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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 노동교화 처분과 두 차례 징역 판결, 허난성 정셴진이 박해로 결국 사망

[밍후이왕](밍후이왕 통신원 허난성 보도) 허난성 화이양(淮陽)시 파룬궁 수련생 정셴진(鄭現金)은 2019년 8월 11일에 중국공산당에 의해 박해를 당해 억울하게 사망했는데 향년 57세였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에 대한 20년이 넘는 지속적인 박해 중에서 정셴진은 생전에 여러 차례 납치 감금을 당했고, 불법 노동교화 처분을 당했으며, 두 차례 불법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사망했을 때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아내는 여전히 감옥에 불법으로 감금돼 있었다.

정셴진은 허난성 화이양시 동남쪽의 루타이(魯台)진 사람이며, 예전에 사업에서 성공한 상인으로 허난성에서 한때 매우 유명했다. 정셴진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심신에 매우 큰 이로움을 얻었고, 많은 나쁜 습관을 버렸으며,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처신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정셴진과 아내 왕하오메이(王好梅)은 진선인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 이유로, 여러 차례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당원에게 납치, 감금당했다.

두 부부가 납치되고, 노 모친이 지나친 슬픔으로 사망

2001년 4월, 루타이진 파출소 경찰 왕스민(王世民)은 7~8명의 경찰을 거느리고 지행정촌(集行政村)의 4곳의 아파트 앞에 들이닥쳐 정셴진의 집에 대해 불법적인 가택수색을 진행했다. 어떠한 이른바 ‘증거’를 수색해 내지 못한 상황에서, 정셴진과 아내 왕하오메이를 화이양 공안국으로 납치해 불법 심문한 후 두 사람을 구치소에 가뒀다.

정셴진 두 부부가 불법으로 감금당한 기간, 집은 경제력을 끊겨 미성년인 세 아이의 생활은 극히 어려웠다. 학비를 내지 못한 이유로 두 딸은 핍박을 이겨내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중도에서 학업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왕하오메이의 어머니는 딸, 사위가 모두 감옥에 갇힌 소식을 듣고 비통하고 두려워 끊임없이 혼잣말로 되뇌었고 입맛도 없었다. 그리고 우울증이 심해져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효과가 없었으며 병세가 하루하루 심각해져 곧 머지않아 세상을 뜰 것 같았다. 노인에게 약간의 위안을 주어 병세가 호전되게 하려고, 그의 가족은 현 국가보안대대로 가서 눈물을 머금고 석방을 간청했으나 경찰은 상대해 주지 않았다. 결국, 노인은 2001년 음력 10월 초엿샛날에 지나친 슬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공안국으로 가서 왕하오메이를 석방해 하루 동안 집으로 돌려보내 어머니를 위해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공안국 부정위 런웨이(任偉)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런웨이는 그 후 업보를 당해 20년 형을 선고받았음) 왕하오메이는 8개월, 정셴진은 7개월 동안 불법으로 감금당했다. 두 사람은 각각 500위안을 갈취당한 후 차례로 석방됐다.

두 부부가 누차 납치되고, 차례로 불법 노동교화 처분을 당하다

2002년 봄, 정셴진은 버스를 타고 사무를 보러 서치(社旗)현 주지(朱集)진으로 갔다가 주지진 파출소장 양젠중(楊建中)의 아내의 악의적인 고발을 당했다. 주지진 파출소와 서치현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경찰은 정셴진을 현 구치소로 납치해 감금했다. 정셴진은 구치소에서 단식으로 이유 없는 박해를 저지해 4개월 동안 불법으로 감금당했고, 경찰에게 5백 위안을 갈취당하고 비로소 감옥 문을 나섰다.

2003년 음력 2월 초이렛날, 루타이진 파출소 경찰 왕스민(王世民), 국가보안대대 경찰 왕취안둥(王全棟)은 5~6명의 경찰을 거느리고 정셴진의 집에 들이닥쳐 불법 가택수색을 진행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강제로 정셴진을 유치장으로 납치했다. 그날 밤 경찰은 합해서 4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납치했는데, 한 명의 여성 수련생이 구치소에 갇히고 기타 3명 수련생은 유치장에 갇혔다. 저우커우(周口)시에서 온 악독한 쑹궈량(宋國良)은 3명 파룬궁 수련생을 포승줄로 묶어 잔인하게 구타했다. 그 후 정셴진은 쉬창(許昌)으로 납치돼 2년 불법적인 노동교화처분을 받았다.

