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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노동교화, 한 번의 징역형 당한 산시 옌촨현 가오스위안,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산시 보도) 세 차례에 불법적인 노동교화처분과 한 번의 불법적인 징역형 박해를 당한 후,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옌촨(延川)현 파룬궁 수련생 가오스위안(高世遠)은 출소해 얼마 되지 않아 결국 2018년 4월 말, 사망했다. 사망 시 50세쯤이다.

가오스위안은 옌안(延安)시 옌촨(延川)현 관좡(關莊)진 관자 거우(關家溝)촌 출신이다. 1998년 연말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해, ‘진선인(眞善忍)’을 지도로 좋은 사람이 돼 수련생의 표준에 도달했다. 그는 진실하고 착했으며 꾸밈이 없어, 마을에서 나이가 많은 일부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은 젊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을에서 공인받는 좋은 사람이 오히려 장쩌민(江澤民)집단과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에 대해 발동한 박해 중, 믿음에 확고했다는 이유로 매번 산시성 사당 요원에게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세 차례 노동교화 박해를 당하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이 파룬따파를 박해하기 시작한 후, 가오스위안은 단호히 파룬따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두려움 없이 베이징으로 서둘러 가서, 파룬따파에 대한 천지를 뒤엎을 듯한 박해를 멈추도록 당국에 요구했다. 이것은 본래 국민의 합법적인 권리지만 중국공산당 ‘일언당[一言堂, 대중의 (상반된)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제 의견만을 고집하는 것]’의 박해 중, 산시성 옌안현 중국공산당 요원은 오히려 그를 감금한 후 노동교화처분을 내렸다.

가오스위안은 산시성에서 첫 번째로 노동교화처분 박해를 당한 파룬궁 수련생이다. 그는 극히 악명이 높은 산시성 펑샹(鳳翔)현 짜오쯔허(棗子河)노동교화소에 감금됐다. 이것은 거의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산골의 노동교화소이다. 이곳에서 그는 강제 세뇌, 강제적인 음식물 주입, 강제 노동교화처분을 받았다. 2년 동안의 고난을 겪고 그는 비로소 노동교화소에서 벗어났다.

노동교화소에서 나온 후, 어느 한 번 그는 젠양(咸陽)시로 가서 파룬궁 수련생 가오타오하이(가오타오하이와 그는 예전에 함께 짜오쯔허 노동교화소에 감금돼 박해당한 적 있다. 가오타오하이는 그 후 산시성 웨이난(渭南)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했다)를 찾았는데, 찾지 못했다. 오히려 가오타오하이가 다니는 직장의 보위과에 의해 납치당해, 그는 또 한 차례 짜오쯔허 노동교화소에 불법적으로 감금됐다. 그가 몇 달 동안 단식으로 항쟁한 것 때문에 노동교화소에서는 비로소 부득이 그를 석방해야 했다.

2009년 1월 22일(음력 섣달 27일)에 가오스위안은 설을 쇠러 집으로 돌아왔다. 1월 28일(정월 초사흗날) 아침, 밥을 먹을 때 옌촨현 공안국의 사람이라고 자칭하는 세 사람은 기만하는 수단으로 그를 옌촨현 구치소로 납치했다. 잇따라 옌촨현 공안국 바이룽핑(白榮平), 리옌린(李延林) 등은 국가안전국 장궈유(張國友)와 610의 쑹(宋) 모와 결탁해 가오스위안의 집으로 가서 불법적인 가택 수색을 진행해, 대법 책과 손으로 베낀 대법 책 10여 권을 강탈했다. 그리고 연공 CD 한 장과 현금 3천여 위안(한화 약 49만 원)이 있었다. 85세인 가오스위안의 노 모친은 두 눈이 실명하고, 정신적으로 매우 큰 위협과 상해를 입었다.

구치소에서 옌촨현 공안국에선 경찰과 결탁해 가오스위안에 대해 기만과 은폐의 수단으로 그를 박해했다. 그들은 가오스위안에게 감옥 규정과 각종 규정을 외우도록 했는데, 가오스위안은 외우지 않았다. 그들은 죄수에게 지시해 가오스위안을 땅 위에 넘어뜨렸고, 경찰이 경찰봉을 들고 가오스위안을 혹독하게 구타했다. 그들은 가오스위안에게 이것저것을 하도록 지시했다. 가오스위안이 거부하자, 그들은 곧 가오스위안에 대해 혹독한 구타를 진행했는데, 가오스위안의 온몸이 상처투성이 됐다.

