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遙寧)성 신우(心悟)
【밍후이왕 2009년 11월 24일】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여러 동수들 안녕하세요!
나는 96년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다. 인터넷을 통해 명혜편집부 중국대륙 대법제자들의 체험 교류(6기대륙법회) 모집 공고를 보고 매우 감격 되어,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또 한 차례 법을 실증할 기회와 대법의 기적을 펼칠 기회를 주신데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위대하고 자비하신 사부님 감사합니다!’ 저는 몇 년간 수련한 심득(心得)을 써내어 사부님께 보고 드리고, 동수들과 교류하려 한다.
1999년 ‘7.20’ 부터 이야기 하려한다. 그 암흑 한 나날에 하늘이 변하고 공기마저도 사악의 요소가 서리고 도처는 사악의 눈이었지만, 사부님의 점화로 그 분의 자비와 대법의 신기를 진감했고, 그 분께서는 자신보다도 제자인 우리를 더욱 아끼신다는 것을 진정 알 수 있었다.
• 사부님 자비로 ‘7.20’에서 걸어 나오다
그때 나는 동수와 동행으로 상방(上訪)하러 갔다가, 회사에 의해 돌아온 후 계속해서 회사의 감시를 받았다. 동수들은 내가 잡혀왔다는 말을 듣고 나를 보려 회사에 왔다. 그 기간 곡절은 있었으나 동수들과 함께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웠으나 오래도록 잠들지 못 한 채 ‘사회가 왜. 갑자기 돌변하였는지 알 수 없어서’ 천장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그 순간 내 눈앞 천장이 일망무제 (一望無際)한 영상으로 변하여 펼쳐져 나타났다가 지나갔다. 나는 놀라움으로 멍해졌다, 이런 영상은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나로 하여금 다른 공간을 보게 하여, 대법에 대한 믿음과 신심을 확고하게 하려는 사부님의 점화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맘속으로 묵묵히 ‘사부님 안심 하십시오! 누구도 대법과 사부님에 대한 나의 신념을 동요 시킬 수 없습니다.’ 라고 맹세하며 법문 한 구절을 생각했다. “무슨 불(佛), 무슨 도(道), 무슨 신(神), 무슨 마(魔)이든, 모두 나의 마음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말라.” 《전법륜》
아직은 밝지 않았으나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서 연공을 했다. 시작한지 금방 나는 하늘을 날아올라 작은 별들을 손에 쥐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놀았는데 그렇게 자유자재로 내 마음대로 였다. 그 때만은 일체 잡다한 인류의 일들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출정할 때는 어렴프시 사부님께서 나의 신변에 계신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이내 소리 내어 울자, 옆에서 자던 애를 깨우게 되어, 그러는 나를 본 애도 내 팔을 껴안고 울었다. 그도 대법제다.
좀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연공을 시작했다. 손의 감각이 이상한듯해서 보았더니 손이 온통 흑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사부님께서 나의 신체가 아직 고에너지 물질로 완전히 전환되지 못했으므로 연공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시는 것이라고 알았다. 이런 현상은 몇 달 간 지속되었는데 지금까지 줄곧 연공에 대하여 감히 게으르게 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반도체 라디오가 있는데 전 세계 라디오방송을 모두 청취할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국제방송국’이 매일 저녁 8시 중국에 대한 방송을 했다. 방송을 시작할 때 나오는 음악은 모두 ‘대법연공음악’이었다. 당시 나는 큰 고무를 받았다. 잊을 수 없는 일은 바로 ‘7.20’ 그날에 나는 운 좋게 사부님의 인터뷰 녹음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의 친절하신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흐느껴 울었다. 사부님께서는 마지막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기에서 나의 대법제자에게 몇 마디 말하련다….” 하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격동되어 밤새 나의 집 근처의 동수들에게 알려 주고, 함께 감격해마지않았다. 그런 사악한 나날중에 그런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진귀한가! 언어로 표시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크나큰 안위와 격려를 주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신변에서 가호(加護)해 주시는데 모든 심혈을 기우리신다. 어느날 회사에서는 조명기구를 전부 새것으로 교체 할 예정였는데,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의 경우 방이 커서 열 몇 개의 등이 필요 했다. 이를 모두 바꾸려면 3,4일은 기간이 필요했다. 우리 회사의 환경은 매우 좋은편이여서 동료들과 상급자들까지 모두 나를 지지해 주어 할 일이 없을 때는 법공부를 하였다. 이같은 현상은 이미 습관처럼 되어 동료들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명 기구를 바꾸는 작업을 하게 되면 나의 법공부에 지장이 있을 것을 생각한 동료들이 옆방의 키를 주면서 나더러 그 방에 가서 책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알려준 방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읽었다.
