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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예계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받은 총론

[밍후이왕] (밍후이 통신원 중국 종합보도) 밍후이왕 자료 통계에 따르면 1999년 7월 중국공산당과 장쩌민 범죄 집단 및 610 특무조직이 파룬궁을 20년 박해한 기간 중국 문예계 파룬궁 수련생이 적어도 아홉 명이 박해로 인해 사망하였으며, 적어도 75명이 납치되었다. 그중 불법적으로 징역형을 판결받았거나 노동교화를 받은 사람이 50명이 되고 기타 납치된 사람은 25명이다.

파룬궁(法輪功)은 파룬따파(法輪大法)라고도 하고 파룬불법(法輪佛法)이라고도 한다. 1992년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대사님이 중국 창춘시에서 전했고, ‘진선인(眞善忍)’ 수련을 종지(宗旨)로 하는 불가(佛家) 공법이다. 출가(전수 제자 제외)하지 않아도 되기에 속인 사회에서 수련하기 적합하다. 공법은 간단하고 배우기 쉬우며 통속적이고 알아듣기 쉽다. 특히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다. 파룬궁은 이미 전 세계에 널리 전해졌다.

파룬궁 수련생은 국적, 민족, 피부색을 가리지 않으며 직위가 높고 명성과 위세가 대단한 사람이든, 고위 관리자, 기업주나 젊고 재능이 넘치는 대학생이든 일반 서민이든 사회 각 계층, 각 분야 사람들이 모두 자기 계층에서 수련할 수 있다. 일상생활과 직장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 수련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며, 모순에 부딪혔을 때 자신에게서 찾으며 끊임없이 심성을 향상해 초범(超常)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파룬궁 수련생 대부분은 사회 각 분야의 엘리트이며, 그 중 문예계 스타, 서예가, 화가 등 사회 유명 인사도 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정권을 빼앗은 이래, 이렇게 줄곧 사회 주류인사를 소멸시키고 전통문화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선량한 문예계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박해는 특히 잔혹했다.

목록

1. 박해받아 사망한 주요 사례

2. 실종사례

3. 불법적인 징역형 선고나 노동 교양 박해를 당한 주요 사례

4. 납치되어 박해받은 주요 사례

1. 박해받아 사망한 주요 사례

1) 가수가 학살되다

당시 42세의 파룬궁 수련인 쉬저우(於宙)는 중국공산당 경찰에게 ‘올림픽 맞이하다’를 구실로 베이징에서 학살되었다. 이것은 그가 베이징 콘서트에서 집으로 귀가하던 중 불법적으로 붙잡힌 지 11일 만의 일이다.


위저우
(於宙

위저우의 고향은 길림성으로, 그 당시 문과 수석으로 베이징대학 프랑스어과에 입학하여 여러 가지 언어에 능통했고, 다재다능하여 자타가 공인한 인재였다. 1995년 위저우는 친구를 통해 파룬따파를 알게 되어 인생의 참뜻을 찾았고 부부 두 사람은 대법 수련의 길로 들어섰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이 파룬궁 박해를 발동했고, 위저우 부부는 줄곧 이유 없이 박해를 당했다. 1999년 8월 위저우 부부는 불법적으로 15일 구류되었다. 그들은 고문을 받았지만 한 명의 수련생도 팔지 않았다.

2008년 중국공산당은 올림픽을 명분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불법적으로 잡아들였다. 2008년 1월 26일 위저우는 공연이 끝난 후 차를 몰고 아내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함께 불법적으로 구류된 후 퉁저우 구치소로 보내졌다. 2월 6일 가족이 통지를 받고 베이징 칭허 응급센터에 갔을 때 파룬궁을 수련하여 몸이 건강하던 위저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직 호흡 마스크를 착용한 채 다리는 이미 차갑디차가웠다.

그 후 베이징 경찰은 치밀하게 소식을 봉쇄했고, 그의 친족이 외부에서 소식을 누설하지 못하게 하려고 양측 부모의 집을 모두 암암리에 포위하여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한창 장년(壯年)인 위저우는 이렇게 사랑하는 것들을 떠났고 그들에게 끝없는 그리움과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 찬 노래를 남겼다.

2) 저명한 화가 정아이신(鄭艾欣) 노동교화소에서 세뇌 박해를 당해 세상을 떠나다

광둥성 주하이(珠海)시 파룬궁 수련생, 저명한 화가 정아이신(鄭艾欣) 여성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고 소위 ‘전향’을 거부하여 노동교화소에서 세뇌반으로 이감되고 세뇌반에서 다시 노동교화소로 이감되었다. 4년 가까이 계속 세뇌 박해를 당하며 갇혔다가 그 후 장기간 중국공산당 특무가 따라다녔고, 24시간 전화 감시를 하여 심신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정신이 극도 억압받아 2012년 9월 1일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01년 3월 5일에서 19일로 화가 정아이신은 불법적으로 더우먼구 ‘610’ 세뇌반에 갇혀 2주 동안 박해당했고, 그 후 1년간 불법적인 노동교화를 당해 광둥성 싼수이 여자노동교화소에 보내졌다. 노동교화 기간 그녀는 줄곧 자신의 신앙 권리를 견지했고 소위 ‘전향’을 거절했다. 2002년 4월 노동교화 기간을 다 채웠지만 ‘전향’하지 않자 더우먼구 ‘610’은 아이신을 데려가 더우먼구 ‘610’에 가두어 ‘전향’ 세뇌 박해를 계속했다. 불법적으로 3개월 초과하여 가둔 기간 아이신은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고 연공을 견지했다. 2002년 7월 24일 공안 기관은 세뇌반에서 감옥 경찰에게 불복하고 경문 및 파룬궁 표어 제작을 은닉했다는 등으로 아이신을 재차 형사 구류하여 2년의 불법적인 노동교화로 7월 29일 아이신에게 족쇄와 쇠고랑을 채워 재차 광둥성 싼수이 여자노동교화소에 보내 박해했다.

노동교양소에서 아이신은 현지에서 영향이 매우 크며, 그녀의 남편은 또 유명인이었고 그녀가 확고하게 수련했기 때문에 강제로 격리했다. 많은 파룬궁 수련생과 함께 있긴 했지만 24시간 지키는 사람이 있었고, 그녀는 여러 사람과 함께 목욕을 포함한 단체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경찰은 또 하이힐로 머리를 때렸으며, 독방(검은 방)에 감금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아이신의 남편 리정톈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지만, 아내 수련을 이해하고 존중했다. 2003년 이 씨는 일본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의 중국관에서 창의적인 설계로 뛰어난 여러 사람을 물리치고 낙찰되었다. 2004년 그는 기자 회견에서,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아내가 돌아와서 돌봐주어야 한다고 언급하며, 그의 아내는 좋은 사람으로 다만 파룬궁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 이유로 중국공산당이 그녀를 노동교화소에 가뒀다고 말했다. 2004년 4월경 아이신은 노동교화소에서 집으로 앞당겨 보내졌다. 집에 돌아온 후 그녀는 정신적인 압박으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온 후 아이신은 엄밀한 감시 통제를 받아 마음대로 먼 길을 나갈 수 없었고 전화는 24시간 도청되었다. 한번은 그녀가 주하이로 돌아가려고 트렁크를 끌고 화실 문을 막 나서는데 그녀를 가로막고 가지 못하게 했다. 중국공산당 610 무뢰한은 그녀 남편에게도 ‘할 수 없는 세 가지’ 금지령을 내렸다. 텔레비전, 신문에 나타나지 못하게 했고 출국하지 못하게 했다. 불법적인 감시와 제어로 그녀와 그녀 남편은 매우 속박당했다.

그녀 남편은 화가이고 음악가, 예술가, 철학가였기에 그녀 남편 화실에 드나드는 세계 각지, 전국 각지 미술계, 연예계, 언론계 등 분야의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또 그녀는 선량하고 아름답고 재능이 뛰어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경력이 매우 전기(傳奇)적이라고 여겼기에 모두 그녀를 방문했다. 이런 엄혹한 환경에서 그녀는 이 플랫폼을 이용하여 오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 밖에 사람들은 그림전시회에 초청이 되어 그녀는 그림전시회에 가서 대법 진상 자료를 내줬다.

