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화베이(華北) 대법제자 위샤오(玉簫)
【명혜망 2004년 10월 24일】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여러 동수님 안녕하십니까!
나는 97년에 법을 얻었는데 법을 얻기 전에 내 인생은 고난이 너무 많아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법을 얻은 후 자살은 죄를 짓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수련을 함에따라 이러한 생각이 점차적으로 적어졌으며 나중에는 완전히 없어졌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법을 외웠으며 때로는 새벽 2시에 잠이 깨면 몇 단락이라도 책을 읽고나서야 마음 놓고 잠을 잤다. 나는 99년 이전에 단체 법공부를 하면서 적지않는 이득을 얻어 일부 개인수련의 관(關)을 지나왔으며 처음으로 “안을 수련하니 밖이 안전하노라[修內而安外]”는 말의 현묘함을 체험했으며 ‘선(善)’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99년 후에도 각종 원인으로 인해 나는 줄곧 개인수련 상태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늘 나 자신에게 나는 속인의 생활을 하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수련하러 태어났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때는 가부좌만 하면 눈물이 얼굴을 적셨는데 나중에야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너무도 큰 것을 감당하신 것을 나의 명백한 일면이 느꼈기 때문임을 생각하였다. 2000년 6월 동수들과의 고마운 교류가 있었고, 나는 마침내 여러 가지 현실적인 고려와 압력을 내려놓고 톈안먼 광장에 갔다. 그곳에서 나는 사(私)가 없이 중생을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의 평탄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후 몇 년 간의 풍파 속에서 나는 5차례나 불법으로 체포되었는데 길게는 5일에서 가장 짧게는 몇 시간 동안 잡혀 있었다. 나는 사부님의 가호 하에 정법수련의 길에서 끊임없이 전진해 왔다.
* 정정당당하게 진상을 알리다.
톈안먼에 간 것부터 시작해서, 퇴근 시간에 슬며시 전단지 몇 장을 나눠주거나 스티커를 붙이고, 문 앞에서 말로 진상하거나 직장에서 공개적으로 진상을 알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나중에는 ‘도처에 꽃이 피는 식으로’ 하게 되었다. 나는 진상하는 과정에서 두려움이 점점 적어지는 것을 느꼈으며, 중생에 대한 책임감과 자비가 그것을 대신하였다. 나는 교사(敎師)로서 누락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수업 시간을 이용해 학생들에게도 모두 진상을 알렸다. 처음에 수업시간에 진상을 하자니 좀 긴장되기도 하였다. 그때 내가 맡은 학생들은 3개 반 100여 명이었는데 각 반마다 적어도 20분 정도는 이야기 해야 했다.(그 전에 나는 미리 은연 중에 그들에게 대법의 제일 낮은 층에서 사람이 되는 매우 많은 도리를 이야기해 주었으며 매 번 나는 “이것은 나의 스승께서 알려주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당시의 감수는 톈안먼에 갈 때 심정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말해야 했으며 그래야만 학생들이 나와 맺은 인연에 미안하지 않고, 또한 어쩌면 이것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기회일 지도 몰랐다. 진상을 알린 결과는 각 반마다 모두 열렬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이것은 그들이 대법에 대해 인정한 것이었기에 나는 매우 기쁘고 안심되었다. 일이 지나간 후에는 매우 평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후에 동수의 남편한테 그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 동수는 듣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학생들은 이미 졸업을 했는데 한 학생은 내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몇 년 간 공부를 하던 중에 지금까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선생님이 바로 나라고 하였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고 나와 내가 한 말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뜻밖으로 여겨졌다. 그때의 심태를 돌이켜 보면 일체를 버리더라도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주려고 했었는데, 그들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확실히 부끄러움이 없었다.
