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룽장성 자무쓰시 윤해주의 박해 경과 자술
[밍후이왕] “2006년 2월 26일, 외지에 있던 나는 노동교양소에서 출소한 수련생을 만나러 가다가 저녁 6시 넘어 경찰에 납치당했다. 찬물이 머리에서 흘러내려 옷을 적셨다. 그들은 또 밧줄로 나의 머리카락을 묶은 후 그 밧줄로 나를 매달았다. 남자 경찰은 구둣발로 나의 머리와 다리를 가격했다. 아버지는 내가 10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병으로 쓰러지셨다. 천진한 아들은 내가 곧 곁을 떠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음은 헤이룽장성 자무쓰시 윤해주(尹海珠, 조선족)가 박해당한 경과에 대한 자술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난 일을 잘 기억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그것은 세 살 때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많은 환상을 했다. 나는 17세에 직장에 입사했는데 그것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은행이었다. 23세 되는 해 결혼했는데 스스로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 아무리 행복해도 늙으면 헤어져야 한다.’ 등 의문은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잘 웃었는데 웃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했다. 이럴 때면 “즐거움이 극에 다다르면 비애가 찾아온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뜻밖에 얻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 대법(大法)을 수련해 진정한 행복을 찾다
하루는 친척이 나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나는 대법 서적 ‘전법륜’을 본 후 나의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사람을 수련할 수 있게 하는 한 권의 천서(天書)였다. 나는 아주 격동되어 바로 수련하려고 결심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25세 되던 1998년 5월이었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아주 허약했다. ‘바람이 불면 풀이 움직이는’ 것처럼 유행 감기와 같은 것을 빼놓지 않았다. 게다가 19세 때 B형간염에 걸려 부모님은 특별히 나를 걱정해 종래로 집안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나는 기력이 충만했으며 힘이 없는 느낌이 없었다. 이것은 정말 좋은 공법이다!
나는 연공장과 법학습장을 찾았다. 이후부터 직장에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연공과 법학습에 계속 참가했다. 대법은 사람에게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가르쳤기에 나는 열심히 업무를 잘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으며, 연공을 시작한 그해에 직장에서 선진 근로자로 선정됐다.
2. 바른 믿음으로 인해 박해당하다
1999년 ‘7.20’, 파룬궁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온 하늘을 뒤덮을 듯한 탄압이 시작됐다. 당시 여태껏 ‘운동’을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왜 이렇게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으나 여전히 수련을 견지했다. 직장 책임자가 나를 찾아와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했으나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매우 두려워했다. 아버지는 하루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생각하시고 나에게 아버지가 겪은 ‘3반’, ‘5반’, ‘문화대혁명’ 등 많은 운동에 관해 이야기하시면서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잠자코 듣기만 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7.20’ 이후 나는 밥도 넘어가지 않아 먹을 수 없었고 웃음도 없어졌다. 어머니는 매일 나에게 전화로 밥을 먹었는지 물으셨고, 직접 밥을 지어 오셔서 내가 먹는 것을 지켜보셨다. 7월 28일 나는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베이징으로 ‘상방(민원제기)’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대법에서 혜택을 받았으므로 한마디 공정한 말을 하려고 했다. 나도 자신의 결정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직업을 잃을 수도 있으며, 베이징에 갔다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우리 이웃에 나와 같은 또래가 살고 있는데 그의 친척이 ‘6.4’ 때 중국공산당이 탱크와 기관총으로 대학생을 학살하는 장면을 직접 봤다고 했다). 나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베이징에 도착해서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민원사무실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지방 파출소 경찰에 체포돼 베이징 주재 지방사무소로 보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붙잡혀 간 파룬궁수련생은 그곳에서 직장이나 지역 파출소 경찰이 와서 압송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직장과 거주 지역 분국에서 온 4명에 의해 현지로 압송됐다. 차에서 내리니 야밤이었는데 그들은 나를 분국으로 데리고 가서 심문했고, 또 수련하겠는지 물었다. 내가 수련하겠다고 대답하자 직장의 책임자가 나의 부모에게 전화해 나와 통화하게 했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고 목이 메 “별일 없지, 별일 없지.”라고 말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수련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강해서 나에게 필요한 물건이 없냐고 물으셨다. 나는 다음 일을 알 수 없었으므로 아무 물건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들은 나에게 15일 구류처분을 내리고 간수소에 감금했다. 당시 나는 어떤 곳으로 가는지 몰랐기에 아주 두려웠다. 야밤에 달리는 차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나무는 아주 무섭게 보이고 음산했다. 간수소에 도착해 분국의 사람이 나를 간수소 사람에게 넘겼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철문 여닫는 소리와 쇠사슬 소리에 온몸이 오싹했다. 철문을 하나 열고 나를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악취가 풍기는 용변기 곁에 배치됐다.
