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님 따라 만 리 길(사진)
글/ 미국 대법 제자
[명혜망] 편집자의 말: 이 글은 한 파룬궁 수련생이 1993년도부터 그가 사부님을 따라 중국 대륙 각 대도시를 다니면서 설법을 들은 과정이다. 그의 소박하고 상세한 문장에서 장쩌민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혹독하게 파룬궁을 대하고, 무엇 때문에 이런 엄중한 박해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는가 하는 것을 더욱 똑똑히 알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고 있다. 장쩌민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리훙쯔 선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무엇 때문에 5억 달러라는 무역 적자로 이 선생의 귀국을 인도(引渡)하며 무엇 때문에 파룬궁 수련생을 이렇게 무서워하는가. 이것은 어쨌든 그 무슨 원인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이 문장은 특수한 과도기적 역사시기에 파룬궁 창시인이 대륙에서 법을 전할 때의 많은 구체적인 실례를 상세하게 기재한 문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족하는 구체적인 답안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장은 비록 길지만 읽기만 하면 감촉(感觸)이 비교적 깊어 존경하는 독자들과 함께 향수하기 위하여 특히 이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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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輪大法 홍법9년 사진전시회 ―《정법의 길》곧 열리게 된다. 이 생기 넘쳐흐르는 지난날의 사진을 보니 몇 년간 대법이 세간에서 전해지는 중에 내 자신이 겪었던 갖가지 쓰라린 경력이 떠오른다. 나는 사부님께서 친히 지도해 주셨다. 지난 8개월의 오랜 시간을 거쳐 선별하고 제작하여 끝끝내 완성한 위대한 대법의 사진 작품을 통하여 능히 실증할 수 있는 것을 온 정력을 다 하여 조금이라도 표현하여 이를 대법에 헌납하려고 생각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병이 있어 늘 병 때문에 약을 먹었다. 그렇게 몇 년 지나니 의사와 약물에 대해서 이미 신뢰를 잃고 말았다. 92년 말 나의 신체는 급속히 나빠져 집 식구의 부추김을 받아 비행기를 타고 북경으로 와서 기공사를 찾게 되었다. 내가 찾은 기공사는 뽑아 내고 보충하고 하면서 오랫동안 치료하였으나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93년 7월 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책꽂이 속에서 《파룬궁》이란 책을 보고 본능적으로 꺼내어 보니 거기에는 연공인의 아랫배 부위에 하나의 파룬을 넣어 준다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깜짝 놀랐다. 종래로 생명의 오묘함을 어떠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는데 기공사가 능히 영혼이 있는 생명체를 만들 수 있다니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이 일은 너무나도 크다. 다시 생각하여 보니 하나의 파룬이 나의 아랫배 부위에 있으면 꼭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한시가 급하여 그 친구에게 나를 도와서 파룬궁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7월 25일 나는 베이징에서 열리는 제11기 파룬궁 전수반에 참가하였다. 이로부터 나의 수련의 길이 시작되었다.
나는 48년생으로서 불, 도, 신 및 전통 문화에 대하여 그 이름만 알았지 실질은 몰랐다. 더군다나 기공과 수련에 대하여서는 개념마저도 없었다. 비록 무신론에 대한 교육을 받았지만, 학생은 점수 얻기 만을 위하기에 신앙은 말할 수 없어 머리는 텅 비어 있었다.
11기 학습반은 베이징 공안 대학 강당에서 열렸는데 나는 20번 째 줄에 앉았었다. 제1강의 시간은 곧 나를 흡인하였다. 선생님께서 사전 문화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들으면서 속으로 놀랐다. 이러한 일들은 이 몇 년 동안에 내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었는가?
우리 이 세대들은 소녀시절에 문화대혁명을 맞이하여 인간 세상의 각종 슬프고 쓰고 매운 것,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할 정치 유희를 직접 목격하였으며, 침통한 현실 속에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정치, 권력 각종 사조에 대하여 모두 빠져 나와 냉정히 그를 관찰하고 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학습하였다. 그러나 이 망망한 세계에 대해서는 마음에 잡히는 데가 없어 어떤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무슨 표준으로 자신의 행위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은 몰랐다. 직장에서 매일 서로 다투고, 빼앗고, 서로 속이고 속이는 환경에 갇혀 지내며 마음 속으로는 아주 역겨웠다. 한가할 때면 늘 《오묘한 비밀》과 같은 잡지를 뒤적이면서 인생 이외의 문제를 사고하였다. 이 때의 마음은 세상 밖에서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고 가볍고 자유로움을 감지하곤 하였다.
오늘 한 번에 이렇게 새로운 것을 듣고 나니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았고, 아주 흥분하였다. 매 강의 시간을 나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들었으며, 매 시간이 끝나면 신체의 고통은 아주 많이 완화되었다. 나는 매일 오후마다 일찍이 길 떠날 준비를 하였다. 한 기 학습반이 결속되었다. 나는 또 한번 학습반에 참가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12기 학습반은 “우커쑹” 어느 지역에서 열린다고 하여 나는 급히 방법을 동원하여 표를 구입하였다. 우커쑹은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아주 멀었다. 몇 시간의 강의를 들은 후 나는 열이 나기 시작하였고 기침을 한번 하게 되면 목과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 말도 할 수 없었다. 노 수련생은 나보고 어떻게 고통스럽더라도 꼭 견지하라고 하였다. 3, 4일 후 열이 내렸으며 아프던 곳에 큰 덩어리가 없어진 감을 느꼈다. 그 후 나는 또 13기 학습반에도 참가하였다. 2-7차량 공장에서 열렸는데 그곳은 더욱 멀었다. 먼저 “시뺀먼”에서 차를 타고 다음 309 교외로 나가는 차를 갈아타서 종점에 도달한다. 매일 오후 4시 남짓하면 길을 떠나서 7시 반에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오면 12시가 넘었다. 3번의 학습반이 끝나니 나는 보모를 내 보내고 나 스스로 일상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기 또 한기 강의를 들었으며 선생님의 강의는 점점 더 높아져 모두 내가 종래로 들어 보지 못한 참신한 것들이었다. 그러면 믿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나는 어렸을 때 베이징 교외의 한 농촌에서 몇 년을 보내었다. 불, 도, 신 및 귀신에 대한 개념은 모두 그 때 작은 의자에 앉아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것이 고작이다. 그 때 농촌에는 전기가 없어 어린 아이들은 저녁에 늘 별들을 보았다. 온 하늘의 별들은 모두 이야기로서 매개 별마다 모두 한 단락의 기이한 전설이 담겨 있다. 일체 아름다운 동경, 일체 알 수 없는 비밀 그 모두가 너무 멀어서 미칠 수 없는 하늘 위에 있었다. 아이들이 나쁜 일을 하게 되면 할머니들은 곧 귀신으로 그를 위협하면서 인과 응보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시절의 경험은 한편으로 나의 마음 속에 종자를 심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좀 커서 학교에 가니 학교의 선생님은 이런 것은 없다고 말하였다. 도시로 들어가니 그곳 사람들은 모두 아주 현실적이어서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나도 종래로 자세히 이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 문제가 단번에 눈앞에 놓이자 그야말로 머리는 다소 띵하고 눈앞이 아찔하였다. 나는 사람의 생명은 짧고 경험 또한 유한한 것으로 무엇이나 모두 친히 가서 체험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는 선생님을 보아야 한다. 선생님이 믿을 만하면 선생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오직 선생님이 있으면 나의 눈은 항상 선생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매 하나의 목소리와 웃는 모습 매 하나의 작은 동작도 모두 눈으로 보고 마음 속에 담아 두었다. 때문에 강의가 끝나면 나는 늘 머뭇거리면서 뒤에서 걸었다. 어느 날 12기 학습반이 끝난 다음 우커쑹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 선생님이 뒤에서 걸어 오시는 것을 보았다. 옆에는 그분의 집 식구들과 또 수련생 한 명이 있었다. 그들은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차가 오니 사람들은 차 문 쪽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되도록 선생님이 계시는 쪽으로 비집고 가서 선생님과 같은 차 칸에 오르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어디에 빈자리가 있는가 살피고 일단 빈자리가 있기만 하면 다른 사람 먼저 가서 거기에 앉으려고 하였다. 내가 차 칸에 들에 와서 보니 선생님은 옆 칸에 올라타셨다. 나는 급히 두 차 칸이 연결된 칸막이 문으로 가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조금도 급해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들여 보내고 거의 제일 마지막에 올랐다. 그가 올랐을 때 그래도 한 두 자리는 비어 있어 서두르면 능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급하여 ‘빨리빨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는 조용하였으며 근본적으로 어떤 감각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비집고 자리에 앉았고 거의 그만이 그곳에 서 있었다. 나의 마음은 설렜다. 그와 우리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묵묵히 그는 어떤 마음으로 주위의 세계를 대할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점차적으로 나의 마음 속엔 하나의 글자, 바를 “正”자가 떠올랐다.
이 선생님은 어째서 이렇게 바른가, 너무 똑바르기에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인간의 어떤 표면적인 것도 가려진 것이 없고, 일체는 그렇게 진실하고 지어내는 것이 없고, 과장하는 것이 없고, 억지를 쓰는 것이 없고, 가식이 없다. 강의하는 것도 내가 본 그 어떤 하나의 강의 방식과 달리 시간이 되면 강의를 하고 겉돌지 않고 직접 강의 내용으로 들어간다. 가는 곳마다 어떤 사회 유명 인사처럼 부추기는 것도 없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뒤에서 절을 하고 읍하면서 병을 치료하여 달라는 것도 없다. 학비도 아주 싸서 10번 강의 9일에 40원을 받고 노 수련생은 또 절반이 할인된다. 후에 기공 과학 연구회가 요구하기를, 파룬궁 학습반에서 학비를 너무 싸게 받아 다른 기공 학습반에서 학비를 받아들이는데 지장을 준다고 하여 겨우 50원으로 올렸고, 노 수련생은 여전히 절반을 할인받았다. 선생님의 각지에서의 강의는 모두 그곳의 기공 협회가 초청하여 주최하였으며, 학습반을 꾸린 수입은 기공 협회와 4대 6으로 나누었다. 들어온 수입의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수행 인원의 식사와 숙박비, 여행비용을 제하고 나면 곧 얼마 남지 않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생각하였다. 선생님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고 병도 치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가?
매기 학습반 강의시간에 선생님은 사람들의 신체를 조정하여 주었다. 수련생들의 반응은 아주 컸다. 한 기 학습반이 끝나면 어떤 사람은 한평생 지녔던 병이 모두 나아져 아주 신기하다고 하였다. 신체상에서 이익을 얻어 놀랍고 기쁜 것 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일생에서 이렇게 마음이 활짝 열려 본 적은 없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일체는 모두 그렇게 투명하고, 어떤 비밀도 없고, 가깝고 멀거나 귀천이 없는 것임을 느꼈다. 인간 세상의 모든 혼탁한 변천이 우리 이 강의시간에 들어올 수 없고, 참석한 매 사람마다 서로 알지는 못하지만 마음은 한곳으로 온통 집중되어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모두 수련하려는 마음들이기에 매 강의시간이 끝날 때면 모두 떠나기 아쉬워한다. 조용할 때에 나는 다음의 自問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가”. 나는 점차적으로 선생님의, 타인을 위하는 정신과 선생님이 강의한 일체가 모두 나의 내심 속의 아주 깊고 깊은 곳과 일종 호응 혹은 일종 공명 혹은 일종 감응이 일어났음을 감지하였다. 어느 하루 나는 끝끝내 알아내었다, 그것이 곧 ‘眞’이라는 것을.