한 번은 가도(街道) 거민(居民)위원회에서 아파트 구역에서 대법을 비방하는 분신자살 사진전시회를 하는데 우리 집 창문에 4~5장 붙여놓은 것이었다. 내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정오였다. 이러한 것들이 중생을 독해시키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아무런 주저없이 창문을 열고 찢어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그림들은 붙인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좀 걱정이 되었는데 4~5장을 떼자 한 묶음이 되어 한꺼번에 안고 갈 수도 없었고 또 버릴 곳도 없었다. 나는 운전을 할 줄 몰랐고 또 운전이 가능한 동수를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오직 한 가지 방법–거민위원회에다 진상을 하여 그들이 스스로 가져가게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서둘러 동수를 찾아가 발정념을 하라고 했다. 동수는 뜻밖에 “거민위원회에다 진상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그 (사진전) 내용을 믿는 사람도 얼마 없을 겁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나는 마음이 매우 괴로웠는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가 보았으면 나의 책임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거민 위원회를 찾아갔는데 서기(書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는 모두 좋았다. 어떤 사람은 조금 있으면 경찰이 올테니 조심하라고 알려주었으며,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내게 사진은 모두 30여 장이 있으며 연속으로 내다 걸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것을 가져가지 않는 한 내가 그 자리에 서서 오는 사람마다 모두 진상을 알려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나는 사진옆에 서서 진상을 알렸다. 동수도 함께 와서 같이 진상을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모두 집에 가서 발정념을 강화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대법을 비방하는 분신자살 전시사진들을 걷어갔다. 610 경찰이 와서 하는 말이 “거민위원회에서 당신을 고발했습니다. 제발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했다.
명혜망의 도움으로 진상자료들은 갈수록 풍부해졌으며 진상을 알리는 방법도 갈수록 원활해졌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연공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사무실의 사람도 알고 있으며 동네에서도 알고 있고 이웃에서도 그가 연공(煉功)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전법륜』)”
나는 동창회에는 아무리 멀어도 한 번도 빼놓지 않았으며 매번 새로운 동창생이나 선생님들을 만나곤 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관리원, 택시 기사, 걸인, 고물상, 길을 묻는 사람, 영업사원, 전기제품 서비스 기사, 부모형제 및 아이들의 동창이나 친구,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는 진상 대상이었다. 직접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주소를 기억하여 집에 돌아온 후에 편지로 보냈으며, 전화 번호, 팩스번호를 베껴서 해외 동수들에게 보내어 해외 동수들의 도움을 받았다. 많은 식품과 가전제품 포장 위에는 전화번호, 팩스번호가 기록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모두 수집하였다.
오로지 심태(心態)가 순정(純淨)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사부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몇 년 전에 나는 마음속에 한 가지 바램이 있었다. 바로 서로 다른 4개의 성(省)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이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싶었으나 너무 멀어 직접 가지 못하는 것이 큰 유감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나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냥 편지만 보내기에는 가장 좋은 효과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러자 사부님의 자비하신 안배하에 차례차례 그들 4개 성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만나게 되었으며 그들은 모두 진상 자료를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때에 우리 지역에서 진상 자료가 끊어져 자료를 구하는 일이 아주 시급했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이’ 곤란한 상황에서 자료가 신속하게 유통되었다. 가령 VCD자료가 떨어지면 ‘견증’ VCD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해외에서 도착했으며, 한번은 명혜망에서 ‘풍우천지행’ 이 나온 것을 보고 오랫동안 찾았지만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2004년 여름, 나는 외지에 가서 진상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매일 사부님께 향을 피워올리면서 “사부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한테는 이 VCD가 너무나 필요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외지로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구하지 못해서 더이상 그 동수와 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기존 자료를 준비하였다. 나중에 돌아온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떠나기 이틀 전에 VCD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정말로 만감이 교차하였다. 우선 나 자신의 오성이 좋지 못하여 사부님을 확고하게 믿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웠고, 이번엔 사용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지만, 또 동시에 기쁨이 더욱 컸다. 이렇게 가장 전면적이고도 위력이 있는 진상 VCD로 진상을 알리면 엄청나게 큰 작용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은 내가 지내 온 몇 년 세월 중에서 가장 즐거웠던 날이다.
* 몇 차례 관(關)을 넘기는 과정에서 놀라긴 했으나 위험은 없었다.
이 몇 여년 동안에 나는 5차례나 불법으로 체포된 적이 있었으나 그 때마다 정정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정법활동을 하면서 제일 관건적인 요소는 수시로 정념(正念)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며,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러 온 것이지 속인의 생활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관건적인 시각에 비로소 정념으로 마난을 대할 수 있으며, 또한 비로소 자신이 큰 연극의 주역이며 마난을 감당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톈안먼에 가서 경찰 앞에서 연공을 하다가 주동적으로 체포된 후에는 단순히 자신의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잘못을 승인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였다.(그때 주위 동수들이 감히 걸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조급했다. 나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에게 대법제자가 걸어나오면 설령 직장을 잃더라도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주려고 생각했다. 결과는 직장도 잃지 않았고 또한 나에게 새 집을 주었다.)
