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 지역 동수들이 모두 안을 향해 찾기를 청함
【명혜망 2006년 6월 27일】한동안 우리는 각기 다른 지역으로부터, 해당 지역 동수들이 사악에게 연속으로 납치당하고 불법 수감 당한 후 보내온 교류문장들을 자주 받아왔다. 우리는 또 그 중 상당 부분을 연속으로 발표했지만 유사하거나 거의 똑같은 정황들이 여전히 끊임없이 각기 다른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 중 일부는 박해를 긴급히 폭로하고 동수를 다그쳐 구원함을 주로 호소했고, 일부는 체포된 동수에게 어떤 집착이 있음을 주로 분석했다(이런 유의 문장은 갈수록 적어졌다. 받은 원고를 통해 보면 각 지역 동수들이 모순 앞에서 문제를 보고 문제를 처리할 때 모두 갈수록 원용하고 안을 향해 찾음을 중시하고 있다). 일부는 체포된 동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다른 동수들의 수련상태에 대해 일깨워주고 현지의 정체적인 형세에 대해 마음을 쓰며 또한 모두들 법에서 다 함께 제고해야 함이 필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 중에는 지금까지도 감히 사람마음에서 걸어 나와 세 가지 일을 하지 못하는 수련생들이 더 이상 걸어 나오지 않으면 위험하기 그지없다는 문제를 일깨워주는 것을 포함한다(정법이 끝나지 않았다면 사부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에게 기회를 주지시겠지만 남은 기회는 갈수록 적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악과 낡은 세력의 요소는 절대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고 조만간 당신에게 훼멸적인 검증을 가할 것이다).
중국 전통문화 중에서는 하나의 도리를 배운 후에는 “하나를 보고 열을 알수 있고”, “한 가지 일로부터 많은 것을 유추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배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속인 층면의 요구이다. 우리 대법수련자에 대하여 사부님께서는 더욱이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기나니(學法得法 比學比修)”[1]의 요구를 제기하셨다.
아래 문장 및 이전에 명혜망에 실린 같은 유형의 문장들이 이야기하는 문제에 대해, 기타 유사한 정황이 있는 지역에서는 제때에 중시하고 제고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물론 다른 지역의 정황이기에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며 이로써 경각성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만약 사악이 자신의 지역을 박해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심지어 박해가 자기 개인의 머리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법에서 문제를 보고 자신의 수련을 본다면, 혹은 심지어 박해가 자신에게 떨어졌음에도 자신이 남이 실패했던 길을 반복하고 있음을 여전히 모른다면 그럼 오성이 너무 차이 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과 수련자 단체,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 함에 손실을 가져다주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정법이 이 일보까지 왔고, 모두 다 노력하여 사악으로 하여금 더 이상 구치소, 노교소, 감옥에 대법제자를 수감하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데 수련인에 대한 법의 기본 요구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손실을 증가시키는 것은 우리 모두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박해가 이미 발생한 지역에 대해 우리 마음을 함께하여 이미 발생한 박해를 반대로 낡은 세력의 배치를 타파하고 사악을 폭로하고 세인을 구도하는 기회로 여기자. 사악의 훼멸적인 검증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 다 함께 법속에서 용맹정진하자!
명혜 편집부
2006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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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랴오닝 둥강(東港) 지역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한 둥강 동수들과의 긴급 교류
글/대륙대법제자
2006년 1월 25일부터 5월 23일까지, 우리 둥강 지역에서는 12명의 동수가 사악에게 불법 체포 당했다. 정법노정이 이미 오늘까지 도달한 시점에서 사악은 왜 아직도 우리 지역에 대해 이렇게 미친 듯이 우리 동수를 박해하고 있을까? 나는 동수들이 납치당한 이 일에 대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세가지 일’을 하는 중에 둥강 지역에 존재하는 문제와 부족점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로써 정체적으로 다그쳐 제고하고 법에서 수련하게 해야하며 수동적으로 박해 속에서 수련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지만 또한 너무나 많은 편폭으로 동수들의 많은 시간을 점하고 싶지 않으며 아래 몇 가지 방면에서 개인의 인식을 말하려고 한다.
1.법공부와 수련 및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의 사명과 책임에 대해 아직도 똑똑히 몰라
어떤 사람들은 법공부를 아주 적게 하거나 법공부를 하지 않는데 《전법륜》에서 말한 것을 자신은 모두 알고 있다고 여기며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박해 받는 것이 두려워 법공부를 하는데 사악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에 만약 법공부를 하지 않으면 사악의 틈을 타게 되어 박해를 받을 것인 즉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마치 법공부의 목적이 대법에 동화하여 우리의 사전 대원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박해를 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 같다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인간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박해가 그렇게 두렵다면 사실상 박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여부는 사람과 신의 경계선이다.
