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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내려놓고 중생을 마음 속에 담아야 한다(하편)

문/길림대법제자 세천

[명혜망 2005년10월31일]

1. 사람마다 협조자이다

나는 협조자라는 이 개념은 나와 너무 먼 것으로 여겨왔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성격과 씬씽(心性)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저 나의 “기술항목”만 잘하고 서로 협력하는 일에 대해서는 참여하지 말고 마음대로 의견을 발표하지 말자고 생각하였다. 사존님께서는 설법 중에서 협조자에 대해 여러번 제기하였다. 나는 협조자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협조자 자신이 여하여하 하여서가 아니라 그가 일으키는 작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 사람들을 잘 조직하지 못하고 자신의 환경중에서 정체적인 법실증에 참여하며 자기 본인만 잘 한다면 이 협조자는 그저 한 보통 수련생으로 밖에 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기술방면에서 대법일을 하는 자신이 협조자와 그 무슨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접촉하는 몇사람은 모두 협조방면의 일을 하는 동수들인데 그들은 매일 모든 심혈을 기울여 대법 일을 하며 모순 속에서 부단히 자신을 수련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내가 볼때는 정말로 균형을 잡을 수 없는 많은 문제에 부딪쳤으며 어떤 때는 심지어 요언들도 있었다. 물론 이는 한 수련인의 개인수련을 놓고 말하면 두말 할 것 없이 무조건적으로 안을 향해 찾아야 하는 것이다. 허나 매일 부딪치게 되는 책임과 압력은 나로 하여금 협조방면의 일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였다. 어떤 때는 동수들이 각양각색의 방안을 제기하기에 협조자를 놓고 말하면 될수록 넓고 주밀하게 고려하여야 했다. 협조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을 감당하여도 항상 동수들의 오해을 받았다. 때문에 나는 그들이 매우 수고하는 것을 보고 있는 힘껏 그들을 ‘도와’ 일부 대법 일을 하였고 점차적으로 나는 저도 모르게 많은 협조방면의 사업에 참여하였는데 후에 나는 나의 책임감은 그때 그저 일종 감성적인 인식임을 발견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나는 사부님의 “아태지역 수련생회의에서의 설법”을 학습하게 되었다. 무엇이 협조자인가? 사부님은 “대법제자들의 책임자는 실은 단지 하나의 협조자이고 연락인이며 한 전달인(傳達人)에 불과하다.”, “다만 여러분을 위하여 더 많이 이바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무엇 때문에 “협조자”라는 말을 듣기 두려워 하는가? 그래 나는 정체(整体)를 위하여 더 많은 것을 이바지하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곧바로 더 많은 것을 이바지 하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수들이 그렇게 많은 압력을 감당할때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어떤 때 자신의 관념이 충격을 받으면 차갑게 “당신들 협조자라는 사람이……”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무슨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가? 나의 이것은 유의적, 무의적으로 간극을 조성하고 있지 않는가? 실제로 협조는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저 연계하는 작용을 하여 우리 매 하나의 대법제자로 하여금 모두 정체 속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로 하여금 정체적으로 사부님의 정법의 진정에 따라가게 하며 정체적으로 제고되고 승화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돌연 나는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원래 협력하는 일은 우리 매 대법제자와 모두 관계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느 하나의 법실증을 위한 일도 고립적인 것이 아니며 모두 우리 대법제자들이 공동으로 정체상에서 서로 배합할 것이 수요되며 오직 이래야만 더 잘 완성할수 있는 것이다. 설사 두 동수 사이에도 서로 협력하고 배합할 것이 필요한 것이다. 후에 나는 법학습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협력하는 일은 우리 매 한사람과 모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대법제자가 하나의 정체(整體)로 되어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일치하게 협력한다면 법력(法力)이 대단히 클 수 있다.”(2003년 정월 대보름날 설법) 만약 우리들이 협력을 잘 하지 못한다면 중생을 구하는 일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협조자’ 이 명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후에야 비로소 우리 매 하나의 대법제자마다 모두 협조자임을 깨달았다. 무엇때문에 전에는 나와 관계가 없다고 여겼는가? 까놓고 말해서 자신이 응당 감당해야 할 책임을 지려 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시끄러운 것이 두려웠고 여러가지 모순에 부딪치는 것이 두려웠으며 자신이 놓지 못하는 속인의 마음이 충격을 받을까봐 두려웠고 제대로 하지 못해 책임을 질까봐 두려웠다. 총적으로 자아(自我)를 내려놓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협조자에 대한 나의 인식이 점차적으로 감성적 인식으로부터 이성적 인식으로 승화됨에 따라 나의 마음의 용량도 점차 증가되었다. 자아(自我)를 집착했던 것이 점차 정체를 더 많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일을 하거나 일부 문제를 처리할 때에도 정체적인 각도에서 출발하였다. 자신의 위치를 정체 속에 놓고 다시는 그전처럼 늘 정체 밖에 서서 정체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곳에 부족한 점이 있음을 발견하면 곧 묵묵히 보충하고 원용하고 있다.

