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지린성 보도) 2004년 4월 13일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시 파룬궁(法輪功) 수련생 장융(姜勇)은 국가보안대대에 납치돼 톄베이(鐵北) 구치소와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시설물에 불법 감금돼 고문 학대를 당했는데, 납치된 지 80여 일 만인 7월 4일 사망했다. 경찰은 가족의 사진 촬영을 거부하는 등 증거가 될 만한 모든 자료를 소각해버렸다. 현재까지 장융의 시신은 사체검안소에 안치돼 있는데,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은 계속 가족의 접근을 막고 있다.
“이 파룬궁은 정말 좋아요”
장융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에는 승부욕이 강해 무슨 일에서나 늘 앞에 나서려는 강한 성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1개월이 지나도 낫지 않아 고생하던 중, 한 사람을 만나 파룬궁은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으며 성격도 좋게 바뀐다는 설명을 듣게 됐다. 장융은 1996년 파룬궁을 정식으로 연마하기 시작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성품이 좋아져 문제와 마주쳐도 참고 양보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운 사람으로 변했고, 가정도 화목해졌으며, 교통사고를 당해 불편했던 다리도 완전히 나았다. 그 후로 키 170cm의 장융은 건장한 체력에 어떤 질병도 걸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장융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장융을 이렇게 좋게 변하게 할 수 있다니, 이 파룬궁은 정말 좋아요. 이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는 정말 신기하네요”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중공의 박해로 여러 차례 납치당하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정치세력이 잔혹하게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장융은 진선인(真·善·忍)의 믿음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중공에 납치, 불법적인 구류처분과 노동교양처분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온갖 고문학대를 당했다. 이른바 ‘민감한 날’이기만 하면 매번 장융을 찾아와 괴롭히거나 불법 납치해 감금했다. 장융은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유랑생활을 하게 됐다.
창춘 국가보안대대와 파출소경찰이 수없이 집에 찾아와 협박하며 괴롭혔다. 그때마다 아내와 아들은 크게 놀랐는데, 아내는 심각한 심장병이 발생했고, 아이는 겁에 질려 집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밤10, 12시까지 대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 사복경찰 때문에 가족들의 공포는 하루가 일 년처럼 길고 고통스러웠다.
경찰은 함부로 아무 죄명이나 씌워 인권을 짓밟았다.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 아내에게까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 1년을 내렸는데, 2003년 3월경 장융의 아내를 속여 파출소로 오라고 한 후, 판(范) 성을 가진 경찰이 파출소 유치장에 감금시킨 것이다.
1999년 하반기 장융은 베이징 민원사무실을 찾아가 “파룬따파는 정법이며, 국가와 인민에게 백 가지 좋은 점만 있고 한 가지 나쁜 점도 없다”고 공정한 말을 했는데 경찰에게 두 차례 불법 납치돼 창춘(長春) 다광(大廣)유치장에 감금당했다. 2000년 7월 톈안먼에 가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의 현수막을 펼쳤다가 불법적으로 납치돼 펀진(奮進) 노동교양소로 이감될 때까지 구류처분으로 감금됐고, 다시 차오양거우(朝陽溝) 노동교양소로 이감돼 1년이 넘는 기간 감금당하며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했다. 2002년 3월 베이징으로 파룬따파를 실증하러 갔다가 납치돼 유치장에 감금됐고, 그해 11월 창춘 뤼위안(綠園)구 분국에 납치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호랑이 의자에 앉히기, 큰 괘에 올리기 등등의 잔혹한 고문 학대를 당했다.
거듭된 납치로 80일 만에 박해 사망
2004년 4월 13일 장융은 창춘시 공안국가보안대에 납치당한 후 4월 26일 가족에게 통지됐다. 장융이 납치되면서 가방에 보관하고 있던 3만 위안과 핸드폰, 오토바이등이 전부 사라졌다.
