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중국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2009년11월12일】
나는 95년 초에 법을 얻은 노제자이다. 지난날을 회고하면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부끄럽다. 나는 10여 년간 비록 굽은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대법의 표준과 사부님의 기대에는 많이 미치지 못해 이미 5차례의 대륙심득 교류회가 있어도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늘 나 자신이 잘한 게 없기 때문에 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번 제5차 교류회가 발표된 후부터 이는 사부님께서 대륙대법제자들에게 법을 실증하라고 준 기회임과, 우리가 수련하는 전반 과정의 일부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여 사부님께 수련한 답안을 받쳐야 하기에 이번에는 내가 잘했건 못했건 상관하지 않고 모두 쓰게 되었다.
10여 년간 대륙에서 수련한 상황을 회고해 보면, 오늘의 내가 제자로서 있게 된 진실한 체득과 깊은 감수를 언어로서는 다 표현 할 수 없다. 나는 오직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와 부처님의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말씀만 할뿐 입니다!”
1, 15여 년 간 걸어 온 수련노정의 근본적인 보장은 견정한 신사신법이었다
(1), 홀로 두 차례 북경에 상방하러가 법을 실증하는 걸음마다 사부님께서 가호해 주셨다.
나는 법을 얻기 전 여러 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공법을 연마해 어느 정도 호전 되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능히 병의 뿌리를 뽑을 수 있고 능히 위로 제고될 수 있는 공법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95년 정월 설을 쇠려 놀러갔다가 나는《중국파룬궁》과《전법륜》이라는 두 권의 책을 보게 되었다. 당시 나는 간단하게《중국파룬궁》을 보았는데 곧 거기에 끌려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줄곧 찾으려고 한 그 공법이라는 생각에 먼저 정공수인을 배워 집에 돌아 온 후 가부좌를 했더니 단전 부위가 약간씩 몇 번 아팠다. 후에 나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파룬을 안장해 주신 것임을 알았다. 그 이후부터 대법수련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집 밖에서 처음 연공한 그날부터 집에 돌아와 소업하기 시작하였는데 몇 차례 모두 열이 6시간이상이나 높이 올랐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의 신체는 매우 빨리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나는 대법과 사부님을 견정히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99년 강 집단이 미친 듯이 탄압을 시작했다. 나는 “4.25” 상급기관에 가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기 위해 동수들과 중남해로 갔다. “7.20” , 대량으로 수련생을 체포하는 걸 보고 나는 반드시 북경 상급기관에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여 사부님을 위하고 대법을 위해 도리를 따지겠다고 생각하였다. 7월22일 이른 아침 아무런 계산도 없이 혼자 북경으로 가는 객차에 앉아있었다.
속으로 생각해보니, 내가 북경의 동서남북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겠는가, 어디에서 내려야하는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나는 곧 사부님께, 사부님 저를 도와 길을 안내할 사람을 찾아 주세요, 제가 헛걸음하지 않게 해 주세요. 결과 북경에 들어간 후 차안의 2남1여 3명의 젊은이가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이 어디서 내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부님께 빨리 나를 도와 길을 안내하여 줄 사람을 찾아달라고 하였다.
바로 그때 머리를 드니 차에서 내린 한 젊은이가 가지 않고 바로 나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즉시 알아차리고 차에서 내렸는데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으며 사부님께 더없이 감사하였다. 우리가 북경거리에 갔을 때 (나는 무슨 거리인지 모른다) 도처가 모두 군인들이고 차량마다 군용차량이었다.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양측 길에 늘어선 행인들의 보따리를 삼엄하게 검사하는 가운데 한 무리읫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법을 실증하는 대법제자들임을 직감했는데, 그들은 거기에 조용히 서 있었으며 수시로 자각적으로 서 있는데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마음으로 오늘의 법 실증은 가능하게 이런 형식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럼 나도 응당 그 단체 중의 일원인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나는 곧 차에서 같이 내린 그 여학생과 함께 길을 건너 자각적으로 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에 들어섰다.