15일 출소 기한이 되었을 때 가족, 분국 직원, 정법위 직원이 함께 간수소에 와서 나에게 ‘수련포기 보증서’를 쓰라고 했다. 가족과 친구들도 모두 쓰라고 권고했다. 남편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쓰지 않았다. 남편은 울면서 떠났다. 나의 마음은 아주 괴로웠지만 나는 우리에게 잘못이 없고, 파룬궁은 사람에게 선하도록 가르치는 좋은 공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달 반이 지나서 우리 가족에게서 5천 위안을 갈취하고서야 나를 풀어줬다. 직장에서는 이미 나를 해고한 상태였다.
2000년, 나는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했다. 당시 나는 임신 2개월이었다. 하루는 시국의 몇 사람이 나를 찾아와 그들과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내가 임신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나를 하루 동안 심문하면서 밥도 주지 않았고 저녁에 간수소로 보냈다.
나의 언니가 간수소로 전화해 임신한 동생을 감금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항의했다. 간수소 직원은 정말 임신했으면 석방하겠다고 했다. 3일 후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오후에 풀어줬다. 언니가 나에게 말하기를 간수소 직원이 언니에게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법에 위반되는 것이므로 고발하라고 알려줬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또 언니에게 돈을 갈취하려 했지만, 언니는 돈이 없다고 하면서 주지 않았다.
2002년,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있었다. 가족들은 걱정돼 나에게 피하라고 했다. 당시 아기는 11개월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정말 방법이 없어 집을 떠났다.
내가 떠난 3일 만에 시국과 파출소의 한 무리 경찰들이 어머니의 집에 들이닥쳤다. 후에 어머니에게서 들었는데 당시 아기는 이 소란에 놀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나를 찾지 못하자 수배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나는 유리걸식하게 됐다. 아기를 생각해도 낮에는 이웃들이 보고 고발할 것 같아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망을 보다가 기회를 봐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낮에는 가지 못하고 어두워서야 갔다가 잠시 아기를 보고 떠났다,
이 해 오빠가 간암에 걸렸지만 나는 문병을 몇 번밖에 못 갔다. 언니가 나를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면서 오빠의 병세가 중해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나에게 알리겠다고 했다. 언니에게서 소식을 듣고 내가 급히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는 오빠와 마지막 인사를 못 했다. 오빠는 혼미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후에 언니가 말하기를 오빠가 임종 전에 “내가 죽은 후에 여동생을 화장장에 못 오게 해라. 공안국에서 알고 다시 그 애를 붙잡아가게 하면 안 된다.”라고 당부하셨다고 했다. 이렇게 나는 오빠의 마지막 길도 배웅하지 못했다.
고문 시연: 강압적으로 두 다리를 일(一)자형으로 벌리게 하다.
2002년 말, 나는 수련생의 집으로 갔다가 그곳에 잠복해 있던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6~7명이 나를 분국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나의 양손을 몸 뒤로 가져다 수갑을 채웠고, 두 다리를 끝까지 벌리게 한 후 의자에 묶어 놓았다. 의자에는 경찰이 앉아 있었으며, 그 양옆에 또 두 명이 각각 있었다. 그들은 나의 머리에 물건을 씌운 후 나의 머리를 두드렸고, 나의 코에 담배 연기를 쏘였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얼마나 견디는지 보자!” 나는 기절했다. 쓰러지는 순간 근육이 찢기는 소리를 들었다.