나는 일생 동안 ‘眞’을 숭상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眞’이라고 느꼈다. 이를 위하여 나는 필사적으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인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일생에서 커다란 대가를 치르느라 신심이 아주 고달팠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을 만나 묵묵히 강의를 체험하고 보니 그것은 진정으로 그렇게 고결하고 그렇게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나의 마음은 진동되었다.
사부님께서 우한(武漢) 제2기 전수반에서 설법 및 공법전수(1993.3)
베이징 13기 학습반이 결속되고, 다음 기는 우한(武漢)에서였다. 나는 계속하여 듣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 혼자 길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을 바라볼 때 너무나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비록 신체가 이미 아주 크게 좋아졌지만 그러나 원래 신체 조건이 너무나도 좋지 않아 그때 나는 보온병마저도 들 수 없는 신세였다.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뾰족한 수가 없고 나는 용기를 내어 길을 나섰다. 나의 표는 중층 침대여서 기실 오르기도 아주 힘들었다. 차에 오른 후 나는 아래 침대에 앉아 있었으나 침대 주인은 나를 쫓지 않았다. 내가 물을 마시려고 허리를 굽히니 옆 사람이 바로 나에게 물을 부어 주었다. 저녁이 되니 아래 침대 젊은이가 나보고 “중층 침대에서 잘 수 있겠습니까? 안 되면 나와 바꿉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미안하여 한번 시험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겨우 침대에 올라 누워있자니 뒤흔들리는 것이 마치 바다 너울과도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다시 내려와 그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그는 두말없이 올라갔다.
우한역에서 내릴 때 한 차 칸의 사람들이 나를 도와서 짐을 역까지 날라 주었다. 당시 나는 아주 행운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보살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우한(武漢)에서는 연속적으로 세 번의 기를 열었다. 즉 우한의 3, 4, 5기로서 제3기는 우창의 재정 학원에서, 제4기는 한커우의 시강당에서, 제5기는 우한 강철 공장에서 열었다. 우한 3기 학습반이 모두 끝나니 이미 9월 말이 되었다. 다음 기는 광저우(廣州)에서 꾸리게 되어 나는 또 광저우로 따라 가서 광저우 제2기 전수반에 참가하였다.
선생님의 매 기 강의는 모두 대체로 같았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도 않았다. 같은 문제를 강의할 때 많은 말씀은 같았으나 어떤 때에는 다른 각도로 강의하여 그 몇 마디에서 나는 단번에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들으면 들을 수록 더욱 알게 되었고, 들으면 들을수록 이 일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느꼈다. 기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부처에 대한 이해는 사람을 도와 고난을 해결하는 보살이라는 것이고, 도에 대한 이해는 악을 제거하고 선을 선양하는 의사라는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선생님의 강의가 佛과 道보다 높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곧 온 하늘의 도리인 것이다. 선생님이 능히 파룬을 만들 수 있고 선생님께서 이렇게 똑똑히 생명을 꿰뚫어 이해하고 당신의 업을 제거한다는 이것은 일반적인 기를 내보내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누구인가? 나는 긴장하여 감히 계속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일은 크기가 대단하다. 나는 나의 남편을 보고 배우라고 하였고, 또 국외에 있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여 어서 빨리 돌아와서 강의를 들으라고 하였다.
그때 선생님께서 어디에서 강의하신다는 소식만 들으면 나는 최대한 노력하여 참가하려고 하였다. 만약 한 기 한 기씩 따라 다니자면 그 번 학습반의 마지막 저녁 강의시간이 끝나자마자 곧 기차역으로 달려가서 사전에 기차표를 끊어야 했다. 당시 대륙에서는 기차표 사기가 아주 어려웠다. 한곳에 가서는 될 수 있는 한 비용이 싼 여관을 찾아 지출을 절감하여야 하였다. 어떤 때에는 멈추어 좀 휴식도 하려 생각하였으나, 매 기 학습반이 결속될 때 선생님의 말씀은 나로 하여금 격동을 금할 수 없게 하여 결심을 내리고 또 따라 가게 되었다.
톈진(天津) 제2기 학습반이 결속될 때라고 기억된다. 선생님은 처음으로, 이 대법을 여러분에게 남긴다고 말씀하였다. ‘남긴다’는 말씀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이 일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때 나는 선생님께서 이 지구에서 강의를 하시기만 한다면 하늘 끝 바다 끝이라도 될 수만 있다면 나는 꼭 참가하겠다고 결심을 다졌다. 당시 나에게는 바퀴가 달린 여행 가방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때 국내에서 볼 땐 꽤 고급스런 것이었다. 안에는 전기 가마, 쌀, 조미료, 녹음기, 테이프, 후레시, 의복, 우산 등이 있었다. 당시 나는 기름과 소금을 먹을 수 없었다. 가장 먹기 쉬운 것이 우유와 죽이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나 스스로 끓여야 했다. 이런 몸으로 선생님을 따라 다니기는 확실히 고생이 막심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학습반이 열려 강의마당에 앉아 선생님께서 강당에 오르시는 것을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 기쁨은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러 나오고 그 친밀감은 표현할 방법이 없으며, 오직 비할 바 없이 위대한 빛이 무한하게 뿌려지는 듯하였고, 인간의 일체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로지 선생님을 따라 신성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따라가고 싶은 느낌이었다. 매 한 기 학습반 최후에 선생님께선 우리들에게 심득 체험을 쓰라고 하셨으나 나는 아주 송구스럽게도 언제나 한 편도 쓸 수 없었다. 병을 떼어내고 신체가 건강하게 되어 감지덕지하다는 것보다, 마음속엔 항상 이 한 마디 말이 솟구쳤다. 바라건대 선생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같이 계시길 바라고, 선생님의 빛나는 광채로 영원히 우리 생명의 길을 밝게 비추어 주십시오.
94년 4월로 기억된다. 나는 허페이(合肥) 제2기 학습반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침대에 하루 낮 하루 밤을 줄곧 누워 있었다. 정말 지쳤다. 다음 기는 장춘(長春)이다. 장춘은 선생님의 고향이다. 속담에 걸출한 사람의 거주지가 유명하다고 했고, 선생님의 고향에 가 보는 것은 나의 오랜 소원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침대에서 일어나 또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장춘에 도착하였다. 장춘의 수련생들은 안내표식을 들고 번갈아 가면서 외지에서 오는 수련생들을 맞이하였고, 시 중심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여관에 우리를 안내했다. 그곳이 비교적 저렴했기 때문이다. 길에서 장춘의 수련생들은 열정적으로 우리들에게 정황을 소개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처음 왔는데 모두 아주 신선하다고 느끼어 피로를 깡그리 잊고 행복한 마음으로 공공 버스 차장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장춘 수련생이 손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빨리 보세요, 저곳이 바로 선생님의 댁입니다!” 우리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아주 수수한 외벽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은 벽돌 아파트로서 기껏 하여야 4, 5층이 되었다. 선생님께선 그렇게 능력이 있으신데 이런 곳에 계시다니… 이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부터 경의의 마음이 솟아올라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춘해방대로103호 서쪽건물의 4층 서쪽문이 바로 리훙쯔사부님과 모친이 장춘에서 거주하던 곳이다.
학습반은 지린 대학의 밍팡궁에서 열렸다. 외지에서 온 수련생이 많아서 선생님은 오전 9시~11시,저녁7시~9시까지 하루에 두 번씩 강의하셨다. 오전표는 일찍이 구입하였는데 저녁 표는 살 방법이 없었다. 첫날 방과 후 숙소에 돌아와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강의를 들으려 온 것이다. 선생님의 강의가 저녁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숙소에 있자니 속이 정말 답답하였다. 이튿날 강의가 끝난 다음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강당 밖의 풀밭에서 저녁 강의시간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렸다. 모두 문어귀에 서서 표를 물리는 것을 사서 들어가고자 원하였다. 시간은 일 분 일 초가 지나갔다. 우리는 무척 조바심 나게 기다렸다. 문득 한 수련생이 누가 표를 구하는가 하였다. 나는 얼른 표를 받고 그에게 돈을 주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강당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고 할 무렵 낮이 익은 노 수련생이 멀리서 달려오면서 외쳤다. “당신을 찾느라고 여기 저기를 뛰어다녔어요.” 나는 생각하였다. ‘어이구, 이 표를 보존할 수 없구나’ 짐작대로 그는 칭하이에서 한 수련생이 왔는데 처음으로 강의를 들었지만 중국어[普通話]를 잘 몰라 한번 더 들으려고 한다. 당신은 노 수련생이니 그에게 표를 양보하여 주라, 그는 칭하이에서 제일 처음으로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표를 주고 자리를 떠나 또다시 큰 문어귀에 가 서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들어갔고 강의는 시작된 지 오래되었다. 우리 표 없는 사람들은 의연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 이 때 강당의 관리 일꾼은 강당의 정문을 닫았다. 작은 문으로 드문드문 사람들이 드나든다. 우리는 모두 그 작은 문으로 몰려갔다. 작은 문과 멀지 않은 곳에 한 젊은이가 서 있는데, 나는 그곳에 묵묵히 서 있는 그를 보았었다. 내가 그의 옆을 지날 때 그는 갑자기 표를 요구하는가를 물어왔다. 나는 멍해 있다가 요구한다고 말하자, 그는 나에게 표를 주었고, 나는 손에 움켜쥐고 있던 그 칭하이 사람이 준 돈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또 표가 있게 되었다! 옆에서 부러워하는 눈길을 보고 나는 미안한 감을 느끼고 옆에 있는 늘 학습반을 따라 다니는 쩡쩌우의 한 젊은이를 보고 그더러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는 이것은 응당 당신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니 당신이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때 밍팡궁 지하실에서는 무도를 하였는데 무도표를 사 가지고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강당으로 가서 능히 강의를 들을 수 있었으나 누구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탠진의 젊은이는 우리가 이런 속임수를 써서 들어가서 강의를 듣게 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들어가서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강당 문을 지키는 사람이 수련생들의 간절하고 끈질긴 모양을 보고 감동되어 문을 열어 모든 사람들을 들여보냈다고 하였다.
그 번의 학습반에서 우리는 여러 조로 나누어 선생님과 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여러 사람들은 자각적으로 조를 묶고 선생님은 여러 사람과 차례로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은 매일 집에서부터 걸어서 강의하러 다녔다. 어떤 수련생은 차가 있어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고자 하여도 선생님은 모두 간곡히 사절하였다.
