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원제(文傑)는 헤이룽장(黑龍江)성 치치하얼(齊齊哈爾)시 민족중학교 교사이다.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다는 이유로 세 차례 불법으로 감금당한 적이 있고, 치치하얼에서 9년 동안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또 허베이(河北) 싼허(三河)시에서 5년의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총 14년 넘게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아 고문 학대를 당했다.
원제는 중공(중국공산당) 사당에 박해당한 경과를 다음과 같이 자술했다.
나는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민족중학교 교사로, 1995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본래부터 있던 류머티즘, 심장병, 정신쇠약 등 병 증상은 모두 수련 중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완쾌되어 정말 병이 없이 온몸이 가벼워졌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를 스프레이로 썼다가, 잔혹하게 중국공산당 고문 학대당해
2001년 1월 17일 저녁, 나는 벽 위에 ‘진선인(眞善忍)’ 큰 글자를 스프레이로 썼다가 쑨우(孫吳)현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에 의해 쑨우현 공안국으로 납치당했다. 악독한 경찰들은 밤새 불법으로 심문을 진행했는데, 전기봉으로 나의 머리 부위, 왼쪽 손에 전기충격을 가했다. 이튿날, 나는 쑨우현 구치소에 불법으로 감금당했다.
중국공산당 고문 재연도: 뒷짐결박, 전기충격, 몽둥이로 구타하기, 밟고 차기(踩踢)
1월 20일, 치치하얼시 젠화(建華) 공안 분국의 악독한 경찰 세 명이 나를 치치하얼시 젠화구 제3 형사경찰대로 납치했다. 정보과 과장 장이더(張義德)는 내가 도착한 것을 보자, 있는 힘을 다해 나의 뺨을 때리고 나를 찼다. 내가 사악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독한 경찰은 곧 나에게 ‘큰 괘에 올리기(上大掛)’ 고문을 가했다. 나의 두 발은 쇠 의자 위에 묶였고 두 손은 한 사람의 키보다 더 높은 곳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들이 쇠 의자를 뒤로 치우자, 나의 몸은 즉시 허공에 매달렸는데, 순간적으로 두 팔은 마치 경련이 일어날 듯이 아팠다. 그 후 나는 아파서 기절했다. 얼마나 오래 지나서야 내가 풀려났는지 몰랐다. 두 팔은 완전히 지각을 잃었다. (2년 후 비로소 정상적으로 회복했음)
악독한 경찰은 고문을 동원하여 내가 살 집을 구하라고 나를 핍박했는데, 그곳에서 또 파룬궁 수련생 5명을 납치했다. 그날 저녁에 우리를 치치하얼시 제2 구치소에 불법으로 감금했다. 구치소에서 당직하는 경찰이 접수할 때 상처를 기록했는데, ‘두 팔은 고문당해 들 수 없다.’라고 썼다. 이렇게 나는 2001년 1월 20일부터 2002년 1월 22일에 줄곧 치치하얼시 제2 구치소에 불법으로 감금당했다.
우리를 감금한 ‘감방’은 매우 비좁아 저녁에 잠을 잘 때마저 몸을 구부리고 어깨를 세우고 잤다. 비좁아서 가슴이 아프고 배가 아파, 소변이 마렵지 않아도 화장실로 가고 싶었다. 화장실로 갔다가 돌아오면 다시 원래의 위치로 비집고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대량의 파룬궁 수련생이 이곳에 불법으로 감금당했기 때문에 한 ‘호(號, 감방)’안은 30여 명인데, 대법 수련생이 30명을 차지했다. 매일 저녁 3교대로 나누어 잠을 잤으나, 일부분 사람은 여전히 핍박으로 차디찬 시멘트 땅 위에서 잠을 잤다. 나는 예전에 시멘트 땅 위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구치소에서 먹은 것은 옥수수떡이고 마신 것은 모래가 섞인 멀건 배춧국이다. 그 기간에 나와 다른 파룬궁 수련생은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단식을 진행한 넷째 날, 구치소 소장 린융구이(林永貴)는 내가 갇힌 1호 감방 안으로 와서 광적으로 대법 수련생을 혹독하게 구타했다. 게다가 나를 경찰실로 잡아끌고 가 한바탕 혹독한 구타를 한 후, 수갑, 족쇄로 등에서 한 데 꿰매 손을 등 뒤에서 채워 몸을 쭈그려 앉혔고, 몸 뒤에서 매우 짧은 쇠고랑으로 손과 발을 연결했다. 화장실로 가려 해도 두 사람에게 들려갔는데, 여전히 풀어주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고문 설명도: ‘뒤에서 꿰뚫기 고문(穿後刑)’—사람의 두 손을 등 뒤에 채워 두 무릎을 꿇게 하고, 두 발에 족쇄를 채우는 동시에 수갑, 족쇄를 철사로 가장 짧은 거리로 꿰는 것이다
‘족쇄를 꿴’ 후, 악독한 경찰은 우리에게 음식물 주입 고문을 시작했다. 그들은 나의 머리칼을 잡고 강철로 된 국자로 나의 입을 비틀어 열고, 나의 입안에서 힘껏 휘저어 잇몸마저 찢어졌다. 감옥 의사 쑨천룽(孫臣龍)은 힘껏 나의 코를 잡았는데, 마치 나의 코를 비틀어 떨어뜨리려 하는 듯했다. 나에 대해 강제적으로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했는데, 주입한 것은 소금물을 섞은 옥수숫가루 물이었다. 이렇게 하룻밤 동안 수갑 족쇄를 찼는데, 손발마저 전부 부어올랐다.