나는 언제나 법공부할 때 《전법륜》을 한번 보고나면 다른 설법 책을 읽고는 했는데, 그날은 마침 《스위스 법회의 설법》을 공부하는 날이었다. 나는 그 설법을 몇 번을 읽으면서 내용 중, 우주에 대한 부분의 내포를 이해하지 못하고 표면의 글만 보아왔었다. 그러나 그날은 책을 읽으면서 한 층의 우주 속으로 들어갔으며, 호한(浩瀚)한 우주에서 여행하다가 돌아 왔으며, 어떻게 우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알 수가 없어 멍 -한 상태였다. 위대하고 자비하신 사부님의 고심의 점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 정말 너무 자비 하십니다!
‘7.20’때 남편은 출장을 갔는데 그도 ‘7.20’의 거센 파도에 놀라 집에다 많은 전화를 걸어왔다. 남편의 아버지는 악당의 문화혁명의 광란 속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이미 악당의 몇 십 년의 악행에 두려웠던 것이다. 며칠 후 그는 돌아왔는데 몸이 많이 야위었다. 그가 나를 걱정하는 맘을 알 것 같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사악의 형세에 놀라 기절초풍 하여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나더러 대법을 포기하라고 강요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 재난을 가져 올 것 이라고 말했다. 말을 듣지 않는 나에게 그는 흉하고 악하게 변하여 입질, 손질을 했으며 또 내던지고 부수고 했다. 내가 법을 듣고 연공 하는 크고 작은 비디오를 모두 부수어 버렸으며 그릇과 각종 집기들을 마구 박살냈다. 내가 ‘법공부.연공’을 하기만하면 나를 때리고, 꼬집고, 비틀고 했다. 연속 10여 일을 그랬다! 그러는 동안 나는 온몸이 무력해지고, 머리가 몽롱하여 눈물을 흘려 나중에는 더는 흘릴 눈물조차 없어졌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던 어느 날 저녁, 남편은 또 큰소리를 지르며 나를 구타하면서 대법수련을 포기하라고 밤중까지 소란을 피워, 나는 머리가 터지는 것만 같아 더는 참을 수 없어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집 밖으로 나가려고 두, 세 계단을 내려 왔는데 무의식중에 눈길이 창문에 닿았다. 그 순간 금빛 찬란한 큰 ‘파룬’이 돌고 있었다. 나는 멍한 가운데서 즉시 사부님께서 점화해 주신 것을 알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갈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선채로 철제 난간을 잡고 계속 돌고 있는 파룬을 보는데 눈물이 샘처럼 솟았다. 이때 남편이 문을 열고 계단 한 가운데서 오도가도 않고 서있는 날 보고는 문을 쾅 -하고 닫아 버렸다. 그 문닫는 소리가 내 가슴을 찍는 것만 같아 고통스러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차츰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누구도 나를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사부님의 안배한 길로 갈 것이다.’ 고 다짐한 후 되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잠들었고 난 조용히 법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내가 어디를 가든 어디를 보든지 간에 먼저 나의 눈앞에는 파룬이 보였다. 머리를 들면 눈앞에 파룬이 돌고, 문을 열면 문에서 돌고, 자물쇠에서 돌고, 키에서 돌았다.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주의를 주었으며 정진하도록 고무해 주었다.
그 후 신기하게도, ‘7,20’ 전에 사부님께서 6개 나라에서 설법하신 설법집들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읽고 또 읽었다. 진동과 개변이 너무나 커서, 자신이 설법에 녹아 들어간 것 같게 느껴졌으며, 날마다 변하는 감수가 참으로 신기했다. 나는 ‘7.20’ 전에는 수련한 것 같지 않았으며, ‘7.20’이 후에야 비로소 수련하여 법리를 알게 되고 깨달은 것 같다.