우리가 머문 여관은 지린 대학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때 공공 버스표는 아주 싸서 몇 십 전이였다. 어떤 수련생들은 매일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어느 한 번 나는 한 수련생에게 이렇게 먼 길을 어째서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의 아내가 지지하지 않기에 한푼한푼 절약하여 돈을 모으면 곧 다음 기 학습반에 참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아주 감동을 받았다. 이것은 선생님이 고향에서 꾸리는 마지막 학습반이다. 마지막 강의가 결속 될 때 선생님께서는 간곡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나와 몇몇 수련생들의 열차표 발차 시간은 이제 반시간도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은 계속하여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싶어했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 밍팡궁을 떠나 길가로 나왔을 때에는 십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 열차 시간을 놓치면 나는 아주 번거로워지리라고 생각했다. 표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산 것인데 보통석으로 탠진에 가서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를 갈아타야 하였다. 택시에 올라타서 기사더러 차를 빨리 몰아 달라고 부탁하여 십 분에 도착하였다. 택시는 역전 광장의 변두리에 섰기에 플랫폼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은 시간은 몇 분 안되고 어느 플랫폼인지도 모른다. 탠진의 젊은이가 나의 무거운 상자를 들고 날듯이 달리고 몇 사람은 짐을 어깨에 둘러메고 달렸다. 무엇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역전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플랫폼으로 달려갔다. 틀리지 않았다. 탠진의 젊은이가 열차에 발을 들여놓고 푹하고 꼬꾸라졌다. 순간에 열차는 떠났다. 그 날은 정말 기적이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5월 29일 청두(成都)에서 학습반을 연다고 한다. 전번 기는 충칭이었다. 나는 이전에 충칭에서 학습반을 열지 않았기에 파룬궁 보도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학습반을 따라 다니며 나는 선생님께서 그렇게 노고가 크신 것을 보았다. 탠진(天津)에서 학습반을 꾸릴 때 든 여관은 20몇 원으로 목욕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강의를 듣고 돌아가서 쉬고 잠을 자는 것이지만 선생님께서는 24시간 우리를 조정하신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억지로 선생님 계시는 곳에 찾아가서 절을 하면서 일어나지 않고 선생님 더러 자기 집사람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며 선생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여도 듣지 않는다. 이 많은 중생을 보노라면 어떠한 마음의 사람들도 다 있어 노수련생들은 모두 아주 괴로운 나머지 이후로는 선생님의 곁으로 가지 않고 선생님께서 더 많이 휴식하실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당시 나의 남편은 청두에서 사업하였다. 나는 이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무엇을 좀 도와야 할 것이 있겠는가 하여 먼저 청두로 갔다. 나는 청두에서 기공 협회를 찾아가 나는 차량을 지원할 수 있고, 무슨 할 일이 있으면 모든 노력을 다 하겠다고 하였다. 기공 협회는 스스로 손익을 책임지는 것이기에 그들이 학습반을 꾸리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아주 인색하였다.
그 날 선생님께서는 차에서 내리셨고 같은 차에는 많은 수련생들이 충칭에서 따라 왔다. 이미 5월 하순이라 남방은 아주 더웠다. 차에는 에어컨이 없어 모두 아주 피곤해 보였다. 수행 인원은 큼직큼직하게 묶은 책《파룬궁》(수정본)을 지고 있었는데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하였다. 기공 협회에서는 택시 한 대를 보내 왔다. 선생님께선 수행 인원들더러 물건을 싣고 먼저 가게 하였다. 나의 남편은 정류장에서 차를 몰고 역 출구까지 가 선생님의 걸음을 줄여 드리려고 생각하였다. 차가 정차장을 금방 벗어나자 갑자기 역 앞의 사거리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물샐틈없이 차가 모여들었다. 다행이 나의 남편 차는 수입차여서 자동으로 변속하기에 발진이 빨라 온갖 애를 다 쓴 끝에 차들의 포위를 빠져 나왔다. 어찌도 마음이 조급하였던지 입에는 물집이 다 생겼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선생님은 역 앞에서 40몇 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마음 속으로 어찌나 죄송했던지 몇 일 동안 안정되지 않았다. 후에 선생님께선 이것은 교란이라고 말씀하시며, 오는 길에 이런 시끄러움이 아주 많았다고 하셨다.
청두(成都) 학습반은 한 접대소 강당에서 진행 되었다. 선생님의 학습반은 종래로 광고하지 않았다. 그때 각종 기공반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첫날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강의가 다르다는 소리를 듣고 소식이 재빨리 펴져 강의가 결속할 때에는 이미 800여 명이 되었다. 매번 강의가 끝나면 나의 남편은 차를 몰고 선생님을 여관으로 모셔갔다. 사람들은 모두 잠시 지체하며 선생님께서 차에 오르신 다음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경감시켜 드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마음으로 아주 기뻤고 위안이 되었다.
우리들의 학습반은 독립적이다. 사회상의 누구와도 교섭하지 않으며, 다만 기공 협회에서는 돈만 받는다. 선생님께서 공을 전수하시는 과정에서 노정, 숙식은 모두 자신이 안배하기에 정말 고생하신다.
청두에서의 그 나날들을 나는 평생 두고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따라 많은 곳을 다녔다. 첫날에는 문수원(文殊院)으로 갔다. 우리의 차는 앞에서 달렸다. 같은 차에 홍콩의 한 상인이 동승했다. 그는 청두에서 학습반을 꾸린다는 말을 듣고 줄곧 청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중국어를 잘하지 못하여 강의를 듣는데 지장을 받았는데 선생님께선 가는 길에 그에게 해석하여 주셨다. 차에서 내렸다. 뒷차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먼저 큰문으로 들어갔다. 선생님께선 앞에서 걸으셨다. 문에 들어서니 문수원 양 옆으로 4대 금강이 서 있었다. 선생님께선 뒤를 돌아보시며 내가 강의할 때 그들이 모두 현장에 있었다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은 어째서 이렇게 보기 흉측한가하고 여쭈어보니 선생님께선 그들의 위력은 대단하다고 말씀하였다. 그 때 사찰은 아주 혼란스러워서 여우, 족제비, 귀신, 뱀 무엇이나 다 있었다. 선생님께선 가는 곳마다 청리 하셨는데 손만 한 번 휘저으면 되었다.
기세가 웅장한 “파룬따파” 글자를 새기다(중국 우한, 1999년 3월 27일)
며칠 후 선생님은 칭청싼(靑城山)에 갔다. 동행한 이들로는 따롄 보도원, 꾸이쩌우 보도원, 우한 보도원과 기타 몇몇 수련생이었다. 그때 나는 갑자기 옛날 사람들이 말한, 산은 높지 않지만 신선이 있으면 영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뜻밖에 나는 이 신체로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 왔다. 돌아온 후 나의 남편과 동료는 아주 놀라워했다. 청두 학습반이 결속한 후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 러산과 어메이산(峨眉山)으로 갔다. 러산의 나한당에서 동행한 한 수련생이 달려 와서 선생님께 말하기를 XX 보살(지금 이름이 기억나지 않음) 이 선생님을 보고 아주 미안하여 선생님께 인사를 하였다고 말했다. 선생님께선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돌아갈 때에 그들은 아주 멀리까지 배웅할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나는 하나 하나의 흙으로 빚은 조각상을 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한당을 나올 때에 뒤에서 한 중이 이 무리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말하였다. 분명 그는 무엇인가를 보았을 것이다. 어메이싼은 확실히 기타 곳과 달랐다. 진딩(金頂)에서 나는 처음으로 천목을 진실하게 감각하였다. 선생님과 같이 다니니 신기한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의 머리는 정말 견디어 내기 힘들었다. 나는 《서유기》와 기타의 전설을 생각하고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다. “어째서 신화 이야기가 모두 진실한 것입니까?” 선생님께서는 신화 이야기도 아무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다음 기는 쩡쩌우였다. 어렵게 침대표를 샀다. 나는 선생님과 같은 칸을 타고 쩡쩌우(鄭州)로 향했다. 떠나는 날 날씨는 매우 무더웠다. 역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역내는 몹시 붐비었다. 선생님도 우리와 같이 물건을 들었는데, 온몸이 비 오듯 땀으로 젖으셨다. 나의 마음은 아주 괴로웠으나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이윽고 차에 올라섰는데 차량이 임시로 설치해놓은 침대 칸임을 그제서야 알았다. 다만 앞에 칸과 또 다른 한 개 부서(局)의 차 칸만이 임시 칸이 아니었다. 열차는 청두 부서의 것이고 우리의 침대 칸은 쩡쩌우 부서의 것이었다. 때문에 앞의 열차 칸에서는 우리 차 칸에 일체를 공급하지 않았고 심지어 물도 주지 않고, 앞차 칸과 통하는 문마저 잠가 버렸다. 이 차칸에는 또 일부 수련생들도 동승해 있었다. 나의 마음은 아주 조급했다. 열차 운행 중에 먹을 것은 라면 밖에 없는데 뜨거운 물도 없이 되겠는가? 나와 동행한 수련생은 열차가 정차 중일 때 얼른 내려서는 앞차 칸으로 가 더운물을 담았다. 그러나 돌아올 겨를이 없어 다음 역에서 차가 선 다음에야 돌아 올 수 있었는데 그가 가져온 물은 마실 물 밖에 안되었다. 선생님께 매 끼니마다 라면 한 그릇으로 대접하였다. 선생님과 우리가 같이 산 차표는 모두 6장으로, 이 차 칸의 가장 마지막 좌석이었다. 차가 화싼(華山)을 지날 때 선생님은 열차 끝 부분에 서 계셨다. 그 차 칸의 연결 통로 부분에는 유리가 없었다. 선생님께선 그곳에 오랫 동안 서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하여 호기심을 갖고 걸어가서 바라 보았다. 선생님께선 나에게 화싼의 많은 수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산에서 내려와 선생님을 보러 왔으며 열차를 따라 오고 있다고 알려 주셨다. 선생님은 그들에게 물었다. “나의 제자들이 어떻습니까?” 그들 어떤 분은 아주 오래 수련하였지만 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줄곧 쩡쩌우까지 따라가서 설법을 들었다. 후에 선생님은 강의에서 그 날의 이야기를 하셨다.
쩡쩌우 학습반 조건이 가장 형편없었다. 기공 협회에서는 방치되어 있던 체육관을 제공했다. 중간은 낡은 마룻바닥이고 사방의 관람석은 벽돌로 쌓은 층계로서 파괴되어 온전하지 못하였고, 오래된 창문은 어떤 경우 유리조차 없었다. 선생님께서 이런 조건에서 강의를 하시게 되니 정말 말이 아니어서 노수련생들은 모두 한숨만 내쉬었다. 6월 11일 학습반을 시작하였다. 며칠 후 주말 그 날은 오후 4시에 수업이 있었는데, 시간이 중반 쯤 지났을 때 돌연히 광풍이 세차게 불어오며 하늘과 땅이 다 같이 어두워지더니 큰비가 우박과 함께 천지를 뒤덮으며 쏟아졌다. 비는 창문으로 뿌려지며 몰아쳐왔다.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은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호두 크기 만한 우박이 체육관의 철기와를 두드려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나는 광풍, 폭우, 우박 또 번개가 한데 뒤엉킨 이런 장면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나는 교단의 왼쪽 마룻바닥에 앉아있었다. 나는 노 수련생이므로 심성을 지켜야하지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 관람석에서 내려 온 사람들에게 자리를 넘겨 주었다. 우박은 더 요란하게 내리치듯 쏟아져서 마치 지붕을 뚫으려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의 교단 위 지붕이 뚫려 빗물이 줄줄 흘려 내리기 시작했다. 연이어 스위치가 떨어지고 전등이 꺼져버려 실내는 온통 어두컴컴하게 되었다. 이 일체의 기이한 일이 발생한 데는 오직 몇 분이란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은 선생님을 바라보았고 어떤 이는 조용히 앉아 가부좌를 하였다. 나는 마음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하고 조급하게 생각하였다. 그때 “누가 위에 있는가?”하는 선생님의 외침이 들렸다. 선생님을 바라보니 두 눈을 감으시고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가슴 앞에 놓았다. 옆에 있는 수련생들은 눈을 떼지 않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손을 빨리 보라고 한 수련생이 말하였다. 잠시 후 선생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물건을 손에 잡은 것 같았다. 다음 탁상 위에 있는 식수병을 열고 물을 마시고 손의 물건을 병 안에 넣었다. 이때 비가 멎고 태양이 나타났으며 햇빛이 체육관 실내로 비쳐 들어왔다. 여러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하였다. 그 다음 선생님은 대수인(大手印)을 하셨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주 큰 문제를 처리하였으며 당신들을 위하여 아주 많은 것들을 떼어 버렸다고 하셨다. 이때 하나 하나의 전등이 켜져 계속 강의가 진행되었다. 사후에 늘상 학습반을 따라 다니는 쩡쩌우 수련생이 증언하기를, 자기는 당시 공제실에 있었는데 스위치가 떨어진 후 선로에는 줄곧 전류가 없었지만 전등은 하나하나 켜졌다고 말하였다. 그 날 강의가 끝난 후 거리에 나와 보니 적지 않은 나무들이 부러져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잡고 물었다. “금방 벌어진 일은 당신들 때문이 아닙니까?” 일반 사람들이 모두 이런 일을 아는 것을 보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이튿날 쩡쩌우 신문에는 많은 곳의 지붕이 날려 갔다고 보도하였다. 기상국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으며 사전에 전혀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고 말하였다. 기공협회 주최자는 오늘 자신이 시야를 크게 넓혔다고 하였다. 이튿날 쩡쩌우시 시장이 직접 강당을 찾아와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선생님과 악수하였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와 그의 며느리도 우리의 학습반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학습반은 지난(濟南) 제2기였다. 지난 체육관은 3,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빈 좌석이 없었다. 지난 학습반에서 선생님은 아주 상세히 강의하셨으며 이후에 발생할 일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다음 기는 따롄(大連)이다. 선생님께선 여러 사람 모두가 다 따롄으로 가지 말기를 희망하셨다. 따롄은 막힌 골목이고 열차가 적으며 표는 이미 다 팔렸다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30일 그 날에는 비행기로 따롄을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 번 선생님은 가는 길에 많은 저해를 받았고 마의 교란이 아주 심하여 선생님은 부득불 배를 타고 바닷길로 간 것 이었다.