이런 기점의 변화는 나로 하여금 책임감이 있게 하였으며 후에는 주동적으로 다른 동수들과 배합하여 내가 그전에는 참여하려 하지 않던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협력함은 협조자의 일뿐만이 아닌바 그저 협조자가 법에서 인식한 하나의 생각을 제기하면 모두들 묵묵히 보충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기술방면의 대법의 일도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있는 힘껏 그 속에서 한 협조자의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다시는 “협조자”라는 칭호를 회피하려 하지 않을 때 더는 나와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의 생각에는 그전의 일체는 가능하게 모두 나 자신의 그 당시의 심태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2. 인간세상은 제멋대로 나쁜 일하는 사악의 낙원이 아니다

1999년 사악이 대법을 박해하기 시작한 이래 많은 일들이 나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 법학습소조에서 6명의 대법제자가 대법을 실증하려 북경에 갔었는데 지금은 우리 세사람만 남아 있고 나머지 세사람은 모두 사악의 박해를 받아 사망하였다. 나와 2년간이나 서로 배합해 오던 동수는 악인들에게 붙잡혀 갖은 혹형의 시달림을 받았고 어제까지 서로 같이 교류하던 동수들이 지금은 감옥에 갇혀있다. 명혜망에서는 날마다 대법제자들이 납치되고 노교소에 붙잡혀 가며 판결받고 자료점이 사악에게 파괴되는 소식들이 실리는데 이런 동수들의 피의 교훈은 시시각각 나더러 꼭 올바르게 매 한걸음을 걸어야 한다고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하고 수련을 하였는데 결국은 자신이 박해를 받지 않게 보호하기 위함으로 변화했다. 나는 그때 자신이 낡은 세력의 배치한 마난 속에서 수련함을 인식하지 못하였기에 박해의 어두운 그림자는 내가 의식하지 못한 정황하에서 생존의 환경을 찾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 낡은 세력의 이런 무리한 박해를 승인하였는데 비교적 돌출한 표현이 바로 매번 신변에서 박해가 발생하면 우선 생각한 것이 “이 동수는 꼭 무슨 집착을 놓지 못해 사악에게 박해의 구실을 준 것이다”라고 즉시 나에게도 동수와 같은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가 자신을 비추어 보고 나는 꼭 교훈으로 삼아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유하에서 낡은 세력은 우리 공간에서 생존의 위치를 찾았으며 동시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낡은 세력에게 대법제자를 박해할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인식을 지니고 매일 법실증의 일을 하였기에 마음 속에는 언제나 말 못할 압력이 있었다. 나는 자신에게 “우리가 법을 학습하고 수련함은 그래 자신이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란 말인가?”라고 부단히 물어 보았다. 이는 우리가 인간세상에 온 목적, 즉 사부님을 따라 중생을 구하는 것임을 똑똑히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사부님은 진작 우리에게 “우리는 낡은 세력 자체의 출현과 그것들의 배치한 일체마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상에서 그것의 이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2004년 시카고법회에서의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낡은 세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이 문제에 대해 똑똑히 인식하였을 때, 마음 속의 그 압력은 순식간에 흔적없이 사라졌으며 그 대신 법실증 속의 “행복”을 느낄수가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사람이 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며, 인류의 역사는 또 사악이 날뛰는 낙원을 마련해 준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정법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며 대법제자들이야말로 비로소 여기에서 휘황함을 펼칠 자격이 있는 것이다.”(《 2005년 유럽법회에 즈음하여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휘황은 나는 무엇 때문에 체험하지 못하였는가? 오히려 보이는 것은 모두 박해뿐인가? 그것은 내가 아직 완전히 대법과 정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의 매 하나의 생각과 염두를 요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오히려 정반대로 부단히 낡은 세력의 존재를 승인하고 심지어 낡은 세력이 동수들에 대한 박해를 승인하였으며, 무형중에 사악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법리상에서 자신의 문제를 인식한 후로부터 어느 곳의 동수가 박해를 받든지 우선 생각한 것은 낡은 세력이 동수에 대한 박해를 견결히 부정하고 정념으로 동수를 가지하여 하루 빨리 마귀소굴에서 뛰쳐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인식이 점차 명백해짐에 따라 점점 “법에 동화하나니 타년에 가서는 기필코 성취하리라”(홍음.법을 얻음)를 느낄 수가 있었다. 법을 잘 학습하고 발정념을 잘하며 연공을 잘하는 이것은 대법제자의 본분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마음 속에서는 대법에 대한 무한한 존경의 마음이 생겼으며 동시에 법의 신성함과 장엄함을 느꼈고 더 나아가서 미래 우주의 보위자로서 우주의 일체 바른 요소를 위해 책임져야 할 사명감을 느꼈다. 인간세상은 사악이 제멋대로 날뛰는 낙원이 아니기 때문에 대법제자만이 여기에 휘황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대법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꼭 아름다운 것이다. 허나 우리 또한 법에 대한 의혹과 오해를 수련해 버려야 한다.