중공 감옥에서 감행되는 고문 시연: 철통을 씌우고 머리를 두드리기
그들은 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 그들은 연필을 한 손에 두 개씩 끼운 후 두 경찰이 각각 나의 손을 잡고 비틀었다. 내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자 한 경찰이 나의 목도리로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당시 분국 국장이 옆에서 보고 있었다. 잠시 후 국장이 “됐다.”라고 하자 그들은 멈췄다. 그들이 손을 놓자 나의 두 팔은 축 늘어졌는데 이미 감각이 없었다. 국장이 ‘움직여’라고 소리쳤다. 내려다보니 근육이 모두 찢겨 있었다. 국장이 또 그들을 시켜 단단한 물건 두 개를 가져오게 해 나의 발바닥 혈 위를 찌르게 했다. 또 발바닥을 긁게 했는데 발바닥도 모두 터졌다. 한 경찰이 자기를 증오하는지 물었는데 나는 당신들도 속았고 피해자이므로 증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3. 10년의 인간 지옥
2006년 2월 26일, 외지에 있던 나는 노동교양소에서 출소한 수련생을 방문하려다가 저녁 6시가 넘어 경찰에 납치당해 간수소에 감금당했다. 나의 심정은 극도로 무거웠다. 나 자신이 자유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연로한 부모와 어린 아들을 생각하니……
그들은 나를 간수소 체육관에 끌고 가서 밤새 잠재우지 않고 심문했다. 매일 저녁 5~6명 경찰이 나를 걸상에 수갑으로 채워놓고 내가 졸면 나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동북의 2월은 몹시 춥다. 찬물이 머리에서 옷 속으로 흘러내려 치질이 있던 나는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낮이면 창문턱에 내려앉는 비둘기가 부럽기도 했다!
40여 세 여경이 나에게 “만약 당신이 밥을 먹지 않으면 나는 당신의 눈을 파내겠다.”라고 했다. 그녀는 말하면서 두 손가락으로 나의 눈을 찔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나는 아주 아팠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흉악했다.
그들은 또 밧줄로 나의 머리카락을 묶은 후 그 밧줄로 나를 매달았다. 남자 경찰은 구둣발로 나의 머리와 다리를 가격했다. 그래도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내가 ‘진선인’을 수련하는 것은 잘못이 없으며, 그들은 사당(邪黨)에 속았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그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말했다.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인터넷을 봉쇄해 파룬궁의 진실한 면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에 대해 말했으며, 톈안먼 분신자살은 자작극이라는 것을 말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저서에서 자살은 ‘죄’가 있다고 말씀하셨기에 우리 파룬궁수련생은 분신자살을 하지 않는데 정부에서 조작해 사람을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대부분 경찰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당시 나를 납치했던 우리 지역 책임 경찰이 나를 아주 동정하면서 말했다. “당신을 이렇게 할 줄 알았다면 나는 당신을 붙잡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각성에 안도했다. 밤중에 나는 나를 지키는 경찰에게 진상을 알렸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진상을 알게 되면 내가 여기에 헛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조금 위안을 얻었다.
그들은 온종일 나를 재우지 않았다. 나는 박해에 항의해 단식했다. 나흘째 그들은 억지로 나에게 음식을 주입하려 했다. 또 나를 시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심전도, 혈압 검사를 했으며, 의사에게 나를 살인범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죄행을 감추었다. 나는 낮은 소리로 의사를 불러서 나는 살인범이 아니고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며, 그들이 나를 박해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의사는 나의 말을 들은 후 “돌아가서 식사를 잘하세요. 일이 있으면 다시 오세요.”라고 말했다. 경찰은 나에게 강제로 음식을 주입하려고 했으나 의사가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나를 구치소로 끌고 왔다. 후에 그들은 또 나에게 자백을 강요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 후 그들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아무런 죄가 없는 나에게 10년 징역형을 받게 했다.
나는 나에 대한 판결 소식을 듣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연로한 부모님이 이 10년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나의 어린아이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항소했다. 나는 항소장에 파룬궁을 수련하면서 사회와 국가에 이로움만 줬을 뿐 해로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과 내가 어떻게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 됐는가를 썼다. 나는 항소장을 간수소를 통해 법원에 전달하게 했다. 하지만 얼마 후 원심을 유지한다는 통지가 왔다.
내가 투옥되기 전 어머니와 언니가 면회 오셨다. 아버지는 내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으로 드러누우셨다고 했다. 어린 아들은 내가 곧 그의 곁을 떠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후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10년 동안 한 번은 유치원에 손자를 데리러 갔는데 어린이들이 자기 엄마를 부르면서 달려가는 것을 본 나의 아들도 따라서 엄마를 부르며 달려갔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가 “너의 엄마가 아니야!”라고 말하자 나의 아들이 서럽게 울었다고 했다.