따롄 보도원이 청두에서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이 선생님과 같이 찍은 사진 위에 용이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아주 기이하게 생각하여 따롄에 가면 보여 달라고 하니 그는 동의하였다. 이번에 따롄에 가서 나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에게 보여 달라고 졸랐다. 어느 하루 그가 그 사진을 가져 왔다. 내가 사진을 보니 정말로 그들과 선생님께서 선 뒤쪽 하늘에 두 마리의 용이 앞뒤에 가지런히 있었다. 머리는 크고 코와 눈의 윤곽도 아주 똑똑하였다. 또 위에는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또 나에게 두 자루의 보검을 가리키며 보라고 하였다. 내가 보니 아주 작지만 똑똑하여 분간할 수 있었다. 칼은 칼집에서 나와 있었다. 나는 망연히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는 사진은 한 장 밖에 없다면서 필름을 가지고 가서 현상하려 하였으나 현상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의 아들은 어떻게 말하여도 믿지 않고 사진을 찍은 곳에 20여 번이나 가서 고찰하였으나 마지막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 번 제10번째 강의에서 물음을 해답할 때 한 수련생이 《파룬궁》 책을 볼 때 두 보검을 본 것을 여쭤 보았다. 선생님은 “내가 우주 중에서 갖고 왔는데 위력이 비할 바 없습니다.”고 말씀하셨다.
8월5일에는 하얼빈에서 학습반을 열었다. 지점은 하얼빈 아이스 하키장이었다. 그때 아이스 하키 장은 채 완공되지 못하여 3면에는 좌석이 있었지만 한쪽 벽은 베니어 합판을 붙이었다. 아이스 하키장의 공사 작업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공반에 참가하였다는 말은 종래로 들어 보지 못하였는지라 그들도 와서 강의를 듣기도 했다. 어느 하루는 강의가 시작되기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장내를 한 바퀴 돌면서 여러 사람을 문안하였다. 선생님께서 수련생 앞으로 갈 때 선생님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련생들은 한꺼번에 주욱하고 일어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선생님을 향하여 경의를 표시하였다. 선생님께서 앞으로 가시면 앞의 수련생들이 또 주욱 일어섰다. 이렇게 선생님이 한 바퀴 도실 때 수련생들은 정연하게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것이 기복을 이루어 그 장면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다. 그 시각 온 장내에는 신성함과 숭고함이 충만하여 수련생 자신들마저도 모두 어리둥절해졌는데 이것은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것이다. 내 곁에 처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온 한 분이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아야, 종래로 이러한 장면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 어떤 국가 지도자가 와도 모두 불가능한 것입니다!”
연길 학습반은 연길 체육관에서 열렸다. 개최를 위해 열심히 움직인 분은 연길에서 제일 처음 타지에 가서 강의를 들은 조선족 수련생이었다. 그는 고향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의 사업 단위의 70% 되는 사람들이 학습반에 참가하였다고 했다. 그번 기의 마지막 날 조선족 수련생들은 산뜻하고 아름다운 민족 복장을 입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복장은 그들의 가장 성대한 예절로서,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선생님을 배웅하기 위함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간단한 의식을 거행하였고 선생님께선 수입 7천 원 전부를 연길 적십자회에 증정하셨다.
그 날 나는 강의실에서 나와 곧장 열차역으로 달려가서 도문강 1호를 타고 장춘으로 간 다음 차를 갈아타고 하얼빈으로 갔다. 전번 기 하얼빈 학습반에서 신수련생 한 분이 비디오카메라를 빌려 가지고 녹화하였는데 나한테도 한 부 주겠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녹화기를 모두 살 수 없었으며 녹음기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주 적었기에 나는 빨리 가서 찾아야 하였다.
하룻밤 열차를 타고 이른 아침 장춘에 도착하였다. 나는 짐을 들고 다니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지하 도로 어귀에 잠시 멈추어 서서 짐 상자를 세워 놓고 숨을 몰아 쉬면서 뒤를 돌아다 보니 선생님께서 뒤에 서서 자애롭게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기쁘기도 하고 감동되기도 하였고 또 선생님이 나를 도와 짐을 들까봐 (주: 이것은 수련계의 사부와 제자 관계의 계정(界定)과 수련 방식에 관계됨) 황망히 말하였다. “선생님, 저의 일에 관계하지 마십시오. 선생님께서 먼저 가십시오. 저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저는 정상적으로 길을 떠나 다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앞으로 가신 다음 나는 비로소 짐을 한 계단 한 계단씩 옮기기 시작하였다. 나는 짐을 끌고 줄을 서서 출입구를 나선 후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선생님께선 앞에서 내가 역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의연히 그렇게 자애롭게 나를 바라보시고 있어 당시 온 몸에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 정말 선생님 앞에 달려가 엎드려 절하고 싶었지만 주위에 사람이 많고 선생님 곁에 또 수련생이 있어 달리 방법이 없어 선생님께 허스를 하면서 “선생님 저 때문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날 나는 순조롭게 하얼빈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기적과 같이 북경으로 돌아갔다.
몇 달 후 12월 21일에 꽝쩌우에서 제5기 학습반을 꾸리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최후의 한 기였다. 그때는 이미 파룬궁이 아주 넓게 전파되었고 또 아주 빨리 전파되었다. 거기에다 몇 달 동안 학습반을 꾸리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은 손꼽으며 학습반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또 마지막 기라고 하니 뚱베이, 씬쟝 등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두 찾아 왔다. 도를 얻기 위한 이 생명들의 가장 큰 일 중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아주 많은 일화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너무 일찍이 와서 호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강의 기간 중의 생활비를 유지하기 위하여 매일 식사비용을 2원 씩 썼다. 광저우에서는 2원을 가지고는 배불리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북경의 수련생들은 자기의 돈을 내놓아 매 사람에게 100원씩 나누어주었다. 뚱베이 한 여자아이는 대중형 기업이 생산을 중지하여 수입이 없기에 채소를 팔아 번 돈으로 강의를 듣기 위해 왔음에도 얼마 되지 않는 돈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다. 또 한 형제는 이불짐을 둘러메고 여행의 괴로움을 겪으면서 동냥하다시피 하며 학습반에 왔다.
사부님께서 광저우 제2기 전수반에서 설법하고 공을 전하다(1993)
듣는 말에 의하면 광저우 제5기 학습반에 5천 여 명이 참가하였다 하는데 그 숫자는 가능하게 더욱 많을 것이다. 광둥성 기공 협회에서는 일찍 표를 다 팔았다. 나의 표는 광저우에 있는 친척에게 부탁하여 10월에 미리 사 둔 것이다. 후에 온 수련생들은 표를 살 수 없었다. 첫날 강의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 체육관 앞의 광장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500여 명이 표가 없다 하였는데 체육관 직원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을 초과하여 입장시킬 수 없으며 통로에는 사람이 앉을 수 없다고 하였다. 북경의 일부 수련생들은 신 수련생들에게 표를 양도하였다. 그들이 표를 교환할 때 쌍방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가득했고 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격동의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표가 없는 수련생들은 체육관 문 앞의 광장에서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은 체육관 사업 관계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들은 전례를 깨고 옆 칸의 문을 열어 동시에 녹화하는 텔레비전을 연결하여 밖에 있는 모든 수련생들이 들어와서 강의를 시청할 수 있게 하였다.
광저우 제5기 학습반은 전에 없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로 보아 사람들이 법을 구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러한 법을 얻고자하는 중생들의 각오가 깨어나 열린 것이기에 그들이 나타내려는 사부님에 대한 경의 역시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길 없는 것이었다. 어느 하루는 수련생들이 아주 일찍 왔었다. 그들은 체육관 정문에서 강당으로 통하는 길 양 옆에 겹겹이 서서 중간에 한 갈래 길을 남겨 놓은 채 그렇게 조용히 서서 줄곧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선생님께서 오시니 사람들은 무리 지어 선생님을 에워싸고 선생님께 한없는 경의를 표시하였다. 체육관 직원들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러 나와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은 수련생들에게 당신들의 선생님은 누구인가 물어왔다. 체육관에서는 큰 일이 적지 않았지만 이러한 장면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광저우 제5기 학습반은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여러 사람들은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하는 것을 알았으며 자기가 걸어가야 할 수련의 길이 무엇인가도 알았기에 모두 결심을 견지하였다. 나의 아이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93년도 말에 귀국하여 광저우 제3기 학습반에 참가하였으나 미국으로 돌아 간 후 날마다 견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5기 광저우 학습반에 참가한 후 그녀의 마음에는 진동이 아주 커서 미국으로 돌아 간 후 혼자서 날마다 연공을 견지하였으며, 또 주위의 사람들에게 대법을 소개하였다. 후에는 어떠한 고난과 좌절에 부딪혀도 수련하려는 그 마음이 결코 동요되지 않았다.
광저우 제5기는 이 선생님이 중국 대륙에서 꾸린 제일 마지막 학습반이었다. 그 후 몇년동안 파룬궁은 중국에서 보급되는 것이 고조에 올랐었다. 그 번 학습반에는 미국, 홍콩과 또 유럽 일부 나라에서 일부러 강의 들으려 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돌아가서 그 곳에서 제일 처음 시작하는 파룬궁 수련생이 되었다. 이 수련생들은 이후 파룬궁의 세계 각지 홍법 활동 중에서 모두 아주 많은 사업을 담당하여 그들이 응당 일으켜야 할 작용을 발휘하였다.