2005년 3월에서 2008년 10월 말까지 그녀 어머니는 연속 두 번 납치되어 불법적으로 노동교화소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 근심과 환경의 압력으로 그녀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매우 커서 2009년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2011년 광저우에서 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납치되었고, 그녀는 무형의 압력을 더 크게 받아 2012년 결국 몸에 여러 가지 질병 상태가 나타나 45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 베이징 기타 연주자 이자 가수 리징성 박해당해 세상을 떠나다


연주하고 있는 리징성(李京生)과 아내 

리징성(李京生)은 기타 연주자이자 가수다. 어릴 때 선천성 심장병을 앓아 병원에서 ‘사형’ 판정을 받은 적이 있다. 1998년 5월 리징성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새 생명을 얻었다. 그는 아내 완위와 협력해서 공연하여 예술 사업이 점입가경(漸入佳境)에 이르렀다. 2001년 6월 25일 리징성은 천안문 광장에서 가부좌 연공을 하고 “파룬따파는 정법이며, 우리에게 합법적인 연공 환경을 돌려달라.”고 높이 외쳤다. 경찰은 그의 가슴을 잔인하게 발길질하여 상처를 입혔고, 게다가 납치해 불법적으로 노동교화를 시켰다. 9월 21일 퇀허 노동교화소 5대대에 납치되어 간 후 다시 1대대(일반교양 대대)로 이전되었다.

퇀허 노동교화소에서 리징성은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고, 여러 번 납치되어 훈련팀에 의해 학대를 가중하여 구타당함, 앉기 고문, 잠을 못 자게 하고, 배 불리 먹지 못하게 하여 예전보다 지금의 신체는 안팎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그리고 10개월을 연장하였다. 노동교화소에서 돌아온 후, 리징성은 극도로 허약하고 반응이 둔해져 2004년 12월 13일에 불행히도 40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내 완위는 당시 베이징 하이뎬구에 살았다. 2005년 9월 28일 저녁 안위는 잠시 수련생 집에 머물러 있다 납치되어 불법적으로 하이뎬구 칭허 구치소에 갇혀 박해당했다. 후에 완위는 불법적인 2년 노동교화에 처해 파견처 9대대에 갇혔다. 그 후 완위 등 수련생은 베이징 파견처로부터 비밀리에 허베이성 가오양 노동교화소에 보내져 박해당했다.

4) 만화가 장즈취안 억울하게 박해당해 세상을 떠나다

허베이성 헝수이사범학교 강사이며 만화가 장즈취안(張之泉)은 중앙미술대학을 졸업했고 문화대혁명 때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퇴직한 후 파룬궁을 배워 심신의 혜택을 받았다. 2001년 3월 19일 저녁 헝수이 선저우시 경찰 자쐉완(賈雙萬), 상윈항(尚運航)은 고향 선저우시 시양타이촌에서 장즈취안을 납치한 후 그에게 불법적으로 중형 7년의 형을 선고, 허베이성 제4감옥에서 박해당했다. 불법적으로 갇히기 전 4년 동안 그의 신체는 대단히 건강했으며, 감옥 의사는 70이 넘는 그의 심장이 40살 젊은이의 건강 형상이 나타났다며 놀라워하며 감탄했다.

그 후 감옥 경찰은 명예와 이익을 위해 잇따라 두 불량배(형사 죄수)를 이용하여 그의 사람 몸에 심한 손상을 주었다. 마음대로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고 침대(철 침대)를 두드리고 이불을 걷어 올리고 잠을 자지 못하게 했으며, 자백을 강요하고, 심문하고, 체벌하고, 놀라게 하는 등 심지어 교만이 극에 달하여 “내가 감옥에서 누구를 죽이고자 하면 그는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떠벌렸고, 장즈취안이 감옥에서 죽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장즈취안
(張之泉

잔혹한 손상을 주어 장즈취안의 신체는 철저하게 망가져 원래 70~75㎏이던 그가 30~35㎏밖에 되지 않았으며, 완전히 뼈만 남았다. 가족의 강렬한 요구로 2007년 3월 감옥에서(병보석) 들려져 나왔다. 가족이 그를 데리러 갔을 때 장즈취안은 이미 혼수상태였고, 감옥에서 들것에 실려 나와 아들마저 알아보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후 장즈취안은 끊임없이 현지 ‘610’, 공안 국내안정보위국의 교란을 당했고 퇴직 연금도 지급받지 못했다. 각 방면의 압력 아래에 신체와 정신은 계속 회복되지 않아 그는 2010년 5월 1일 향년 76세 나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5) 가족들이 서명을 거부하자 경찰은 강제로 화장했다


정원친
(鄭文芹

정원친(여, 42세)은 헤이룽장성 다칭시 자오위안현 문공단 회계이다. 집은 자우위나진에 살았다. 정원친은 파룬궁을 수련한 이유로 본 현 공안 기관에 소환되어 협박하고, 세뇌반에 보내고, 불법적으로 노동교화를 당했다.

2002년 5월 11일 정원친과 파룬궁 수련생 펑진보(馮金波)는 다칭에서 경찰에게 납치되었고, 사얼투구 공안 분국에 이르러 3일 동안 걸어놓기(上大掛: 두 손을 침대에 매달아 발은 겨우 땅에 닿게 사람을 달아매는 것) 등의 고문을 받고 자백을 강요당했다. 자우위안현 공안국 정치 보위 대대는 현지 유치장에 그를 불법적으로 잡아 가두고 나흘 후 자오위안현 구치소로 되돌아왔다. 정원친은 시종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 자오위안현 구치소는 불법으로 삼 일을 가둔 후 5월 22일 폭력에 따른 음식을 부어 넣는 사태를 일으켜 사망했다.

가족들은 정 씨 시체 여러 곳이 빨갛게 붓고 멍든 것을 보았고, 법의가 해부한 결과 소위 산소 부족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가족이 죽은 사람의 몸 여러 곳에 멍이 든 것은 분명히 고문 박해한 것이라고 질문했을 때 자오위안 현 구치소는 그들은 정원친을 때리지 않았다며 다칭 사얼투 공안 분국에서 때린 것이라고 변명했다. 경찰은 가족들이 서명을 거부한 정황에서 강제로 정원친 시체를 화장했다.

2. 실종사례

1) 세계 서예 명인 리광웨이 실종되다

리광웨이 (남, 1935년 8월 출생)는 장시난창 쑹바이샹 초등학교 퇴직 교사로 국제 미술가 연합회, 세계 서예협회, 벨기에 세계문화교류센터, 중국 서예 예술 명인연구원 등 16곳에서 공동으로 ‘세계 서예 명인’이라는 영예 칭호로 심의하여 결정했다. 작품 및 소전이 ‘중국 현대 예술계 명인록’ 제5권 하권, ‘세계 현대 서예 전각가대사전’, ‘세계 현대 저명한 화가 진각 박람대전’ 등 여러 대 사전에 기재되었다.

'李光伟'
리광웨이(李光偉

1998년 말 리광웨이(李光偉)는 중병에 걸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여 곳곳을 다니며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 후 아내의 소개로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수련한 후 몸이 호전되어 스스로 연공과 법공부를 갈 수 있게 되었다.

99년 중국공산당은 미친 듯이 날뛰며 파룬궁을 박해했고, 불법 요원이 그의 집을 불법적으로 수색하여 문화대혁명 때 중상을 입었던 노인이 너무 놀라 지병이 도졌다. 그는 자신이 쓴 수련하여 혜택을 본 체험과 진상 편지를 진상을 모르는 사람과 본인의 화가 친구에게 보낸 이유로 감시를 당했고, 문을 나서면 미행하는 사람이 있었다. 2005년 7월 25일 그는 가족들에게 나가 좀 거닐겠다고 말했고, 이렇게 나간 사람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리광웨이는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눈물 흘리며 우는 아내와 자식들은 그를 곳곳으로 찾아다녔고, 현지 파출소에 사건을 신고하고 많은 공안 부서, 시장을 찾았지만, 그가 파룬궁을 수련한다고 거의 다 회피하며 접수하지 않았고, 사람을 찾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딸에게 “번거로운 일을 사서 하지 말라.”고 협박까지 했다.