중국공산당에 의해 9년의 불법 징역형 선고받고,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에서 박해당해
2001년 7월, 치치하얼시 젠화(建華) 법원에서는 나와 11명 대법 수련생을 한 공소장 위에 놓고 우리에 대해 불법 재판(어떤 대법 수련생은 서로 알지도 못했거나 혹은 무슨 왕래가 없었음)했다. 젠화구 법원 법정 경찰은 또 법정에서 우리에 대해 공갈 협박, 욕설을 퍼부었다. 헌법을 위반한 상황에, 법원에서는 우리에 대해 불법 징역형을 선고했는데, 어떤 이는 12년, 10년, 9년, 8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중 왕젠화는 4년(4년이 되지 않아, 왕웨이화는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9년의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판결에 불복해 법에 따라 상소했다. 그러나 나의 상소장은 2심 판결서 위에서 체현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판결에 복종한다고 주석으로 밝혔다.
2001년 말, 내가 여자감옥으로 납치당하기 전, 경찰은 나에게 사진을 찍고 지장을 눌러 지문을 남기도록 핍박했다. 내가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자, 그들은 곧 나의 양쪽 뺨을 번갈아 때렸다.
2002년 1월 22일, 경찰은 내 가족에게 4백 위안의 이른바 ‘차를 세낸 비용’을 갈취해 나와 다른 파룬궁 수련생을 헤이룽장성 여자감옥 집중 훈련대로 납치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경찰은 곧 죄수를 교사해 주야로 끊임없이 나를 통제했다. 나는 ‘보고사(報告詞)’와 ‘감옥 규정’을 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늘 한밤까지 세워 두기 고문을 당했다. 3개월 후, 나는 7감구(지금의 4감구임)로 납치돼 계속 박해당했다.
어느 한 번, 감옥에서는 강제로 모든 수감 인원에게 식당에서 파룬궁을 비난하는 이른바 뉴스를 보도록 핍박했다. 감옥 측은 내가 모함을 제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나를 묶는 데 사용하는 끈, 입을 붙임에 사용하는 테이프를 준비해 놓았다. 바로 이번 박해 중, 어떤 대법 수련생은 ‘독방’에 갇혔다. 나는 매일 죄수 네 명의 유형무형의 감시하에 심정이 고도로 긴장되고 우울했으며 공포감을 느꼈다. 그리고 수시로 질책, 호통을 당할 수 있었고, 심지어 구타와 욕설을 당했다. 매일 여전히 악독한 경찰, 악독한 죄수의 핍박에 못 이겨 17~18시간 동안의 노예 노동을 했다.
약 2002년 7월, 나와 전 감옥에서 불법으로 감금당한 대법 수련생은 단체로 노예 노동 박해를 저지해 단체적으로 파업했다. 나는 ‘독방’에 갇혀 56일 동안 가중된 박해를 당했다. 독방은 일 년 내내 햇빛을 보지 못하고 어둡고 축축했으며, 이불과 요가 없었다. 삼복 날 일지라도 매일 저녁 몇 번이나 추워 잠에서 깼으며, 또 늘 굶었다. 56일째 되는 날, 나는 수갑을 차고 감방으로 돌아와 계속 박해를 당했다. 이후의 보름 사이에 24시간 동안 작은 나무 걸상 위에 앉아 뒷짐결박으로 채워졌다. 저녁에 작은 걸상 위에 앉아 잠을 잤는데, 밤사이 추위에 잠에서 몇 번이나 깼다. 그리고 밥을 먹고 화장실로 갈 때마저 쇠고랑을 찼다.
