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9년의 억울한 징역형 선고받은 스자좡 자오메이산, 퇴직금 박탈당해

[밍후이왕](밍후이왕 통신원 허베이 보도) 스자좡(石家莊)시 파이프 주조 공장(전 스자좡 냄비 주조 공장) 직원 자오메이산(焦梅山)은, 1995년 고공 작업에서 조심하지 않아 심각한 부상을 입어 요추 4개가 골절됐는데, 수술 치료를 받아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1996년 인연이 있어 파룬궁을 수련한 후 2개월 만에 다시 일어섰다. 그는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해 사회, 근무 기관과 가정을 막론하고 모두 공인하는 도덕이 고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부터 자오메이산은 새 생명을 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당 사람들에 의해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왔으며, 2006년 3월 납치돼 9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퇴직금을 박탈당했다. 올해 이미 68세인 그는 여태껏 어떠한 생활 자금도 없었다.

다음은 그가 겪은 박해에 대한 자오메이산의 진술이다.

2000년 2월 4일, 나는 외부에서 공개적으로 단체 연공할 때, 스자좡시 공안국 경찰서에 의해 학교와 같은 장소로 납치됐다가, 뒤이어 2일 동안 스자좡시 창안(長安)구 베이다(北大)가 파출소로 납치됐다. 그 후 또 가오청(藁城) 유치장에서 불법 감금됐다. 2000년 2월 14일, 젠다(建大) 파출소에서는 나를 가오청 유치장에서 파출소로 끌고 돌아가서 불법 심문을 진행했다. 매일 낮에 심문을 받았는데, 재판을 받는 동안 나에게 누가 이번 단체 연공의 주최자인지를 강요했고, 저녁에는 나를 영창실에 가뒀다.

첫날 밤, 젠서(建設) 베이다가 파출소 경찰 궈위취안(郭玉泉)은 두 손으로 나를 채웠는데, 한 손으로 한쪽 수갑을 채웠다. 그런 다음 내 두 손을 힘껏 높은 곳에 매달았다. 맨 마지막에 나에게 전체 몸이 땅에서 떨어져 공중에 매달려 있게 했는데, 단지 두 발끝만 땅에 닿게 해 꼬박 하룻밤을 매달았다.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나를 내려놓았다. 내 두 손목은 수갑에 조여 깊은 자국이 생겨나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1개월이 지난 후 손목의 자국은 그제야 차츰 줄어들었다.

이튿날 저녁, 젠서 베이다가 파출소 경찰 류훙쥔(察劉紅軍), 웨훙(岳紅, 여, 당시 약 30여 세)은 내 코트를 벗겨 나를 마당 안의 이중 기둥 위에 매달았다. 1년 중 가장 추운 날에 나를 하루 저녁 추위에 떨게 했다. 셋째 날 밤, 또 내 두 손을 이층 침대의 위층 침대 끝에 매달아 놓고, 보조 경찰에게 감시를 진행하게 해 내가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 번째 밤, 나를 가오청 유치장으로 돌려보내, 2000년 2월 22일에야 풀어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2006년 3월 초, 스자좡시 국가보안 경찰은 추적, 미행 및 기타 수단을 써 파룬궁수련생 안원치(安文琪, 지금 이미 사망했음)를 납치했다. 2006년 3월 3일 오후, 스자좡시 국가보안 대대 대대장 덩팡(鄧方)은 한 무리 국가보안 경찰을 거느리고, 강제로 안원치를 그의 고향 스리푸(十里鋪)의 거처로 압송해 가서 수사를 진행했다. 나는 당시 이곳에서 진상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뒤이어 나는 롄멍로(聯盟路) 스강다제(石崗大街) 파출소로 납치됐다. 납치 인원은 덩팡, 톈링쥔(田靈軍), 왕즈강(王志剛), 궈스셴(郭士賢), 디스펑(翟石峰) 등이다.

방금 납치됐을 때,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줄곧 나에게 이름을 물었다. 나는 그들과 협력하지 않고 진상을 알렸다. 당시 나는 마침 사당에 의해 인터넷에서 지명 수배를 받았다. 이튿날 오후 그들은 인터넷에서 내 신분을 검색해 냈다. 국가보안 부국장인 리(李, 이름은 잊었음)모 씨는 직접 나서서 나를 찾아 다음 날 아침 4시까지 ‘대화’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어찌할 방도가 없자 “나는 결코 당신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나는 리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알고 그들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알았다.

셋째 날 오전, 덩팡은 불법적으로 나를 심문했다. 그는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면 당신을 풀어 돌려보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위해 뭘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덩팡은 “소리를 녹음하고 영상녹화를 마치면 당신은 떠나세요. 그러면 당신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즉,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라고 하면 그것을 말하고,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 그걸 하면 됩니다. 이해했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처럼 그렇게 말입니까? 나는 절대 당신들을 협력해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지옥에 가겠습니까.” 덩팡은 말했다. “나도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협력해 일을 마치면 당신을 풀어주겠습니다. 만약 협력하지 않으면 고통을 주겠습니다.” 그런 다음 곧 나를 스자좡시 제2구치소에 불법 감금했다. 구치소에서는 내 성명이 무명씨인 것을 보고 수감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은 또 새롭게 표를 만들어 날 구치소에 불법 감금했다.

2007년 7월, 스자좡시 신화(新華)구 검찰관 뤄완췬(羅萬群)은 검찰관으로서 스자좡시 신화구에서 불법적으로 나에게 9년 형을 선고했다. 재판장은 장타오(張濤)이고 판사는 마정제(馬征傑)이며, 배심원은 자오원빈(趙文斌)이고 서기원은 류차오(劉超)이다.

그 후, 나는 스자좡시 중급인민법원에 항소했고 스자좡시 중급인민 법원은 불법적인 원판결을 유지했다. 재판장은 뤼링(呂玲)이고 판사는 왕잉천(王英辰), 페이웨이화(裴衛華)이고, 서기원은 왕팅(王婷)이다.

2014년 초, 감옥에서는 나에게 1년 형을 줄여줄 것을 제안했다. 스자좡 창안(長安)구 ‘610’ 직원과 창안구 젠베이 사무소 종합관리사무실(‘610’) 과장 리융빈(李永斌) 등 3명은 감옥으로 와서 나에 대해 “당신은 연마(파룬궁을 가리킴)할 것입니까, 아니면 연마하지 않을 것입니까? 연마한다면 우리는 떠나고, 연마하지 않으면 곧 함께 갑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대법 수련을 견지하겠다고 하자, 그들은 내 조기 석방을 취소했다. 2015년 3월에 불법 형기가 만기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감옥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올해 68세이고 직장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38년을 근무했다. 2015년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이미 60세가 넘었다. 나 개인과 직장에서는 이전에 이미 내가 60세 이전에 마땅히 납부해야 할 양로금 보험 액수를 스자좡시 사회보험국에 납부했고, 직장에서는 또한 이미 내 퇴직 절차를 마쳤다. 스자좡시 사회보험국에서는 매달 나에게 양로금을 지급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스자장시 사회보험국 모처 류(劉) 처장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 것 때문에 양로금을 지급해 주지 않았고 절차를 밟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또 내가 납부한 양로금 보험금을 되돌려주겠다는 등을 말했다. 내가 여러 차례 류 씨를 찾아 진상을 알렸으나 그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불손한 말을 했다.

이 때문에 내가 2015년 3월 3일에 집으로 돌아가서 여태껏 어떠한 생활자금도 없게 하여 나에 대해 경제 박해를 진행했다.

(역주: 박해자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9년 9월 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9/3/392244.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