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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억울한 옥살이로 생명 위급해진 차오양시 린구이즈, 박해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랴오닝 보도) 랴오닝(遼寧) 차오양(朝陽)시 솽타(雙塔)구 파룬궁 수련생 린구이즈(林桂芝)는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중공(중국공산당) 경찰의 잔인한 박해를 받아 집과 가족을 잃었다. 그녀는 7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면서 혹독한 구타를 당했으며, 약을 넣은 밥과 반찬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식을 잃었다. 박해로 의식을 잃은 그녀는 스스로 생활할 수 없었으며, 결국 2020년 2월 20일 향년 58세로 억울하게 사망했다.

린구이즈의 남편 장중취안(張忠權)은 감옥에 면회하러 갔다가 아내가 박해받는 참상을 직접 보고도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아내는 육체적인 박해를, 남편은 정신적인 박해를 끝없이 감당했다. 남편은 결국 비통하고 억울한 심정으로 2018년 9월 겨우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林桂芝'
 린구이즈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전의 린구이즈는 심각한 심장병으로 자주 발작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지고, 쇼크를 일으켜 수시로 생명이 위험해졌다. 일가족의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1998년 3월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수련 후 얼마 되지 않아 몸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어 더는 약물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하지 않았고, 건강을 회복해 지금껏 병이 재발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으로 파룬따파의 신기함과 비범함을 목격했으며, 가정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2002년 2월 22일, 린구이즈는 연공한다는 이유로 1개월 넘게 강제 감금됐다. 그 후 벌금 500위안(한화 약 9만 원)을 내고서야 석방됐다. 2002년 5월 13일, 그녀는 또 1개월가량의 불법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튿날 집으로 돌아온 이후, 파출소와 주민위원회에서는 이른바 민감일이 되면 그녀의 집으로 와서 소란을 피웠다. 보증서를 쓰고 믿음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으며, 보증서를 쓰지 않으면 구류처분을 받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대법 중에서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대법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한 병의 고통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며, 더구나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대법을 양심을 어기고 비방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핍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남편과 아이를 남겨두고 집을 떠나 홀몸으로 외지에서 유랑 생활을 했다.

2003년 11월 18일, 린구이즈는 일하러 가다가 차오양시 잔난(站南)분국에 의해 또 납치된 후 제1구치소 우자와(吳家窪)로 이송되어 불법으로 감금됐다. 감금된 기간에 그녀는 열악한 환경에서 연공할 수 없게 되어 심장병이 재발해 여러 번 쇼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구치소에서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응급 처치도 해주지 않았다.

차오양시 솽타구 검찰원과 법원은 2004년 1월 중순, 중병을 앓고 있는 린구이즈에게 7년의 중형 판결문을 보냈다. 3월 초, 경찰은 린구이즈를 차오양 바리바오(八里堡) 중심병원으로 데려가서 검사받게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 그녀는 경찰 차오빙린(曹丙林)에게 심전도를 보여 달라고 했으나, 차오빙린은 보여주지도 않고 오히려 그녀를 구타했다. 그 후 의사에 말에 의하면 요로 케톤체(ketone體), 심박급속증(心搏急速症), 혈액 점착[血質粘] 등 여러 가지 질병이 있다고 말했다.

2004년 3월 5일, 린구이즈는 선양(瀋陽) 여자감옥으로 이송됐으나, 그녀의 건강 상태가 극히 나쁘다는 이유로 수감이 거부됐다. 전(前) 솽타 공안 분국의 경찰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병 상태의 린구이즈를 차로 끌고 가서 구타했다. 그녀는 수감이 거부되어 돌아온 후에도 치료를 위한 석방 조치를 받지 못하고 여전히 감금됐다. 당시 차오양시 솽타 공안분국의 부국장 장즈루(張志儒, 현재 차오양시 공안국 국가보안지대장)가 박해를 주관했다.

5월 1일 전, 지역 병원의 진단을 거쳐 린구이즈의 진료 기록을 솽타구 법원에 넘겼으나, 아무런 결과가 없었다. 그 후 그녀는 또 선양 감옥으로 이송되어 박해받았다.

감옥에서 매일 여러 번 쇼크를 일으켜도 치료를 위한 보석 조치가 가로막히다

린구이즈가 선양 여자감옥 2대대 6소대에 불법으로 감금됐을 때의 대장은 장레이(張磊)였고, 또 한 사람의 대장은 충줘(叢卓)라고 불렀다. 그녀는 가부좌하고 연공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혹독하게 구타당하고 짓밟혀 발 복사뼈가 부서졌다. 그녀의 몸 상태는 갈수록 나빠지고 병세가 심해졌다. 가족은 병보석으로 치료받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구했으나 거부됐다. 경찰 장레이는 “린구이즈는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백하지 않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보증서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안에서 죽는다고 해도 병보석 조치를 해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린구이즈는 감옥의 사악한 전향을 거부했다.