2004년 2월 20일, 경찰 왕스민은 7~8명의 경찰을 거느리고 거듭 정셴진의 집에 들이닥쳐 불법적인 가택수색을 진행했다. 경찰은 강제로 왕하오메이에게 대법 사부님을 욕하도록 했다. 왕하오메이가 욕하지 않자 경찰은 곧 그녀를 구치소로 납치했다. 왕하오메이는 10여 일간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경찰은 1천 위안을 갈취해서야 가족에게 데려가게 했다.

2005년 6월 18일, 보리를 말리는 바쁜 계절에 왕스민은 한 무리의 경찰과 결탁해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농사일에 바쁜 왕하오메이를 다시 구치소로 납치했다. 왕하오메이는 보름 동안 단식해서야 석방됐다.

2006년 음력 3월 초이렛날, 왕스민은 7~8명의 경찰을 거느리고 저녁 12시경에 왕하오메이의 집에 들이닥쳐 진상 소책자 6권,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강탈했다. 그리고 또 왕하오메이를 화이양 구치소로 납치했다. 구치소 안에서 왕하오메이는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해 몸이 극도로 허약하고 생명이 위독했다. 구치소에서는 국가보안대대에 보고했는데, 대장 창이쥔(常怡軍)은 상관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다. 그 후 왕하오메이에 대해 1년 3개월 불법 노동교화 처분을 내렸다.

정셴진, 외지에서 납치돼 무고한 8년 형 선고받다

2008년 5월 5일, 정셴진은 허난성 저우커우시로 물건을 팔러 갔다. 저우커우시 자베이(閘北)분국 경찰은 신분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납치했다.

이튿날 저녁 10시 50분, 경찰은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와 어떤 절차도 제시하지 않는 채 정셴진이 잠시 거주하는 샹청(項城)의 집(두 부부는 샹청에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임시 셋방임)을 미친 듯이 조사해 몰수를 진행했다. 정셴진의 큰딸은 “당신들은 한밤중에 민가에 들이닥쳤는데 누굽니까? 무슨 이유로 우리 집을 수색하죠?”라고 물었다. 몇 명의 경찰은 업무증을 보여줬는데, 그중 두 사람은 저우커우시 공안국 사람이었다. 경찰은 노발대발했는데 경찰 더우밍커(竇明科)는 주먹으로 저우셴진의 두 딸과 아들의 얼굴을 구타했다. 세 오누이는 한 사람씩 뺨을 구타당해 멍이 시퍼렇게 들고 부어올랐다.

경찰은 또 2층과 3층의 기타 주택에 뛰어들어 광적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2층의 문은 두 개나 짓밟혀 망가졌다. 정셴진의 집안의 모든 생활용품은 부엌살림과 잠을 자는 침대를 제외하고는 전부 깡그리 강탈당했다. 경찰은 또 “만약 방법이 있다면 땅을 석 자 파야 한다.(역주: 소위 ‘증거’를 찾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뜻)”라고 큰소리쳤다.

정셴진은 그 후 화이양현 ‘610’과 국가보안대대 경찰에 의해 저우커우시로 돌아가 현 구치소에 불법으로 감금된 지 6개월이 된다. 결국, 현 법원에 의해 8년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08년 10월 23일에 허난 신미(新密) 감옥으로 납치됐다.

두 부부는 거듭 무고한 5년 형을 선고받고, 정셴진은 박해로 사망

2016년 7월, 정셴진과 아내 왕하오메이는 다섯 번째로 납치돼 두 사람은 모두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각각 허난 신미 감옥, 신샹(新鄉) 여자 감옥으로 납치돼 박해를 당했다.

허난 신미 감옥에서 정셴진은 박해를 당해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어 위장 호스를 꽂고 유동식 주입을 당했다. 그리고 기관이 잘린 후 후두암에 걸렸다. 맨 마지막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는 절차를 밟고 출소했다. 아들딸은 그를 정저우성 의학원 병원으로 보내 검사를 받게 했다. 그리고 또 정저우성 대학1 부속병원으로 옮겼는데, 일주일 동안의 관찰과 각종 검사를 거쳐 아이의 3만여 위안(한화 약 500만 원)의 저축을 쓴 후에야 의사는 돌아와 부수 치료를 받게 했다.

이때 정셴진의 아내 왕하오메이는 또 신샹 여자 감옥에 불법으로 감금당했다. 딸은 이미 결혼했고 아이가 어린 이유로, 장기간 아버지를 돌볼 수 없었다. 정셴진은 집안에서 보살펴 줄 사람이 없었고, 2019년 8월 11일 억울하게 사망했는데 당시 57세였다.

원문발표: 2019년 10월 1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0/11/3944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