대립적인 정서를 가지고 경찰의 악행을 저지시키던 것으로부터, 또 분별심을 가지고 경찰에게 진상을 알려 빨리 나오려던 것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자비로 경찰에게 선행할 것을 권하게 되었으며, 오로지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것만 생각하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가고 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 나는 매 번마다 이전에 인식했던 것과 나의 심태에 누락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보건대 누락이 있다고 하여 뭐 두려울 것은 없으며 오직 시시각각 자신이 사부님을 도와 정법을 한다는 사명을 잊지 않고 큰 연극의 주인공이라는 신분을 잊지 않는다면, 일체 바르지 못한 상태는 모두가 대법 중에서 바로 잡히게 되며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변하게 된다. 이 몇 차례 불법(不法)으로 체포된 경력은 내게 있어 진상을 알리는데 살아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었다.
언젠가 한 번 잡혀갔을 때 경찰과 직장의 상사가 와서 나를 납치하여 세뇌반에 보냈다.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세뇌반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으며 어떤 사람도 나에 대해 전향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구역담당 경찰과 직장의 상사 앞에서 그때 나는 매우 긴장하여(두려움이 아니다)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떨렸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만 사악에게 협조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 뿐이었다. 담당구역 경찰은 “가고싶지 않아도 가야하고 들고서라도 가야한다”, “가서 전향하지 않으면 선양의 마싼자 노교소로 보내겠다”고 협박조로 말했다. 그러면서 동수 한 사람이 이미 ‘전향’했으며, 우리 지역의 대법자료들은 모두 내가 제공한 것이라 하였다고 말했다. 나는 듣고 나서 약간 놀랐으나 그 동수에 대해 아무런 원망도 없었다. 또한 자료들을 내가 제공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때의 생각은 경찰이 내가 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은데 그러면 다른 동수들에게 더 시끄럽게 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법리적으로 인식이 그렇게 명확하지 못했다. 신경문 《건의》를 막 받아 본 상태였는데 어떻게 해야 사악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인지 잘 몰랐다. 죽더라도 가지 않겠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응당 세뇌반에 가서 진상을 알려야 하는지 방향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경찰을 원망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경문에 씌여있는 것처럼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입에서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 마치 저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세뇌반에 신경문을 가져다 주려고 마음 먹었다. 만약 깨닫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방법을 강구해서 그 곳을 떠나고자 했다. 그런데 그 결과 가는 길에 나의 ‘심장병이 갑자기 발작했고’ 이 일로 인해 나를 병원에 보내서 응급치료를 하는 것으로 끝났다. 나를 붙잡아 갔던 구역담당 경찰은 “처리 방법이 타당하지 못하다”며 비평을 받았다. 남편은 내가 보는 앞에서 세뇌반에 잡혀 갔는데 후에 그가 나와서 하는 말이 당시 생각이 ‘큰일 났구나, 이제 다시는 아이를 보지 못하겠구나’였는데 결국 그는 세뇌반에서 사오(邪悟)하게 되었다.
평소에 집에 있을 경우나 그렇지 않으면 불법으로 체포되었을 때를 막론하고 나는 자신이 오랫동안 감금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았다. 어느 한 번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교류한 적이 있는데 불법으로 노동교양을 받다가 마음을 어기고 전향했던 동수 A는 “다음 번에 또 체포된다면 절대로 전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왜 체포됩니까? 설령 이런 일이 있다고 해도 나는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서서(살아서) 나오든 누워서(죽어서)나오든 지를 막론하고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동수는 내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가 단체로 교류하던 중 동시에 체포됐는데 그 당시 나는 임신 6개월이었다. 비록 두려운 것은 없었지만 강제로 낙태시킬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 아이도 법을 위해 온 생명이므로 오직 내가 바르게 걷기만 한다면 인간 사회에서의 결과가 어떠하든지를 막론하고 최후의 귀결처는 아름다울 것이다. 마음이 놓이자 경찰에게 진상을 하고 《논어》를 외우고 발정념하며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단체연공을 했다. 나 자신이 큰 연극의 주역이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경찰들의 태도는 매우 좋았으며 심지어 마치 나의 시종과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자비로 중생을 구도할 심태를 잃고, 마음속에 분개하는 마음이 있고, 불만이 있을 때에는 경찰도 내게 못되게 굴었다. 20시간 후에 나는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은 채(다른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사진을 찍었다) 정정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동수 A는 2년 노동교양 판결을 받았으며 매우 큰 마난을 겪었으며(30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은 것을 포함) 또 다시 마음을 어기고 전향되었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몇 개월 전 있었던 위험에서 벗어난 일이다.