2002년 8월 15일, 나와 대법 수련생 천웨이쥔(陳偉君, 이미 박해로 사망)은 세 개의 쇠문을 돌파해 소굴에서 벗어났다. 그 후 악독한 경찰에 의해 감옥으로 납치돼 돌아온 후, 연속으로 차이고 구타당했다. 나는 두 번째로 ‘독방’에 갇혀, 강제로 하룻밤 동안 쇠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이튿날에 풀어주었을 때, 전체 몸은 움직일 수 없어 고정됐을 때의 자세를 유지하고 움직일 수 없었는데, 한나절이 되어서야 회복되었다. 경찰은 나에 대한 박해를 도리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반대로 묶인 고리에 위에 채워졌는데, 밥을 먹고 화장실로 가는 것을 제외하고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저녁에 잠자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예전에 악독한 경찰에 의해 큰 괘에 올리기 고문을 당했을 때 조성된 내상 때문에, 팔이 뒤틀림이 가장 두렵고 누르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반대로 또 묶인 고리에 위에 채워 놓았는데, 어느 각도로도 안 되고, 무슨 자세라도 팔을 눌러 놓아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가을은 점점 추워졌고 독방은 더욱더 추웠다. 나는 솜옷을 보내 주도록 요구했으나, 며칠이 지나도 주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1개월 넘게 박해당했다. 독방에서 돌아온 후, 매일 핍박에 못이겨 죄수와 함께 노예 노동을 했는데, 각 방면에서 난처하게 굴었다. 환경은 고도로 긴장하고 두려웠다. 사악이 가장 광적인 나날에 1분 1초마저 견디기 매우 어려웠다. 수시로 이유 없는 박해를 당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하루도 좋은 날을 보내지 못했다.
2003년, 감옥 측에서는 또 대법 수련생을 박해하는 음험하고 악독한 수단을 생각해 냈다. 가족이 면회하러 올 때 죄수는 반드시 ‘보고사’를 외워야 한다고 규정했다. 보고사 첫 마디가 바로 ‘나는 ×감구 죄수 ×××입니다.’라는 것이다. 대법 수련생은 무고하게 박해를 당한 것이지 죄수가 아니다. 보고사를 외우지 않으면 가족이 면회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온 후, 경찰과 죄수는 또 나에게 육친의 정이 없고, 인간성이 없으며, 가족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욕했다. 중국공산당의 위법자들은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심했다.
같은 해 4월 7일, 우리는 노예 노동에 참여함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작은 나무 걸상에 앉히기 고문을 당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7~8시까지 약 10여 시간을 앉았다. 2004년 12월, 나와 함께 불법으로 감금당한 파룬궁 수련생 정진 보(鄭金波, 지금 이미 박해로 사망)는 악인 쉐수화(薛淑華)에게 구타당했다. 나는 대대장에게 편지 써서 악인을 징벌하고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다. 나는 이로 인해 격리돼 나흘 동안 감금당했는데, 매일 죄수 네 명에 의해 감시당했다. 감시당하는 기간에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2006년 11월, 여자감옥에서는 대규모로 전면적으로 또 한 차례 대법 수련생을 박해했다. 11월 28일, 전 감옥에서는 불법으로 감금당한 모든 수련생에 대해 각 감구에서는 통일적인 시간에 ‘감구 청리(清監)’를 진행했다. 주요한 목표는 경문을 수색했는데, 몇 개의 건물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깡패 감옥장 류즈창(劉志強)은 수하의 한 무리 악독한 경찰을 거느리고 곳곳으로 쏘다니며 소란 피웠다. 대량의 경문은 악도에 의해 강탈당했다. 그 후 며칠 동안은 매일 경문을 수색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매일 강제로 대법 수련생을 가지런히 한 곳의 작은 나무 걸상에 앉혔는데, 눈을 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우리 사이에 접촉함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침대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화장실로 가려 해도 엄격한 제한을 받았는데, 원인은 우리가 접촉할까 두려워서였다.
