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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억울한 옥살이 당한 후난 장야친, 박해로 사망해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후난 보도) 후난(湖南) 샹탄(湘潭)시 파룬궁(法輪功) 수련생 장야친(張亞琴)은 납치돼 무고하게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19년 8월 13일에 후난성 여자감옥으로 납치돼 감금 박해당했다. 2020년 12월 12일 직장 책임자는 그녀가 사망했다며 가족에게 뒷수습하라는 창사(長沙) 여자감옥 측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남편은 이 소식을 듣고는 몹시 슬프고 분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야친은 올해 65세이며 후난(湖南) 유색야금 2총대(有色冶金二總隊) 가속이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해 다년간 몸이 건강했다. 2018년 12월 30일 오전, 후탄(湖潭)시 푸룽(芙蓉)길목 농업시장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샹탄시 웨탕(岳塘)구 바오타(寶塔) 파출소에 의해 납치, 불법 가택 수색, 감금 모함을 당했다. 그리고 샹탄시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 기관에 의해 공모 당해 무고하게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녀의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은 채 2019년 8월 13일 후난성 여자감옥으로 보내 계속 불법 감금했다.

장야친은 후난 여자감옥 고도 경비구로 납치돼 강제로 세뇌 전향당했다. 감옥 측은 종래로 가족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고, 전향하지 않으면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게다가 가족에 대해 속임, 공갈 협박, 위협과 감시를 진행했다. 감옥 안에서 장야친은 이른바 ‘전향’을 거부하고 ‘진선인(真·善·忍)’에 대한 믿음을 견지했다. 이 때문에 각종 고문 박해, 시달림을 당했다. 원래 몸이 건강하고 몸무게가 65kg이 넘었던 그녀는 박해로 피골이 상접해지고 전신이 손상됐다. 이것은 장야친이 두 번째로 억울한 옥살이를 당한 것이다.

첫 번째는 무고하게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또 후난성 여자감옥에 감금된 것으로, 박해당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불법 감금 기간 장야친은 각종 고문 학대를 당했는데, 전기봉으로 전기충격 가하기, ‘화살을 짊어지기(背弓箭)’, 장시간 동안 세워 두기(站樁), 장시간 동안 수면 박탈, 바오자(包夾, 수감 감시자) 감시, 강제로 과중한 생산 노동을 배치하기, ‘호랑이 걸상’에 앉히기, 독극물 주사하기 등이다.

酷刑演示:老虎凳
고문 재연: 호랑이 의자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에 대해 박해를 발동한 21년 동안 장야친은 비인간적인 노동교양, 불법 판결, 고문 학대를 당한 외에 또 장기간 사악한 기관에서 사람을 파견해 미행 감시를 당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매일 아무런 자유가 없는 비인간적이고 강압적인 생활을 보냈다. 샹탄 2총대의 장야친의 거주지는 불법적으로 16차례 침입당했고, 주저우(株洲)에 있는 그녀의 형님 집은 두 차례 불법 수사를 당했으며, 닝위안(寧遠)현의 어머니 집은 세 차례 불법적인 수사를 당하며 교란 받았다.

장야친은 1996년 12월에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섰다.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에 여러 가지 질병을 앓았는데, 위염, 식도염, 류머티즘, 심장병, 두통, 머리가 어지러운 증상, 몸이 차가운 증상, 식은땀이 나는 증상, 전신이 무기력한 증상 등 여러 가지 질병이 있었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지 6개월 사이에 기적적으로 몸이 전부 완쾌돼 병이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 동시에 도덕적으로 심성도 승화되었다.

1. 거듭 불법 감금 박해를 당하다

중공 장쩌민(江澤民) 정치 깡패 집단은 1999년 7월 20일부터 파룬궁에 대해 광적인 박해를 발동해,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극단적이고 사악한 정책-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도록 했으며, 죽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심지어 시신을 조사하지 않고 직접 화장했다. 장야친의 가족도 다른 파룬궁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각종 교란을 당했다. 1999년 7월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11차례 납치당했다. 그중 7차례나 불법적인 행정구류처분과 형사 처분을 받았고, 주저우바이마룽(白馬壟) 여자 노동교양소에 1년 동안 감금당했다. 그리고 후난성 여자감옥에 3년 동안 감금당했고, 샹탄시 우자(伍家)화원 세뇌반에 1개월 동안 감금당했다. 2000년 6월에는 베이징 톈안먼 광장 인근의 어느 방안에서 8시간 동안 구금당했고, 베이징 주재 베이징 샹탄 사무처에 72시간 동안 구금당했다.