수련생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자 군인과 경찰이 자동차로 한차, 한차씩 풍대 체육장으로 실어 날랐는데 그곳에는 전국각지 성시에서 온 대법제자들로 꽉 차 있었다. 한 차가 들어오면 전 장내가 즉각 박수를 치면서 환영했다. 비록 그곳에서 만난 동수들은 서로 모르지만 마치 아는 사이처럼 친근하게 서로를 고무 격려했다.
2000년 9월 30일, 나는 또 북경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사악은 모든 힘을 동원해 차량수색을 벌였고, 신분증 검사도 샅샅이 했다. 사악은 내가 앉은 주변의 젊은이 10여 명의 신분증이 없다고 쫓아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줄곧 사부님께 “사부님, 저는 신분증이 없으므로 절대 그들이 찾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천안문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나도 길을 잘 모르기에) 결과 나에게는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았고 근본 나를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뒤 대략10분 정도 지난다음 경찰이 또 다시 차에 올라와 아직도 신분증 없는 사람이 있는가? 고 두어마디 소리치고는 곧 차를 통과시켰다.
천안문에 도착한 다음 나는 신분증이 없어 여관에 들지 못하므로 교구의 어느 층집 아래에서 하루 밤 지내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산동에서 어린이를 데리고 온 한 동수와 3번이나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우리는 연분일 것이라며 이야기하던 도중에 내가 거처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주동적으로 나를 이끌고 여관에 가 아이의 침대를 나에게 내 주었다. 당시 나는 소업하고 있었는데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장단지의 껍질이 벗겨져 피가 흘러 여관의 더운물에 발을 담그고는 상처에 달라 붙어있던 종이를 뜯어낼 수 있었다.
다음날 “10.1”일 아침에 혈기 올리는 의식을 한 후 나는 또 묘하게 동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당신을 따라 가겠으며 당신이 어디가면 나도 따라 어디 가며 당신이 어떻게 하면 나도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동수는 우리지방의 보도소의 책임자이다) 당시 광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대법제자가 광장의 절반을 점하였다. 도처에 대법제자들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왔다. 우리 둘은 동수를 선두로 순간적으로 10여 미터 크기의 붉은 색 바탕 천에 노란색 글씨로 적은 “파룬따파 하오” 현수막을 치켜들었다.
나는 비록 경찰에게 제지당해 머리를 땅에 대었지만 내 마음만큼은 영예로웠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좋은 동수와 함께 정정당당하게 대법이 좋다는 것을 실증하게 하신 것이었다. 나는 경찰차량에 실렸어도 마음은 사부님께 대한 감사로 충만했다. 사부님께서 모두 안배해 주셔서 나로 하여금 천안문광장에서 헛되지 않도록 하셨고, 소원이었던 대법이 좋다는 것을 실증하게 하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파룬따파는 좋다 ” 고 소리칠 때 나는 흐느끼느라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2), 정념으로 관을 넘고 가정 구치소를 돌파하다
99년에 나의 남편은 갓 2선으로 물러나 경찰직이었다. 아이들도 거의 모두 공안 부분에 근무하고 있어서 가정 내 압력이 매우 컸다. 남편은 밥그릇을 잃을까 무서워했고, 애들은 사업에 영향이 있을까 무서워했으며 나 자신도 무서운 마음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사부님과 대법이 악인들에게 비방당하고、모함 당하기에 나는 대법제자이므로 좋은 것만 얻으려하고 감히 진정한 말을 하지 못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전법륜》에서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 참기 어려운 것을 당신은 참아 보고, 보기에 안 되고 행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을 그러면 당신이 한번 시험해 보라. 도대체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一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전법륜》)라고 하셨다.
2000년5월13일, 북경에 가 상방하려 했다는 이유로 당지 공안에서 접수하고 돌아올 때 파출소 경찰이 손에 한 뭉치 서류를 가지고 왔다. “전시통보”였는데, 400원 월급을 받는 남편의 일을 정지시키고 검사서를 쓰게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매일 검사서를 가지고 공안국 각 사무실을 다 돌아서야 국장과 만난다. 그렇게 날마다 남편을 욕보이고 아울러 국장 4명이 동시에 남편을 찾아 담화를 하며 위협했다. 당신의 마누라가 다시 북경에 가면 당신을 공안국에서 조동시킨다고 한 것이었다. 이런 가정, 사업, 사회. 여러 방면에서 오는 압력과 무서운 마음이 한 번에 모두 나에게로 집중되어 왔다. 남편은 날마다 나를 핍박했고, 텔레비전의 비방과 거짓말을 크게 틀어 듣게 하고 보게 했다.
