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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

글/요녕(遼寧) 단동(丹東)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3월 14일】 우주의 말겁(末劫)시기에 태어나 온 몸에 업력이 가득한 사람으로서 나는 비할 바 없이 만나기 힘든 법을 얻은 기연으로 우주대법을 널리 전하시는 사부님의 학습반에 참가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고 호탕한 불은 속에 푹 빠질 수 있었다. 매 번 인생에서 한순간이었던 그때를 회상하노라면 참으로 천금보다도 소중하고 비할 바 없이 행복하다!

사부님을 뵙자마자 눈물이 나와

1994년 4월, 나는 사부님께서 꾸리신 장춘 제7기 학습반에 참가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처음으로 사부님을 뵈었을 때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사람을 대함이 그렇듯 친절하셨고, 붙임성이 좋으셨으며, 시종 미소를 머금고 계셨는데 비할 바 없이 상화(祥和)하고 자비로우셨다. 수시로 남을 배려해 주셨고, 곳곳에서 제자들을 위해 염려해주셨다. 입으신 옷은 소박했으나 도리어 비할 바 없이 성결해 보이셨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이 법을 잘 배워 수련해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 늘 당신의 휴식시간을 줄이시고는 일찍 오셨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으셨으며, 미리 강단에 오시어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해답해 주셨다. 학습반에서 나는 다른 동수들과 마찬가지로 늘 사부님 곁에 더 오래 있으려 했고, 사부님의 설법을 더 많이 들으려 했다. 나도 매 번 일찌감치 강의 장소에 도착했는데 한 번은 내가 위층에 앉아 있는데 강의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아 동수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사부님께서 들어오셔서 한 수련생과 말씀을 나누시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사부님을 뵈면서 단번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생각했다. ‘왜 사부님을 뵙자마자 곧 눈물이 나왔을까?’ 바로 그날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나를 보자마자 우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의 명백한 일면이 내가 그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기 때문이다.”(대략적인 의미).

이 말씀을 듣고 나는 단번에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부님을 뵙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는지. 그것은 사부님께서 내게 너무도 많고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나의 명백한 일면이 감수하여 감동되어 운 것이었다. 사람의 그 일면이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중에 사부님의 설법을 통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올려 깨끗이 씻어 주셨으며 또 만고에도 만나지 못할 우주대법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를 주신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로스앤젤레스 시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이번 정법은 전반 우주에 근본적인 변화를 발생하게 하는 것이므로 대법제자들은 수련 중에서 미시적인 데로부터 다시 조정되었으며 불필요한 것들은 직접 제거해 버렸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 생명의 상태를 개변한 것으로 이것은 이전의 수련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라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가를!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법시기 대법제자’ 란 칭호를 주셨고 우리에게 중생을 구도하고 대법을 실증하며, 우주를 보위할 신성한 사명을 주셨으며, 우리에게 위덕을 수립할 기회를 주셨다. 우리는 또 정법시기에 사부님과 함께 있어 우주 중생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대법제자이다. 이 일체의 일체는 모두 우주 중에서 결코 더는 있을 수 없는 영예이다.

한 동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셨지만, 법을 전하기 시작하신 이후 이 몇 년 동안 일 분 일 초도 멈추신 적이 없다. 많고도 많은 것에 대해 우리는 영원히 모를 것이며 우리의 마음은 영원히 다 담지 못할 것이다.”

현재 정법은 최후에 이르렀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이끌고 온갖 험한 어려움을 뚫고 지나 오셨다. 제자로서 사부님께서는 너무나 위대하시며 부처님의 은혜는 끝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이 어휘로 어찌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표현할 수 있겠는가 !

사부님의 홍대하신 자비

어떤 사람은 욕을 하면서 학습반에 들어가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 확실히 이런 사람이 있었다. 나랑 같이 학습반에 참가한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사부님을 존중하지 않았다. 매 번 강의를 다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사람들이 흥분 되고 격동되어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의 자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되새겨 보는데 비해 이 사람은 일부러 말참견을 하면서 사부님께 불경한 말을 했다. 여러 사람이 말려도 그는 듣지 않았는데 나는 그것 때문에 그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강의가 끝난 후 더 이상 그와 같이 가지 않았다.