얼마 전에 나와 함께 배합하던 한 동수가 사악의 박해를 받았는데 그 동수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었다. 그때 나는 전에 여러 사람이 함께 하던 법실증의 일을 혼자 하게 되었다. 이때 나의 머리 속에는 “자욱한 안개에 광풍이 일테면 일거라 /산에 내리는 빗줄기는 원정의 먼지를 씻어내네”(홍음<2> “정(征)”이 떠올랐다. 낡은 세력이 어떻게 몰골을 바꾸어도 우리가 사부님께서 배치한 길을 따라 나간다면 곧바로 광명하고 휘황한 것이다. 그러나 전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대법의 표준대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는 한마디가 절대로 빈 구호에 지나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3. 자아를 내려놓고 중생을 마음 속에 담아야 한다

내가 자신을 바로 잡고 수련인의 정념을 다시 찾아 수련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을 때, 견정하게 수련함은 나로 놓고 말하면 문제로 된 듯 싶었다. 왜냐하면 한 수련인이 본질상에서 자신을 개변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고비를 넘는 속에서 진정하게 명,리,정을 내려 놓지 못한다면 마난 속에서 걸어 나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때는 그런 수련상태하에서 나는 정체적인 법실증의 일에 참여하였다. 나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한 명의 제자라도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며 매 한명의 중생에게 정법중에서 다시 자신의 위치를 바로 잡을 기회를 준 것임을 알고 있다. 동시에 나는 주위 동수들이 나에 대한 신임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더 준확하게 말하면 이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견정한 믿음인 것이었다. 이렇게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르침과 동수의 정념가지 및 너그러운 이해가 있었기에 나는 비로소 오늘 여기까지 걸어올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개인 수련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고 자아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오늘 내가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하는 속에서 내가 부딪치고 또 반드시 돌파해야 할 “난관”으로 되였다.

정체 속에 참여하였을 때, 나는 마치 수련을 갓 시작한 새 학원처럼 정법수련과 개인수련을 한데 결합하였는데 어떤 때는 이점에 주의하면 다른 점에 주의하지 못했다. 사악의 미친듯한 박해 속에서 어떻게 기점을 바로 잡고 사심을 내려놓으며 견정하게 법을 실증하는가 하는것은 내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자신의 언행, 말투, 선량한 마음 등을 옳바르게 수련하는 면에서 근본 주의하지 않았으며 완전히 상대방의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동수를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는 점에서는 더욱 부족했다.