내가 듣지도 보지도 않으면 남편은 직장에 출근하지도 않고 나를 지키고 앉았고 그러면 나는 또 단식을 했다. 나를 아무 곳에도 못 가게 하자 나는 정신이 붕괴되는 것 같았다. 정신이 극한에 도달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대법제자가 미치면 먹칠을 하는 게 아닌가? 차라리 일어나 TV에서 떠드는 소리가 무엇인지 듣고는 거짓말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해 주면서 사악의 거짓을 폭로하자고 생각하고는 일어났다.
남편은 처음에는 내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차츰 묵묵히 듣다가 어떤 부분은 나의 말에 동감했다.
처음에는 내 말을 잘 듣지 않던 남편이 차츰 내 말을 들었지만 맞장구치지 않다가 어떤 부분에는 동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차 나에게도 느슨해졌지만 내가 나가면 곧장 따라 다니거나 열쇄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 또한 자유가 있는 것이고, 바르게 해야 할 것은 바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곧장 나가서 동수들에게 진상자료를 받아 배포했다. 그렇게 하면서 나의 활동에 대해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고 알리지 않았는데, 가끔 무서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부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고 있기에 내 마음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기에 나를 절대로 사부님께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바깥에 나가고 싶으면 나가서 일을 견지하면서, 가족들에게도 나의 대법수련의 길을 막지 않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집에서는 고생을 겁내지 않고 원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뜰히 보살피며 나에게서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랬더니 특히 며느리가 만족하여 줄곧 우리 집에 들어서면 하루의 피곤이 풀어져 좋다고 했다. 그렇듯 가족들은 천천히 더 이상 나를 간섭하지 않고 상관하지 않는 게 지금은 이미 습관이 되어 내가 밖으로 나가도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다.
(3), 오직 마음속에 법을 담기만하면 무슨 모순이나 모두 능히 제거 된다
2001년 내가 재차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고 돌라온 후 직장 보위 과에서 4사람이 우리 집으로 3차례나 찾아왔다. 나는 그들을 열정적으로 맞이했지만 그들이 요구한 보증서를 쓰지 않았다. 그랬더니 남편에게 찾아가 “당신 마누가가 북경에 가지 않는다고 보증하지 않으면 당신 아내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고 협박했다. 사실 내가 처음 북경에 갔을 때부터 남편은 늘 나에게 북경에 가면 곧장 이혼한다고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나는 비록 남편을 상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달픈 마음에, 내가 어떻게 잘해야 이 모순을 평행 잡겠는가? 생각했다. 남편이 큰 압력 앞에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을 보고 도리를 알려주려 했지만 남편은 아예 진상을 들으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조급하고 괴로웠다. 사실 나의 직장상사가 남편을 찾아가 괴롭혔는데 (당시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남편은 깊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정식으로 나를 깨워 매우 심중하고 참다운 심정으로 말했다. “나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워 3시가 넘었는데도 눈을 부칠 수 없고 잠을 잘 수 없다. 오늘오후 당신직장 사람들이 또 와서 나를 핍박하였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그의 심리적인 고통을 능히 이해할 수 있었고, 아울러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수련의 문제에서 절대로 타협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럼 당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요? 나는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 테니 내일 당신이 함께 가서 이혼수속을 하면 당신에게 연루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남편은 나에게 수련을 양보하라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기실 나도 적의 공격을 늦추는 계책을 썼다. 사부님께서는『전법륜』에서 “연공 때문에 부부가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그는 말이 없었다.
다음날 남편은 내 말이 정말이라고 생각했기에 매우 참답게 사양하면서 “앞으로 당신이 (집을)나가도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웃으며 이곳의 일체 절반이 나의 것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가겠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멍한 표정으로 큰소리로 말하기를 “당신이 가지 않겠으면 이혼하지 맙시다. 우리 구역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이혼인가” 이렇게 되어 그때부터 다시는 이혼을 제기하지 않았다.
