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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삐 뛰어다니며 날 구출한 교장

글/중국 대법제자 후이롄(慧蓮)

[밍후이왕] 1999년 12월 25일, 남편이 베이징에 파룬궁의 진실을 말하러 갔다가 납치됐다. 내가 아침에 출근했을 때 경찰은 속임수로 나를 파출소로 데려가 불법적으로 31일 구류시켰다.

동북의 겨울은 매우 추운데 그해는 더 추웠다. B 교장은 촌 교장을 데리고 지린성에서 급히 온 오빠와 남동생과 함께 날 데리러 유치장에 왔다. 원래 보름 구류하기로 했는데 이후에 15일을 더 연장해 그들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거울처럼 미끄러운 빙판길을 500여 킬로미터나 달려왔는데, 그 어려움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구류 만기일이 되자 그들은 다시 유치장에 와서 날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거의 11시에 난 석방됐다.

차를 몰고 현지 한 음식점에 도착하자 오빠와 남동생은 B 교장과 촌 교장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 한 달 동안을 바쁘게 뛰어다니며 그들은 고생했다. 음식을 먹을 때 B 교장은 큰 새우 하나를 껍데기 벗겨 두 손으로 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둘째 누나, 동생이 누나에게 새우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28살에 교장을 맡고 5년이 지났지만, 여태껏 이번처럼 개처럼 쫓겨 오고 쫓겨 간 적이 없습니다. 동생의 눈을 보세요.” 말하면서 안경을 벗었는데 33살의 사나이가 눈물을 흘렸다.

오빠가 지난 한 달간 B 교장이 겪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교육국을 다니면서 얼마나 좋은 말을 했는지 모르고 큰 압력을 이겨내고 내 공직을 확보했다. 또 노고를 무릅쓰고 몇 번이나 유치장에 나를 보러 왔는데 경찰에게 개처럼 쫓겨나고 쫓겨 갔다. 30일 기한이 됐는데도 사람을 석방하지 않고 내일이 만기라고 미루었다. 31일째 되는 날, 그들은 일찍이 날 데리러 왔다. 10시까지 기다렸는데 사람을 석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B 교장은 점점 화가 나 자기 신분을 생각하지 않고 욕을 퍼부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내 이름)이 누굽니까?” “○○는! 내 둘째 누나입니다!” B 교장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부러 ‘누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집에서 둘째임) 경찰은 즉시 상급에 보고했다. 그런데 그 상급은 설날 준비를 하느라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구류되면서 B 교장과 촌 교장도 연루되어 그들은 연말 상금도 받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난 후 내가 ‘9평 공산당’을 배포하다 다른 사람의 모함을 받았을 때, 시 610 왕 씨 책임자는 나에게 3년 형을 받게 하겠다며 내 이름을 찍어 (감옥에)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또 파출소에 납치됐다. B 교장은 전화를 걸어 파출소에 있는 그의 동창에게 말했다. “얼른 사람을 구해줘.” 당시 상황을 나는 전혀 몰랐다. B 교장은 내 앞에서 이런 일을 전혀 말하지 않아 몇 년 후에야 나는 그 이야기를 알게 됐다.

99년 이 교장은 중국공산당의 하늘의 뒤덮을 듯한 광적인 탄압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가슴을 펴고 내 앞에 서서 비바람을 막아주었다. 나는 감동했다. 중화민족의 역사의 길고 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런 사나이가 이 민족을 위해 정의의 벽을 쌓았는가? 정말 천지를 감동하게 하고 귀신도 울렸다.

비바람 속에서 나를 지켜준 교장

학교를 합병한 후 여러 문제 때문에 촌 학교 1학년 담임교사를 맡을 사람이 없었다. 학교 합병에 의견이 많았던 촌 학부모들은 이 기회에 교육국에 청원하러 갔다. 번거로운 일이 신임 교장에게 떨어졌다. 전임 교장이 내가 최적의 인물이라고 추천해 신임 A 교장은 날 찾아왔다. 전임 교장은 진상을 듣고 나를 잘 알았으며 여러 번 전력을 다해 악당의 박해를 저지해주었다. 전임 교장은 다른 동료에게 “○○선생님(나를 가리킴)은 아주 선량하고 정직하다.”라고 말했다.