3. 불법적인 징역형 선고나 노동교화 박해를 당한 주요 사례

1) 베이징 화가 친웨이 여러 차례의 불법적인 노동교화, 징역형 선고 박해를 당하다

2016년 5월 18일 베이징 화가 친웨이(秦尉)는 하이뎬 분국 수광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되었다. 2016년 12월 2일 친웨이는 불법적인 재판을 받고 억울하게 2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친웨이와 가족은 상소했지만, 베이징 제1중급 법원은 원심을 유지했다.

친웨이(남, 50여 세)은 중앙 공예미술대학 실내장식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는 정직하고 상냥하며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었다. 대법을 수련한 후 직장에서 명리를 따지지 않았고, 가정에서도 갈등을 잘 해결하여 동료 학생들과 친구들은 그와 사귀길 좋아했으며, 다들 친웨이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의 박해가 발생한 후 적어도 8번은 납치되었고, 두 번의 불법적인 노동교화과 두 차례의 징역형을 선고받는 박해를 당했다.


친웨이
(秦尉

2016년 5월 18일 친웨이는 ‘9평 공산당’을 사복을 입은 수광파출소 경찰 장훙즈(張紅志)에게 배포하여 납치된 후 불법적으로 체포되었다. 7월 11일 안건이 하이뎬 검찰원에 넘겨졌다. 9월 중순 안건은 하이뎬 검찰원에서 하이뎬 법원에 넘겨졌다.

2016년 12월 2일 오전 10시 넘어서부터 11시 20분까지 베이징 하이뎬 법원 산허우 법정은 불법적으로 파룬궁 수련생 친웨이를 법정에서 심문했다. 두 변호사가 이치와 근거에 맞는 무죄 변호를 했지만 친웨이는 후에 불법적으로 2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친웨이와 가족이 상소했지만, 강제로 원심을 유지했다.

2) 산둥성 저명한 서예가 류시퉁 불법적인 판결 및 잔혹한 박해를 당하다

류시퉁(劉錫銅)은 저명한 서예가이다. 1999년 이래 파룬따파 신앙으로 인하여 파룬궁을 공정하게 말한 이유로 직무를 무리하게 제명당하고 근 20여 차례에 걸쳐 불법적으로 현지 파출소, 구치소, 세뇌반에 갇혔고, 본원 농업기지에서 노동 교화를 당했다. 2003년에 이르러 불법적인 노동교화 3년, 2008년에 불법적인 4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기간 비인간적인 고문과 학대하는 박해를 당했다.

류시퉁은 1992년에 중국 서예가협회 회원에 가입했다. 웨이팡 국제 연날리기 대회, 산둥성 박물관, 칭다오시 박물관 등에서 여러 차례 개인 서예 예술 전시를 했다. 또한, 여러 가지 서체가 전국 서예 시리즈 전시 활동에 선정되었다. 이미 돌아가신 저명한 서예가이며, 원래 중국 서예가협회 회장 치궁(啟功), 전 중국 서예가협회 부회장 류빙썬(劉炳森), 전 중국 서예가협회 고문 왕샤쥐(王遐舉) 및 현대 20여 명의 명인 서예가는 잇따라 전시회에 표어와 축사를 써서 보냈다.

류시퉁이 한번 개인 서예 예술 전시를 마친 후 사흘 만에 줄곧 비밀리에 감시하던 ‘610’, 공안, 국가 안전기구는 갑작스럽게 불법적으로 집을 수색했다. 경찰 다섯 명이 그의 집을 구석구석 뒤져 소중히 보존했던 모든 대법 서적과 개인 물품 등을 빼앗아갔다. 류시퉁과 아내는 각기 무고하게 4년형,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류시퉁은 칭다오 다산 구치소에 불법적으로 10개월 갇힌 후 2008년 9월 10일 비밀리에 산둥성 감옥의 사형수구역인 11 감옥구역에 이송되어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08년 9월 10일에서 2009년 5월 22일까지 류시퉁은 지난 감옥 11 감옥구역에서 세 개의 엄격한 관리를 조직하여, 5명의 반장, 6~7번에 걸쳐 약 40여 명의 흉악범에 의해 박해를 당했으며, 흉악범은 감옥 경찰이 직접 지시하거나 매수한 것이다. 류시퉁은 80일 가까이 계속 밧줄에 묶인 채 박해당했고, 여러 차례 십여 일 동안 계속 잠을 자지 못하게 했으며, 흉악범이 50여 차례나 혼수상태가 되도록 때렸다.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이 오히려 장기간 흉악범에게 고문당하고 유린당했으며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상세한 정황은 ‘칭다오 서예가 류시퉁이 박해 원흉 장쩌민을 고소하다’를 보기 바란다.

3) 화가 류융 윈난성 푸얼시에서 불법적으로 4년 형을 선고받다

윈난성 푸얼시 멍리안현은 변두리 지역의 아름다운 작은 현이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2012년 12월 17일 이곳의 법원은 처음 불법적으로 법정을 열어 윈난의 파룬궁 수련생 우수한 화가 류융을 재판했다. 법정에 온 사람들은 정직하고 올곧은 류융을 보고, 변호사의 이치 있고 근거 있는 무죄 변호에 귀를 기울였다.

류융은 1972년 지린 창링에서 태어났고 동북 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했다. 1994년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한 후 류융은 이전에 신경쇠약, 심했던 불면증, 늘 감기에 걸리고 기침이 심했었던 증상이 치료하지 않고도 병이 완쾌되었다. 게다가 사람은 더욱 온화해지고 상냥해졌으며, 근면하고 성실해져 동료들과 상사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2001년 류융과 아내 류옌은 쿤밍으로 이사 갔다. 류옌은 윈난성의 뛰어난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잇따라 창춘시 우전대학(郵電學院), 지린대학, 윈난 사법대학 상업대학에서 근무했다.

2012년 9월 1일 류융이 멍리안현에서 채색화와 조각 공정을 할 때 벽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는 한 마디 진실한 말을 써 납치되었다. 멍리안현 공안국은 ‘사교조직을 조직하고 이용하여 나라 법률, 행정 법규를 파괴했다.’(중국공산당은 진정한 사교)라는 죄명으로 그를 불법적으로 멍리안현 구치소에 가두고 박해했다.

12월 17일 공산당 무리는 멍리안현 법원에서 불법적으로 류융을 재판했다. 이것이 이 변방 작은 현에서 처음 발생한 대법제자에 대한 불법적인 법정 심문이다. 당시 법원 재판부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모두 중국공산당 기구 조직의 공무원이 방청했다. 취지는 한 차례 ‘심각한’ ‘사례 교육’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방청 공무원이 생각지 못한 것은 그들 앞에 나타난 상서로운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정직하고 올곧은 파룬궁 수련자 류융이었다. 들은 것은 고품격의 높은 소양의 대학교수, 예술가는 이치와 근거에 맞는 진술을 했고, 베이징 변호사의 정당하고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무죄 변호였다.

류융은 변호 중에 말했다. “당신들은 내 집에서 제가 읽는 책을 수색해 갔습니다. ‘밍후이 주간지’와 대법 서적은 모두 제가 인터넷에서 본 것을 내려받았고, 또 누구도 해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죄증’이 되는 것입니까? 제가 거리에서 대법 진상 CD를 배포한 것은 돈을 사취한 것이 아니라 제 돈으로 만든 것입니다. CD는 사람과 사회에 해가 없습니다. 법정에서 방영해야 합니다. 내용에 근거하여 죄를 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용을 방영하지 않으면 판사님이 모르지 않습니까? CD 수량으로 ‘죄증’을 열거하는 것은 정말 황당합니다. 제가 벽에 ‘쩐싼런하오’를 쓴 것은 글자와 내용이 나라와 국민에게 다 건강한 것이고 나라와 국민을 해친 것이 없기에 죄가 없습니다. 제가 보낸 자료는 진상 자료 내용인데, 진실한 것인지 가짜인지는 읽어보시면 됩니다. 왜 읽어보지 않고 죄를 결정합니까?”

