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왕 통신원 랴오닝 보도) 푸순(撫順)시 신빈(新賓)현 파룬궁수련생 왕중성(王忠勝)은 2020년 11월에 신빈현 국가보안에 의해 납치, 불법 가택 수색을 당했다. 이후 지금 알게 됐는데, 순청(順城)구 법원에 의해 4년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고 4천 위안의 벌금을 갈취당했다. 4월 26일에 판결을 내렸는데 재판장은 마웨(馬躍)였다.
왕중성은 신빈현 중공(중국공산당) 당 간부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고급 강사로 30여 년 재직했다. 파룬궁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한 이유만으로 불법적으로 공직에서 해고당했고 여러 차례 납치됐으며, 노동교양소와 세뇌반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부득이 이 거리 저 거리 돌아다니며 가위와 식칼을 갈아 어렵게 생활을 보냈다. 그 후 학생에게 과외수업을 해주어 생계를 도모했다. 20여 년간 그와 아내 왕구이란(王桂蘭)은 박해가 그들에게 조성한 큰 경제적, 정신적 손실을 당했다. 아내 왕구이란은 2019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1999년 7월 20일 아침 연공을 끝낸 후, 왕중성은 자전거를 타고 연공장을 떠날 때, 무장 경찰 두 명에 의해 자전거에서 끌려 내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사전에 준비해 놓은 미니버스 안에 그를 밀어 넣고 신빈현 공안국으로 납치했다. 그날 납치된 파룬궁수련생은 또 퍄오청쥐안(樸成雋), 상융(商詠), 천주원(陳久文), 쑹완서우(宋萬首) 등으로, 그들 5명은 신빈현 당 간부 학교에 갇혀 집에 가지 못하게 됐다. 그 후 그들은 불법 감금당해 강제 세뇌를 당했는데, 줄곧 마음을 어기고 수련을 포기한다는 말을 한 후 비로소 8월 초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
1999년 9월 5일, 왕중성과 아내 왕구이란은 파룬궁을 위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10월 사이에 왕중성은 베이징에서 현지로 돌아와 신빈현 병원으로 가서 병을 앓고 있는 막내 이모를 봤는데, 신빈현 공안국장 리궈성(李國生) 등에 의해 공안국으로 납치됐다. 말로는 일주일 구류한다고 했으나 줄곧 그를 석방하지 않았다.
1999년 11월 사이에 중공은 신빈현 공안국 무도청에서 이른바 ‘파룬궁 핵심분자를 공개 처리하는 대회’를 소집했다. 현지 정부에서 많은 사람이 갔는데 공안국 관련 책임자가 있었다. 당시 현장을 맡은 쑨진쉬안(孫進宣)은 왕중성에 대해 공직에서 해고하는 처리를 낭독했다. 당시 신빈현 TV방송국에서는 또 영상을 만들어 신빈현 주민들에게 방송해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을 속였다.
같은 해 12월 말, 왕중성은 2년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고 푸순 노동교양원에 보내졌는데, 2000년 10월에 노동교양원 밖에서 형기를 집행당했다.
2000년 연말, 왕중성은 다시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실증했다. 12월 30일, 톈안먼 광장에서 사악한 사복 경찰에 의해 톈안먼 구치소로 납치됐고 저녁에 베이징 펑타이(豐台) 구치소로 보내졌다. 왕중성이 사진 찍기를 거부한 이유로 악독한 경찰은 그를 구타해 땅에 넘어뜨렸고, 이름을 보고하지 않고 또 경찰에게 진상을 알린 것 때문에 여러 차례 발에 채였다. 2000년 음력 섣달그믐날에 풀려나 돌아왔다.
2001년 정월 20일이 넘어서 왕중성은 베이징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해 불법적으로 파출소로 납치됐다.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말하는 것을 거부한 이유로, 경찰에게 구타당하고 걷어차이고 밟혔으며 쇠창살 안에 갇혔다. 왕중성은 몸이 짓밟혀서 보름 넘게 아팠다. 그 후 왕중성은 베이징 차오양(朝陽)구 구치소로 보내져 형사범과 함께 갇혔다. 그 후 푸순시 신빈현 공안국에서 두 사람이 와서 왕중성을 푸순 교양원으로 납치해 돌아왔다.
왕중성은 10개월 형기를 연장당해 박해를 당했다. 노동교양원에서는 많은 ‘유다’(파룬궁을 수련했다가 배반한 자를 비유: 역주)를 파견해 왕중성을 ‘전향’했다. 한 번은 그는 여성대대로 끌려갔는데, 그 여성 유다들은 그를 땅 위에 넘어뜨렸다. 한 무리 사람들이 덮쳐들어 왕중성을 ‘긁었는데’ 왕중성은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 후 왕중성은 목 위에 혹이 생겨났고 점점 커졌으며 또 각혈하기 시작했다. 교양원에서 지정한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암이라고 추정해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2002년, 연간에 푸순 노동교양원 교육과의 루카이(陸凱)는 왕중성의 집으로 가서 그를 보았다. 그 후 왕중성에게 싱징(興京) 호텔에 가게 했다. 당신 신빈현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서기 쑹쥔린(宋俊林)도 그곳에 있었고, 또 일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왕중성을 전 성의 ‘전향’ 사례로 삼으려 했다. 만약 왕중성이 동의하면 직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료는 모두 랴오닝 일보 기자가 쓴 것인데 그가 서명하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왕중성은 승낙하지 않았다.
2004년 9월 어느 날 저녁, 푸순시 신빈현 파출소의 쾅칭웨이(匡慶威), 자오위샹(趙宇翔) 등은 왕중성을 파출소로 납치했다. 그리고 왕중성에게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도록 했으나 왕중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뤄타이산이좡(羅台山莊) 세뇌반으로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기간에 왕중성은 또 중공 경찰에게 불법 납치를 당했다. 집안은 수색당했고 하루 동안 불법 감금을 당했다.
2020년 11월 1일, 왕중성은 재차 신빈현 국가보안에 의해 납치, 가택수색을 당했다. 오후에 왕중성의 아들이 공안에 불려가 서명을 했다. 왕중성은 불법적인 형사 구류처분을 받고 푸순 난거우(南溝) 구치소에 감금됐다.
(역주: 관련 박해 기관과 박해자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5월 1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 사례
원문위치: www.minghui.org/mh/articles/2021/5/16/4257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