• 첫 진상자료와 첫 대법의 기(旗)
‘7.20’후 어느 날, 보도원이 나에게 한 부의 진상자료를 가져왔는데, 그 것을 통해 처음으로 동수들의 소식을 알게 됐다. 나는 공산당이 무엇을 하는가를 우선 일부 사람들에게 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회사의 통신기록을 이용 하여 우편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서 보도원을 찾아가 진상자료가 더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매 동수에게는 한 부씩만 배정 됐다고 하여, 나는 동수들이 다 본 다음 나에게 모두 달라고 하자, 그는 무엇 하려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일반 세인들에게 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리고 그런 것들이 바로 진상 자료인지도 몰랐다.
이런 식으로 나는 자료가 생기면 우편을 통해 발송 했는데, 어느 날 법공부를 하다가 사부님이 설법에서 “나는 당신에게 문 앞까지 가져다 주었다.”《전법륜》고 하신 말씀을 보고 이런 자료들을 직접 세인들의 문 앞에까지 보내야겠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먼저 아이를 통해 필요한 집 대문에 봉투를 붙일 수 있는 양면 스티커 테이프를 준비 했다.
나는 물건을 찾다가 연공장에 걸었던 ‘파룬따파’기(旗)를 발견 하고는 우연치 않게 ‘7.20’이 후에 내 수중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그 깃발에 쓰여있는 파룬따파(法輪大法) 란 글을 보고 만약 좋다는 호(好)자를 더해주면 좋겠다 싶어서 투명 비닐로 ‘파룬따파’ 글을 찍어 내고 시장의 벽보의 호(好)자를 찍어내 함께 조합했다. 그리고 흰 천에 본을 뜨고 빨간색을 칠을 하여 ‘法輪大法好’ (파룬따파하오)란 대법의 기를 만들어 냈다. 어디에다 걸 것인가 궁리 중인데. 하루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학교 가는 길에 입체교차로 개통식을 했다면서, 엄마랑 같이 교차로 위를 가보자고 하여 우리 모자는 자전거를 타고 교차로 위로 갔다. 계절은 여름이고 새로 개통한 입체교차로여서 교차로 아래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래, 여기다!’ 하는 생각에, 위치를 가늠 한 후 한끝은 교차로 난간에 끈을 묶고 다른 한 끝은 기둥에 묶은 다음 기를 펼쳐 걸었다. 처음 두렵고, 조급하고, 경험도 없고 하여 기를 펼치고 보니 거꾸로 되었다. 조급한 맘 견딜 수 없었으나 용케도 겨우 제대로 겨우 다시 걸었다. 기를 걸 때 아래 산책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손짓하고, 어떤 사람은 소리쳤다. 우리는 기를 걸어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한 참 후에 인파속으로 묻혀 버렸다. 아이는 호기심이 발동 하는지 다시 입체교차로에 가보자고 하여 우리는 돌아서서 입체교차로 밑으로 와보니, ‘파룬따파하오’란 대법의 깃발이 교차로 중간에 단정하게 걸려 있었으며, 장엄하고, 신성했다. 비록 빨간 색으로 칠을 한 서툰 모양 였으나, 오히려 특별히 주의를 끌고 눈부신 듯해서 기쁘고도 감격스러웠다. 집에 돌아와 나와 아이는 눈짓으로 서로 마음속의 기쁨을 나누었으며, 이불 속에 누워서도 소리 없이 웃었다.
• 정법시기 대법제자 기쁨
2006년 16일, 드디어 사부님의 한편의 《경문 (원만에로 향해 나가자)》을 받았다. 정말 슬픔과 기쁨이 엇갈렸으며 눈물이 얼굴을 씻었다. 그 후 또 《이성》과 《미국서부에서의 설법》등이 발표되어, 그때로부터 우리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열어놓은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길로 나갔으며, ‘사부님의 정법 보조’가 되어 중생을 구도했다.
• 진상을 하고 대량의 진상자료를 배달
나는 집과는 10여 분 거리에 있는 회사로 출근 하고 있었다. 출근 전에 진상자료를 배달하기 위하여 매일 한 시간 앞당겨 출발하고, 점심휴식종이 울리면 회사부근의 주민 구역에 진상자료를 배포했으며, 저녁 퇴근 후 에도 하였다.