전체 불법적인 법정 심문은 오전 9시부터 점심 12시 30분까지 방청하는 사람들이 줄곧 정신을 집중하여 마지막까지 들었다. 재판장은 마지막에 법정 심문을 마쳤다고 선포하고 심사 결정 결과는 별도로 통지한다고 했다. 2012년 12월 3일 변호사가 윈난 파룬궁 수련생 류융을 위해 이치와 근거 있는 무죄 변호를 했지만 멍리안현 법원은 여전히 류융에게 불법적으로 4년 형을 선고했다.

4) 안후이성 우수 연주자 진위안 불법적으로 중형을 선고받다

진위안(50여 세) 안후이성 공연단에서 연주하는 배우이며, 전국 청년 얼 후 경연대회에서 준우승했었다. 1998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진선인’에 따라 심성을 수련하여 끊임없이 도덕성과 정신 경지를 향상했다. 그는 매우 높은 예술 소양과 다방면의 기량을 가진 것 외에 직장 환경에서든 사회에서든 가정에서든 모두 곳곳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생각을 했고, 고생을 기꺼이 달갑게 여겼으며, 책임감 있는 좋은 사람이었다. 중국공산당 박해가 발생한 후 적어도 2차례 납치, 한 차례의 불법적인 노동교화 3년, 한 차례의 불법적인 8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11월 10일 오전 8시 주하이시 공안국 샹저우분국 국내안정보위국 경찰 라이하이중, 처쉐찬 등의 사람은 또 불법적으로 진위안 집에 뛰어들어와 진위안을 납치하고 줄곧 오후까지 불법으로 수색하여 강제로 그가 호신부를 만든 설비, 컴퓨터, 프린터 및 다 만들어진 호신부와 미처 만들지 못한 호신부 심지어 개인 저금통장까지 강탈해갔다. 진위안은 재차 구치소에 갇혀 그에게 심각한 증상이 나타나 이틀 동안 완전히 혼미한 상태에 처했다.

2011년 4월 25일 주하이시 샹저우구 법원은 진위안에 대한 불법적인 재판을 진행했으며, 베테랑의 인권변호사가 법률의 공정함을 위해 법정에서 진위안의 무죄 변호를 했다. 그는 법률을 익숙하게 장악했고 엄격하고 뚜렷한 논리로 추리하여 법정에서 진위안에 대한 기소를 완전히 뒤집었고, 진위안이 무죄라는 것을 증명하고 마땅히 무죄로 석방되어야 한다고 변호를 했다. 검찰관과 법관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았고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1년 6월 24일 오전 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주하이시 샹저우구 법원은 진위안에게 불법적으로 8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진위안은 광둥 양장 감옥에 납치되어 계속 박해를 당했다. 양장 감옥에 간 후에도 진위안의 증상은 여전히 뚜렷했던 반면, 감옥에서는 그의 생명을 무시하고 온갖 수단으로 그를 ‘전향’시키려고 핍박하는 데 집중했다. 가족이 감옥에 면회와도 허락하지 않았다.

진위안의 가족은 재차 거대한 타격을 입고 고통을 당했다. 그의 아내는 무용가이다. 그의 연로한 어머니는 줄곧 중병에 걸려 한쪽 폐만 남아(한쪽 폐를 잘라냈음) 산소통으로 호흡을 유지했다. 가족은 노인이 아들 때문에 자극을 받지 않도록 줄곧 각종 구실로 아들이 사악한 공산당에게 납치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루 또 하루 결국 더는 속일 수 없게 되자, 박해의 검은 손은 이 갖은 고생을 겪은 노인을 극도의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어머니는 감당하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을 감당하면서 어머니의 진실한 사랑과 운명으로 항쟁했고, 굳세게 아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기대했다. 진위안의 아버지는 덕성과 명망이 높은 노인으로 지방 지도층 간부를 지낸 현지에서 이름 있는 청렴하고 공정한 관리였다. 아들이 ‘죄인’처럼 붙잡혀 징역형을 선고받아 그 내면의 고통은 압력을 받아 그의 등을 굽어지게 했다.

5) 광저우 청년 화가 부부 불법적인 징역형을 선고당하다

황광위(黃廣宇)는 1984년생으로 광둥 라오핑 태생이다. 2010년 광저우 미술대학 유화 과를 졸업했다. 중국 포스트모더니즘연구소 석·박사과정을 연속 대학원생으로 장기간 고전 유화(油畫) 기법과 정신을 연구하고 탐색했다.

허원팅(何文婷)은 1986년생이고 후난 다오현 태생이다. 14살에 융저우시 작가협회에 가입했고 시급 이상의 원고응모에서 상을 받고, 국가급 신문에 소설과 만화를 어느 정도 발표했다.


황광위
(黃廣宇)와 허원팅(何文婷

2013년 12월 19일 황광위, 허원팅 부부는 광저우대학 광둥 외국어 무역대학 캠퍼스에서 학생에게 공개적으로 중국에서 널리 환영받는 인터넷봉쇄 돌파 소프트웨어가 담긴 CD를 배포하다 납치되었다. 2014년 8월 모두 불법적으로 3년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13년 12월 19일 저녁, 파룬궁 수련생 황광위, 허원팅 부부는 광저우대학 외국어 무역대학의 강의실과 생활구역을 연결하는 터널에서 인터넷봉쇄돌파 소프트웨어가 담긴 시디를 배포하다 판위구 샤오구웨이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되었다. 납치에 가담한 경찰은 장위산(張玉珊), 정이룽(鄭翼榮), 량징뱌오(梁敬標), 왕신항(王身行 )이고, 배후 주모자는 샤오구웨이 파출소 소장 리페이린(李沛林)이다.

2014년 3월 허원팅이 판위 사완 구치소 안에서 쓴 일기가 전전하다 흘러나와 구치소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위가 전 세계에 폭로되었다. 허원팅의 긴 머리를 자르고, 폭력으로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구치소 소장 장웨성(張粵生), 판위구 공안분국 국장 리위쉬안(黎宇軒), 판위구 정치법률위원회 서기 류위안산(劉苑珊), 판위구 사교방비사무실 주임 캉위푸(康玉福)가 박해에 가담했다.

2014년 5월 20일 판위구 구치소 뒤쪽에 있는 ‘판위 사완구 형사재판소’는 황광위, 허원팅 부부에 대한 불법적인 법정 심문을 했다. 법정에서 황광위, 허원팅은 모두 파룬궁은 합법이고 공개적으로 인터넷봉쇄돌파 소프트웨어를 배포한 것은 합법이라고 말했으며, 두 정의로운 변호사도 무죄 변호를 했다. 변호사의 변호 경전은 치밀했고, 이번 기본 인권 박해는 법제를 짓밟고 인권을 침범하고 신앙 자유를 침범한 추악한 짓이라는 것을 남김없이 폭로했다. 변호사의 훌륭한 변호에 방청객이 “왜 법정에서 사람을 석방하지 않습니까?”라는 문책 및 현장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는 외치는 소리에 판사 마이슝제(麥雄傑 )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다음 허원팅의 가족과 친척 친구들이 판사 마이슝제를 찾아가 그에게 파룬따파가 박해받은 진상을 알려주었다. 친척, 친구 중 서예계에서 덕망이 높은 연장자가 본인이 문화대혁명에서 받은 10년 박해 경과를 마이슝제에게 알려주었다. “인류 역사에서 정의는 지금까지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이슝제는 변함없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법률, 도덕성과 양심을 무시하고 2014년 8월 황광위, 허원팅 부부에게 불법적으로 3년 3개월 징역형 판결문에 서명했다.

황광위, 허원팅 및 가족은 판결문에 사인하는 것을 거부했고, 변호사를 청하여 인권을 수호하는 상소를 했으나 2심에서도 불법적으로 원심을 유지했다.