감옥 측은 우리를 세뇌하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매일 파룬궁에 대해 극렬하게 모함하는 말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그리고 ‘바오자(包夾)’ 죄수에게 지시를 내려 대법을 비난한 사악한 책을 읽어 강제로 우리에게 듣게 했다. 악도들은 잇따라 각 감구에서는 대법 수련생을 전문적으로 ‘전향’을 진행하는 11감구로 납치했다. 2007년 4월, 나는 11감구로 납치당했다. 악독한 경찰이 지시한 죄수 추이샹(崔香)을 우두머리로 하여 나에 대해 욕설을 퍼붓고 구타했다. 그리고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매일 전문 인원이 나에 대해 강제 세뇌를 진행했고 번갈아 박해했다. 이런 강압 박해는 2시간 넘게 걸렸는데, 내가 정신이 흐려져 핍박에 못 이겨 ‘전향’할 때까지였다. 2007년 말, 나는 엄정 성명을 써서 새롭게 대법 수련 중으로 다시 돌아와 수련했다.
2008년 2월 초, 나는 6감구로 옮겨졌는데, 이곳에서 대법 수련생 사이에 접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두 명의 ‘바오자(包夾, 수감 감시자)’ 죄수가 감시하는 것이 이미 관례로 되었다. 몇 해 동안 줄곧 모두 이러했다.
2010년, 사악한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월 19일, 나는 긴 9년간의 감옥 박해를 끝내고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감옥 측은 여전히 박해를 최후일각까지 유지했다. 오전 시간에 나는 몇 차례나 나를 풀어주도록 요구했으나, 경찰 측은 치치하얼시 ‘610’ 사람이 와야 내가 떠날 수 있다고 말했다.
비록 내가 감옥에서 걸어 나왔으나, 나에 대한 박해는 이 때문에 멈추지는 않았다. 내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근무하는 권리를 불법적으로 박탈당해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데, 또 진일보로 불법적으로 내가 신분증 절차를 밟는 권리를 박탈하여 나를 호적에 올려주지 않았다. 돌아온 후에야 나는, 2001년에 악독한 경찰이 내 집에 가서 불법 가택수색을 진행할 때 나의 모든 대법 서적과 비디오재생기를 강탈했을 뿐만 아니라, 또 나의 저축통장을 몰래 훔쳐 갔으며, 게다가 2001년에 은행과 공모해 3차로 나눠 불법적으로 나의 저축통장 위의 2만여 위안을 훔쳐 갔다. 내가 감옥에서 돌아와 은행에 가서 돈을 찾을 때는 단지 백여 위안밖에 남지 않았다.
사당은 나를 9년 동안 박해한 동시에 내 가족에게도 극심한 상해를 주었다. 나이 든 부친은 내가 9년의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름 동안 잠을 자지 못하며 날마다 안절부절못했는데, 감옥의 담벼락을 보기만 하면 마음이 뒤집혔다. 어머니는 9년 이래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고난을 감당했다. 원래 행복하던 나의 가정은 파멸되어 아이는 11살에 어머니 사랑을 잃었다. 내가 감옥에서 돌아와 첫 번째로 기차역에서 아이와 만났을 때, 20살인 아들을 직면해 우리 모자는 만났으나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아이와 가족에게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게 해서는 안 되었고, 그들에게 더는 괴롭게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차 밖으로 돌려 눈물을 묵묵히 흘렸다…….
먼 타향에서 거듭 감옥에 갇히다
2012년 4월,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를 당했는데 나는 하마터면 연루될 뻔하여 어쩔 수 없이 유랑했다.
2014년 4월 22일, 허베이성 싼허(三河)시 공안국에 납치당했다. 경찰은 나에 대해 온갖 방법을 생각해 나의 이름을 알려고 했는데, 내가 협력하지 않자 이튿날에 ‘파룬궁 여성 1호’라는 명목으로 나를 싼허 구치소로 보냈다.
구치소에서 내가 협력하지 않자, 그들이 나에 대한 태도는 비교적 악랄했다. 12일 후 나를 세뇌반으로 보냈다. 세뇌반에서 두 명의 일을 책임진 관원의 태도는 매우 악랄했는데, 악의적으로 사부님을 공격하고 대법을 공격했으며 나에게 전향하도록 요구했다가 나에 의해 냉혹히 거절당했다. 그곳에서 2개월 넘게 있었다. 한 번은 몸이 특별히 괴로워 심장병과 유사한 상태가 나타나 그들은 나를 병원으로 보냈다. 세뇌반에 있은 기간, 나의 변호사가 나를 만나려고 요구했다가 그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거부당했다. 국가보안대대 리웨이(李偉)는 여러 차례 나에 대해 유도 신문하여 자백하게 했다.