나는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에 감금됐다. 내가 투옥되는 당일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여자감옥에 도착하자 나는 독방에 감금되어 강제 ‘전향’ 박해를 당했다. 매일 나에게 파룬궁을 비방하는 녹화영상을 보게 했으며, 아침 5시부터 저녁 11~12시까지 쪽걸상에 앉아 있게 했다. 밥을 먹고 화장실로 가는 외에는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 쪽걸상은 면적이 아주 작고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져 체중의 압력으로 고통당하게 했다. 이것은 겉으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없는 고문이다. 어떤 파룬궁수련생은 이 고문을 당한 후 다리가 불구가 되어 걷지 못했다. 또 어떤 사람은 엉덩이가 짓물러 속옷이 달라붙어 피와 살이 찢겨나가지만 매일 계속해서 강제로 앉아 있어야 했다. 누구나 감히 나서서 말하지 못했으며, 나를 동정하는 수감자들이 몰래 몇 마디 할 뿐이었다. 나는 9감시구역에서 이렇게 11개월 동안 이 고문을 당했다.
2008년 5월, 나는 제3감시구역으로 이감됐다. 제3감시구역은 생산을 위주로 하는 생산 감시구역이다. 나는 평시에는 감방에 갇혀 있었는데 감방은 7~8㎡ 정도이고,이층 침대가 있었고, 12명이 감금돼 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데 일 년 사계절 가족이 면회를 와야 밖으로 나갈 수 있고 평시에는 감방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한 수감자가 전문적으로 나를 감시(이를 이른바 ‘바오자’라고 함)했다. 어떤 파룬궁수련생은 두세 사람이 감시했다. 이런 ‘바오자’는 모두 살인범, 강도범, 사기범들이다. 나는 3감시구역에 3년 넘게 감금돼 있었다.
2012년 7월, 나는 또 제9감시구역에 이감되어 박해당했다. 당시 전국 각 성의 감옥 ‘610’ 요원이 여러 감옥으로 다니면서 파룬궁수련생을 전향시키기 위해 박해를 가하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침대에 묶어 놓고 온 밤을 재우지 않았다. 나의 다리는 부어 허벅지와 같았으며, 신발을 신을 수 없었고, 화장실에 가서는 앉을 수 없었다. 10월 초, 그들은 나를 독방에 감금시켰다. 손과 발은 땅에 있는 고리에 채워놓았는데 24시간 계속 이런 자세로 있어야 했다. 고리는 땅에서 10㎝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나는 일어설 수도 없었고, 쪼그리고 앉을 수도 없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해도 풀어주지 않았다.하루에 두 끼 멀건 죽을 먹였다.이불도 없었다. 이렇게 15일 동안 9감시구역에서 박해당했다.
며칠 후 언니가 면회 왔다. 나는 언니가 걱정할 것 같아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언니가 말하기를 지난달에 나의 아들과 함께 면회 왔는데 면회를 허락지 않아 돌아갔다고 했다. 나는 가족이 걱정할 것을 우려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11월 나는 11감시구역으로 이감됐다. 11감시구역의 생산시설은 감옥 안에 있었다. 나는 매일 먼지와 타는 냄새가 나는 환경에서 지냈다. 당시 감옥의 대대장은 우리 파룬궁수련생에게 일하지 않으면 독방에 감금하겠다고 협박했다. 우리는 모두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파룬궁수련생을 독방에 감금했다.
4. 가정이 파괴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다
2013년 말, 나는 꿈에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깬 나는 아버지에게 불상사가 생겼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6개월 후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팔십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를 나는 7년 동안 뵙지 못했다. 어머니는 7년 넘게 아버지와 손자를 돌보느라 많이 상해있었다.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파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는데 어머니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곁에서 돌봐드려야 하기에 한시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하는데 어머니가 면회 오신 것을 보고 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버지, 아버지에게 효도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고 끝내 떠나셨네요!’ 부르짖으면서 울었다.
이 10년 동안 나는 비인간적인 시달림과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내 가족도 상상할 수 없는 정신적인 시달림과 경제적인 손실을 당했다. 1999년 ‘7.20’ 박해가 시작된 후 2016년까지 가족은 한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다.
원문발표: 2017년 2월 13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2/13/3430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