우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불법으로 판결받았거나 노동교양을 당했으며 나머지는 다수가 그저 신경문은 요구하지만 진상자료는 가져가기 싫어했다. 나는 이 상황을 알고 매우 조급했는데, 작년에 꾸었던 꿈을 매우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와 일부 동창들이 시험 답안을 쓰고 있었는데 끝날 시간이 거의 다가왔다. 나는 아직도 몇 개 문제를 다 써넣지 못했지만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감독 선생님이 다가와 나의 펜을 가져가더니 동창들이 풀고 있는 시험지가 거의 공백인 것을 가리키면서 빨리 그들을 도와 답안을 써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응당 이런 동수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하자니 매우 어려운 감을 느꼈다. 속인들에게 진상을 알리기 보다도 더 어려웠다. 일부 동수들은 시간과 경제적으로 매우 여유가 있었지만 그러나 속인의 관념이 너무도 심하기에 대법자료는 가져도 그만 안 가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법을 찾아서 직접 하려고는 더구나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를 봐서 교류를 하려고 했으나 응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속인들에게 진상을 할 때 제일 듣기 거북한 말이 “당신은 왜 이렇게도 바보인가? xx도 수련하고 있지만 외부에는 절대 수련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회사에서도 복지혜택을 제대로 다 받으며, 집에 가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데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라는 말이다.
이런 동수들을 만나면 나는 선의적으로 그들을 깨우쳐 주고는 한다. 동수들과 함께 발정념을 했고, 자료들을 나눠주다가 거절당하기도 하고 나 혼자서 애기를 안고 발밑에 깔린 눈을 밟으면서 4~5시간 자료를 연계하느라고 걸아다녔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던 일, 노동교양을 마치고 나온 동수들에게 자료를 가져다 주었으나 상대가 원하지 않았던 일 …..비록 늘 자신에게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라고 격려했지만 시간이 좀 길어지면 나는 또 힘들어지고 실망했다. 이때 두 번이나 출국(出國)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마음이 약간 움직였다. 생각해보니 국내의 친척 친우들에게는 거의 다 진상을 했으며 더 이상 유감도 없었다. 중국에 남아서 주요하게 해야할 일은 걸어나오지 못한 동수들을 도와서 걸어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갔으나 그렇게 큰 변화가 없었기에 차라리 출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에 그쳤을 뿐 또한 모종 원인으로 인하여 출국 수속을 밟지는 않았다.
이처럼 바르지 못한 심태와 단순히 개인이 법을 실증한다는 생각은 낡은 세력이 교란할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어느 날 밤중에 자료를 전달하는 동수 B의 해외에 있는 엄마가 전화를 걸어, B가 세뇌반에 납치되어 갔으니 나보고 빨리 집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여 부랴부랴 물건을 챙겨 날이 밝자 문을 나섰다. 그러다 보니 길에서 택시 기사에게 진상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동창생의 집에 도착했으나 그녀의 태도는 매우 냉담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낭패를 당한단 말인가? 나는 중생을 구도하려고 오지 않았는가?’ 이렇게 하여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동수의 엄마는 또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는데 나보고 빨리 다른 곳으로 가서 숨으라고 했다. 또한 610이 자료의 출처를 찾고 있는데 B가 견뎌내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평소의 언행으로 보아 나는 B가 정념으로 걸어 나오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이어집니다)
(제1회 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 서면교류대회 발언고 )
문장완성 ; 2004년 10월 14일
문장발표 : 2004년 10월 24일
문장갱신 : 2004년 10월 24일 22:34:13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10/24/873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