6) 후난성 이양시 궈자오칭 박해당하여 하체가 완전히 마비되고, 불법적으로 징역형을 선고받다


궈자오칭
(郭照青

궈자오칭(郭照青, 여)은 1972년에 고급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은 이양시 캉푸베이로 4호에 있고 대학 본과를 졸업했다. 이양시 군중예술관 간부이고 여러 차례 이 분야에서 선진적인 근무자로 평가됐으며, 직장과 사회에서 널리 호평을 받는 우수한 젊은이였다. 1996년 궈자오칭은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후 궈자오칭은 대법 수련을 강행하여 강제로 시 서예협회 비서장 직무에서 해임되었고, 연이어 적어도 9번은 납치당했으며, 불법적으로 노동교화 2년 한 차례와 징역형 10년 형의 한 차례 선고를 받았으며 아울러 여러 가지 고문 박해를 당했다.

2005년 12월 20일 궈자오칭과 부모는 함께 창더우링구의 사악한 두목 왕융캉(王永康), 우시융(吳希勇), 황쥔화(黃軍華) 등에게 납치되었고, 온 가족 생활비 23,000여 위안(약 391만 원)을 모두 강탈당했다.

궈자오칭의 친척은 수련하지 않았는데도 박해당했다. 아버지 궈다오캉(郭道康)은 중국 음악가협회 회원이고, 중국 서예가학회 회원이며, 중화 시사학회 회원으로 전국 이름 있는 문화 명인이다. 당시 이미 70세가 넘은 그를 불법으로 창더시 제1 구치소에 가두고 매 끼니를 물로 삶은 배추를 먹게 했으며, 가족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궈자오칭의 어머니 슝비윈(熊碧雲)은 심장병, 고혈압이 심각했으며, 집안에서 납치당했을 때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튿날 혈압을 재니 230에 심박 수는 180이었고, 불법적으로 20일 갇힌 사이에 세 번이나 기절했다. 세 번째로 기절했을 때 경찰은 응급구조도 하지 않고 사건 처리반에 파룬궁은 이미 ‘반동 정치 조직’으로 되어 죽더라도 사람을 석방할 수 없고 감옥에서 죽으면 한쪽에 버리라고 전달했다. 마지막에 궈자오칭의 고령 부모는 불법적으로 3개월 가둔 후 석방했다.

궈자오칭은 혼자 불법적으로 창더 린리현 구치소에 갇혀 박해당했고, 박해를 저지하기 위해 그녀는 70일 단식 항의한 후 2006년 4월 21일 병원에 실려 가는 길에 도주했다. 2009년 4월 21일 궈자오칭은 천저우 베이후구에서 현지 국내 안정국 경찰에게 납치되었다. 10여 명의 경찰이 궈자오칭의 거처에 뛰어들어가 그녀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 궈자오칭은 피범벅이 되어 고통에 기절했다. 경찰은 범행을 덮어 감추기 위해 다급하게 바닥의 피를 닦아낸 뒤 현장 사진을 찍었다.

궈자오칭은 천저우에서 9일 갇힌 후 경찰에게 협조하지 않아 고문 박해를 당해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같은 해 4월 창더 ‘610’ 등 악인은 이 소식을 듣고 궈자오칭이 도주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이양 ‘610’에 앞서 먼저 궈자오칭을 빼앗아 4월 29일 창더 린리 구치소에 이전되었다. 린리 구치소에 간 후 구치소 악인은 그녀가 맞아서 불구가 된 두 다리를 힘껏 밟아 그녀의 두 다리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위축되었다.

2009년 6월 궈자오칭은 창더1감옥에 옮겨져 계속 박해당했다. 본래 성에서 그녀를 석방하는 데 동의했지만 창더시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은 기어이 그녀를 불법적으로 징역형 선고를 요구했다고 한다. 2009년 12월 2일 궈 씨 부모가 면회하러 갔을 때 감옥 측은 궈자오칭에게 이미 내부적으로 10년을 선고했다고 알려주었다. 이번 소위 판결은 어떠한 법적 절차도 밟지 않았다. 불법적으로 징역형 판결에 가담한 사람은 우링구 법원 판사 샤유추(夏友初) 등이다.

2010년 초 궈자오칭은 후난성 여자감옥에 이전되어 계속 박해당했다. 전문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하는 감옥 6구역 2중대에 그녀를 가뒀다. 그곳의 감옥 경찰은 소위 ‘전향’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궈자오칭의 두 다리 근육이 위축된 사실을 상관하지 않고 사람을 불러 강제로 그녀를 끌고 다니게 했고, 듣기 좋게 ‘재활 훈련’이라고 했으나, 사실상 육체적인 박해이다. 감옥에서는 불법적으로 궈자오칭 가족의 면회 권리를 박탈했으며, 이유는 단 하나이다. 궈자오칭이 감옥의 모든 박해에 협력을 거절하고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를 관 같은 방에 가두어(關入小號-관샤오하오) 수감하고 강제로 ‘전향’시키려고 시도한 것은 소위 ‘공견(攻堅-강한 적을 공격함)’이다. 이런 정황에서 그녀를 핍박하여 노예 노동을 시켰고 매일 12시간 노예 노동 박해를 했다.

7) 중국 월계관 시사(詩社)회장 투텅이 납치되어 불법적으로 노동교화 박해당하다

투텅(塗騰)의 본명은 투쑹산(塗松山)이다. 시인, 미술학가, 작가이며, 1978년 허난 출생으로 산시(陝西)성 시안시 웨이양구에 거주했다. 투텅은 2007년 중국 월계관 시사를 창설했다. 취지는 ‘문화연구’, ‘공공교육’, ‘학술교류’, ‘출판 전파’ 등 공익 문화 사업에 종사하기 위한 것이다. 산시성 시안시는 이미 10회의 시 회(詩會)와 여러 차례 문예 교류회를 열었다. 그의 됨됨이는 정직하고, 이익에 동요하지 않았으며, 공익사업에 힘써 시안 문예계 인사와 광범위한 학자들의 존중과 인정을 받았다.

2009년 투텅은 스스로 파룬따파 수련의 길을 걸었다. 파룬궁을 수련한 날부터 그는 십여 년 피웠던 담배를 순식간에 끊었다. 끊임없는 수련 과정에서 다년간의 나쁜 습관을 하나하나 고쳐 본인과 신변의 친지들은 모두 심신의 혜택을 보았다.

2012년 8월 13일 오후 중국 월계관 시사회장 투텅은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국내안전보위국에 의해 불법으로 끌려갔고, 노트북 2개, 휴대전화 2개, 하드디스크 하나, 도장 파는 기계 하나와 약간의 개인 자료를 강탈당했다. 그날 저녁 8시 30분경 시안시 베이린 분국 국내안전보위국 대대 자오 모 씨를 선두로, 한 무리의 경찰을 이용하여 그의 거처에 침입하여 불법으로 수색했다. 그의 약혼녀가 수사증을 요구하자 한 장의 빈 수사증을 내보였다. 위에는 시안시 공안국 도장 두 개만 찍혀 있었다. 경찰은 면전에서 “지금 번호를 적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 후 투텅(투쑹산)은 불법적으로 노동교화 1년 1개월을 선고받아 8월 14일부터 시작되었고, 구실은 파룬궁 진상 CD를 제작하고 전파했다는 것이다.

8) 시인 푸잉 불법적으로 9년형 선고하여 박해를 당하다

푸잉은 다재다능한 시인이다. 베이다 서양 언어학부와 베이징 영화대학 대학원생 반에서 연수했고 잇따라 베이징 샤오칭 영화회사, 베이징 텔레비전, ‘세기를 뛰어넘는 인재’ 잡지사에 근무했다. 개인 전문 저서로는 시집 ‘정녀(靜女)’가 있고 다른 사람과 합작한 작품으로는 ‘서글픔을 향수하다’가 있다. 1999년 1월 푸잉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반년 후인 7월 20일, 장쩌민 일당은 전국적으로 물결쳤고 박해를 지금까지 지속했다. 푸잉은 33살의 아름다운 나이에 9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당했고, 중국공산당은 그녀 청춘을 함부로 파멸시켰다. 3000여 일의 불법 수감 박해로 감옥에서 나온 푸잉은 이미 백발이 되어 중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중국공산당은 각 방면에서 교란하고, 압력과 박해를 당했다. 2015년 6월 16일 푸잉은 우편배달로 최고검찰원과 최고인민법원에 원흉 장쩌민을 고소했다.