8년 이래 내가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보면 대법이 전해질 때를 맞추어 친히 선생님의 설법을 공손히 들을 수 있었고 친히 선생님이 공을 전수하시는 것을 받을 수 있었던 이것은 지극히 경하할 일이다. 이것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지극히 진귀한 기연인 것이다. 비록 이 몇 년 이래 아주 많은 고생을 하였고, 아주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것은 예전의 내가 막무가내로 질병의 시달림을 받던 그 때와는 마음이 완전히 같지 않은 것이다. 자기가 기꺼이 고생을 사서 수련하는 것을 통하여 몸에 있는 더러운 것들이 한 덩어리 한 덩어리씩 떨어져 나가는 것을 똑똑히 감수할 수 있었다. 지금은 온몸이 활력으로 넘쳐흐르고, 생명은 희망으로 충만되어 광활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기실 생명은 원래 아름다운 것이다. 오직 우주의 법리를 모르기 때문에 미혹 중에서 적지 않은 업을 쌓아 자신을 고통의 심연에 빠뜨린 것이다. 선생님께서 우주의 진법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 우리의 신체를 청리하여 주시며, 법륜과 일체 수련하는 요소를 넣어 주시기에 우리들은 능히 대법 중에서 수련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신심은 끊임없이 승화하게 된 것이다.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은 연공하는 사람을 보고 아주 고통스럽다고 여기겠지만 연공하는 사람은 아주 행복한 것이다. 우리들은 향상하는 하는 생명이며 능히 천지와 같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것은 그저 오직 사람의 아름다운 소망일 뿐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도리어 확실하고도 확실하게 그것을 체험하고 실행하는 이 길을 걷는 것임을 안다. 우리는 정말로 고해를 뛰쳐나와 반본귀진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 이미 아주 길다.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그 무엇을 나타내자고 한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수하시는 것이 너무나도 쉽지 않았으며 법을 전하신 이 9년 이래 일 분 일 초도 멈추신 적이 없었다. 우리들은 많고 많은 것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에도 그것을 영원히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분의 품격은 숭고하고 위대하며, 그분의 지혜는 광대하고 광활함을 사람의 언어 내포로는 그 만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99년 7월, 대륙의 방송국, TV에서는 미친 듯이 요언을 날조하여 비열한 수단으로 사람의 나쁜 마음을 꾀어내었다. 속인은 말하지 않더라도 어떤 수련생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것은 너무나도 황당하고 가련하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추측할 수 있으며 사람의 도리로 불가의 도리를 평가할 수 있겠는가?
법이 건곤을 바로 잡는 최후의 시기에 나는 내가 걸어 온 길을 회상하며 그것을 또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자만하지 말며,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한결같이 사부님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기 위해서이며, 자기를 위하고 더욱이 우주 중생의 영원한 미래를 위해서이다.
(2001년 4월 뉴욕 법회 발언고 )
소중한 회억, 마음에 새긴 가르침
글/ 광우(光宇)
[명혜망 2002년 11월 6일] 1994년 4월, 여동생은 나에게 “파룬궁이 진저우(錦州)에서 학습반이 열리니 꼭 오세요.”라고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알고 지내던 한 노 비구니에게 “파룬궁이 학습반을 여는데 불법(佛法)을 이야기 한데요. 사찰에 출가하신 지 이미 이렇게 오래되셨는데 불법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라고 물어보았다. 비구니 스님은 “무엇이 불법인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저우로 가서 법을 듣기로 약속하였다.
그 날, 마침 어떤 여자가 비구니 스님을 따라 출가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학습반에 참가하게 된 일을 모르고 있었다. 나이든 비구니가 “그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인연에 맡기시지요.”라고 말씀드렸다. 결국 나의 이 한 마디에 그녀는 우리와 함께 진저우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병이 많았고 후두암 등에 걸린 지 7년이나 되어 갈증을 모르고 살았으며 땀이 나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발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모두 끈끈한 점액이었다. 나중에야 나는 사부님을 만나뵙기도 전에 사부님께서 이미 내 몸을 청리해주시기 시작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진저우에 도착하여 우리는 학습반을 찾아갔다. 사부님께서 강연대에 나타나시자 내 마음속은 얼마나 격동되었는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40여 년이나 소식(素食)을 해온 그 여자분은 내 옆에 앉아서 “전 정말로 관음보살을 보았습니다. 13∼14세 모습에 금으로 된 귀걸이를 끼고 있었는데 장엄하기 이를 데 없어요. 선생님께서 어디까지 강의하시면 거기에 나타나요. 불법(佛法)을 이야기하시면 바로 부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관음을 이야기하시면 바로 관음보살의 형상이 나타나요. 그리고 손으로는 끊임없이 다양한 색깔의 빛발을 내보내고 있어요. 눈꽃 같은 파룬(法輪)들이 온 마당에 가득해요.”라고 말했다.
나이 든 이 거사는 출가하면 관음보살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신불(神佛)이 그녀에게 대법과 인연을 맺으라고 점화해준 것 같았다. 나중에 그녀는 나에게 “나는 출가하지 않을 겁니다. 파룬궁만 전일하게 수련할래요. 선생님은 부처님이에요. 중생을 널리 제도하러 오셨어요.”라고 말했다.
좋은 인연이 맺어지면 집이 곧 절이된다. 부처님께서 오시어 널리 제도하시니 금광대도(金光大道)였다. 제2강의를 다 듣고나서 함께 온 비구니 스님은 선생님께서 강의하신 내용이 불법수련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출가한지 이미 여러 해 되었지만 자신이 어떤 법문을 수련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일 마지막 강의가 끝난 후 수련생들은 쪽지를 제출했고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문제를 해답해 주셨다.
비구니 스님이 계속 울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선생님께 문의드리러 갔다. 당시에 사부님께서는 강단 우측의 쇼파에 앉아 계셨으며 따뜻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사부님 앞에까지 걸어가서는 “선생님, 한 비구니가 왔는데 그녀는 어찌 할지 몰라서 울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가서 그녀에게 모두 같다고 알려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막 가려고 하자 사부님께서는 “가서 그녀를 데리고 오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스님을 찾아 강연대 문 앞까지 걸어갔다. 아직 그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노스님은 황망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는데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부님께서는 급히 다가오셔서 스님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시면서 “이러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스님을 부축하여 쇼파에 앉히셨다. 스님은 격동되어 말을 하지 못하다가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한 마디만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롭고 상냥한 눈길로 강단을 가리키시며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모두 여기에 있어요. 관음보살도 석가모니도 모두 여기에 있답니다.” 노 스님은 사부님의 이 말씀을 듣고나서 마음으로 기쁘기 한량없었다. “원래는 이런 것이구나. 천상의 신불(神佛) 모두 사부님을 도와 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하는구나!” 노 비구니는 자신이 사부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음을 행운으로 여겼고 자신이 불가대법을 얻을 수 있음을 행운으로 여겼다. 이 얼마나 큰 조화인가!
어느 날 강의가 끝난 후 마침 저녁 9시였다. 우리는 뒷줄 좌석에 앉아 있었으므로 먼저 나왔다. 밖에는 비가 내렸는데 크지도 작지도 않은 비였다. 학습반을 멀리 걸어 나가 뒤돌아보니 사부님께서 어느새 뒤에서 걸어오고 계셨다. 그리하여 큰 소리로 “선생님이 아니십니까?”라고 했는데, 사부님께서는 내 목소리를 들으시고는 고개를 돌리시더니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셨다. 나는 빗속에서 멀어져 가는 사부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곳의 수련생들을 원망했다. 왜 사부님께 차를 준비해드리지 않았는가? 어떻게 사부님께서 비를 맞고 걸어가시게 한단 말인가? 다른 기공사들이 공을 전할 땐 모두 차로 모셨지만 우리 사부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비를 무릅쓰고 걸어 다니셨다…….
매번 내가 이 한 단락의 잊지 못할 경력을 회상할 때마다 출가인, 승려, 도사, 그리고 사회상의 일부 거사들을 늘 생각하게 된다. 알아야 할 것은,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우리가 수련하여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천만년의 기다림은 바로 오늘에 달렸으며 기연은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다.
진귀한 회상
글/ 남경(南京) 대법제자
[명혜망 2003년 1월 6일] 나는 강소성 남경 대법제자로 1996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는 남경에서 학습반을 꾸리신 적이 없기에(듣자하니 그 원인은 남경 기공부문의 사람들이 돈을 벌고 싶어했지만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의 학비를 높일 의향이 없으셨기 때문에 초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경의 제자들은 줄곧 사부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법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강소의 T 공정사가 출국할 때 연분이 있어 비행기에서 사부님을 뵈었다. 그가 돌아와서 남경 대법제자들에게 사부님을 만난 경과를 소개했는데 나는 오늘 그때의 회상을 되살려 이 글을 써내어 여러분들과 함께 그 행복했던 감수를 다시 되새겨보고자 한다.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보도원이었다. 나는 연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법회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 역시 사부님의 자비하신 배치였다. 법회는 남경 강녕(江寧)현 중학교에서 진행되었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열(喜悅)과 상화함을 띠고 있었다. 나는 마치 일종 미묘한 에너지 마당에 휩싸인 것 같았으며 앞이마(천목) 부위가 조여들며 살이 한데로 모여 안으로 뚫고 들어감을 느꼈다.
T 공정사는 법회에 나와 사부님을 만나 뵌 경과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과학기술고찰단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는데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리(李)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미국에 갈 때도 리 선생님은 우리와 같은 비행기에 타고 계셨지만 사부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귀국할 때, 내가 비행기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몸집이 큰 중년남자가 걸어 들어왔습니다. 나는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이 분은 리 선생님이 아니신가?’
나는 종래로 리 선생님을 뵌 적이 없었고 아직 대법 수련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내 아내와 아이는 모두 대법제자입니다. 그들이 설법비디오를 볼 때마다 나는 매번 비디오를 틀어주고 테이프를 넣어주는데 그때 화면으로 리 선생님을 보았기에 인상이 아주 깊었습니다.
나는 비록 대법을 수련하지는 않았지만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리 선생님에 대해서도 매우 숭경(崇敬)했습니다. 나는 오늘과 같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가서 “혹시 리 선생님이 아니신지요?” 리 선생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그렇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자리를 잡으신 뒤 나는 곁에 가서 앉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부님을 수행하던 수련생이 사부님께서는 지치셨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셔야 한다면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내 심정을 아신 사부님께서 그 수련생에게 둘이 잠시 자리를 바꾸게 하여 나더러 옆에 앉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영광스럽게 선생님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었으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아무 말씀도 없이 신문 한 장을 보시면서 다른 한 장을 나에게 넘겨주며 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감히 당돌하게 나올 수가 없어서 그저 조용히 앉아만 있었습니다. 신문을 들고는 있었지만 형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일심으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모순된 심정으로 반시간 남짓 앉아있었을 겁니다. 나는 결심을 내리고 말을 꺼냈습니다.
“리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전하시는 파룬궁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아주 숭경합니다.” 리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실 뿐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나는 또 말했습니다. “저도 파룬궁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 선생님의 강의를 듣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도 파룬을 넣어주시길 청하고 싶습니다.”
나의 요구를 듣고 나서 리 선생님은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를 바라보듯이 나를 보시며 웃으셨습니다. 그 후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을 많이 읽으세요” 나는 대뜸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나는 자신의 요구가 매우 유치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자리를 바꾼 수련생의 거듭되는 요구에 의해 나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그러나 조금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여전히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리 선생님 곁에 가서 일부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 후 다시 그 수련생에게 쫓겨났습니다.
