명시기의 ‘적색테러’가 떠오르게 한다. 21세기인 오늘 장쩌민(江澤民)은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했지만 법률이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누가 헌법을 짓밟고 있는 것인가. 박해 받아 사망한 쿵칭황의 부인 신분으로 왕자웨는 전세계 선량한 사람이 중국대륙에서 발생하고 있는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폭행에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사악의 박해를 저지할 것을 호소했다. (2000년 11월 8일)

쿵칭황의 부인 왕자웨는 2001년에 강제노역을 당하여 심한 박해를 감당하고 있다.

리쯔헝(李自恆)은 1997년 4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젠수이 린안진 당 위원회서기로 있으면서 부 진장 쿵칭황이 대법을 수련한 후 부패와 타협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한 것을 무시하고, 몸소 박해에 참여하여 쿵 씨를 사망하게 했다. 그리고 나중에 또 TV에 여러 번 출현하여 쿵칭황이 대법을 수련하여 자살했다며 세인을 현혹시켰다.

톈진탕(田金堂)은 젠수이현 현장으로 있는 기간 쿵칭황이 박해 받아 사망한 사건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원문위치: http://library.minghui.org/victim/i8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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