2, 시간을 틀어쥐고 법 공부를 많이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법 공부를 잘해 “안을 향해 찾는” 법보를 잘 틀어쥐고 실수하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번 설법 중에서 법 공부를 많이 할 것을 재삼 강조하셨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나는 매일 5∼6강의『전법륜』을 공부하였다. 2002년 이후에는 손자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법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나는 밤12시 발정념을 마치고 법 공부를 시작해 새벽2시반좌우에『전법륜』2강을 공부하고 다시 한 시간 자고 3시 반에 일어나 아침연공을 하였다.
2007년에 밍후이왕에서 대륙 동수들이 함께 10시 50분에 연공할 시간을 증가했다는 통지에 따라 나는 연공을 저녁10시50분으로 옮겨서 한 뒤 12시 반에 잠을 잤다. 그리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8시 반까지 『전법륜』2강 혹은 3강을 보면서 발정념을 3번하였다. 이렇게 매일 저녁연공을 하고, 아침 법 공부를 하고, 오전에 나가서 진상을 말하고, 자료를 배포하고, 오후 매주 단체 법 공부를 2∼3번 한다. 나는 부단히 법 공부함에 따라 나의사상, 심신이 점차적으로 법 중에 용납될 때에 그러한 나쁜 관념, 사람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개변되며, 바로잡아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완고한 관념, 사람의 마음도 촉동되고, 폭로되어 나온다. 비록 법을 매일공부하지만 일에 봉착하면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찾을 줄도 몰랐다.
사부님의『2004년 뉴욕 국제법회에서의 설법』이 발표 후, 나의 고향에 경문 및 일부자료를 전하여 주었다. 그날 내가 70여부의 경문을 가지고 먼저 한 동수에게 가는데 대략 12월 중순 눈이 내려 길에는 모두 용화된 흙탕물이었다.
사거리 교차로 200m가량 걸어 왔을 때 나는 한 손으로 가방을 들고는, 사람이 많아도 괜찮으니 오른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게 내가 눈을 떴을 때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았고,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그렇게 달라 보여 여기가 어딘가? 내가 왜 여기에 서있나? 좀 지나서야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딘지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동북쪽 북을 향해 걸었는데 어떻게 큰길 어구의 서쪽에 서 있는가? 그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머리를 만져 보니 손에는 온통 흙이라 비로소 내가 넘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넘어졌고 누가 나를 일으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경문을 넣은 가방을 보니 흙이 조금도 묻지 않고 그대로 있었고 그 손이 붙잡지 않았더라면 모두 떨어뜨릴 뻔하였다. 이 가방 안에 무엇을 넣었지, 마치 누구의 집으로 가져가야 하는 건 기억이 났는데 누구일까? 누구이며 어디에 사는가? 모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한번 이사를 한 것 같은 기억은 났지만 어디로 이사했는지 몰랐다.(기실은 이미 이사한지 7년이 되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집으로 향했다. 가방을 보니 아주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아 집으로는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로 가져가야 하나? 생각을 하며 걷다가 무의식적으로 길모퉁이를 돌았다. 그 때 갑자기 하나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바로 내가 가야할 동수 아들의 전화번호였다. 그 전화번호는 가끔 4~5차례 밖에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다.(사부님께서 일깨워주신 것이다) 공중전화를 걸어 집 위치를 물으니 아이가 웃어 나도 따라 웃었다. 그 집에는 이미 여러 차례 가 본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길을 물어서야 비로소 그의 집에 도착했다. 동수는 나를 보자 넘어졌는지 물었고,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옷을 벗어보니 잔등에 흙이 묻어있었고, 속이 메스꺼운 느낌이 들었다. 이는 뇌진탕 증세였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위층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마치 7~8년이나 오지 않았던 것 같았고, 집 또한 낯선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남편이 따뜻하게 차려준 밥도 먹지 않고 재빨리 가부좌를 한 뒤 발정념을 했다. 그렇게 1시간가량 발정념을 하자 속이 메스껍지 않았고, 그제서야 머리가 아파서 만져보니 껍질이 정수리 껍질이 벗겨져 있어서 머리를 감을 수 없었다.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뒤로 넘어진 것 같은데 뒷머리는 아프지 않고 정수리가 터진 게 이상했다. 