장융은 불법적인 구류처분을 받은 후에도 즉각 구치소로 이감되지 않고, 국가보안대에 의해 알려지지 않은 불법 시설물에 1개월간 감금당해 구타와 고문을 당했는데, 큰 괘에 올리기와 호랑이의자 고문, 전기고문, 대나무 이쑤시개 박기, 고춧물 주입, 비닐 주머니를 씌워 질식시키기 등 온갖 잔인무도한 고문을 당했다. 장융은 고문을 당하면서 여러 차례 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속 8일간 고문을 당한 장융은 2004년 4월 21일 톄베이 제1구치소로 이감됐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상해가 심해 다음 날인 4월 22일 창춘시 공안병원으로 이송됐다가, 5월 26일 톄베이 구치소에 다시 감금된 후 계속 박해당했다.
2004년 7월 4일 장융은 결국 고문 박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감금돼 고문 박해를 당하는 기간에 가족은 계속 면회를 요구했지만, 악경(사악한 경찰)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은 7월 4일 오후 8시, 구치소 측으로부터 “장융의 병이 갑자기 도져 즉시 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처치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들은 학살의 증거를 은폐하려고 이른바 ‘사망설명서’라는 것을 작성하려했다가 그마저도 중도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장융의 시신에는 목이 조여 생긴 두 개의 내출혈 흔적이 있고, 입안에서 피가 흘러나왔으며, 눈과 가슴 부위에 시퍼런 멍이 있었고, 항문에 분홍색 위생 종이를 받치고 있었다. 건장했던 장융은 단식,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 온갖 고문 박해로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사망했다. 가족이 사진 촬영을 하려고 하자 현장에 있던 40여 명의 악경들이 제지하며 가족을 사납게 밀쳐냈다.
가족은 슬프고 분한 마음이 가득 차“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은 내상이 아닌가.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다. 목을 조인 흔적이 있고, 몸이 시퍼렇게 된 것은 외상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항문 부위에 위생 종이를 받쳤고, 또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구치소에서는 ‘갑자기 병이 도져 사망했다’고 말했는데, 만약 마음에 켕기는 점이 없다면 사진 촬영 하는 것이 왜 두려운가?”라고 힐난했다.
가족이 장융의 옷과 소지품을 반환하라고 하자, 구치소 측은 전부 버렸다고 했다. 사망자의 옷과 소지품이 설사 고가품이 아니라고 해도 가족에게는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인데, 구치소 측이 무슨 권리로 마음대로 없애버리는가? 장융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할 때 옷에는 분명 증거가 묻어 있었을 것이다. 구치소 측에서 옷과 소지품을 전부 없앤 것은 고의로 고문의 증거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다음 날 가족이 다시 장융의 시신을 보았을 때, 입안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미 처리가 됐고, 가슴 부위 등 전신의 피멍 자국은 표백돼 청백색을 띠고 있었고, 감겨 있는 두 눈꺼풀은 자색을 띠었다. 시체보관소에는 알코올과 약솜 등으로 처리해놓아 증거 현장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이는 국가보안지대와 톄베이 구치소 측이 고문으로 학살한 모든 증거를 인멸시켜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은폐시켰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장융은 납치당하기 전 몸이 건장했고 매우 강한 체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파룬따파 수련 후 어떤 병도 앓은 적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마을 사람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처럼 강건했던 사나이가 납치된 후 80여 일 만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는데 이처럼 억울함이 천고에 또 어디 있겠는가!
창춘시 공안국과 톄베이 제1구치소 경찰은 사람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겨 파룬궁 수련생 장융을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박해에 가담한 경찰들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인데, 그것들은 중공을 도와 오히려 법을 위반하는 사악함을 집행한 것이다. 그것들은 장융을 직접 살해한 원흉이며, 장쩌민이 “때려죽여도 상관없고, 맞아 죽으면 자살로 처리하라”고 한 학살정책대로 집행한 것이다.
장융의 학살사건은 현재 16년째가 되는데, 장융의 시신은 여전히 사체검안소에 안치된 상태고, 가족이 시신을 보려고 하면 공안국 측은 여전히 각종 구실을 대며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서 들어갔다가 사망해 나왔는데, 구치소 측은 책임이 없단 말인가? 가족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중공은 고문으로 진선인을 믿은 좋은 사람을 학살했다. 장융의가족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극심한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
원문발표: 2020년 6월 11일
문장분류: 대륙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11/4075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