게다가 줄곧 법실증하는 속에서 기술방면의 일을 해왔기에 하나의 비교적 봉폐된 환경 속에서 또 일부 응당 있지 말아야 할 집착심들이 생겨나 나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 방법을 매우 강조하였다. 예를 들면, 내가 만들어 놓은 진상자료를 다른 사람이 고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심지어 나는 동수들이 조판에 대해 잘 모른다고 인정하였기에 그들이 제기한 생각을 어떤 때는 달가워하지 않으며 접수하였다. 동수들이 나의 문제를 제기할때 나는 우선 변명부터 하였으며 이 한장의 진상자료를 세인들이 보면 무슨 감수가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허나 우리가 진상을 이야기하는 목적이 곧바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중생들에게 진상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닌가? 동수가 이 도리를 나에게 말할 때, 나는 비로소 이것은 얼마나 큰 자신에 대한 집착이며 중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는데 까놓고 말하면 여전히 자아를 실증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동수의 제의에 따라 진상자료를 제작하였을 때, 자료들은 사람들에게 눈에 확 띄이는 감을 주었다. 나는 그때로부터 진상자료를 제작할 때 될수록 세인들의 각도에 서서 생각하였으며 동수들의 부동한 제의를 귀담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자아에 대한 많은 집착을 내려 놓으니 법실증의 일을 할 때 대법은 나에게 샘 솟는 듯한 지혜를 주었다. 그때 사부님이 하신“신은 당신의 방법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당신에게 층차를 제고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상에서 당신의 인식이 제고되어서야 비로소 당신의 층차를 제고시켜 준다. 이것이 바로 바른 법리(正法理)이다.” (《 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에서의 설법 》)가 생각이 났다.

비록 이렇게 엎어졌다 일어나며 부단히 전진하고 모순 속에서 부단히 자신을 찾았지만 대법과 정법의 요구, 중생을 구하는 수요와 비교하면 아직도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후에 내가 일부 동수들과 접촉함에 따라 나의 수련을 잘 하지 못한 부분들이 법을 실증하고 동수들과 협력하는 중에서 더욱 뚜렷이 표현되었다. 허나, 나는 자신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는 근본 몰랐는데 가능하게 내가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에만 몰두하고 동수와 배합하는 속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단점을 찾지 않았고 주동적으로 자신을 수련하지 않았다. 반대로 모순에 부딪치면 늘 다른 사람이 나를 불공평하게 대하던 것이 생각났으며 몇년 전의 일이 여전히 마음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강렬한 집착심은 나로 하여금 동수와의 배합중에서 솔직하지 못했다. 다른 동수가 나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 마음 속에서 생각한 것은 우선 “내가 한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가?” 였고 동수들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내가 이 문제상에서 법에서 진정으로 제고되지 못하고 용감히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고 노력하여 극복하지 않으니 때때로 이런 모순에 부딪쳤다.

어느 한번은 줄곧 함께 배합하여 오던 동수와 수련중에서 모순이 생겼는데 그는 그때 완전히 모순 속에서 제고되지 못하였기에 떠나가려 하였다. 나는 자신의 문제를 찾는 한편 정념으로 동수를 고무하여 주었으며 대법의 일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가 법실증을 위한 일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큰 용기로 남아서 그 동수와 계속 배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에서 받은 압력은 오직 나 자신만 알고 있다. 바로 이 한점 원인으로 하여 나로 하여금 진정으로 선의로 동수가 제기한 문제를 이해하고 안으로 찾지 않게 하였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고 너른 마음으로 용납해 줄 것을 바랐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신임하는 한 아줌마를 찾아 그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나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음) 나의 마음 속 말을 하였다. 나는 내 신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알고 있다. 매 사람마다 매우 큰 압력을 감당하고 있기에 나는 나의 일로 그들에게 부담을 가하고 싶지 않아 줄곧 스스로 감당해 왔다.