세 번째로 또 건너가서 앉았는데 이번에는 리 선생님이 수련생을 시켜 나를 부른 것이었습니다. 리 선생님께서는 나더러 창밖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갑자기 비행기 날개 아래쪽에 오색영롱한 큰 광환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주 아름답고 장관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저것이 바로 나의 진신(真身)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비행기가 곧 수도 비행장에 착륙할 예정이었고, 리 선생님은 북경에서 내리셨고 나는 계속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가야 했습니다. 작별인사를 나누며 나는 리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남경 제자들이 선생님께서 남경에 오시어 설법하시기를 학수고대합니다.” 리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기연(機緣)을 봐야 합니다. 올해의 시간은 이미 다 정해졌습니다.” 나는 또 “리 선생님께서 남경 대법제자들에 대한 희망사항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리 선생님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책을 많이 읽고 책을 많이 읽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반 법회 중에 나는 마치 봄바람에 싸여 있는 듯 했다. T공정사가 사부님을 만난 경과를 이야기할 때 나는 때때로 에너지가 체내로 주입되는 것을 느꼈으며 내장이 아주 상쾌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남경 제자들은 책을 많이 읽고 법학습을 많이 하는 열조를 일으켰다.
진귀한 회상 (1)
글/ 대륙대법제자 후이롄(慧蓮)
[명혜망] 수련생이 쓴 “사부님 따라 만리 행”을 읽고 나니 감개무량하다. 그 해에 어쩐지 나 역시 사부님따라 성도(成都)에 같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몇 번이나 사부님의 강의를 들었다, 그 동수와 비슷한 경력이 있다, 대법이 전해진 십 몇 년간의 경력을 견증 할 수 있다.
나는 배운게 많이 없어, 문장을 쓰기 어렵고, 마음 속의 말을 잘 표현할 수 없다, 동수들 보고 대필 해달라는 생각도 했었다, 이렇게 미루어지다 보니 낡은 관념의 장애를 오래도록 받았다. “명혜망”에 두 번이나 뜬 문장 “정법수련 과정 중에서 정념정행 평안무사한 대법제자들도 자기의 경력을 써야 한다”란 문장을 읽고 나서 모든 장애를 뿌리쳤다. 나는 생각하기를, 화려하고 이쁜 단어는 내가 아니다, 나는 비록 세인을 감동시키는 큰 일은 못했지만, 그러나 대법이 세간에서 전해질 때, 대법은 나에게 빼어나고 뛰어난 아름다움을 주었고, 사부님이 당년에 마난을 물리치고 법을 전할 때의 견증으로 될 수 있다 , 나의 힘을 다하여 써내려 한다, 동수들과 같이 감수하고 공동 정진하며, 거짓을 폭로하고, 대법을 정실하고, 동시에 낡은 관념을 타파하는 과정이다.
회상 1
사악의 박해로 인하여, 내가 집을 떠나, 떠 돌아 다닌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올해의 상황은 2001년의 상황과 많이 다르다, 더욱 많은 동수들이 나와서 대법을 증실 하고 있다, 또 많은 사악에 이용당하여 잘못 깨달았던 동수들이 깨어나서 다시 정법의 길에 들어왔다, 정체적으로 보면 더욱더 성숙 되었다, 더 강대하고 견정하다, 여러분들의 배합도 더 잘되고 있다. 작년의 일이 생각난다. 설이 가까워 져서, 나를 받아 주었던 마음씨 착한 할머니(수련하지 않음)의 아들 딸이 집으로 설을 쇠러 온다. 나는 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 집을 떠났다, 그런데 친척집(수련하지 않음)을 찾아 같더니 나를 받아 주지 않았다, 잠시 숙소를 찾지 못했다. 사악을 제거하고, 진상을 더욱 잘하기 위하여 ‘유리걸식’했다. 거리에는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족모임 하러 가는 사람, 쇼핑하는 사람, 웃고 떠드는 사람…… 지금 우주의 대법이 박해를 받고, 사부님이 비난당하고, 중국 인민들이 독해를 받았다, 너무 가련하다, 그런데 집을 떠난 대법 제자들은 발 붙여 놓을 자리도 없다! 가슴속은 매우 비통했다. 사부님 생각이 더 간절했다, 나도 모르게 사부님이 걸으셨던 길을 걸었다. 나는 지단공원 ‘방택원’까지 왔다, 맞은편 돌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 해(96년 11월)를 회상하면 국제 법회의 정황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 나는 영광스럽게 교류회의 복무업무를 했었다, 오전에 법회도 참석했다. 오후는 소그룹교류를 한다. 단체 연공을 마치고 강당에서 두 부류로 나눠서 10명이 한 테이블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AA식) 반찬이 절반 나왔을 때, 갑자기 사부님이 오셨다. 모두 사부님을 보고 일어섰다. 박수 치는 사람, 허스하는 사람, 사부님께 매우 열렬한 경의를 표했다.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한 바퀴 돌아 보셨다. 멈추시지 않고 손을 저으면서 “모두 앉으십시오, 계속 식사를 하시오, 식사 후 내가 당신들을 보러 오겠다.” 후에 안 일이지만, 사부님께서는 미국에서 오시는 길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직접 회의장소로 오셨다, 사부님은 저녁 식사도 못 하셨다, 모두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식탁을 정리 한 후 회의 장소가 됐다, 다시 여러분들과 만났다, 사부님께서는 4~50분 동안 설법을 하셨다, 떠나실 때는 저녁 8시가 넘었다. 나는 사부님의 자상한 웃는 모습을 회상하며 행복의 눈물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고생스럽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사부님은 중생을 재도하기 위하여 모든 심혈을 기울이고 계신다, 우리가 오늘날 한 일도 응당히 사부님께 떳떳해야 하고 대법에 떳떳해야지 않겠는가! 생각을 멈추고 단수 입장을 하며 사악을 청리했다, 세인을 구도하는 데는 일분일초도 낭비 할 수 없다.
회상 2
내가 집을 떠나서 제일 큰 일은 잠자리다(신분증은 쓸 수 없고, 시내는 집값이 비싸며, 교외에서는 목표가 크고 안전하지 못하다). 2001년 여름의 일이 기억난다, 나쁜 사람의 신고 하에 사악들은 나의 주소를 알고, ‘유다’의 인솔하에 610의 악경7~8명이 경찰차 두 대를 몰고 나를 잡으러 왔다, 그때 마침 내가 집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웃에서 금방 발생한 일을 알려 주며 말했다. “경찰차 두 대가 금방 가는데 당신이 돌아왔어요. “나는 웃으면서 “경찰차는 나의 정면으로 지나간 것 같아요” 이웃은 작은 목소리로 “당신을 잡으러 온 것이요, 빨리 가시오, 아직 웃고 있어요.”나는 생각하기를 하나가 움직이지 않으면 만가지 움직임을 이겨낸다. 사악은 나를 잡을 수 있는가? 그 날, 유다와 경찰이 집 식구들(속인)에게 약삭바르고 비겁한 수단을 다 썼다, 그들은 속아 넘어 갔다, 사악들과 협조를 했다.(그때는 아직 께닫지 못했다, 자기의 공간 마당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같이 나의 숙소에 찾아와서 “세뇌반”에 가라고 핍박했다. 나는 엄숙히 정고(正告)했다.“법은 나의 마음속에서 깊이 뿌리를 박았다, 이 길을 나는 끝까지 가겠다, 누구도 나를 움직일 생각 말라…..” 그리고 부단히 정념을 해서 그들 배후 사악의 ‘연경겸시’를 제거했다, 그들이 밤으로 경찰서에 신고하려는 염두도 제거했다. 후에 그들은 나를 몇 시간 동안 잘수 있게 동의했다. 내일 아침 나를 보내기로 했다. 나는 그들이 작은 목소리로 하는 얘기를 들었다 “내일 아침 가기 전에 먼저 전화를 해서 경찰차를 부른다”. 그날밤 2시쯤 됐다, 모두 잠잠해졌다, 나는 한가지 일념을 가졌다 “절대로 사악한데 배합하지 않는다, 꼭 바르게 가야 한다, 나는 대법 입자이다, ” 계속 정념을 했다, 다른 공간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사악을 청리 했다, 대문을 걸지 말라고 했다, (매일 12시면 경비실에서 문을 닫는다, 아침 6시에 문을 연다. 여름에는 5시면 날이 밝는다.) 절대로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수련의 길을 똑바로 가야 한다, 간단한 준비를 했다. 날 밝기 전에 꼭 떠나야 한다, 자물쇠를 비트니 과연 기적적으로 열렸다, 나는 강대한 정념의 동반 하에 순리롭게 봉쇄를 뚫고 나왔다.
그날은 비가 온 것으로 기억된다. 생각지 못하게 하루 종일 달려 다녔지만 저녁 10시가 넘도록 잠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연락이 되는 수련생은 도와줄 수 없고, 예전에 많은 동수들은 연락할 수 없다, 거리에는 행인들이 점점 적어지고 비는 하루 종일 왔지만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나는 힘도 들고,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춥기도 했다(겨우 옷 한 벌 가져 나온 것도 도중에 일어 버렸다). 멍하니 육교 위에서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 보았다. 육교 밑에는 전에 연공을 했던 장소가 있다, 지나간 일이 영사막 같이 눈앞에 떠오른다…….
나는 조기(早期)에 친히 귀(耳)로 주불(主佛)님의 설법을 들었었다, 사부님 친히 공을 전수하여 주셨다. 처음 법을 배웠을 때 공법이 좋다는 것 알고 사부님이 좋다는 것만 알았다, 응당히 더욱 많은 사람이 이득을 보게 해야 한다, 초기 연공장을 성립할 때, 종종 혼자서 카세트를 들고, 수집한 자료를 붙여서 만든 플랜카드를 걸고, 물어보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만 있으면, 나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소개를 해주었다, 비바람도 막을 수 없었다. 그때는 오직 한 마음 밖에 없었다, “대법은 너무나 좋다, 많은 사람이 이익을 보게 하자.” 연공장은 아주 빠르게 하나에서 열 몇 개로 늘어났다. 모두 같이 법 학습하고, 연공하고, 교류하고, 그때는 정말 상서롭고, 정토였다…… 오늘은 박해로 인하여 동수들 연락이 안 된다. 그때를 생각하고, 지금을 보면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다, 울려고 해도 눈물이 말랐다. 지금은 어떻게 가서 법을 정실 하겠는가? 문득 나는 자기의 심태가 문제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빨리 깨어나야 한다, 자신을 정리하고, 조용히 자신에게 물었다, “너의 책임은 무엇인가?” 불시에 사부님이 95년 1월초, 보도원을 접견해서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심태를 정리한 후, 이지적으로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분석해봤다. 현재 사악한 세력은 우리 사람의 마음을 겨냥한 것이다, 한 방면은 우리를 분리시켜, 와해하려 하고 또 한 방면은 가상이 창궐한 만행으로 제자들의 의지를 굽히려 한다. 책임을 인식하고 안으로 찾자, 이런 일이 나타난 것도 정체적으로 법 학습 잘 못한 것이고, 튼튼하지 못한 것이다, 일체는 우연이 아니다, 나도 책임이 있다, 나도 수련을 잘 못했다.
사부님은 우리에게 깨우쳐 주셨었다 “수련생들을 잘 이끄는 것은 공덕이 무량한 것이며, 잘 이끌지 못하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파룬따파의해)내가 바로 책임을 못다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누락이 생긴 것이다, 대법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사부님! 제자는 대법에 미안합니다, 사부님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의지가 떨어지면 안 된다, 사악을 청리해야 한다, 시간을 다투어 법에 대한 손실을 미봉 해야 한다. 이때는 그렇게 망연한 상태가 아니다. 나는 나에게 알렸다. 절대로 사부님의 제자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정법의 노정을 똑 바로 가야 한다, 중생들에 책임지고, 우주의 대법에 책임져야 한다. 나는 자신에게 좌우명을 정했다, 사부님은 한 분, 법은 하나, 견심, 견정, 견수, 끊어지지 않고 굽혀지지 않고 끝까지 나가겠다.(어제 박해를 받았을 때 끊어지면 끊어졌지, 굽히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오늘은 그것을 철저히 부정했다) 일체의 마난을 이길 수 있다. 눈앞의 개인곤란(잠자리)은 근본 염려와 근심이 안 된다. 정념으로 나를 박해하는 사악을 제거하는 외에 나는 깜깜한 밤하늘을 보고 말했다. 오늘 나는, 잠자리를 찾지 못한다 하여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꺾을 수 없다. 하늘을 이불로 삼고, 땅은 침대로 삼고, 가느다란 빗물은 감로로 삼는다.