한 번은 진상자료 배포를 위해 한 건물 문 앞에 섰는데, 잠겨있던 전자장치 문이 손을 대기도 전에 드르릉 소리를 내면서 저절로 열려 무사히 배포를 했고, 어떤 때는 5,6여 동에 배포 하는 동안 여름인데도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아 수월하게 배포를 하기도 했다. 한번은 6m 되는 기를 걸 장소를 물색하던 중, 길가에 큰 철 골조가 세워져 있고 아래는 녹지대여서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기를 걸려니 너무 높아 사다리가 있었으며 좋겠다고 생각 하며 몇 걸음 걷는데, 휴식하는 의자위에 좀 큰 돌 세 개가 있고, 그 옆에 사다리가 누워 있는 게 아닌가. 또 어느 날은 경찰국 앞 아파트에 기를 걸려고 갔으나, 나무 막대기를 갖고 가지않아 그대로 가서 어디를 만지니 막대기가 손에 쥐여져 저절로 나의 손에 뛰어든 것만 같았다. 그 후 나는 아이와 함께 성 위원회청사, 검찰청청사 앞 아파 등에 ‘천멸중공’ 기를 걸었었다. 후에 나는 기를 걸 때 일체는 사부님이 안배하심을 믿고 어떤 부속 물건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이 모두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정법노정을 따라 잡으라고 우리에게 공능을 열어 놓으신 걸로 생각 된다.
• 녹색으로 변질 된 물 병
사부님은 여러 설법에서 법공부의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나는 법공부를 매우 중시했다. 집이든 회사든 시간만 있으면 법공부를 하여 매일 세 네 강, 많을 때는 여섯 강을 공부할 때도 있었다. 직장 작업량이 많지 않아 반나절에 끝나는 때는 언제나 회사에서 매일 두 강 이상을 공부했다. 법공부에 지장이 되지 않게 심지어 목이 말라 갈증이 심해도 물을 마시지 않는다. 물은 언제나 잠잘 때 마시니 항상 물병을 침대 머리에 놓고 자다가, 먹고 싶으면 눈감고 물을 마시었다. 하루는 침실에 들어 무의식중에 침대 위의 물병이 녹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 나는 자세히 다가가보니 물병에 이끼가 가득 꼈다. ‘이런 물을 마시고도 이렇게 건강하다니.’ 대법의 초상적임과 신기함을 불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나에게 ‘민감일’ 은 없다
나의 머리 속에는 그 무슨 ‘민감일’이란 속설이 없다. 반대로 민감한 느낌이 들 수 있는 특정한 날일 수록 진상 자료를 더욱 많이 배포하며, 대법의 깃발도 역시 더 많이 걸어 놓았다. 예를 들면 ‘4.25’사부님의 생신일, 혹은 속인의 명절이나 휴가 일, 심지어 ‘7‧ 20’ 등에 시간을 틀어쥐고 평일보다 배로 배포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이런 날일수록 나는 사부님이 더욱 그리웠으며 옥중의 동수들이 더욱 염려 되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했든지 막론하고 사부님이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것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중생 구도와는 너무너무 멀다.
• 가정 자료점의 행렬에 들어가다
2004년 나는 퇴직했다. 사부님의 점화와 동수의 도움으로 ‘가정 자료점’ 행렬에 들어섰다. 동시에 법공부 팀도 나의 집에 다시 개설하였으며, 줄곧 오늘까지 나는 법을 외웠다. 자료점을 열었을 때 컴퓨터와 프린터에 대하여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 전자시장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공포로 시장에 갔을 때 형장으로 가는 것 같았으며, 머리 속에서 계속 정.사(正/邪)대전이 벌어 졌다. 잉크를 바꿀 때 한 동수가 “당신은 그곳 시장에 익숙하지 않으니 다른 동수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다음에 당신이 스스로 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돼, 그래도 내가 갈 것이야. 내 일은 내가해야 해!” 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수들은 계속해서 “그 곳은 도처에 사복정보요원들이 깔려 있으니, 그곳에서 생소한 사람이 잉크을 교환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자료점을 노출시키는 것과 같아. 일이 잘못되면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워, 그러니 이번만은 다른 동수에게 도와달라고 해!”라고 강력하게 말 했어도, 나는 그래도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해야 해. 당신들도 이렇게 하고 있지 않아. 하나의 과정이 있어야 해!” 이렇게 주장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전자 상가에 가서 잉크를 교환 하려고 생각하니 머리가 터지는 것 같고 공포심으로 오전 내내 머릿속 투쟁을 했다. 12시 정각 발정념을 했다. 