그 사람은 강의를 들을 때 앞줄에서 8번째 줄에 앉았는데 좌석 위치가 곧장 사부님과 정면으로 마주 해 있었다. 그의 나쁜 염두를 사부님께서 모르실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매 번 내가 눈여겨보아도 사부님께서는 강단에서 내려오셔서 수련생에게 동작을 바로 잡아 주실 때 앞줄에서 오가시면서 미소를 지으신 채 자애롭게 매 수련생들을 바라보시는 것이었다. 물론 그 사람 앞에 다가오셨을 때도 자비롭고 상화하게 그를 바라보셨는데 조금도 다른 기색이 없으셨다. 그 일은 나의 심령에 아주 큰 진동을 일으켰는데, 사부님께서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성인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이전에 다른 기공사가 꾸린 학습반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기공사는 많은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다니면서 찬양하는 말이 그칠 새 없었다. 만약 어느 수련생이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평하면 즉각 수업시간에 크게 성을 내거나 심지어 보복까지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부님께서는 수업을 듣는 사람이 당신을 존경하지 않아도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고 대선(大善)대인(大忍)하시면서 아예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나중에 사부님께서는 수업 중에 말씀하셨다. (대략적인 의미) “어떤 사람은 나를 욕하면서 학습반에 들어와 강의를 들었지만 그러나 나는 그를 구도하고자 한다.” 사부님의 이렇듯 넓고 큰 흉금, 홍대한 자비를 그 누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후 수련 중에 매번 心性(씬씽)상의 마찰이 있거나 모순이 첨예하여 고비를 넘기기 어려울 때면 나는 늘 사부님의 대선(大善) 대인(大忍)하시고 일체를 포용하실 수 있는 흉금을 생각하곤 했다. 사부님은 누구신가? 무량한 대궁, 무량한 중생의 창도자이시며 대궁의 주재자이시다. 그럼에도 당신을 욕하는 사람을 그렇듯 너그럽게 대하시고, 또 그를 구도하려 하시는데 이는 어떠한 용량이며, 어떠한 관용이며, 어떠한 자비인가? 그런데 나는 우주 먼지 속의 미생물처럼 작디작은 생명으로서 일에 부딪히면 무슨 시비요 하면서 안팎으로 변명을 하지 않는가? 나는 너무도 가련하지 않은가? 매번 이것을 생각하면 사부님의 드넓은 포용과 관용은 내게 고비를 넘길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었고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동력이 되었다 .

말씀과 행동으로 몸소 제자의 본보기가 되시다

사부님께서는 제자에게 “큰 뜻을 품었지만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제자들은 모두 이 ‘큰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작은 일’의 표준은 또 무엇이겠는가? 『사부님 은혜』 가운데 동수가 소개한 것이 있다. 사부님께서는 평소 행동과 몸가짐이 아주 단정하셨다. 그렇게 여러 해가 되도록 사부님께서 소파, 의자에 앉으실 때 다리를 포개거나 몸을 뒤로 젖히거나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연세가 많은 수련생들을 돌봐주셨고, 손님을 배웅할 때면 문 앞까지 나오셔서 손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배웅하신 다음에야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나 자신과 대조해보니 나는 어떻게 했는가?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사부님께서는 소박하셨다.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 입으신 옷은 비록 낡긴 했어도 몸에 어울리고 깨끗하셨다. 동수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안에 입으신 양털 셔츠는 모두 기운 것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오늘과 같은 사회 환경에서 누가 기운 옷을 입겠는가? 하지만 우리 존경하는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도리어 안에 그런 옷을 입으셨다. 사부님께서는 심지어 버려진 배추묶음도 주우셨다. 사부님께서는 딸에게 2위안짜리 싼 신발을 신기셨고, 밥상이나 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 드셨다. 제자가 먹다 남긴 칼국수 반 사발도 남김없이 드셨다는 것을 읽고 내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흘러 흐느껴 울었다.

나 자신과 사부님께서 하신 것을 대조해 보니 참으로 부끄러웠다. 자고이래 모두 제자가 사부를 공양해왔으나 우리 사부님께서는 도리어 당신 돈으로 제자들을 청해 먹이셨고 종래로 제자들에게 한 푼도 받지 않으셨다. 학습반을 꾸리시던 기간에 사부님께서는 제자가 라면만 먹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데 정작 당신께서는 도리어 일 년 내내 라면만 드셨다. 자고이래 제자에 대한 사부님의 자비가 이렇게 큰 적이 있었던가? 세인을 구도하는 대법 서적을 사부님께서는 무료로 보내 주셨다……. 한 가지 한 가지 매 하나의 일마다 그 어느 것인들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고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것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 7.20’ 이후 사악은 사부님을 공격하고 비방하면서 사부님께서 ‘재물을 긁어모으고 ’, ‘호화로운 주택에 살았다’고 가상을 만들었다. 변하지 않는 확고한 사실 앞에서 이런 가상들은 스스로 파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나로 하여금 7. 20 이후 얼마 안 되어 텔레비전에서 사부님께서 ‘재물을 긁어모았다’고 비방할 때 내가 방송국의 사악한 무리들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무슨 재물을 긁어모은단 말인가, 이 우주는 모두 사부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우주는 모두 사부님 것이며, 사부님이야말로 우주에서 가장 부유하신 분인데 무슨 재물을 긁어모은단 말인가?

사부님의 고상함과 사부님의 위대함, “큰 뜻을 품었지만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말라”는 제자에 대한 사부님의 가르침. 말씀과 행동으로 직접 가르치신 이 모든 것은 영원히 제자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후주 : 사부님의 생활이 소박하고 간소함은 제자들의 깊은 경애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구도하는 각자(覺者)가 반드시 구도 받는 사람과 같이 고생과 가난을 겪어야 하며 오직 이래야만 비로소 사람을 구도할 수 있다고 잘못된 인식을 가져선 안 된다. 이런 잘못된 인식 역시 박해가 발생한 후 일부 사람들이 악당의 날조 속에 미혹된 원인 중의 하나이다.】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3/14/1507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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