그래서 아래층에 내려가 자전거를 보니 자전거 왼손잡이 부분이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차 오른쪽으로 넘어지면서 정수리가 먼저 땅에 부딪쳤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찬공기를 마시며 쉼호흡을 한 뒤 내가 360도 돌면서 꼬부라져 떨어졌는데, 나이 60에 140근이나 되는 체중으로 그렇게 떨어졌으니 얼마나 위험했는가, 만약 사부님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나는 정말이지 끝장났고,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죽었을 것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부님의 새로운 설법『2004년 뉴욕국제법회에서의 설법』을 연속 4번 공부하였다. 그때, 나는 “만약 당신이 법을 실증한다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뭐라고 해도 당신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가장 선의적인 변명이라 할지라도 당신은 모두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다. (박수) 왜냐하면 당신이 대법을 제1위에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이 제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다.” 이 두 단락의 법을 보면서 나는 단번에 명백해졌다. 최근 발생했던 심성관을 돌이켜보니 모두 다 일을 하며 일을 논했을 뿐,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는가? 늘 자신의 안을 향해 찾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원망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버려야 할 마음을 찾지 않을수록 모순은 더욱 격화 되었으며, 하나의 난은 다른 하나의 난보다 컸으므로 마음은 뼈를 도려내는 것처럼 아픔을 조성해 평온해지지 않았다. 난은 모이고 모여 무더기로 커져 건너가지 못했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곤두발질 하여 도를 깨닫게 한다. 이 한 번의 곤두박질은 나로 하여금 집을 찾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나 더러 명석해지게 하였다.
참답게 자신을 잘 찾아 보아야하는바, 사부님의 말씀은 마치 영단묘약과도 같이 나의 마음에 들어왔다. 당시 내 마음속은 마치 아래, 위가 하나의 매우 큰 빈 통과 같이 느껴졌고 아무것도 모두 없었고 무슨 평형 되지 않는 것이 없이 아무것도 모두 없었으므로, 처음으로 나는 안을 향해 찾는 단맛을 체험하였다. 그 당시의 교훈을 기억해 그것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자신의 일사일념을 포함해 매차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니 심성관이 점점 적어졌으며 기타 좋지 못한 사람의 마음도 점진적으로 바르게 놓았다.
2007년 우리 고향 전현의 협조인 한 사람씩 차례로 납치되어 세뇌 반에 갔다. 당시 나는 동수들이 나를 연루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동수들은 나에게 주의하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대법 책을 잘 보관하고 나는 곧 내가 해야 할 3가지 일을 잘하면 누구도 감히 와서 나를 박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마음 편하게 매일 아침에는『전법륜』을 3강씩 공부했고, 오전에는 진상을 알리고 자료도 배포하며 오후에는 단체법공부와 기타설법을 공부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몇 달이 흘러갔는데, 그들 모두 전화 되어 돌아 왔으나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후에 들은 말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다 말을 했고, 더구나 나와 연계가 제일 많았던 한 협조 인은 전화 된 후 내가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계속 3번이나 그를 찾아가 그의 가족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그와 교류도 했다. 결국 마지막에 그는 성명을 쓰고 다시 수련을 시작하면서 나에게 경찰에서 다 말했던 것을 사과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는 매우 견정하고 매우 착실하게 수련을 한다. 또 다른 3명의 동수도 끝까지 찾아 가서 만나 지금은 모두 성명을 썼으며 대법수련에 돌아와 계속하여 협조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내 자신이 수련을 잘하지 못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반드시 말하고 싶은 것은 마지막 귀중한 시간을 시시각각 자신을 하나의 수련하는 사람으로 간주하여 법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을 잘하여 중생구도를 첫 자리에 놓고 사람을 많이 구하고 자신이 사전에 한 큰 소원을 체현해야 한다.
(밍후이왕 제6기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 교류회)
문장발표: 2009년 11월 12일
문장분류: 정법수련 >대륙인터넷법회글 >6회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9/11/12/2118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