헌데 뜻밖에 그 아줌마는 엄숙하게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마난 속에서 사부님과 대법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의 어머니를 생각하였으니 이것은 사부님께서 말한 어떤 수련생은 사악의 박해 중에서 ‘엄마’하고 소리친 것과 같은 도리가 아닌가?” 나는 그 말에 더 상심하여 크게 울었다. 나는 그때로부터 다시는 그 어떤 사람과도 나의 마음속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좀 지나 냉정해지자 나는 “수련인은 모순 속에 엎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아줌마의 말을 다시 생각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사실 사악이 우리를 파괴할 때 우리는 경각성을 높여 어떻게 정념으로 부정하는가를 알지만 우리 동수들의 소위 모순 속에서 이 점을 늘 잊곤 한다. 후에 나는 이런 “곤란”에 또 부딪쳤을때 곧 사부님을 생각하였으며 사부님께서 제자를 가지 해 줄 것을 빌었다. 그러자 매우 빨리 일년 반동안이나 어머니를 생각하던 정이 점차 담담해졌으며 금방 놓을 수 있었다. 마음 속에서는 다시는 자신의 감수만 생각하지 않았으며 점차적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나는 천천히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았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대법의 일을 얼마나 많이 하든지 사실 많이 한 것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법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이 자비하여 우리에게 다시 한번 위치를 바로 잡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한점을 인식하였을 때, 나는 대법일을 얼마나 많이 했든지 그것은 모두 응당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번 “풍파”가 지나간 후 나는 법학습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며 “오로지 진정으로 법을 장악하기만 하면 비로소 길을 바르게 갈 수 있으며 비로소 이 생명은 보증이 있게 되는 것이다.”(2004년 뉴욕국제법회 설법)라는 사부님의 말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전에 나는 자신이 법학습을 매우 중시한다고 느꼈는데 후에 이렇게 많은 모순 앞에서 나는 자신이 법을 잘 학습하지 못했으며 법으로 진정하게 자신을 비추어 보지 못했고 실속있게 수련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본질상에서 변화가 일어나게끔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때문에 나는 동수와의 배합 중에서 날마다 자신에게 꼭 다른 사람의 부동한 의견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일깨워 주었다. 허나 어느 한 번인가 동수가 말하기를 “한 협조자가 나와 할 말이 있어한다고 전하자 바로 그때 매우 두려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지 진짜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마음을 평온하게 다잡고 여전히 사부님께 가지해 줄 것을 빌면서 오늘 동수가 어떻게 말해도 변명하지 않고 꼭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그 동수는 매우 많은 것을 말했는데 나는 그저 조용히 들었다. 진정으로 동수의 말을 다 듣고 나니 이번 담화가 나의 수련제고에 매우 큰 도움이 있다고 느껴졌다. 무엇때문에 나는 진작부터 이렇게 하지 못했는가?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한점을 깨달았는데 즉 워낙 안을 향해 찾는 속에는 집착을 버릴 때의 고통외 또 제고 후의 “막다른 곳에서도 길이 열리”는 희열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매일 자신이 매우 비속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부단한 법학습을 통하여 자신의 심성도 부단히 제고되고 있다고 느꼈다. 허나 이 일체는 모두 사람과 비교하고 나 자신의 과거와 비교한 것이며 법의 부동한 층차에서의 요구와 자신의 수련을 비추어 보지 않았다. 나와 거의 3년이나 배합해 오던 동수와의 모순을 마주하였을 때, 내가 말하던 안으로 찾아 자신의 심성을 제고한다는 것은 한마디 빈말로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동수가 나의 앞에서 엄격하게 나의 문제를 제기할 때 나의 나약한 자존심은 충격을 받았다. 그때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큰 상해를 받고 자신이 신임하던 동수한테서 큰 망신을 당했다고 느껴졌다. 그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너그러운 이해에 대한 갈망이 극점에 달했다. 바로 이런 강렬한 집착은 나로 하여금 동수의 말에 대해 진정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진정으로 나 자신의 자존심 배후에 숨겨진 것이 무슨 집착인지 찾아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 겉으로만 견강했지 내심으로는 종래로 있어 본적 없이 허전하였다. 그저 자신이 잘 하지 못했기에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어긋났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는 계속 자신을 위해 변명하려고 생각하였는데 그런 안으로 찾지 않는 행위에 대해 나 자신도 가소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이 지불한 것을 생각할때면 안으로 찾음은 또 그렇게도 무력해졌다. 자존심은 나의 본성의 일면을 억제하였는데 나는 여기를 떠나자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 한순간 나는 사실 나자신이 자아를 놓지 못했으며 여전히 중생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에는 법을 첫자리에 놓는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고험 앞에서는 자신은 또 어떻게 하였는가? 아무리 큰 난 앞에서 뜻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사악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도 나는 떠나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동수의 몇마디 진정한 말 때문에 나는 어찌하여 이지를 잃고 법과 중생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가?