푸잉
 

9) 문화 선전 공작단 배우 왕진판 10여 년을 감옥에서 고통받다

왕진판(王金範)은 치치하얼시 철도 문화 선전 공작단 국가 4급 공연 배우로 후임으로 치치하얼 철도 1중 교사직을 맡았다. 그녀는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여 불법적으로 노동교화 1년을 받고, 불법적으로 10년 형을 선고받아 계속 세뇌반, 구치소, 노동교화소, 정신병원, 감옥에 갇혔으며 그 시기에 고문뿐 아니라 여러 차례 약물에 의한 박해를 당했다.

2000년 정월 28일 왕진판은 하얼빈 철도국 정신병원으로 납치되었다. 왕진판에게 매일 세 번 강제로 약을 먹게 했고, 약을 먹은 후 30분간 서 있게 하여 혀를 검사하고, 약이 녹아 흡수되게 한 다음에 가도록 허락했다. 왕진판이 연공하여 의사는 남자환자 4명을 불러 그녀를 데리고 가게 했으나 남자환자가 갑자기 손을 놓아 왕진판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15일째 되는 날 외부에서 초청된 전문가와 병원 간부가 왕진판을 다시 감정하여 원장은 말했다. “당신 이 사유하는 사고능력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그 어떤 문제도 당신을 곤혹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모두가 당신이 정신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당신을 석방하여 돌아가게 할 수 있지만, 직장에서 당신을 데리러 와야 합니다.” 다음날 직장, 가족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병원에서는 차로 왕진 판을 학교로 돌려보냈고, 학교에서 받지 않아 병원에서는 또 왕진판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2003년 4월 23일 왕진판은 하얼빈 헤이룽장 여자감옥에 보내졌다. 보고문을 외우지 않아 왕샤오리(王小麗), 뤼징화(呂晶華) 대대장에게 한바탕 혹독하게 얻어맞아 까무러쳤다. 정신을 차리자 작은 방의 이환(地環: 땅에 수갑 채우기)에 채워졌다. 왕진판은 심장병이 발작했고 혈압이 230, 240에 달하여 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다. 감옥 의사가 와서 인중을 찌르고 발바닥을 찔러보고 주사를 놓았지만 아무 감각이 없었다. 정신을 차린 후 그녀들은 왕진판을 엄하게 단속하는 9감옥구역으로 보냈다. 노역 거부로 60여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있게 하여 그녀는 뇌혈전 증상, 반신마비, 푹 쓰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북방의 추운 삼 구[동지(冬至)로부터 세 번째의 9일간]에 그녀들은 이른바 야영훈련을 한다고 속이고 파룬궁 수련생에게 홑옷을 입게 하고 밖으로 사람을 끌어냈다. 가지 않으면 다리를 끌고 밖으로 끌어냈으며, 손과 발이 얼어 검 푸른색이 되고 감각이 없었다.

2012년 3월 5일 9수감구역의 경찰과 10여 명의 죄수는 왕진판을 침대에서 땅에 끌어 내리고, 수건으로 목을 옥죄어와 왕진판은 호흡이 어려웠고, 숨소리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녀들은 수건을 손에 쥐고 왕진판의 입과 머리를 테이프로 봉하고 손을 수갑처럼 테이프로 감은 후 왕진판을 시트로 들어 4층 9수감구역에 내려졌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또 한바탕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찬 후 포박하는 끈으로 이 단식 침대의 철주에 묶었고, 또 테이프로 왕진판의 상체를 침대에 휘감았고, 종아리와 침대를 묶어놓고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했으며, 강제로 죄수복을 입게 했고, 아동용 쪽걸상에 앉게 하여 허리를 곧게 펴고 머리를 들게 했다. 두 손은 무릎에 얹고 군인 자세를 취하게 하는 등 왕진판은 고통을 당해 환각이 나타났다.

2014년 4월 29일 감옥에서 나온 후 왕진판은 이미 직장에서 불법으로 공직에서 해고되었고, 신분증, 최저 생활 보장도 모두 해주지 않았다. 왕진판은 반백이 넘었지만, 아르바이트하여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0) 베이징 화가 왕밍웨, 사진작가 진샤오후이 불법적으로 노동교화을 받다

사진작가 진샤오후이(金小輝)와 저명한 유화가 왕밍웨(王明月)는 베이징 파룬궁 수련생이다. 각기 2008년 7월 8일, 9일에 공산당 경찰에게 납치되어 불법적으로 베이징 퇀허 노동교화소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베이징 저명한 유화가 왕밍웨
 

왕밍웨는 1962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1991년에 중앙미술대학 유화과 연수반을 졸업하고, 전문 유화창작에 종사했다. 왕밍웨는 1996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하여 심신의 혜택을 보았다. 99년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탄압을 시작한 후 왕밍웨는 계속 수련을 견지했다.

2008년 7월 9일 오전 베이징 둥청구 안딩먼 파출소 경찰이 왕밍웨 집에 난입하여 불법적으로 집을 수색하고 왕밍웨를 납치했다. 1년 전 왕밍웨 어머니(수련인임)는 일찍이 베이징 공안에 납치되었었고, 집은 이미 몰수되어 약탈당했다. 이번에 단지 작은 USB 메모리 하나만 찾아냈다. 공산당 공안은 왕밍웨를 베이징 둥청구 구치소에 한 달 가뒀고, 이후 왕밍웨는 불법적으로 노동교화에 처했으며 베이징 퇀허 노동교화소에 갇혀 박해당했다.

사진작가 진샤오후이는 왕밍웨의 친구다. 왕밍웨가 납치된 전날 베이징 둥청구 안딩먼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되어 베이징 둥청구 구치소에 불법으로 갇힌 지 한 달 후 불법적으로 노동교화에 처했고, 베이징 노동교화소 인원 배정처에 불법적으로 갇힌 후 베이징 퇀허 노동교화소에서 박해를 당했다.

1995년 왕밍웨 작품 ‘3월’, ‘장동(藏童)’ 등이 중국미술관에서 열린 ‘베이징지풍(北京之風)’ 유화전시에 전시되었다. 일부분 작품이 ‘중국 미술’, ‘10월’, ‘새로운 예술가’ 등 신문잡지에 게재되었고, 국내외 유화 요청전시 및 경매에 여러 번 참가하여 여러 작품이 미술관이나 개인이 수장하고 있다. 2000년 영국 전 총리 시스에게 초청을 받아 본인의 초화상을 그려주었고, 문화예술 교류에 참여하도록 영국에서 초청했다. 2004년 초청을 받고 영국에서 개인 그림전시를 했다. ‘몽화혼(夢花魂)’ 시리즈는 전시한 당일에 전부 팔렸다. 같은 해 작품 ‘봄을 찾다(尋春)’가 10월 15일 국제미술관에서 열린 ‘퉁루얼싱(同路而行:같은 길을 걷다)’ 유화전시에 전시되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11) 청두시 여성화가 이원쥔 구타당하고, 강제로 피를 뽑고 지금까지 불법적으로 갇혀 있다

2018년 2월 12일 청두시 파룬궁 수련생 직업 여성화가 이원쥔은 파룬따파가 좋다는 진상을 전파하여 납치되었고, 납치된 후 청두시 구치소에 불법으로 갇힌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작년 8월 이원쥔의 피를 강제로 뽑았고 10월에는 여경 다이쭤쥔(代作君)에게 구타를 당했다. 가족들이 여러 번 옷가지를 가져다주었지만, 불법적으로 압수되었고, 지급까지 불법으로 갇혀 있다.

이원쥔은 올해 51세이고, 남편 딩중빈(丁中斌)은 54세이다. 그들은 각각 1998년과 1997년에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딩중빈과 이원쥔 부부는 모두 명문 학교를 졸업한 인재다. 이원쥔은 박해가 시작된 후 지금까지 적어도 7번 납치되었고, 한 차례 불법적으로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원쥔은 베테랑 유화가 이고, 이전에 이저우 서예원 상무이사의 직책을 역임했었다. 파룬궁을 수련하기에 이원쥔은 베이징에 해결을 요구하러 갔고 불법적으로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박해를 받고 사업에 큰 영향을 받은 상황에서 이원쥔은 여전히 적지 않은 훌륭한 그림을 창작하여 그녀의 그림은 많은 사람의 사랑과 호평을 받았다. 2018년 2월 12일 오전 9시경 초탕 파출소 경찰은 딩중빈과 이원쥔 부부의 임대주택 내에 난입하여 그들을 파출소로 납치해 갔고, 불법적으로 2월 13일까지 심문한 후 쓰촨성 청두시 구치소에 형사 구류했다.