장야친의 남편도 다섯 차례 납치당하고, 불법적으로 창사 신카이푸(新開鋪) 노동교양소에 1년 6개월 동안 감금당했다. 그리고 베이징에 8시간 동안 구금당했고, 베이징 주재 베이징 샹탄 사무실에 72시간 동안 감금당했다. 딸도 연좌 당해 인질로 납치됐는데, 늘 교란과 압력으로 심각한 상처와 정신적으로 극심한 압력을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박해당한 강압적인 상황 속에서 혼자 외롭게 각종 정신적인 충격으로 시달림을 당했는데, 결국 억울하게 사망했다.

2000년 6월 22일, 파룬궁을 수련해 많은 혜택을 받은 장야친과 남평은 청원하는 방식으로 직접 경험한 혜택을 알리려고 베이징으로 가서, 평화롭게 청원하며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납치당해, 그녀는 베이징 시청(西城)구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고, 남편은 베이징 차오양(朝陽)구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7월 4일, 두 사람은 함께 현지 근무 인원에게 샹탄으로 납치당해 45일 동안 불법 행정구류처분을 받았다. 구류가 끝난 후, 남편은 악의적으로 2년의 퇴직금을 중지당했고, 또 별도로 1만 위안의 벌금(직장과 파출소에서 베이징으로 가서 샹탄으로 납치해 돌아온 출장비로 삼았음) 및 베이징에서 몸을 불법 수색을 진행할 때 1700위안의 현금을 강탈했는데, 여태껏 돌려주지 않았다.

2002년 설 기간, 장야친의 가족은 어머니를 모시고 오빠네 집으로 설을 쇠러 갔다. 두 부부는 주저우로 갔다가 또 납치당했다. 주저우시 퉁탕완(銅塘灣) 파출소에서 심문할 때, 악독한 경찰은 자백을 강요하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고문 수단으로 남편을 구타했다. 오후에 주저우시 스펑(石峰)구 분국으로 끌고 갔다. 샹탄 방면에서도 사람이 왔는데, 분국 심문실에서 남편을 계속 폭력적으로 구타했고, 이로 인해 내상을 입었다. 점심에 그들은 장야친의 오빠 집으로 가서 가택 수색을 진행했지만, 어떠한 파룬궁 자료 등을 찾지 못하자, 곧 그녀의 딸과 언니(역시 파룬궁 수련생임)를 스펑 분국으로 데려가 거짓 자백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20시간 동안 감금했고, 그녀의 오빠에게 100위안의 밥값을 갈취했다. 그리고 2월 9일 오전에 장야친 부부를 주저우시 제2구치소로 끌고 가서 1개월 동안 불법 감금했는데, 이는 강제 자백, 불법 구금 죄, 납치 죄, 불법적으로 주민 주택에 침입한 죄 등 형법 제247조를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다.

2004년 설 연휴의 사당 양회 기간, 장야친의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 일상생활이 불편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집으로 마중해 1개월 넘게 보살펴 드렸다. 그 기간에 샹탄시 610 사무실,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에서는 납치를 기획해, 주택 옆에서 매일 보초를 서고, 점포망을 설치해 24시간 동안 엄밀한 감시를 진행했다. 2월 25일 오후 5시가 넘어 장야친이 막 쓰레기를 버리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2총대(二總隊)의 룽핑춘(龍平春)에게 발견됐다. 그는 즉시 파출소에 통지를 내려 장야친을 우자화원 세뇌반(법제교육기지)에 1개월 동안 감금했는데, 그 기간에 각종 비인간적인 고문 학대와 손상을 입었다.