2014년 7월, 나는 싼허 구치소로 돌려 보내졌다. 어느 하루 저녁 7시경, 싼허 국보과 과장 자즈쉐(賈志學)가 구치소로 와서 나를 속이며 나에게 그들이 지정한 ‘법률지원 변호사’(즉 유죄 변호를 진행함)를 배치하려 하여, 다른 변호사가 나를 위해 무죄 변호하는 것을 제지하려고 시도했다. 다섯 차례 불법 재판을 거쳤는데, 두 번째 재판 때, 나는 심장병 상태가 나타났다. 그들은 어떠한 구조도 하지 않고, 단지 휴정을 선포했을 뿐이다. 법정에서는 법률을 돌보지 않고 사실을 돌보지 않고 불법적으로 나에게 5년 형을 선고했다. 나는 법에 따라 상소했는데, 2심에서는 불법적으로 원판결을 유지했다.
2016년, 나는 허베이성 여자감옥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3년의 불법 감금을 당했는데, 2년 6개월의 사악한 세뇌를 겪었다. 매일 사악한 CD를 보도록 요구하지 않으면, 또 전향자가 사부님을 비난하고 대법을 비난하는 물건을 주입했다. 심각할 때, 사악의 녹화 영상을 하루에 10여 시간을 보았는데, 정신은 거의 붕괴하였다. 물건 구매를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식품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용품 사는 것도 심각하게 통제했다. 전체 과정 중, 교도관 왕예(王野), 차오하이옌(曹海燕)이 나를 심하게 박해했다. 두 차례나 나에게 채혈하고 신체 검사하도록 핍박해 600여 위안을 썼다. 내가 하지 않으면 그녀들은 곧 위협, 공갈 협박, 강제로 끌어 잡아당겼는데, 심지어 죄수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나를 협박했다. 병원에서 나에 대해 채혈, B형 초음파 검사를 요구하지 않은 상황에, 왕예, 차오하이옌은 강제로 나에게 진행했다. 약 7개월이 넘는 사이에 나에게 매일 12시에 잠을 자도록 요구했고, 강제 세뇌했다.
내가 곧 감옥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감옥 측은 여러 차례 헤이룽장 하얼빈시, 치치하얼시와 연계해 그들에게 꼭 감옥에서 나를 마중해 가도록 했다. 치치하얼 ‘610’은 네 명을 파견했다. 두 사람은 베이다(北大)가 파출소의 경찰 장즈웨이(張志偉), 위리훙(於麗紅)이고 두 사람은 지역사회 인원이었는데, 한길에서 나를 따라 하얼빈까지 갔다. 그리고 또 무례하게 나의 남동생 집으로 가서 나의 남동생의 집주인이 거주하는 파출소와 연계했는데,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이곳에서 거주한다는 등을 말했다. 그 후 또 후란구 신민(新民) 파출소로 가서 나에 대해 문의해 기록했으며, 지문을 남기고 사진을 찍었다.
나의 호구 문제에 관해서 치치하얼 베이다가(北大街) 파출소에서는 내가 첫 번째로 판결 박해를 당했을 때, 곧 나의 호구를 무효로 했다. 내가 출소한 후 호구를 올리러 갔지만, 그들은 구실을 대며 처리해 주지 않았다.
내가 이 5년 동안 박해당한 기간에 노 부친은 극심한 충격을 견디지 못해 딸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을 지니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사악한 소굴에서 나왔지만, 나에 대한 박해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수중에 한 푼도 없고 돌아갈 집이 없어 어머니의 집에서 잠시 거주하는 수밖에 없다. 85세인 노 모친은 내가 여러 차례 박해당해 중국공산당이 마구 세도를 부림에 처했던 이유로, 나와 함께 생활하기를 원하고 또 내가 그녀를 보살펴 드리기를 바랐을지라도 여전히 감히 장시간 동안 나를 묵게 하지 못했다. 어떤 때에 나는 다만 기타 파룬궁 수련생의 집에 잠시 거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요 몇 년 동안, 중공 악인의 나에 대한 경제 박해는 줄곧 지속되었고 줄곧 존재했다. 외지에서 일했는데 다만 신분증이 없었던 이유로 나의 원래의 교사 직업과 알맞은 직업을 할 수 없었다. 예컨대 보모, 음식점 종업원, 판매원, 아이를 보는 일, 위생 청소 등이다. 때로는 직장을 구하지도 못했다.
원문발표: 2019년 11월 1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1/18/3959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