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즈창(週志昌), 남, 45세, 헤이룽장 솽청 대법제자. 1999년 9월 저우즈창은 베이징에 파룬따파의 진실한 상황을 알리러 갔다가 솽청수감소로 압송되어 오랫동안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수감된 지 8개월 되던 2000년 5월 6일에 박해를 받아 사망했다.
헤이룽장 솽청시 한뎬진 인무부(韓甸鎮人武部) 부장이었던 저우즈창은 1995년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고 솽청시 파룬궁 보도소와 한뎬진 파룬궁 보도소 책임자다. 저우즈창은 청렴하여 한뎬진에서 명성이 자자한 좋은 간부, 좋은 당원이었다. 저우즈창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들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가 회사에서 받은 각종 표장장은 수십 개나 된다.
1999년 7월 22일 저우즈창은 ‘7.22’ 사건에서 불법 체포되어 솽청 제2수감소에 한 달 동안 갇혀 있다가 1999년 8월 23일 가족이 보증을 제공하여 석방됐다. 1999년 9월 9일 저우즈창은 한뎬진에서부터 베이징 중앙민원처리사무소까지 상급기관을 차례로 찾아가 청원했다. 베이징 중앙민원처리사무소 관련 부문에서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불법 체포되었다. 1999년 9월 17일 솽청시 제1수감소로 압송되어 형사구류라는 명의로 오랫동안 불법 수감되었고 2000년 5월 6일에 박해로 사망하였다. 저우즈창의 사망원인에 대해 제1수감소와 솽청시 615 사무실은 심장병이라고 하였다.
저우즈창은 생전에 신체가 건강하여 심장병에 걸린 적이 없다. 저우즈창은 사망 후 팔꿈치와 옆구리에 멍든 자국이 있었고, 머리가 이상하게 물렁했으며, 손으로 당기면 머리피부와 두개골이 분리되는 현상이 있었고, 손과 발에도 흑색 어혈이 있었다. 발목에도 상처가 나 있었고 발목의 뼈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이것은 수감소에서 장기간 박해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솽청시 제1수감소와 615 사무실은 박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의사진단서와 사망증명서도 보여주지 않았다. 목격자는 2000년 5월 6일 오전 저우즈창이 솽청시 인민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제1수감소와 615사무실에서도 이 일을 승인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전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들이 몇 시간 만에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당시 의사는 저우즈창이 오후에 병원에 실려 올 때는 이미 사망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제1수감소와 615사무실에서는 합리적인 해석을 하지 않았다.
1999년 7월 20일부터 솽청시 순경대 흉악한 경찰 장궈푸、진완즈(張國富、金婉智)는 시위원회 서기 주칭원(朱清文), 정법위원회 서기 왕수칭(王樹清)의 사주 아래 파룬궁 수련생을 미친 듯이 박해했고 이유 없이 저우즈창을 체포해 제2수감소에 감금했다. 99년 7월말 솽청시 대법제자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차례로 불법 체포되어 돌아와 솽청제2수감소에 갇혔다. 흉악한 경찰 장궈푸는 가족을 핍박해 수련을 포기한다는 서류에 서명하도록 시키고 한편으로는 돈을 갈취했다. 저우즈창은 수련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한뎬진 간부는 저우즈창이 빨리 나와서 일을 하게 하기 위해 장궈푸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상의했다. 저우즈창은 좋은 사람이고, 한뎬진 무장부에 많은 급한 일을 그가 처리해야 하므로 진정부에서 보증을 하겠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장궈푸는 파룬궁을 박해하는 데는 조금의 인성도 없는 사람이라 절대 풀어주지 않았다.
[대법제자 저우즈창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을 때 주요책임자 위잔쥔(于佔軍)은 한뎬파출소민경(밍후이왕에 이미 올랐음)이었음. 이 사건은 위잔쥔의 책임이 있으므로 나중에 함께 책임을 물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library.minghui.org/victim/i1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