또 일부분 사람들은 법공부를 임무로 간주하는데 마음상태가 아주 바르지 못하다. 사업 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법을 듣거나 혹은 MP3로 사부님의 설법을 들으니 되었다고 여기면서 다른 여가시간에는 속인생활을 지내기에 바쁘다. 진정으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순정(純正)한 마음으로 법공부를 하고 사부님의 은혜를 공손히 받들며 대법이 우리에게 부여한 지혜와 능력으로 사악을 더 잘 폭로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심한 사람은 아직까지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잘 하라고 요구하신 세 가지 일에 대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세 가지 일을 잘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전법륜》을 학습하기만 하면 원만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또 우리더러 진상을 알리라고 하는가?”라고 말한다.
나는 이상의 수련생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만약 우리 모두 이러한 마음상태로 수련을 대한다면 중생구도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마저도 구도할 수 없다. 이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대법을 얻고도 오히려 오랫동안 소중히 여기지 않고 실질적으로 수련하지 않으며 정법이 오늘날에 이르렀음에도 아직도 이런 상태에 처해있다면 사부님께서는 비록 여전히 자비롭게 당신을 기다리실 테지만 사악과 낡은 세력의 요소가 조만간 틈을 타고 들어와 당신에 대해 “훼멸적인 검증”을 할 것이다. 당신이 평소에 마음속에 법이 없다면 악의적인 박해 속에서 생사의 큰 고비를 넘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선택한 미래는 무엇이겠는가?
2.진정으로 법을 스승으로 모셨는가의 문제
일부 수련생들은 지금까지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는 이런 일을 할 때와 한 가지 일이 발생할 때 법으로 이 일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지 못하고 마땅히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를 가늠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을 본다. 특히 일부 중대한 일에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자신도 그렇게 하거나 혹은 법을 실증하는 중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람마음으로 판정하는데 자신의 정념이 없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해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정진요지(2)―길》중에서 또 근간의 설법에서 여러 차례 이 문제를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으면 우리는 바로 그렇게 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법을 스승으로 모신다”고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요구에 따라 행해야 한다. 많은 수련생들이 사악의 교란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서로 교류할 때 가장 많이 하는 한마디가 바로 “일체는 사부님의 말씀에 따르겠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하셨으면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이다.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돌이켜 실천 중에서 우리가 어떻게 했는가를 보자. “해낼 수 있어야 수련이고” 이래야만 비로소 수련이다.
3.정체적인 협조와 협력 문제
정체적으로 협조하고 협력함은 우리가 오늘날 진상을 알리고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이런 일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그것은 곳곳에서 체현된다. 아래에 단 한 가지 측면에서 정체적인 협조와 협력의 중요성과 그것의 거대한 작용을 설명하고자 한다. 지린성 어느 지역의 동수와 한 차례 교류를 가진 적이 있다. 이 지역의 동수들은 정체적으로 협조 협력하여 아주 잘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사악을 폭로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등의 방면에서 더 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동수가 납치되었다면 현지의 동수 및 협조인은 곧바로 행동한다. 일부 동수는 사악의 어느 부서가 이런 일을 했고 구체적으로 누가 했는지 조사하다. 일부는 가서 박해당한 동수를 구원하는 스티커 식 진상자료 등을 준비한다. 일부는 근거리에서 발정념 하고 일부는 박해당한 동수의 가족들과 함께 파출소에 가서 사람을 석방하라고 한다. 정말로 시간이 없어 걸어 나올 수 없는 동수도 동일한 시간에 발정념을 하는데 당시 접대를 책임진 경찰은 펜을 든 손마저 떨린다고 말했다. 그 결과 얼마 안 가 납치당한 동수는 노교소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일이 있는데, 어느 동수가 노교소에서 박해받아 사망한 후 현지의 동수들은 각종 방식을 취해 사악을 폭로했다. 그 지역의 공안국은 다른 지역의 공안국에 이렇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당신 지역의 ‘파룬궁'(수련생)을 모두 잘 감시하라. 그들이 우리 지역에 오지 못하게 하라.” 이는 무엇을 설명하는가? 첫째 사악과 악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지 우리가 사악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악은 우리 정체를 향해 온 것이지 단독으로 어느 한 사람을 겨냥하여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 방면에서 우리 지역은 오히려 매우 부족했다. 우리 지역의 동수들이 사악에게 박해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하였는가? 대부분 사람들이 동수가 붙잡힌 소식을 들었을 때 움직인 첫 일념은 바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그가 붙잡혔구나, 나까지 연루되는 것이 아닌가?’ 등이다. 자신마저 연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념이 없어진다. 일부 사람들은 동수가 붙잡혀도 자신의 안전문제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데 자신과는 마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다. 하여 냉담하게 한 마디 한다. “그에게는 누락이 있는데, 틀림없이 누락이 있을 것이다.”