세뇌반에서 나온 그 날 오전, 610의 주임 쉬푸민(許服民)은 장야친을 찾아 남편의 행방을 알아보면서 그녀에게 남편을 상해하는 어떠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승낙했다. 당시 610이 고향으로 가서 파괴할까 두려워 오후에 세뇌반에서 나온 후, 장야친은 남편에게 전화했다. 이튿날에 남편은 샹탄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610 사무실과 국가보안대대에서는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남편을 교란하지 않겠다고 승낙한 것을 어기고, 국가보안 대장 옌줘첸(宴卓欽)이 직접 공검법의 18명을 데리고 장야친의 집으로 가서 강제로 불법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끝내 어떠한 파룬궁 서적 등 직접 증거를 찾지 못하자, 화가 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악인들은 박해 이유를 만들어 집안의 사진첩 중의 사진을 가져갔다. 게다가 컴퓨터 위에서 파룬궁 수련생이 홍법할 때의 사진 몇 장을 다운로드해, 이를 구실로 삼아 폭력을 사용해서 장야친의 남편의 두 손을 등에 채웠다. 당시 수갑을 꽉 조였는데, 이로 인해 그녀 남편의 팔은 즉시 부어올랐다. 그리고는 그를 강제로 끌고 가서 1년 6개월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진행했다.

남편 근무 직장에서는 그달부터 퇴직금을 불법적으로 압수했다. 장야친과 딸은 직업이 없고 수입이 없었는데, 경제적으로 생활비를 끊는 것과 같았다. 그 후 두 모녀는 여러 방면으로 가서 선행을 권고해서야 생활비 지급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2998위안을 공제해 그들의 업무처리 경비로 삼았다. 불법 가택 수사 시 1500위안을 빼앗아 모녀에게 일시적으로 생활상 곤경에 빠지게 했다.

2005년 설날 오후 6시, 장야친은 친정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어머니가 땅에 쓰러져 거의 인사불성이 됐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그녀는 급히 고향으로 가서 어머니를 보살펴 드렸다. 3일이 되지 않아 2총대의 허춘장(何春江)이 여기까지 미행해왔다. 마침 그녀가 어머니에게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또 몸 위의 욕창을 깨끗이 씻어드리며 상처에 약을 갈아주는 등 모습을 보고는, 그녀를 압송해 가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그녀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상황을 현지 파출소에 보고했다. 또 친정집의 주택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 밤이나 낮이나 수시로 전화해 교란하거나 집으로 찾아와 교란했고, 파룬궁 서적 14권을 강탈했고 친정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특히 밤중에 노인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는데, 겨우 잠이 들어도 교란하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세가 이렇게 심각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녀를 샹탄시 유치장으로 납치해 보름 동안 감금했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병환과 극심한 정신적인 압력을 감당해야 했고, 결국 억울하게 사망했다.

2. 불법 노동교양과 징역형을 무고하게 선고받다

2007년 9월 30일 장야친은 여자 노동교양소에서 불법 감금당한 후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08년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샹탄시 610,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국가보안, 공안에서는 샹탄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불법 납치를 진행했고, 9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당했다.

2008년 3월 2일 오후, 샹탄시 610, 공안, 국가보안대대의 악독한 경찰은 장야친 직장의 악인과 결탁해 그녀의 주택 단지 정원 안에 매복해 있다가, 장야친이 문을 나서는 틈을 타 강제로 샹탄시 우자화원 세뇌반으로 납치했다. 하룻밤 동안 구금한 후, 샹탄시 싼자오핑(三角坪) 구치소로 다시 납치해 5개월 넘게 불법 감금했다. 장야친에게 고혈압 증상이 나타나자, 감옥 측은 일이 생길까 두려워 그제야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고, 2008년 8월 11일 보석 절차를 밟도록 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샹탄시 610, 법원, 검찰원, 악독한 경찰은 끊임없이 장야친과 그녀 가족에 대해 교란하며 공갈 협박을 진행했다. 이 악인들은 늘 장야친의 딸의 근무 직장으로 가서 이틀에 한 번씩 교란했다. 그녀의 정상적인 근무 생활을 교란했고, 그녀에게 파룬궁을 비난한 자료를 읽도록 핍박해 강제로 세뇌를 진행했으며, 마음에 어긋나는 일을 하도록 핍박했다.

2008년 12월 31일, 샹탄시 610주임 쉬푸민(許服民)을 우두머리로 한 사악한 무리들은 강제로 장야친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녀를 샹탄시 싼자오핑(三角坪) 구치소로 거듭 납치해 불법 감금했다. 2009년 1월 4일, 샹탄시 위후(雨湖)구 법원에서는 가족에게 통지를 내리지 않은 채 장야친과 다른 파룬궁 수련생 등 총 8명에 대해 불법 재판을 진행해서, 죄명을 뒤집어씌워 무고하게 3년에서 7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장야친은 무고하게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상소했지만, 중급인민법원에 의해 기각당했고, 2009년 3월 10일 후난 여자감옥으로 납치했다.