이때 사부님의 법은 머리 속으로 타진(打診)해 들어갔다. – 수련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오직 당신 스스로 진정하게 수련해야만 자신이 비로소 층차를 제고할 수 있다.《전법륜》- 어떠한 다른 선택도 없다. 오직 나 자신이 가야 한다. 이렇게 내가 가야 한다고 정하자, 마음은 즉시 안정 되었으며 나쁜 염두도 없고 홀가분하고 머리도 청성했다. 전자 상가에 가서 점포 주인중 선량한 얼굴을 찾다가, 한 카운터에 여직원 두 명이 눈길에 닿자 그녀들은 나를 보고 인사하면서 “언니 무엇을 살래요. 무엇이 필요하세요? ” 하고 묻는다. 나는 그들이 정 있고 선량하다고 생각되어 조용히 “잉크를 바꾸려한다” 고 말 하자, 그들은 거의 동시에 “예, 예. 저희들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중 한 여직원은 나보고 “언니, 우리의 창고가 바로 뒤켠에 있으니 창고에 가서 사람을 찾아 즉시 바꾸어 줄게요. 나와 함께 갈래요, 아니면 여기 앉아 기다릴래요. 10분이면 돼요.” 라고 했다. 나는 앉아서 10분을 기다리면서 줄곧 발정념을 했다. 무사히 잉크를 교환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렇게 작은 일로 왜 놀랐지!’ 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렇게 나는 힘들게 첫 걸음을 내딛었다. 창고에서 잉크를 교환 하는 가게는 거의 없었다. 나의 심성이 너무 낮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저를 도와 그렇게 제일 안전하게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방식을 선택해 주신 것이다.
한번은 시골 동수가 와서 소모품을 너무 많이 구입했고 또 갈 길이 멀어 차로 운반했는데 구름을 탄 것 같았다. 나는 가는 길에서 줄곧 사부님의 가지를 구했다.
하루는 한 동수가 나를 찾아와 전자 상가에 가서 몇 박스의 종이를 사려고 했다. 그는 며칠 전 한 박스를 샀는데 우리가 매입한 액수 보다 10위안을 더 주었다고 했다. 우리가 상가에 가니 종업원은 인사를 하면서 “언니, 오늘 몇 박스를 구입 할래요?” 묻고는 우리에게 제일 싼 가격으로 주었다. 동수는 울상을 하면서 “가격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서로 협조하고 보충하는 것이다.
• 집착심을 버리는 과정
사부님께서는,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전법륜》라고 하셨다. 작년에 우리 지역에서 떠돌아다니던 동수가 납치 되었다. 그가 납치되기 2개월 전 한 지역에서 두 동수를 데려다 보호 했는데 납치된 동수가 그중 하나다. 그가 불법 수감되어 박해를 받는 동안 ‘명혜망’을 통해 그가 구치소에서 박해를 당하는 상황을 알게 됐으며, ‘명혜주보’와 본 지역 진상자료에도 그가 박해를 받은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수감된 이 동수가 가족을 찾지 못해 그에게 옷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음을 알게 돼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그는 여름에 납치 될 때 여름 홑옷을 입고있었는데, 지금 우리는 두꺼운 털옷을 입고 있음을 볼 때 그가 얼마나 춥겠는가. 이럴 때 우리가 그에게 옷을 가져다 주지 않으면 누가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에게 두텁고 따듯한 옷을 가져다 줘야한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그곳을 감히 당신이 가려고. 그 속은 악의 소굴인데…’ 하는 마음과 함께 ‘그것들이 우리집 문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르며’ 그럴 경우 튀자 고 해도 안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대로 무작정 밀고 나갈 수도, 외면 할 수도 없는 난감함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나는 그래도 가야만 한다는 힘든 선택을 하였다. 사악이 그를 박해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를 관심 갖지 않는다면 사악이 기뻐 할 것이고, 사악은 또한 우리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용해 우리를 그와 격리시킬 것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는 사악이 안배한 길로 갈 수 없다. 나는 서둘러 갈 준비를 하고, 동수에게 내일 구치소에서 발정념을 하라고 부탁했다. 나의 부탁을 받은 동수는 차입시킬 옷을 준비한 후 옷 속에 사부님의 경문과 몇 편의 명혜문장을 넣어 꿰매었다고 했다. 나는 듣고 정말 감격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또 한 번 나와 동수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보았다.