진귀한 회상 (2)
글/ 대륙 대법제자 후이롄(慧蓮)
[밍후이왕]
회상 3
2001년 하반기 사악의 박해로 수련생과의 연락에 일정한 어려움이 있었고 진상자료는 더욱 적었다. 제때에 경문을 볼 수 없었으며(그때 이미 사악 제거 구결이 발표됐음) 수련생과의 만남도 매우 적었는데 이런 환경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악을 제거하고 시간을 다퉈 중생을 구도해야한다.” 이런 책임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다그쳐 구도해야 하며 우리 지역의 몇 가지 현상에 겨냥하여 기다리지도 기대지도 말고 방법을 찾아 연락이 끊긴 수련생을 찾아내 다시 새롭게 입자 덩어리를 형성해야했다. 잘못된 깨달음으로 기로에 들어선 사람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희망이 보인다면, 사부님께서도 어느 제자도 놓치지 않으려 하시기에 그들을 포기하지 말아야했다. 그 시기 매번 법공부를 할 때 ‘전법륜(轉法輪)’을 펼치면 첫 행에서 사부님의 “나는 법(法)을 전하고 공(功)을 전하는 모든 과정 중에서, 사회에 대해 책임지고 수련생에 대해 책임짐에 따라”라는 말씀을 보면서 94년 초의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한 노년 수련생이 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줬다. “매번 학습반에 참가하는 수련생마다 건강 상황 이력을 작성하는데 사부님께서 매 장마다 꼼꼼히 챙겨 보세요. 지금 참가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데 그들이(사부님 신변의 도우미 수련생) 깨어나 보면 사부님께서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르고 보시면서 타 지역에서 설법을 들으러 온 수련생을 찾았대요.(전국 각 지역에서 설법을 들으러 온 사람)” 매번 설법이 끝나면 또 수련생이 써낸 심득교류 원고가 있었다. 매번 사부님께서는 신노 수련생 모두 심득을 써낼 것을 요구하셨는데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보셨다. 업무량이 얼마나 많은지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부님 신변에서 일하는 수련생이 한 말이 있다. “나도 사부님이 언제 주무시는지 모릅니다. 늘 날이 밝아 깨어나 보면 사부님은 여전히 집중하여 찾고, 보고 계셨습니다.” 나 역시 사부님께서 언제나 수련생의 심득체험을 지니고 다니시며 차에서 보시고, 휴식시간에도 보고 계시는 것을 늘 볼 수 있었다. 중생구도를 위해 이는 어떠한 책임인가! 그 당시 나는 일부 수련생이 쓴 글을 보았는데 매우 혼란했고 참답지 않았다. 정말로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이들이 어찌 사부님의 간고함과 고심한 구도를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제자가 쓴 글이 매우 혼란하고 차해도 포기하지 않으셨다. 사부님은 한 명의 인연 있는 사람도 놓치지 않으시려고 했다! 이 또한 어떠한 관용과 자비인가! 속인 사회에서 상사에게 보고서를 올려도 규범이 있지 않은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사실 나는 당신들보다 더 당신들을 더욱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사부님은 제자와 중생을 위해 모든 마음과 심혈을 쏟으셨다.
현재 사부님의 제자로서 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손을 내밀어 그들에게 도움을 줘 정법 중으로 돌아오게 하여 공동으로 정진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며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할 바이다. 나는 더욱 많은 수련생에게 연락해 정체적으로 발정념 해 사악을 깨끗이 제거하고 또 일체 방법과 각종 형식을 이용해 어떤 사람에게는 대면하여 교류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경문과 자료를 우편으로 보냈다. 전향을 돕고 있는 사람에게는 우선 배후에서 그들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다른 공간의 사악을 깨끗이 제거했으며 이런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알게 되면 집 근처로 가서 발정념을 했다. 어떤 사람은 매우 고층에 살고 있어 단수입장하고 한 층 한 층 계단을 올라가며 제거했다. 어느 한번 거의 그 사람 집에 도착하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반드시 사악이 내가 근거리 발정념 하는 것이 매우 두려워 나를 가로막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것에게 양보할 수 없다! 원래 계획대로 특별히 사악한 몇 곳에 도착해 아직도 사악의 악을 돕고 있는 그들 집 근처에서 사악한 요소를 깨끗이 제거했다. 어떤 사람은 사는 곳은 알고 있으나 층수를 몰라서 한집 씩 가면서 빗속에서 단수입장을 했다.(전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았고 그 당시 도처에서 나를 붙잡으려고 했다) 오직 생각한 것은 그들이 빨리 청성해지기를 바랐고 나는 마음속으로 예전의 수련생이여 어서 돌아오라! 얻기 어려운 기연(機緣)이니 대오에서 떨어지지 말라! 는 울부짖음과 사악한 구세력의 배치에 대해 나는 꼭 타파할 거라는 일념뿐이었다.
회상 4
나는 비교적 늦게 법 실증에 나섰다. 마난의 초기에 나는 깨닫지 못해 천안문으로 법을 실증하러가지 못했다. 그때는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매일 집에서 법공부하고 책만 보면서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여겼다. 마침내 2000년에 사부님의 경문이 발표됐다. ‘심자명’부터 한편 또 한편 발표됐는데 ‘이성’을 읽고 나서 나는 청성하게 깨어났다.(정확하게 말하면 사부님께서 법에서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반드시 그것들의 사악함을 세인(世人)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이것 역시 세인들을 구도하는 것이고……,”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면 나는 곧 그대로 해야 했고 나는 마땅히 걸어 나가 더욱 많은 사람이 진상을 알게 해야 하고 세인을 구도해야 했다. 그 시기 나는 진상자료를 매우 적게 보았으나 한부만 있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있었다. 기다리지도 기대지도 말자, 돈을 모아 스스로 해결했다. 이 한걸음을 내딛고 다시 법공부를 하니 법리가 갈수록 명백해졌다. 그러했다. 나는 원래 일찍 걸어 나와 법 실증을 해야 했었다. 그렇다면 무슨 마음이 나를 가로막았을까? 안으로 찾아보니 사심, 두려운 마음, 덮어 감추려는 마음,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마음, 책임지지 않는 마음……. 와! 하나하나가 모두 더러운 마음이었으며 자신의 책임과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이 이러한 것에 가려져 잊고 있었다. 2000년 ‘국경절’ 전후 나는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었으며 반드시 법 실증을 해야 했다. 나는 ‘법정건곤(法正乾坤)’이라는 족자를 지니고 수련생과 함께 천안문으로 갔다.
그날 천안문 광장에 수련생이 대략 백여 명 정도 됐다. 계속하여 수련생들이 광장 중심에 도착했다. 나의 위치는 모인 사람들의 가장자리였다. 사복경찰, 경찰차, 경찰들이 도처에 있었다. 나는 정념이 매우 충족했고 조금도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나는 ‘법정건곤’ 현수막을 높이 들고 “대법제자들이여, 모두 나서서 법을 실증합시다!” 라고 높이 외쳤다. 그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다. 악한 경찰과 경찰차가 나를 향해 덮쳐왔다. 눈앞에 보이는 경찰차는 성냥갑처럼 보였고 차에서 내리는 악한 경찰은 다이아몬드 바둑돌처럼 작게 보였다. 악한 경찰 2명이 나의 양쪽 팔을 끼려 할 때 나는 그들을 보며 한마디 물었다. “당신들은 뭘 하려는 것이요?” 그러자 그들 둘은 감전된 듯 동시에 내 몸에서 손을 뗐다. 이때 사람들에 의해 나는 옆으로 밀려 나갔다……. 정말로 가소로웠다. 성냥갑에 어찌 대법제자를 담을 수 있겠는가? 다이아몬드 바둑돌이 어찌 대법제자를 움직일 수 있겠는가? 너무나 가소로웠다. 그때 나는 진실하게 ‘일정압백사(一正壓百邪)’의 위엄과 위대함을 체험했다. 그날 무사히 집에 돌아온 후 멈추지 않고 자료를 지니고 법 실증에 나섰으며 새로운 정법의 길에 나섰다.
진귀한 회상 (3)
글/ 중국 대법제자 후이롄(慧蓮)
[밍후이왕]글쓴이의 말:더욱 많은 노 제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상을 써내길 건의한다.
회상5
99년7·20이 시작된 후 정말로 하루가 일 년과 같았고 날마다 해가 뜰 날을 바라던 것에서 정정당당하게 걸어 나와 법을 실증했다. TV의 터무니없는 요언날조와 모함에서 나는 갈수록 사악을 똑똑히 인식했으며 대법을 확고히 믿었고3년간 박해가 심할수록 더욱 확고해졌다.어느 날 가도위원회 주임과 서기가 집에 찾아와 수련(修煉)을 포기하라고 핍박했다.나는TV를 가리키며 그들에게 알려줬다. “이 뉴스를 날마다 보는 것 같은데 저기에서 말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완전히 다릅니다.우리는 날마다 그‘전법륜(轉法輪)’을 보고 있는데TV내용과 완전히 다릅니다.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무엇이 적혀있는지 우리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우리는 날마다 연공하고 마음을 닦고 있으며 날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우리가 가장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예를 들어 날마다 배를 먹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맛인지 물어야 할까요?아니면 배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말하라고 할까요?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배가 무슨 맛이라고 하면 내가 믿을 수 있겠어요?그 말을 그대로 들을 수 있겠어요?”그들은 삽시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못했다.나는 또 그들에게 엄숙하게 알렸다.하지만 태도는 상화로웠다. “이후에라도 만약 대법과 수련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하지만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면……,그런 것에 시간을 소모하지 말기 바랍니다.”이후에 그들은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TV에서 사부님에 대한 요언과 모함이 방송되는 것을 보고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대법이 세간에서 홍전(洪傳)되면서 나는 여러 가지 일을 경험했고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면서 겪은 고생을 목격해왔는데 저런 악의적인 요언이 어찌 대법제자의 마음을 아프고도 깊이 찌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92년 동방건강박람회는 국제무역청사에서 개최됐다.나도 그때 참가했었다.홀에 들어서니 갖가지 공파들로 요란한 가운데‘파룬궁’의 줄이 가장 길었고 사람도 가장 많아 나도 모르게 다가갔고 어쩌다보니 밀려서 앞으로 갔다.웬일인지 나도 모르게 마음이 격동됐다.첫눈에 키가 훤칠하고 얼굴에 상화로움으로 가득한‘젊은이’가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나는 함께 간 친구에게 말했다. “저분이 이 공파의 장문인(掌門人,책임자)일 것입니다.”그는 어찌 그렇게 확정지어 말하느냐고 물어서 직감이라고 말했다.그 당시는 매우 이상하게 그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눈앞의 이 분은(사부님)어디에서 뵌 적이 있는 것 같고 혹은 함께 무슨 일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지 않았다.정말로 익숙한 분이셨다!나는 자세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여겨보았다.그 분은 매우 평범한 겉옷을 입으셨고 안에는 담황색의 낡은 털옷을 입으셨다.(손으로 뜬 것 같았다,나중에 알았는데 이 털옷에 기운 자리가 있었다)바지와 구두도 낡은 것이었으나 모두 아주 깨끗했다.사람에게 주는 이미지는 그렇게 꾸밈이 없고 단정했으며 대범하면서 또한 그렇게 겸손하고 온화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회상6
톈진 설법반에 참가할 때 사부님께서 머무른 여관은 저렴한 곳이었고 매일 바쁘셨으며 설법이 끝난 후에도 많은 일을 처리하셨고 여관에 돌아오시면9~10시였으며 저녁식사는 라면이었는데 매일 이러했다.어느 한번 우리는 사부님 신변에서 일하는 수련생과 교류하다가 점심 식사시간이 돼 뭘 사오려고 하는데 무엇을 먹을지 물었더니 즉시 이렇게 말했다. “라면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습니다.라면이란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나서 라면이란 글자를 떠올리기도 두렵습니다.”위대한 사부님께서 중생구도를 위한 생활은 이렇게 간고했다.