中共酷刑示意图:殴打
중국공산당 고문 재연도
혹독한 구타

그 후 가오스위안이 그들에게 무조건 석방하도록 요구했으나, 그들은 석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가오스위안에 대해 불법적인 노동교화처분을 내렸다. 가오스위안은 단식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저지했다. 그들은 죄수를 이용해 가오스위안에 대해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박해를 진행했다. 구치소에서 그들은 가오스위안이 박해로 사망할까 두려워 옌촨현 공안국과 결탁해 강제로 가오스위안을 짜오쯔허 노동교화소로 보내 박해를 진행했다. 그 후 또 궈진(虢鎮) 노동교화소로 옮겨 박해했다.

2010년 4월 상순 어느 하루, 궈진 노동교화소 3대대에 불법적으로 감금당한 가오스위안, 자오푸쒀(趙福鎖), 충쉐린(叢學林) 3명 파룬궁 수련생은 악독한 경찰의 요구를 협력하지 않고 체조하러 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 대대의 경찰 정하이펑(鄭海鵬, 부대대장)은 전혀 원인을 묻지 않고 운동장에서 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상황에서 공공연히 노동교화소 내의 한 무리 노동교화 인원을 교사해 3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구타했다. 게다가 하루 사이 세 차례 구타했는데, 가오스위안, 자오푸쒀, 충쉐린 3명의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돼서야 그만뒀다.

불법적인 판결을 선고받아, 웨이난감옥에서 박해당하다

2014년 8월, 가오스위안은 시안(西安)시 시잉(西影)로의 셋집 안에서 옌메이밍(閻楣明)을 우두머리로 한 옌타(雁塔)구 국가보안대대에 의해 납치됐다. 경찰 옌메이밍은 그가 몸에 지닌 만 5천 위안(한화 약 82만 원)의 현금을 강탈했는데, 어떠한 절차도 제시하지 않고, 뒤이어 그를 옌타구 구치소에 감금했다. 그런 다음 또 그를 시안시 북쪽 교외의 쉬안핑위안(宣平園) 세뇌반으로 옮겨 박해를 진행했다. 그를 3개월 반 동안 박해한 후, 비로소 그의 둘째 형님과 옌촨현 610 요원에게 통지를 내려 그를 고향 집으로 마중해 가도록 했다.

2016년 4월, 가오스위안은 시안시 청둥(城東) 정류소에서 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다가 정류소의 경찰에 의해 납치돼 시안시 바차오(灞橋)구 구치소에 감금됐다. 5월 중순, 진일보로 그를 박해하기 위해 이른바 증거를 끌어모았다. 시안시 장안(長安)구 웨이취(韋曲)파출소의 4, 5명 경찰은 경찰차를 몰고 창안 웨이취구 시자이촌(西寨)구에서 사방에 가오스위안의 현상 사진을 붙였다. 경찰은 촌민에게 그들이 이 사람을 납치했다고 공언하며, 사정을 아는 사람이 가오스위안의 주소와 관련 정보를 제공토록 요구했다.

이번 박해 중, 다만 그가 몸에 백여 장 되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가 씌어 있는 지폐와 몇 권의 대법 서적을 지녔다는 이유로, 그는 바차오구 법원에 의해 1년 6개월 형의 불법적인 판결을 선고받았다. 또한 산시성 웨이난 감옥으로 보내져 계속 박해당했다.

감옥으로 보내질 때, 가오스위안은 몸이 몹시 허약했는데, 폐결핵이 발병한 시기라는 진단이 내려져 감옥 병원 폐결핵 실에 감금됐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감옥 경찰 장중추(張仲秋)는 가오스위안을 찾아 ‘담화’를 진행해 그를 전향하려고 시도했다. 웨이난감옥 입감대에선 당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한 세트의 수단이 있었는데, 장중추가 책임졌다. 게다가 흉악한 죄수 충룽화, 바오샤오웨이(鮑小偉), 리자(李佳), 한차오(韓超) 등을 배치했다. 장중추는 강제 전향을 책임졌을 때, 박해 방안을 설계해 충룽화 등에게 명령해 간호와 졸개역할을 맡기고 구체적인 실시를 책임지도록 했다.

매번 중국공산당의 잔혹한 박해를 경험한 후, 평범하고도 확고한 한 파룬따파 수련생은 웨이난감옥에서 걸어 나와 몇 달이 지난 후, 결국 2018년 4월 하순 폐결핵 증상이 신속히 악화해 세상을 떠났다.

원문발표: 2018년 12월 2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2/28/37895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