다음날 오전 우리는 구치소응접실을 향해 옷을 가지고 갔다. 이 일은 동행한 동수의 경우는 너무나 평법한 일 였지만, 그러나 나한테는 한 차례 큰 심성의 돌파이고 심상치 않은 시련였다. 물론 나와 동수가 가게 된 것도 사부님의 안배이다. 나는 마음이 많이 진정됐다. 그래도 당황스러움을 참지 못해 차에서 내릴 때 동수들이 나를 위하여 발정념을 해 달라고 말하려다, 여기에 감금돼 박해 받고 있는 동수를 생각하고 나오는 말을 삼켜 버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6,7명 다른 사람들이 와 있어서 순서에 따라 줄을 섰으며 동수는 나의 앞에 섰다. 나는 마음이 진정 되지않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계속해서 ’사부님께서 제자의 정념을 가지해 주십사.‘고 구하면서 자신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머리가 어지러운 걔는 내가 아니니, 걔는 즉시 죽어라!’ 고 정념을 했다. 내 차려가 되었을 때 어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도리어 마음이 안정됐다. 나는 사부님이 나를 도와 그런 나쁜 물건을 제거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찰도 누구의 물건인가만 물었다. 나는 동수의 이름을 댔다. 나는 외사촌 언니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묻고 다른 것은 묻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에서 동수의 이름을 찾고 내가 가져간 다수의 물건을 검사하고 어디에다 담겠는가 물었다. 내가 가방을 넘겨주자 가방은 안된다면서 큰 비닐 주머니에 담아 봉하고 나에게 영수증을 주었다. 또 돈을 입금 하고 신분증 번호를 적었다. 일을 끝내고 돌아서는데, 그 경찰은 나보고 다음에는 편리한 주머니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인사하고 나왔다. 동수는 문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 동수에게 아직도 가지 않았는가. 물으니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냥 입구에서 나를 위한 발정념을 했노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촉촉히 눈이 젖어 들었다. 나는 동수의 나에 대한 관심과 도움에 감사하며 더욱 사부님의 고심한 안배와 감당 하심에 감격했다.
• 10월 1일 여행
시댁 삼촌과 남편은 10월 1일 긴 휴가 중에 온 가족이 여행을 하면서 고향에도 가 보자고 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나와 아이를 데리고 잘 노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10여 년간 여행한적 없으며 또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북경에 한번 갔었는데 그것도 아이가 북경 대학에 입학하여 간 것 뿐이다.
나는 수련의 길에는 우연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체는 자연히 따르는 것이다. 나는 시삼촌과 남편의 배려로 이루어진 휴가여행을 이용하여 여행지 그곳의 중생을 구도 하자고 결정했다. 가는 길에서 소요될 일체를 준비했다. 우리는 차를 운전하며 여행을 하므로 손쉽게 일부 간단한 전단지를 뿌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멸중공(天滅中共)’ ‘탈당. 단. 대. 보명(退党团隊保命)’ 등 작은 카드를 만들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염하면 재난이 닥칠 때 명을 보호할 수 있다’ 는 구절을 넣어 붙이는 것도 만들었다.