3. 후난 여자감옥에서 잔인무도한 학대를 당하다

감옥 안에서 장야친은 각종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해 구타로 코가 시퍼렇게 멍들었고, 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구타에 사용된 나무 몽둥이가 부러졌지만 새로 갈아 계속 구타를 진행했으며, 발로 걷어차고, 손톱으로 꼬집었으며, 그녀를 끈으로 침대 머리의 쇠몽둥이 위에 십자가로 묶었다. 장야친은 자신이 무죄이며 불법 재판으로 무고하게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면서 죄수복 입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교도관은 강압적인 폭력으로 죄수복을 입히고 번호를 매긴 명찰을 달았다.

拳打脚踢
가차 없이 마구 때리기

2009년 4월 23일, 장야친은 전향을 거부했다가 전문적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잔혹하게 박해하는 데 사용되는 6감구 여자 병역대로 옮겨졌다. 이곳은 바로 극히 악명이 높은 창사 여자감옥인데 악독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각종 비인간적인 학대와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거기서 세워 두기 체벌을 받았는데, 매일 아침 6시부터 밤중 이른 새벽 두 시까지 서 있어야 했다. 그렇게 매일 18시간 동안 서 있었는데, 어떤 때에는 이른 아침 4시까지 연장하며, 반드시 한 가지 자세를 유지하고 움직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은 반드시 크게 떠야 했다. 만약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냉수를 얼굴에 끼얹고, 귀뺨을 때리는 등 학대를 진행했다. 장야친은 처음 세워두기 고문을 당했을 때 연속 40일 동안 서 있었는데,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다리는 점점 부어올랐다. 그래서 걸을 때면 완전히 굽히지 못했고, 화장실에서 쭈그려 앉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상해를 입었다.

中共酷刑示意图:多根电棍电击
중공 고문 설명도: 여러 개의 전기봉으로 전기충격 가하기

교도관은 세워 두기 고문으로도 그녀의 신념을 움직일 수 없음을 보고, 이어서 장야친에 대해 고압 전기봉으로 전기충격을 가했다. 2009년 6월 3일, 악독한 경찰 리쥐안(李鵑), 마오후이핑(毛慧萍)은 하나의 전기봉을 들고 강제로 그녀에게 노예노동을 하도록 했지만, 장야친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비인간적인 두 명의 악독한 경찰은 전기봉으로 충격을 가했다. 리쥐안은 그녀의 목 부위에 전기충격을 가했고, 마오후이핑은 그녀의 복부에 전기충격을 가했는데, 전기충격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변태적으로 관찰했다. 전기충격은 매번 격렬한 아픔으로 몸에 경련이 일으켰는데, 마치 만 개의 화살이 심장을 뚫는 듯이 아팠으며, 아픔으로 몸을 비틀었고 심장은 바싹 죄어들었다. 일반인이라면 고압 전기봉이 방출하는 불루 레이를 보았다면 즉시 놀라 땅에 꿇어앉아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설사 이런 참을 수 없는 고통에도 겉모습이 나약한 여자 같은 장야친은 주저함이 없이 사악의 전향 요구를 거부했다. 단지 ‘진선인’으로 착한 사람이 되려 했을 뿐인데, 어디로 전향하겠는가? 전향해서 허위적인 사악한 나쁜 사람으로 되란 말인가?

전기충격도 여전히 두 여경의 마성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 악독한 경찰은 즉시 또 다른 한 가지 박해-등 뒤에 채우기(화살을 등에 지기)로 고문했다. 67명의 감옥 바오자의 협박하에 장야친의 팔을 등 뒤로 잡아당겼는데, 한쪽 팔은 위로 잡아당기고 다른 한쪽 팔은 아래로 잡아당겼다. 장야친은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몸 뒤에서 수갑을 찼는데, 일반적인 상황에서 5, 6시간 동안 채워 놓으면 몸은 장시간 동안 극렬하게 아파 혼절해 의식을 잃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고문 학대를 장야친은 네 차례 당한 적이 있는데, 시간은 40여 시간에 달했다. 세 차례는 감옥의 세뇌반에서 박해당한 것으로, 악한 무리는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며 이런 방식을 사용해 그녀에게 믿음을 포기하게 하려 했다. 마지막 한 차례는 이 고문을 22시간 동안 사용했는데, 1분 1초가 고통의 연속으로 속인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후 장야친은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당시 그녀의 두 팔은 내려놓았을 때 이미 불구로 되어 전혀 감각이 없었고, 채워진 적이 있는 손목 부위는 전부 다닥다닥 핏방울이 져 피범벅 된 상태로 수갑 위에 붙어있었다. 그 후 강제 간호, 물리 요법 치료를 거치고, 사부님의 가지 하에 손목은 천천히 일부 감각을 회복했지만, 팔은 부상으로 3년 넘게 불구로 남았다. 출소한 후 법공부와 연공을 거쳐 팔은 또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酷刑演示:背铐
고문 재연: 뒷짐결박