그날 날 찾아와 얘기 나눌 때 A 교장의 어투는 간절했다. 그의 안경 너머로 나는 그 조급하고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았다. 마치 나만이 그를 도와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즉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사례가 생각났다. “이 직원들이 당신들의 法輪大法(파룬따파)를 배운 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면서 상사가 무슨 일을 맡기든지 가린 적이 없고, 이익 앞에서도 다투지 않습니다.” 나는 평온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A 교장은 내 말을 듣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것처럼 연속 말했다. “감사합니다. 누님! 감사합니다!”

초등학교 교사를 맡았던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1학년 처음 한 달이 가장 힘들다. 게다가 나는 퇴직할 나이가 다 되어 관례대로 하면 한가한 일을 하거나 여러 구실로 휴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즐겁게 받아들였다. 대법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각 방면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담임교사를 맡은 후 A 교장은 매번 차를 타고 편벽한 촌 학교에 와서 교실에 들어와 나를 보고 친절하게 말했다. “절대 너무 힘들게 하지 마세요. 힘들면 쉬세요. 몸조심하세요.” 나는 대법을 수련한 후 건강한 신체가 있게 됐다. 수련하기 전에 나는 심장병, 뇌 신경병, 치질, 유방종양, 추간판 탈출증, 눈이 마르고 혀가 마르는 등 각종 질병이 있었다.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일을 전혀 맡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늘까지 살아있을지도 미지수다.

임시 담임교사 업무를 일단락 짓고 유치원에 가게 됐는데 유치원은 표준 등급을 받으려고 재건축해 새로 어린이를 모집하는 곳이어서 원래 업무량보다 몇 배나 많았다. 어떤 교사는 내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하며 병가를 내라고 권했고 잇따라 날 대신해 불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즐겁게 직책을 다 했다. 그들은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속인 중의 모범 인물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신 것을 어찌 알겠는가? 서류 검사 기간에 원장은 힘들어 두 번이나 쓰러졌고 몇 번이나 울었다. A 교장은 여러 번 와서 친절하게 말했다. “힘들면 쉬세요. 등급에 오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이후에 검사를 받을 때 상사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는 것을 보고 나에게 칭찬하는 눈빛을 보내면서 동료에게 말했다. “우리는 4~5명인데도 힘들다고 하는데 저 사람을 보세요.”

평가 결과 우리 유치원은 표준 등급에 도달했다. 내가 퇴직할 때 원장은 여러 번 말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이 유치원도 없었을 겁니다. 다시는 이렇게 잘 협조해주시는 분을 만나지 못할 겁니다.” 원장은 헤어질 때 눈물 흘리며 날 껴안았다.

2017년 4월 24일 오전 7시 30분경, 그날은 월요일이었는데 온종일 비가 내렸다. 우리가 반에서 어린이를 유치원으로 데려오려 할 때 A 교장이 마르고 키 큰 중년 남성을 데리고 왔다. 그는 아무런 증거서류도 내밀지 않고 나에게 기어이 파출소에 한 번 가서 한 가지 일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여러 번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1999년 12월 25일, 그들은 이런 속임수로 날 찾아와 결국 31일 불법 구류했음) 10여 분 대치하다 A 교장이 말했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가겠는데 한 가지 요구가 있습니다. 갔으면 꼭 데려다주셔야 합니다.” 그 사복경찰은 알았다고 했다.