사부님 설법반에 여러 차례 참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부님께서 매우 드물게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하지만 용모에 매우 주의하셨고 간소한 차림이셨으며 날씨의 변화가 없는 한 입은 옷은 언제나 똑같았다.한번은 사부님의 정황을 알고 있는 수련생에게 물어서야 사부님은 손수 밤에 옷을 씻어서 이튿날 또 입으셨으며 새로운 옷은 거의 사 입지 않으심을 알게 됐다.옷도 매우 적었으며 톈진 설법반에서 사부님의 낡은 구두가 해졌으나(몇 년이나 신으셨음)아무리해도 새로운 구두로 바꾸지 않으셔서 몇 명의 제자가 억지로 사부님을 모시고 상점에 가서 새로운 구두로 바꿔드렸다.
매번 몇 명의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수련생이 모이면 자연스레 사부님을 떠올린다.어느 한번 톈진 학습반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사부님 신변에서 일하는 수련생들에 대해 왜 사부님을 잘 돌보지 않아 날마다 사부님께서 라면을 드시게 하느냐고 원망했다.그랬더니 한 수련생이 말을 받았다. “톈진에서만이 아닙니다.사부님은 늘 라면을 드십니다.”그는 이어서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기 시작할 때 매우 간고했던 이야기를 했다.그때 학습반에서 수금한 입장료로는 일부 경우에 장소 대관 비용마저 모자랐으며(대관 비용은 참가 숫자로 정하지 않았다) 각종 경비가 매우 부족했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부님께서는 여태 당신이 얼마나 높은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단지 사부님의 모범적인 행동과 자상함,상화로움으로 일반적인 기공사가 아님을 느꼈습니다.저의 마음속에서 사부님은 큰 신선입니다.사부님께서 저희 지역에서 설법하실 때 저의 집에서 식사하실 것을 거듭 요청 드렸습니다.(그때 사부님께서 머무른 곳은 설법 강당에서 몇 시간 걸리는 거리로 매우 멀었음)사부님께서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으셨으며 야채를 드셨습니다.식사를 준비할 때 사부님께 무엇을 드시고 싶은지 여쭈면 단지 ‘여러분이 무엇을 드시면 그걸로 먹으면 됩니다.번거롭게 하지 마세요,간단하게 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어느 한번 사부님께서 웃으시며‘저는 당신이 빚은 산둥 큰 찐빵을 좋아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실 사부님께서는 늘 제자를 생각하고 계셨는데 하나는 번거로움을 피하려 했고 둘째는 돈을 쓰지 않게 하려 했습니다.”이어서 또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느 날 점심 식사 후 조금의 요리와 야채스프가 남았습니다.저녁에 설법반이 끝나서 사부님께서 돌아오셔서 말씀드렸습니다. ‘채소로 요리하는 건 매우 쉽습니다.’그러자 사부님께서‘남은 것으로 먹으면 됩니다.’라고 말씀하셔서 저는 쉽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저희들이 평소에도 이 정도로 간단하게는 먹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면서 속으로‘어찌 사부님께 남은 야채스프를 드릴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사부님의 표정은 엄숙하셨고 손가락으로 탁자위에 놓인 남은 밥과 남은 요리(실제로는 야채스프였음)를 가리키며‘남은 것으로 먹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어조가 매우 긍정적이고 그때는 마치 일종 항명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날은 사부님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리고 사부님께서는 야채스프를 밥에 부어서 여유롭게 드셨습니다.”여기까지 듣고 한자리에 앉았던 수련생들은 마음이 시큼했고 나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사부님!노고가 많으셨습니다!제자는 천만마디 말로도 사부님에 대한 숭경의 뜻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사부님의 일언일행,일거일동은 그렇게 깊은 감동을 주셨고 만약 잘하지 못하면 정말로 사부님의 말씀으로 전하고 몸으로 가르침에 죄송한 일이다.
회상7
CCTV(중국 중앙TV)와610에서 요언을 날조하기를 사부님은 고등학교 졸업이어서 ‘전법륜(轉法輪)’을 쓸 수 없으며,……해서 쓴 것이라고 했다.이 요언을 듣는 순간 중국 정부가 정말로 망신을 자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CCTV에서 어찌하여 건달같이 거짓말을 하는가!내가 바로 증인이다!나는 비할 바 없는 행운으로‘전법륜’원시적인 초기 녹음테이프 받아쓰기 팀에 참가했다. ‘전법륜’은 우리가 사부님의 창춘(제8회),지난,정저우,다롄 등 학습반의 설법 녹음을 한 글자 한 글자씩 새겨 쓴 것으로5, 6일의 시간을 들였다. 94년 여름 이 신성한 임무를 받고 나는 조금의 태만함도 없었다.나는 교육수준이 높지 않아 사부님의 녹음된 설법에서 많은 글자를 쓸 줄 몰랐다.그리하여 나는 녹음을 틀어놓고 자전(字典)을 펼쳐가며(반복재생기가 없는 상황임)한 구절 한 구절 중지시키고 한 글자도 빠뜨림 없이 받아썼다.밤을 새가며 십여 명이 몇 십 시간 만에 마침내 제때에 받아쓰기를 완성했다.원고는 다시 타자를 하는 수련생에게로 넘어갔고 완성된 후 다시 사부님께 전달됐다.그때의 격동된 심정,일의 무게감을 알고 바닥에 꿇어앉거나 혹은 소파에서 받아쓰던 정경을 생각하고(밤에 가족들이 잠들어 나는 작은 현관방 소파에서 작업했다)다시TV에서의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보게 되니 이러한 깡패정치집단이‘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이 어찌 될 말이겠는가!
원래 나는 글을 쓸 줄 모른다.하지만 대법제자로서 나는 사부님과 대법의 훌륭함을 적어내야 하는 책임감을 강렬하게 느꼈다.또한 더욱 많은 사람이 진상을 알고 그런 가소롭고 사람을 속이는 허튼소리를 꿰뚫어보게 해야 한다.그리하여 몇 번이고 결심을 내려 관념의 장애를 제거하고 드디어 문장을 써냈다.이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계속하여 투고할 것이다.아울러 내가 알기로는(현재 판결을 받고 자유가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현재 많은‘무사하고 난이 없는’대륙 노 수련생들에게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한 사적들이 있는데 매우 감동적이다.하지만 늘 사람 관념의 장애로,혹은 사악에게 붙잡힐 수 있는 증거를 남긴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는 등의 원인으로 감히 전 세계를 향해 사악의 거짓말을 폭로해 대법을 실증하고 사부님의 결백과 위대함을 실증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너무나 깊이 느끼고 있다.만약 사부님의 그 숭고한 말씀으로 전하고 몸으로 가르치신 것이 나의 뇌리에 깊이 박히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이같이 정념이 강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러한 원인에서라도 진실하고 위대함을 천하에 밝혀 수련생들이 더욱 정진하고 세상 사람들이 더욱 청성해질 수 있게 더욱 많은 노 제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상을 써내기를 건의한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의 간고함과 순정함을 잊지 말자
글/ 류신위(劉新宇)
[밍후이왕] 저는 수련을 잘하지 못했으므로 엎어지고 넘어지며 오늘날까지 수련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해 처음 연공을 하면서 파룬(法輪)이 회전하는 것을 느꼈고, 천목으로 법신(法身)을 보았으면서도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노 수련생으로부터 사부님께서 우한(武漢)에 오셨을 때 있었던 한 가지 이야기를 듣고서야 사부님에 대한 의심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학습반에서 일어났던 일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 때였는데, 사부님께서 설법을 끝내시고 강단에서 걸어가실 때 그 수련생이 호기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사부님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사부님께서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넜을 때 승용차 한 대가 사부님을 따라가서 옆에 정차하더니 차에서 몇 사람이 내려 사부님께 차에 오르시라고 했지만, 사부님께서 그들에게 몇 말씀을 하시며 거절해서 그 승용차는 그대로 갔습니다. 사부님께서 다시 걷기 시작해서 한 블럭 정도 가신 후, 작은 가게를 찾아가 만두 몇 개를 사서 점심식사로 때우시는 걸 목격했습니다. 이튿날 그 수련생이 어제 그 승용차에 탔던 사람들을 만나 알아보니, 그들은 현지 기공협회사람이었습니다. 원래 각 지역에서 개최된 설법반은 현지 기공협회가 주최해 사부님을 초청해 열리는 것이었고, 관례대로 기공협회에서 사부님께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던 것인데, 사부님께서 거절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 기공협회사람들은 그런 말을 전하면서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우한에 온 다른 기공사들은 모두 우리가 초청하는 대로 식사나 연회에 참석했는데 오직 파룬궁(法輪功) 선생님만이 그런 격식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 자신과 여러분 모두를 격려하고 싶어서입니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의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말고, 정법노정을 차질 없이 따라가며, 사부님의 은혜를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부님의 사적을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수련생들은 사부님의 자비와 위대함을 써서 발표하기 바랍니다. 이를 중생들에게 널리 알려 사악한 거짓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하여, 그들 중생들이 사부님과 대법을 마음으로부터 우러러보게 해서, 대법을 수련할 수 있는 기연(機緣)을 맺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의 대법제자에게 알려, 대법이 영세불변(永世不變)으로 영원하며, 후세에 올바르고 안정적으로 전해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의 한 가지 작은 일
글/ 연변대법제자
[명혜망 2004년 2월 14일] 나는 99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이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던 초기에 널리 알려진 한 가지 일이 나의 수련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까지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일의 경과는 이러했다. 당시 사부님께서는 연길에서 설법을 끝내시고 연길을 떠날 준비를 하셨다. 몇몇 보도소장들이 사부님을 환송했는데 사부님께서는 소장들과 함께 한대의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셨다. 역에 도착한 후, 한 소장이 택시비를 내려하자 사부님께서는 이에 동의하지 않으시면서 기어이 당신께서 차비를 내셨다. 여러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사부님께서는 “연변에서 내 일은 이미 모두 끝났고 각종 비용에 대한 결산도 이미 깨끗이 끝났기에 경제적으로 나는 당신들과 이미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택시비는 나 자신이 내야하며 나는 수련생들의 돈을 한푼도 쓸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이 일은 수련생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 널리 전해졌다. 나는 늘 학습 소조나 기타 각종 적당한 장소에서 수련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동시에 매사에 아주 조심하면서 사부님께서 어떻게 하셨으면 제자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 중국에서 법을 전하실 때 거쳐가신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건의하자면, 사부님을 따라다닌 적이 있는 대법제자들이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의 작은 일들을 모두 써내어 책으로 만들어 유전되는 가운데 손실이 없게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으로 이 글을 썼으니 만일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10/3/8560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