동시에 경찰은 그들 집에 새로 구매한 노트북 2대와 휴대전화 7대 및 다년간 수장한 가치가 있는 그림(팔기 아까운 그림)과 그림 그리는 원자재, 수련에 사용하는 파룬따파 서적과 수만 위안의 현금 및 은행 카드 등 재물을 몽땅 약탈했다. 37일 후 딩중빈은 석방되었지만, 거주지 감시를 받았다. 이원쥔은 불법적으로 체포되었다.

2018년 8월 29일 오전 구치소 경찰은 구치소 의사와 같은 감방의 다른 범죄 용의자를 사주하여 이원쥔을 눌러놓고 강제로 피를 뽑았다. 2018년 10월 29일 청두시 칭양구 검찰원은 이원쥔을 불법적으로 칭양구 법원에 기소했다. 구치소에서는 당일 강제로 이원쥔에게 죄수복을 입도록 강요했고, 이원쥔은 박해를 막아내며 입지 않았다. 구치소 안의 여경 다이쭤쥔(代作君)은 이원쥔을 사무실에 끌고 가 호되게 때리고 감방의 ‘당직’(감방 우두머리)을 사주하여 이원쥔이 돈으로 물건을 사지 못하게 했고, 세수비누, 비누, 치약을 쓰지 못하게 했으며 화장지마저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구치소에서 매주 사람마다 나눠주는 사과 5개도 압수했다.

12) 치바이스의 손녀 치빙수 불법적으로 정신병원에 갇혀 박해당하고, 불법적으로 노동교화을 받다

치빙수(齊秉淑)는 저명한 화가 치바이스의 친손녀이고 저명한 화가로 그녀는 그림을 매우 잘 그렸다. 치바이스는 일찍이 그녀의 그림은 본인의 그림과 진짜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치빙수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에 온몸이 병이었고, 늘 출혈이 심해서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얘서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중병이 기적처럼 모두 나았다.

1999년 4월 25일 치빙수는 다른 파룬따파 수련자와 같이 자발적으로 민원청원사무실에 가서 평화적인 청원을 했고, 온종일 서 있었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후 치빙수는 여러 차례 납치되었다. 그녀는 본인의 ‘진선인’ 신앙을 견지한 이유로 강제로 베이징 차오양구 다베이야오진 다류수 정신병원에 갇혔다. 의사는 그녀가 ‘정신분열증’에 걸렸다며 강제로 그녀에게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는 “파룬궁이 언제 종결되면 언제 석방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녀가 감옥에 갇힌 기간 감옥 경찰, 감옥소장, 공안의 두목 등은 그녀에게 일부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하고, 그리고 나면 가져갔으며, 가져간 후 팔아버렸다. 그녀를 박해하면서 그녀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했다. 치빙수가 갇히기 전에는 대법을 수련했기 때문에 매우 젊어 보여 40대로 보였다. 불법적으로 갇힌 후 박해받아 귀밑머리가 허옇게 되었고 끊임없이 손을 떨었다. 1년 후 또 베이징 신안 노동교양소 3대대에 보내져 박해당했다.

13) 인터넷 작가 윈샤오 두 차례 불법적으로 징역형 선고 박해를 당하다

윈샤오(雲蕭)는 ‘2007년 서우후왕 10대 우수작가’ 칭호를 영광스럽게 받은 인터넷 작가이다. 2010년 10월 27일 오전 후베이 우한의 근무지에서 한 무리 악당에게 갑자기 납치되었다.

윈샤오는 인터넷에서 정의를 널리 선양한 좋은 사람이다. 윈샤오의 본명은 왕쉐밍(王學明)이다. 쓰촨 사범대학 중국어 문학 전문 학사이고, 시난 사범대학 교육 석사이며, 쓰촨성 작가협회 회원이고 룽취안 작가협회 이사였다. 파룬따파를 신앙한 이유로 2002년 8월 5일 쓰촨성 청두시 룽취안이구 법원으로부터 무고하게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고, 2000년 3월 룽취안 교육위원회는 무리하게 해임되었다. (다몐 중학교 교사) 후에 우한 푸던 강당에서 근무하여 리비위안(利筆原) 생태 ‘물리정(物理情)’ 세 글자 작문 훈련 시스템을 창설하고 각 부류 학생을 지도했는데 효과가 뚜렷하여 학생과 학부모 모두의 호평을 받았다. 윈샤오는 납치된 후 불법적으로 우한시 제2 구치소에 갇혔다. 그 후 중국공산당 법원은 비밀리에 불법적으로 5년 형을 선고받고 후베이성 판자타이 감옥에 갇혀 박해당했다.

비밀리에 납치하고 비밀리에 박해한 악당은 중국공산당 폭력 기구인 국가 안전기구, 우한시 국내안전보위국 대대와 우한시 공안국이다. 중국공산당의 납치 구실은 윈샤오 선생님이 ‘진선인’을 수련했다는 것이다. 윈샤오는 몇 년 전 자신의 파룬궁 신앙을 수호한 이유로 쓰촨에서 일찍이 3년간 감옥에서 박해를 당한 적이 있다. 윈샤오의 아내 스 씨도 같은 시간에 납치되었다. 윈샤오의 연로한 아버지는 거대한 압력을 받아 아들이 납치된 날 저녁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4) 화가 판이밍 불법적으로 노동교화 2년 선고받다


화가 판이밍
  

판이밍(範一鳴 남, 본적 푸젠성)은 저명한 유화가 이다. 중앙미술대학 유화가 연수반에서 공부했고, 그의 작품은 대부분 구미(歐美) 등의 나라에서 개인이 많이 소장했다. 2001년 판이밍은 영국 전 총리 시스에게 초청되어 초상화를 그렸고, 문화예술 교류를 위해 영국에서 초청되었다. 2001년에서 2003년 홍콩에서 3차례 개인 그림전시를 했다. 2004년 영국 런던에서 개인 전시를 열었고, 2004년 9월 베이징 공예 미술출판사에 ‘퉁루얼싱-유화가 작품 전집-판이밍 유화 정품’을 출판했다. 후에 베이징에서 ‘퉁루얼싱’ 유화 합동 전람에 두 번 참가했다. 특히 작품 ‘눈송이가 흩날리다(雪花飄過)’(국부) 미국 NTD TV에서 열린 제1회 ‘전 세계화인 인물 사실 유화 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다.

2008년 7월 8일 판이밍은 수업이 끝난 8살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고, 둥청구 안딩구 파출소 부근에서 뒤따르던 경찰이 집에 들어와 판이밍 부부(아내 이름 불명)를 납치하고 불법적으로 재산을 몰수했으며, 판이밍 부부는 둥청구 구치소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친구가 돈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한 달 후 판이밍 아내는 집으로 석방되어 돌아왔지만 판이밍은 불법적으로 노동교화 2년을 선고받았다.

4. 납치되어 박해받은 주요 사례

1) 서예가 가오쭝전(高宗震)이 박해받은 경과

현재 중국 서예가협회 회원이고, 중국 공공관계예술위원회 회원이며, 세계평화 자선 기금총회 ‘애심대사(愛心大使)’로 베이징 순이구에 살고 있다. 서예 작품은 전국 서예 경연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고, 작품 ‘지족한 자는 부유하다(知足者富)’라는 ‘중국 현대 예술가 수장 대전’에 편성되어 금상을 받았다. 일찍이‘중국 서예가’, ‘중화 건축신문’ 등 신문잡지에 여러 차례 발표되었다. 2006년 세계평화 자선 기금총회에 10만 위안(약 1,700만 원)과 10폭의 서예 작품을 헌납하여 세계평화 자선 기금총회로부터 ‘애심대사’로 임명되어 정치협상 강당에서 금메달이 수여되었다.