이때 나는 사부님께서《 싱가포르 법회에서의 설법 》 중에서“우리가 부딪힌 어떠한 일들을 모두 우리 자신의 이 방면에서 한번 가늠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사람을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것인데 원만의 이 길에서 어떠한 장애도 당신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어떠한 일에 부딪혔을 때 모두 밖으로 보고 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마음 속에 일종의 공평치 못한 느낌이 들어,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데 이것이 모든 생명의 하나의 제일 큰 치명적인 장애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다시는 더 이상 속인의 이치 속에 파묻혀서는 안되며 자신의 집착에서 뛰쳐나와 그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한순간 나는 중생이 나에 대한 기대를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가능하게 그들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자사, 질투,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함… 곧바로 이런 집착을 버리고 극복해야 하는것이다.

후에 나는 동수가 무엇때문에 나를 그렇게 대하는지 깨달았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한 것처럼 그의 좋지 못한 일면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좋지 못한 일면을 보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에 다른 동수와의 배합중에서 나는 매우 적게 대방이 접수할 수 있는 각도에 서서 문제를 말하지 않았기에 무의식간에 다른 사람에게 매우 큰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 동수들 사이에 남의 태도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설사 당신이 인정하건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가능하게 자신의 관념을 지니고 자신의 각도에 서서 생각하기에 여전히 순정하지 못한것이다. 진정으로 순정하다면 그는 꼭 감동되어 눈물을 흘릴 것인바 이는 법의 위력과 법의 자비 때문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법실증 속에서 진정으로 수련의 길에서 옳바르게 걸어야 함을 더욱 똑똑하게 인식하였다. 일을 함은 수련을 대표할수 없고 사람의 마음을 버리는 고험 앞에서 두리뭉실해서는 안되며 그속에서 자신을 찾지 않는다면 이는 더욱 안되는 것이며 이러면 곧바로 수련하지 않는 것이다. 일하는 속에서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것 과 다른 사람에 대한 너른 용납은 우리들이 응당 도달해야 할것이다. 그때로부터 나는 금후에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할지를 알았는바 이는 절대 구호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은 일체를 개변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나는 그때 나에게 나의 부족점을 지적해주던 동수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의 무사(无私)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의 문제를 지적해 줄때, 우선 그들은 자아를 내려 놓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아직 수련되지 못한 집착과 자존심에 상해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동수들의 그 자비로운 마음과 책임지는 마음을 느낄수 있으며 그속에는 사람의 정이 매우 적은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진정으로 그들의 자비와 선량으로부터 흘러나온 “난류”가 나란 이 전에 꽁꽁 얼었던 동수를 용화시킴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였을 때 나를 붙잡고 있던 놓기 어렵던 집착들이 순식간에 해체되며 나의 신의 일면이 부활되고 커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대법의 자비로운 힘에 의해 자아를 집착하던 틀 속에서 뛰쳐 나왔을때 나 또한 진정으로 나 자신도 대법의 이런 신기함, 아름다움, 자비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수 있음을 알았다. “사람이 이 정에서 뛰쳐나왔다면 누구도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며 속인의 마음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는바,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자비(慈悲)이며 더욱 고상한 것이다.” (<전법륜>)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 동수들의 신임, 너그러운 용납과 무사(无私)한 도움…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또 한번 대법의 위력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가능하게 사부님께서 중생에 대한 무량한 자비를 영원히 전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젠 더 많은 중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한 순간 나는 중생을 나의 마음 속에 담았으며 그들의 미래야말로 내가 오늘 응당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나는 이제야 비로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대법제자는 오로지 사람을 구원하는 몫이 있을 뿐”의 뜻을 알것 같다.

진정으로 희망하건대 모든 동수들이 법을 실증하는 과정에서 능히 자아를 내려놓고 서로 공동히 협력하고 배합하여 더 많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구도하길 바랍니다!

(제2차대륙대법제자 심득서면료류대회 교류원고)

문장 완성: 2005년 10월 11일
문장 발표: 2005년 10월 31일
문장 갱신: 2005년 10월 31일 11:39:45
문장 분류: 수련마당
원문 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10/31/1122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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