2008년 11월, 린구이즈는 매일 여러 번 경련을 일으키고 쇼크를 일으키는 등 생명이 위험해졌다. 경찰은 부득불 그녀를 선양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데려가서 검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심각한 병세를 보고는 2008년 11월 19일 감옥 경찰 2명을 차오양시에 보내 병보석 조치를 해주었다.

그 기간에 가족은 차오양시 공안국 국가보안지대 왕징룽(王景龍)과 광밍(光明)분국 지역사회 경찰대대장 리광원(李廣文)을 여러 번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병보석 조치를 악랄하고 강경한 태도로 온 힘을 다해 가로막았다. 그들은 현지 차오양시 공안국 법의를 사칭하고는 린구이즈는 병보석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거짓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병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서명했다. 감옥 경찰은 선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가족이 법의를 찾아가서 보는 앞에서 물어보니 법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가족은 뒤이어 리광원을 찾아 그가 왜 병보석 조치를 가로막는지를 면전에서 물었다. 리광원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다가 결국, 감옥에서 보석 관련 서류 즉 병세가 더욱더 심해졌다는 서류를 제출한다면 다시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감옥은 다시 차오양으로 가서 병보석 조치하는 것을 거부했다. 선양 감옥과 차오양 공안국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현 상황을 유지하여 계속 박해하려고 망상했다. 며칠 후, 조급해진 가족은 다방면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차오양 지역에서 모든 병보석 절차를 타당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바로 2009년 1월 14일, 가족이 마중하러 갔을 때, 감옥 경찰은 병이 위급한 린구이즈에게 보증서를 써서 강제로 ‘전향’하라고 했으며, 보증서를 쓰지 않으면 석방을 거부한다고 협박했다. 그런 다음 불법 심문하면서 대법 수련을 포기하라고 여러 번 협박했다. 그리고 그녀가 수련을 견지하겠다고 하자 석방해주지 않았다. 또한, 충 대장(충줘)은 죄수에게 린구이즈의 밥과 반찬에 약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죄수는 린구이즈가 의식을 잃었을 때 그녀의 입에 약을 넣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린구이즈는 매일 대여섯 번 경련을 일으켰고 의식을 잃었음). 이렇게 되어 린구이즈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2009년 9월 9일, 린구이즈의 남편은 재차 선양 여자감옥으로 가서 아내를 면회했다. 허약한 린구이즈는 가족 앞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시간은 5~6분 동안 지속했다. 현장의 감옥 경찰은 이것은 시간이 짧은 것이라며, 길 때는 30분 넘게 인사불성(쇼크)이 되었다고 말했다. 가장 많게는 예닐곱 번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린구이즈가 기절해 쓰러진 것을 보고도 어찌할 수가 없어 애간장만 태웠다.

감옥은 하루에도 여러 번씩 쇼크를 일으키는 린구이즈를 형기 만료로 석방될 때까지 7년 동안이나 응급처치하지 않고 내버려 뒀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 후 기억을 회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활하지 못했다. 결국, 2020년 2월 20일 억울하게 사망했다.

행복했던 가정은 피비린내 나는 박해로 집과 가족을 잃었다. 장(江) 씨 집단은 30년 동안 파룬궁 수련생에게 광적인 박해를 가해 수많은 가정에 극심한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국민에게서 신체 건강을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을 박탈했다. 사람의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하는 것은, 일부 사람이 금전과 권세의 유혹을 받아, 파룬궁 수련생은 모두 좋은 사람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양심을 어기고 박해에 참여함으로써 박해의 처참함을 가중한 것이다.

선량한 사람에 대한 박해에 하늘과 사람이 노했다. 공산당의 장쩌민(江澤民)은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을 조작하여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파룬궁 수련생을 잔혹하게 박해했는바,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가 고의로 방화하여 기독교 신자에게 죄를 전가하고는 선량한 기독교 신자를 잔혹하게 박해한 것과 같다. 예부터 바른 믿음을 박해한 사람은 틀림없이 천벌을 받았다. 결국, 하늘은 네 번의 대역병을 내려 강대한 로마제국이 해체되어 멸망하게 했다. 고대 로마의 대역병 이후 서기 680년, 사람들은 차츰 각성하여 기독교 신자에 대한 통치자의 박해와 사회의 도덕성 상실을 질책했다. 로마의 백성들은 분분히 집을 나와 기독교 신자 성도 세바스찬의 성골(聖骨)을 받들어 대행진을 했다. 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신에게 참회했으며 결국 신불의 양해를 얻었다. 그때부터 로마 성의 대역병은 완전히 사라졌다.

오늘날 우한(武漢) 폐렴이 맹렬한 기세로 전국에 퍼지고 있다. 우한 폐렴과 17년 전의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모두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으킨 것이다. 사스가 첫 번째 역병이라면 우한 폐렴은 하늘이 사람을 경고하기 위해 내린 두 번째 역병이다. 역병 앞에서 금전과 권세는 한 푼의 가치도 없다. 오직 진심으로 참회하고 속죄해 사악을 멀리해야만 자신을 구해낼 수 있다.

원문발표: 2020년 3월 10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3/10/4022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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