1997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했고, 박해가 발생한 후 적어도 4차례 납치되었다. 박해받은 기간 가오쭝전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고 또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의 번번한 교란과 공갈을 견디지 못하고 2001년 3월 2일에 집안에서 쓰러졌고, 3월 6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2006년 12월 15일 경찰은 가오쭝전을 재차 톈주파출소에 붙잡아가 박해하며, 누군가가 진상 자료를 배포하여 고발했다고 말했고, 불법적으로 자료 출처와 자료를 보관한 곳을 물었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박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가오쭝전과 딸은 호주에 이민하여 정착했다.

2) 중앙악단 오케스트라 대장 천닝팡 온 가족이 박해받다

바이올린 협주곡 ‘양축(梁祝)’과 TV 드라마 ‘갈망’의 주제곡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은은하고 감미로운 마치 눈물로 호소하는 듯한 플루트 독주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깊은 기억을 남겼는가? 그 플루트 독주가 바로 천닝팡이다.

천 씨 부부는 중국문화부에서 평가한 국가 1급 배우로 중앙 교향악단에서 은퇴 할 때까지 30여 년간 연주했다. 그 사이 천닝팡은 1983년에서 1990년까지 전 중앙 교향악단 오케스트라 대장을 8년 동안 겸임했다. 동시에 천 여사는 중앙악단 목관 5중주 및 베이징 ‘필하모니(愛樂女)’ 실내악단의 구성원이었다. 그들의 공연은 널리 퍼져 중국 곳곳에 자취가 남아있고, 여러 차례 각국에서 중국을 방문한 대통령, 귀빈을 위한 공연을 했다. 1987년 미국 24개 대, 중 도시를 순회공연했고, 그중 뉴욕의 링컨 센터, 워싱턴 DC의 케네디 예술 센터가 포함된다. 이후 매년 유라시아 여러 나라에서 초청하여 지역 순회공연을 했으며, 가는 곳마다 관중의 열렬한 환영과 사랑을 받았다.

천닌팡은 그 당시 30여 년간 담배에 중독된 노인 애연가로, 온 가족이 출동하여 강온 양책(強穩兩策-당근과 채찍)을 함께 쓰며 온갖 수단을 다 써도 그는 끊지 않았다. 그러나 리훙쯔 선생님의 설법 동영상 테이프를 며칠 보고, 그는 갑자기 어제 맛있게 피우던 담배가 냄새가 역겨운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을 발견했고, 다른 브랜드를 바꿔 피워도 맛이 이상했으며, 연속 며칠 이러했다. 어찌 된 일인가? 갑자기 리 선생님이 설법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사람의 신체에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당신의 신체를 해치므로 연공인은 마땅히 담배를 끊어버려야 한다”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속으로 선생님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과연 몇십 년 끊지 못했던 담배 중독은 며칠 사이 힘들이지 않고 뿌리째 뽑아버렸다. 몸은 하루하루 좋아졌고, 간이 아프고 위가 아프던 문제도 싹 사라졌다. 예전에 그는 전 악단에서 제일 마른 사람으로, 얼굴색이 검고 누렜으나 후에 혈색이 좋아지고 나는 듯이 걸었으며, 무거운 상자를 들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1999년 7월 장쩌민과 중국공산당이 중국에서 파룬궁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신문, 방송국, 텔레비전방송국은 장황한 거짓말로 가득 찼다. 천닌팡 부부는 직접 받은 혜택을 정부에 알려줄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이런 선량한 소원을 품고 민원 청원 국을 찾아갔다. 결과 천닌팡 부부는 모두 불법적으로 구치소에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3) 배우 장광위 납치되어 박해받다

장광위(薑光宇)는 국내에서는 배우다. 여러분은 아마 ‘옹정왕조’를 보았을 텐데 그는 그 삼남 역을 맡은 홍시이다. 장광위는 1998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이 박해를 시작한 후 장광위는 두 차례 중난하이에 청원하러 가서 파룬궁을 위해 진실한 말을 했고, 중국 정부에서 파룬궁을 올바르게 대하고 박해를 중지하길 희망했으나 두 번에 걸쳐 경찰에 붙잡혀 불법적으로 갇혔으며, 24시간 동안 억지스럽게 가뒀다. 후에 그들이 석방된 후 그는 국내 환경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고 자신의 국가를 떠났다.

4) 8번 납치된 중국 항공우주 부 전자설비 엔지니어이자 화가인 웨창즈

70여 세인 웨창즈(嶽昌智)는 중국 항공우주 부 전자설비 엔지니어이자 화가이다. 그녀의 수묵화 작품은 중국 500명 화가명부에 수록되어 있다. 그녀의 업무 수준은 높고 선량한 사람이며, 98년 대홍수 때 그녀는 3만 위안(약 510만 원)을 기부했다.


저우융캉을 고소한 두 원고 천징샤오
()와 웨창즈(

웨창즈의 일생은 불우했고, 몸이 허약하고 잔병이 많았으며, 가혹한 생활 속에서 그녀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지냈다. 그러다 1996년에 파룬궁을 수련한 후 지병이 다 나아 해마다 나라에 적지 않은 의료비용을 절약해주었다. 1999년 후 웨창즈는 여덟 번 붙잡혔고 두 번 ‘강제 전향반’에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직장에서는 늘 비판하는 대회를 열어 그녀를 비방하는 것 외에 그녀의 연금을 1300위안(약 22만 1천 원)에서 200위안(약 3만 4천 원)으로 삭감했다. 2003년 7월 웨창즈는 재차 억울하게 4년 형을 선고 받았고, 베이징 여자감옥에서 여러 가지 고문을 받아 여러 번 생명이 위독했으며,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하고, 그녀가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돌연 기습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때렸다. 한번은 9명이 동시에 그녀를 땅바닥에 눌러놓고 때리고, 압력을 가하여 때려 그녀는 이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일자형으로 벌리고 그녀 목덜미를 잡고 갑자기 앞으로 눌러 그녀 허리는 그 자리에서 툭툭 두 번 소리가 났고 그녀는 아파서 기절했다. 깨어난 후 그 사람들은 그녀에게 “계속 연마할 것인가?”고 물었다. 그녀가 연마하겠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계속 누르면서 그녀를 반복적으로 괴롭혔다. 척추가 세 군데가 부러졌고 대면적의 어혈은 한 달이 되어도 낫지 않았다. 치료와 최소한의 휴식을 취하지 못하여 그녀의 척추가 부러진 곳은 원래 위치로 회복되지 못했고, 심각하게 옆으로 비뚤어졌다. 웨창즈는 현재 호주에 거주하고 있다.

5) 호주 파룬궁 수련생 장추이잉 박해당하다

1999년 7월 20일 전 중국공산당 당수 장쩌민은 국가 헌법과 법률을 위배하고, 정부 명의를 도용하여 파룬궁을 박해했으며, 모든 국가 기구를 동원하여 대변자로 삼아 사실을 날조하고 시비를 전도했다.

호주 파룬궁 수련생 장추이잉은 파룬궁을 수련하고, 파룬궁을 위해 청원한 이유로 중국에서 불법적으로 8개월간 감금되어 감옥에서 비인간적인 대우와 고문에 시달렸다. 후에 호주 정부와 파룬궁 수련생이 공동으로 구출하여 호주로 돌아갔다.

몇 년 전, 장추이잉은 심한 관절염으로 인해 모든 관절이 너무 아파서 먼 길을 갈 수 없었고, 밥을 먹거나 잠자기조차 어려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생활을 했다. 파룬따파가 그녀를 구해 그녀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왜 매번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가서 대법 사부님을 위해 파룬따파를 위해 공정한 말을 한 이유이고, 장쩌민 일당의 죄악 행위를 폭로한 이유이다.

위 서술한 것처럼 한 무리 재능이 넘치고 세상에 이름난 예술가들이 ‘진선인’을 신앙한 이유로 중국공산당 범죄 집단의 잔혹한 박해를 당했고, 납치되고 불법적으로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으며 심지어 박해당하여 사망했다.

부록: 중국문예 계통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받은 세부 사항

원문발표: 2019년 6월 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6/9/3884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