파출소에 도착한 후 소장의 욕 하는 소리 속에서 그들은 강제로 나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워 ‘호랑이 의자(老虎凳: 고문용 의자)’에 앉혔다. 잡아당기면서 내 새끼손가락이 수갑에 끼여 피가 났다. 소위 ‘원인’은 남편이 친구와 함께 베이징에 일을 보러 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남편 핸드폰 통화를 도청한 후 요란하게 소위 ‘파룬궁 청원을 포위 체포한다’라며 이런 웃음거리를 벌인 것이다.

A 교장은 파출소장이 폭력을 사용하는 전 과정을 목격했다. 내가 불법적으로 6시간 구금된 기간에 그는 줄곧 파출소에서 날 지켰다. 오후 1시 30분, 파출소에서 차로 나와 A 교장을 태우고 학교로 돌아왔고 그는 돌아왔으니 됐다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근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한 나약한 여성이 무고한 박해를 감당한 것을 확실하게 보았다. 그의 앞에서도 그랬는데 사람이 없을 때는 더 잔혹하고 더 몸서리치게 했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지났기에 그는 전화로 식당 책임자에게 나에게 뜨거운 밥을 해주라고 알려주고 비용은 자신이 내겠다고 말했다. 그날 그는 음식을 아주 적게 먹었다. 그는 날 위로하기 위해 억지로 몇 숟가락을 넘긴 것임을 나는 안다. 내가 그렇게 큰 억울한 상처를 받은 것 때문에 그는 가슴 아파했고 자책했으며 속으로 괴로워했다. 평소 내 식사량은 아주 적었지만, 일부러 많이 먹어 그를 시름 놓게 했다. 정말이지 나는 그가 비바람에서 나와 함께 해준 것을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그 특수한 시기에 그는 진심으로 날 지켰고 내가 안전하게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해 8월 나는 정식으로 퇴직했다. 그는 날 사무실에 불러 합장하면서 말했다. “○○선생님, 공덕 원만입니다!” 내가 재차 그에게 감사드릴 때 그는 평온하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이 위치에 있으면 선생님도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가기 전에 나는 기념으로 보서 ‘전법륜(轉法輪)’을 그에게 주었고 그는 기뻐하며 받았다.

이후 나는 그 국장에게 선행을 권하는 편지를 써서 직접 파출소에 갖다 주었다. 한 누나가 남동생을 관심하는 어투로 썼다. 수련에는 적이 없으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피해자다.

그들은 선(善)과 정의의 힘으로 이번 박해를 저지했다

중국공산당이 새빨간 거짓말로 세인을 속이고 사람들에게 파룬궁 수련자를 증오하게 했지만, 거짓말은 하나하나씩 폭로됐다. 각성한 세인은 그들의 선과 정의의 힘으로 이번 박해를 저지했다.

내가 파출소에 납치됐을 때 젊은 경찰이 나를 불러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 나는 배고프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갑시다. 갑시다. 밥 먹으러 갑시다.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밥 먹을 때 나에게 많이 먹으라면서 친절하게 말했다. “배불리 드셔야 합니다!” 다른 한 젊은 경찰은 그의 핸드폰을 주면서 교장에게 잘 있다는 전화를 걸라고 했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이 대법제자를 신고했을 때 그 경찰은 전화에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출동할 시간이 없습니다.” 경찰과 얘기를 나눌 때 그는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대하는 것이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들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 경찰이 대법제자의 집을 방문할 때는 오후 3시 이후에 간다. 그들은 문에 들어설 때 “여러분 다 배우셨나요? (법공부 팀이 3시에 끝남)”이라고 말한다.

특수한 상황에 부딪히면 부진장(副鎭長)이 전화를 걸어 집에 물건을 치우라고 알려준다. 동료들은 나에게 위험이 있을 때면 얼른 도와서 물건을 치워줬다.

대법제자가 선량한 종자를 전파했고 이런 선량한 종자가 우리 옆에서 조용히 꽃피고 있다. 한 떨기, 백 떨기, 천만 떨기가 불광(佛光)이 널리 비추는 곳에서 서로 앞다투어 피고 있다.

원문발표: 2019년 7월 1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발표: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7/12/3898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