2009년 9월 1일, 창사 여자감옥의 악독한 경찰은 장야친을 감옥의 세뇌반(소굴 중의 소굴임)으로 옮겨, 강제 폭력으로 4개월 동안 세뇌 박해를 진행했다. 악독한 경찰들은 각종 고문으로 그녀를 박해해, 강제로 ‘진선인’ 믿음을 포기하도록 했다. 그리고 강제로 감옥 규정을 베껴 쓰도록 했고, 강제로 특제한 형구-낮은 작은 걸상 위에 앉혀 놓고(걸상 바닥에는 두 개의 쇠못과 말뚝이 있었고, 걸상 다리는 두 개는 길고 두 개는 짧았음) 하나의 자세를 유지해 장시간 동안 앉혀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움직이기만 하면 바오자가 한바탕 혹독한 구타를 진행했다. 보름 후 장야친의 피부는 땀에 의해 붙어 문드러지기 시작했고, 일어날 때면 바지가 피와 살에 붙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런 다음 악독한 경찰은 또 강제로 그녀에게 60여 일 동안 세워두기 고문을 가했다. 그들은 듣기조차 민망한 저질스러운 말로 욕하면서 각종 폭행을 진행했고, 그녀의 다리를 걷어차고 머리칼을 잡아당겼으며, 파리채로 그녀의 눈, 입, 귀를 구타했다. 그리고 냉수를 그녀의 얼굴에 끼얹고, 24시간 동안 화장실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잠을 자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며, 채혈을 진행하고, 독극물을 주사했다. 세뇌반의 악독한 경찰 정잉(鄭穎)은 죄수 허윈(賀雲), 황핑(黃平), 천췬(陳群), 왕(王) 모를 지휘해 그녀에게 뒷짐결박으로 고문을 가했다. 첫 번째는 9시간이 넘었고, 두 번째는 22시간이 넘었는데, 두 손이 채워진 부위는 전부 핏방울이 졌고, 팔은 완전히 감각을 잃었다. 장야친이 이런 잔혹한 박해를 당했지만, 절대 ‘진선인’에 대한 신념을 움직이지 않았다.

中共酷刑示意图:注射药物
중공 고문 재연도: 독극물을 주사하기

그녀의 몸 상태가 약간 좋아졌을 때, 장야친은 힘든 생산노동을 배치받았다. 학대로 손에 장애가 있었기에, 그녀는 마작 대자리를 꿰고 지르는 생산 임무를 했다. 손가락을 원활하게 쓰지 못해 실을 당길 때면 늘 잡아당겨 살에 들어가 한 갈래씩 상처가 생겼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강제로 1년 8개월 동안의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장야친은 또 지속해서 7박 7일 동안 수면을 박탈당해 168시간 동안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학대를 당했다. 바오자가 차례로 지켰는데, 일단 눈을 감기만 하면 혹독한 구타와 냉수를 끼얹는 등 학대를 했다. 그녀는 욕을 먹고 구타당하고, 모욕을 당한 후, 약물 박해당했다. 독극물을 주사 당한 후, 장야친은 복부가 아프고 더부룩하게 부어올랐으며, 입안에서는 장시간 동안 침이 흘러나왔는데 흘러나온 침에는 이물이 있었다. 출소한 후 한 단락 시간 동안 법공부와 연공을 해서야 정상적으로 회복했다.

2019년 8월 13일, 장야친은 불법 재판으로 거듭 징역형을 선고받아 창사 여자감옥에 갇힌 후, 2020년 12월 12일 이전에 박해로 사망했다. 상세한 상황은 조사가 필요하다.

 

원문발표: 2020년 12월 20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2/20/4167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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