10월 1일 우리는 길을 떠났다. 발정념을 하면서 고속도로 길목에 이르렀다. 멀리 검문(安檢)을 기다리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남편은 우리차례까지 기다리자면 1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며 지름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도시를 빠지는 길목에서 다시 검문을 받게 됐다. 경찰이 우리에게 차를 길옆에 세우라고 했다. 차에 좀 큰 보따리나 가방이 있으면 모두 검색을 했고, 차 트렁크의 물건도 모두 검사를 하며, 차 밑까지도 철저하게 검색을 한 후 사람들은 모두 신분증을 제시하여 컴퓨터에 등록해야했다. 사실 이 며칠 나는 늘 이 문제에 대하여 내려놓지 못했다. 비록 온 가족이 여행하자고 하여 동의를 했지만, 우리는 오직 사부님의 가지와 자비하신 가호 하에 대법에서 수련해낸 강대한 정념에서만 비로소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오늘의 이런 것들도 모두가 대법의 위덕이며 체현이고 사람과 신의 목격이 아닌가. 우리는 모두 악당의 소위 명부 안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도 그것에 따라 북경에서 학업을 그만 두게 된 것이 아니던가!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서 가지해 주실 것을 구하면서 강대한 정념으로 ‘구세력의 일체 사악한 안배를 부정하고 우리의 이름과 신분증 번호로 모든 사악을 멸해 버리고, 각개 공간을 제약하라.’고 정념을 발 했다. 우리의 이름과 신분증 번호는 나를 위하고, 법을 위해 필요하고, 사를 멸하는 법기(法器)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악은 아무 것도 아니며 우리들이 주역이다. 이런 정념으로 돌파 해 나갔는데, 계속 몇 곳의 검문을 무사히 통과 했으며, 대부분 차 트렁크와 남편의 신분증과 운전면허증만을 보고 통과했다. 우리는 가는 길에 ‘천멸중공’이란 카드를 뿌렸다. 한참을 가다가 우리는 다시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우리는 사부님의 안배 하에 줄곧 아이와 함께 있었으며, 저녁에는 법공부와 발정념을, 아침에는 연공을 했는데, 낮에는 온 몸이 홀가분했다. 우리는 서로 협조하여, 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아이가 시선을 막아주어 내가 붙이거나, 내가 막아줄 때 아이가 글자를 썼다. 기회가 되면 놓치지않고 바로 진상을 하며 삼퇴를 권했다. 과일 파는 농민, 여관의 직원, 고향의 친척 친구들에게 진상을 했다. 호텔직원은 우리에게, 이 지역에도 대법제자가 아주 많은데 그들은 정말 대단하다. 공산당이 그렇게 볶아대도 파룬궁을 이겨내지 못했으며, 지금 파룬궁 사람들이 화폐로 대법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는 매우 탄복해 마지않았다.
하루는 관광지에서 오후 5시 정도 됐을 때 우리 가족의 일행들은 모두 힘들어 하며 잘 걷지를 못했는데, 오직 나와 아이만 힘들어 하지 않고 잘 걷고 활기찼다. 우리는 가는 곳에서 법을 실증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10월1일은 악당들이 성대한 행사를 펼치면서 군인들이 열병식을 하는 날이어서 관광객들도 비교적 적었고, 또한 늦은 저녁이어서 더욱 적었다. 나와 아이는 이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여 부착할 수 있는 곳에는 붙이고 ‘천멸중공’ 을 쓸만한 곳에는 다 썼다. 기둥, 문, 벽에도 통쾌하게 섰다. 우리가 돌아 나올 때는 정문은 이미 닫혀있어, 우리는 다른 곳으로 나왔다. 우리가 투숙하고 있는 호텔에 우리의 신분증이 등록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기회를 틀어쥐고 사부님께서 우리의 이름과 신분증번호가 대법 법기의 강대한 작용을 발휘하여 이곳의 사악을 소멸하게 가지 해 주실 것을 청했다.
드디어 먼 곳 고향에 가서 어르신들을 뵈오니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속으로 ‘사부님 당신께서 대법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렇게 이곳 고향에서 가족들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감사의 마음을 드렸다. 나는 대법을 만나지 못 했더라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사람으로서 유서까지 남겼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과 대법이 나로 하여금 비로소 오늘이 있게 했으며, 나는 사부님의 무량한 홍은에 보답할 방법이 없습니다.
10월 4일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여행길에서 찍은 사진과 비디오를 컴퓨터로 보며, 사진에 선명한 파룬을 보고 너무나 격동되었으며 어떤 사진에는 몇 십 개의 파룬이 있었고 비디오에는 연꽃까지 나타났다. 나는 사부님이 우리를 격려해 주시는 것임을 알았으며,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잘하기를 기대하시며 우리가 정진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그래도 매우 송구스럽고 사부님께 미안 했다. 나는 사악의 검문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진상자료와 CD를 지니지 않았었으니, 사악을 인정하면서 또 사악을 부정했던 것이다. 나의 마음은 사악의 형세에 움직이었기에 비로소 사악을 그렇게 강대하게 보았다는 것을 나는 어렴프시 느꼈다. 나는 반드시 사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대법에서 수련해 낸 정념으로 가서, 일체를 주재해야 한다. 일사일념을 포함하여 진정 신의 일면이 깨어나게 하고 사부님의 자비하고 고심한 구도에 어긋나지 않으며 사부님께서 하나라도 더 안심하시고 적게 힘드시게 해야 한다.
문장발표 : 2009년 11월 24일
문자분류 : 대륙6기 법회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11/24/2123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