마치 위에서 말한 두 번째 문제처럼, 우리는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늘 말하지 않았는가? 사부님께서는 이번 박해를 승인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왜 승인하는가? 누락이 있으면 반드시 박해당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 말을 할 때 우리가 그 당시 어느 기점에 서 있었는지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악이 동수를 박해할 구실이 하나 더 생긴 것이 아닌가? 동수가 박해당하면 우리가 우선 생각할 것은 마땅히 동수를 박해하는 사악의 요소를 제거하고 박해를 부정하며 동수를 구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몇 년 전 《명혜주간》에서 본 이런 한마디가 생각났다. “…감옥에서 박해당하는 동수의 몸을 우리 역시 한쪽 발로 밟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 개의 정체이기에 사악이 동수를 박해함은 우리 자신을 박해하는 것이 아닌가? 왜 우리 둥강 지역에서는 불법으로 체포된 동수를 한 사람도 구원해내지 못하는가? 진정한 대법제자라면 누가 자신과 관계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법 노정이 오늘에까지 이르러 우리 둥강 지역의 대법제자들이 정체적으로 협조하고 협력함이 더욱 필요한데 이래야만 비로소 보다 많은 세인들을 잘 구도할 수 있다. 현재 정황에서 보면 우리 지역의 정체적인 협조와 협력 방면에서 아직도 아주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렸고 우리에 대한 중생들의 희망을 저버렸다. 보다 많은 동수들이 걸어 나와 협조와 협력에 참여하길 바라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다그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그 일체를 잘 하길 희망한다.
4.협조일을 하고 있는 동수들에게 현재 존재하는 문제
(1)사람의 마음으로 법 실증에 참여하는 문제
비록 우리가 법을 실증할 때 다소간 사람마음을 섞긴 했지만 우리가 수련 중에서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이런 사람마음은 갈수록 적어졌고 정념은 갈수록 강해졌다. 그러나 만약 협조일을 하는 우리 동수가 이 방면에서 주의하지 않는다면 막대한 손실을 조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9평》이 나온 후에 일부 협조인들은 다른 진상자료는 할 필요가 없고 둥강 지역 사람들은 진상을 모두 알기에 《9평》만 해도 된다고 했다. 그 결과 만들어낸 진상자료는 배포되지 않았고 자료가 필요한 곳에서는 배포할 자료가 없었다.
협조인 자신이 둥강 지역 사람들이 모두 진상을 알고 있다고 여겼고 다른 수련생들도 맹목적으로 그를 따랐는데 그럼 사악은 왜 아직도 우리 동수를 체포하고 박해하는가? 만약 정말로 ‘9평’만 배포하고 기타 진상자료는 할 필요가 없다면 《명혜망》에서는 무엇 때문에 진상자료를 계속 실었겠는가?
2006년 5월17일,《명혜망》에서는 또 사부님께서 2003년 11월 15일 발표하신《현지 민중을 향해 현지 사악을 폭로하자》는 평주문장을 다시 실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첫째, 이는 정법 노정의 수요이고 둘째, 우리는 현지의 민중을 향해 현지의 사악을 폭로함이 모자랐고 철저히 폭로하지 못했으며 전면적으로 사악과 악인을 폭로하지 못했다.
처음에 이 동수는 아주 열성적으로 박해당한 동수의 자료를 찾아 소책자로 정리할 준비를 했다. 바로 자료가 곧 소책자로 만들어질 무렵 이 동수의 사람마음이 나왔다. 이전에 박해당한 적이 있고 지금 집에 돌아온 동수가 이번의 사악 폭로를 통해 또 다시 박해당할까 두려웠고 이로 인해 동수를 박해한 사악을 폭로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둥강 지역의 현지 사악을 폭로하는 자료는 지금까지 큰 면적으로 제작되지 못했고 배포하지도 못했다.
사악을 폭로하지 않음은 사악의 존재를 허락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진실한 이름으로 박해사실을 폭로한 동수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과 비교하여 너무나 멀리 뒤떨어져 있지 않은가? 사악에 대한 폭로가 부족하기에 사악이 비로소 발광하는 것이고 박해당한 동수는 아마도 내심에서 그들을 박해하는 사악을 우리가 폭로하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 “일체는 사부님의 배치에 따르겠다” “사부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신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때에 우리는 왜 사부님의 배치를 따르지 않는단 말인가?
(2)동수의 건의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문제
협조일을 하는 우리 일부 동수들은 어떤 다른 의견과 건의도 들으려 하지 않고 동수가 각기 다른 건의를 제기할 때마다 동수가 말을 끝내지도 못하게 한다. 이로써 동수의 건의는 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문제가 나타남은 협조인 본인의 수련과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법을 스승으로 모시지” 못하고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는, 자신의 정념이 없는 사람들과 많은 관계가 있는데 협조인의 가부장적 기풍을 키워주었다. 여기서 여러 동수들이 협조인의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모두들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체적으로 더 잘 협조하고 협력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주[1]:사부님의 《홍음》“착실하게 수련” 중에서(1994년 10월 7일)
기타 참고문장(일부분):
요즘 일부 지역 수련생들이 대량으로 체포되는 현상에 대한 교류
http://minghui.org/mh/articles/2006/6/10/129969.html
납치당한 동수를 5차례 성공적으로 구출한 일부 체험
문장완성:2006년 6월 26일
문장발표:2006년 6월 27일
문장갱신:2006년 6월 27일 14:23:49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6/27/131500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