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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융항 변호사, 방관자에서 직접 경험하고 증명에 이르기까지(상)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당신은알 수 없다

글/ 왕융항(王永航)

[밍후이왕] 나는 왕융항이라고 하며, 산둥성 주난현 사람이다. 1993년에 다롄 철도학원(그 후 다롄 교통대학으로 명칭 변경됨) 기계 공정학과에 입학했다. 1997년에 졸업한 후, 다롄 기관차공장에서 근무했다. 1999년에 전국 변호사 자격시험을 거친 후, 처음으로 공장의 법률 고문을 맡았고, 2003년에 사직하고 개업 변호사가 되었다.

王永航
왕융항
(王永航)

변호사 중에서 이름 없는 하찮은 사람으로 생존 문제에 직면했지만 나는 여전히 힘이 닿는 데까지 고난을 당한 이를 위해무료로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다. 특히 사망 배상에 관련된 사건이다. 나는10차례 가까이 사망 배상 사건을 위해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다. 두 차례의 사건(2004년 말에 기니에서,중국 어민 2명을 총살한 사건)은 들인시간이 너무 많아 약간의 비용을 받았고, 그 외는 모두 무료로 대리했다.

2005년에 나는 사건원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말을 이용해 다롄시 도서 빌딩 1층 법률 서적 발매소에서 안내 데스크를 설치해, 책을 구매하는 고객을 위해무료로 자문을 제공했다. 이 보잘 것 없는 서비스를제공한 후에다롄시 사법국에서는 2006년에 나를 다롄시 우수 법률서비스 근무자 18명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2008년 봄, 다롄 파룬궁수련생 왕춘옌(王春彥)은 중산구(中山區)법원에서 법정 심문을 받았다. 내가 변호사로서의 각종 수속(수권 위탁서, 변호사 소개장, 변호사 출정서한)을 전부 갖추고막 법정에 들어서자 법원 형사청 청장(여)은 곧 두려워 벌벌 떨며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법정에서 쫓아냈다. 나의 관련 수속을 거둬간 후, 즉시 사무실로 돌아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는 즉시 사법국에 당신을 조사하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녀는 말한 대로 했다. 며칠 후, 사법국에서 내가파룬궁 사건을 대리하고 있는상황을 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황당했다! 이 청장은 법을 어겨 나의 대리권을 박탈하고, 당사자의 변호사 위탁 권리를 박탈했으며, 당사자와 변호사의 변호권리를 박탈했다.그는 무법천지인자기 자신에대해 아직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또 악인(惡人)에게 내가 변호사로서 대리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도록 고소하게 할 것이라고 했는데, 제멋대로 날뛰며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법을 위반하는 이런 행위는일반적인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파룬궁 문제에 관련되면, 어떠한 비정상적인 방법마저 이상하지도 않다.

2008년 4월 30일 이른 아침,아내는 상하이 푸단(復旦)대학 의학원 영상의학과에서 박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 숙소에서 상하이 쉬후이구(徐匯區)경찰에게 끌려갔다.그녀가 거리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가 적힌 작은 종이쪽지를 붙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상하이 경찰 측은 ‘×교 조직을 이용해 법률의 실시를 파괴했다’고그녀에게 형사 구류처분을 가했다. 5월 2일, 나는 업무담당 기관 창사로(長沙路)파출소로 가서 교섭해, 범죄구성 요소에서 그들에게 아내를 납치한 불법성을 해석해주었다. 교섭 과정 중, 어떤 사법 경찰이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었는데, 태도가 매우 악랄했다. 그는 괴상야릇하게 “당신은 우리를 믿어야 한다. 중국은 필경 법치 국가다.”라고 말했다. 나는 “중국은 법치 국가가 아니다. 법치 국가는 최저한 노동교양처분이 없다.”라고 말했다.

내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불덩이에 덴 것처럼 ‘쌩’하며 책상에서 뛰어내려 이성을 잃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반응을통해 이 경찰이 노동교양제도를 좋아해서 얼마나 손을 떼지 못하는지 볼 수 있었다.

나는 상하이 현지의 변호사에게 위탁해 쉬후이구 구치소로 가서아내를 면회하려고 했다. 그러나변호사 사무실 몇 곳을 다녔지만 모두 파룬궁 사건을 대리하는 것을 고민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변호사 수속을 상하이로 부치게 하여 스스로 면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5월 5일, 나는 변호사 신분으로 아내와 한 번 만난 후, 곧 PC방으로 가서 최고 권력자에게 호소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명문화된 법률 조목을 존중해아내에게 자유를 돌려 달라고 호소했다. 게다가 즉시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멈추라고 했다. 이 편지는나중에 나에게 정죄한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5월 14일,아내는 석방됐다.

나는권익을 수호했다가 즉시 보복을 당했다. 2008년 5월, 랴오닝성 사법청에서는 연간 검사를 이용해 이유 없이 나의 변호사 자격증을 몰수했다.당시 부임한 사법청 청장 장자청(張家成)이 특별히 선양에서 다롄으로 가서 각 방면의 회의를 소집해 어떻게 나를 ‘구해 낼’지에 대해 연구했는데, 이것으로 내가 쓴 문장이 랴오닝성 사법청과 다롄시 사법국에 ‘불량한 영향’을 조성한 것을없애려 했다고 한다. 장자청은다롄시 변호사 협회와 다롄시 사법국에 나의 변호사증을 압수하라고 넌지시 협박하고 차례로 나를 찾아 면담했다.

변호사 협회 관계자를 만났을 때 “왕 변호사, 당신이 쓴 문장을 우리는 모두 보았다. 당신이 말한 것을 다 맞는다고 하지만 당신이 제기한 문제를 정부에서는 직면할 방법이 없다. 당신은 파룬궁에 이용당하지 마라. 파룬궁을 연마하는 그 늙은이와 노부인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신경 쓰는 사람은 당신처럼 이렇게 법률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는말을 했다. 나는 “나에게는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이 있다. 누구도 나를 이용하려고 하지 마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나에게 요구를 제기했다. 이를테면 면담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징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해외 인터넷에 국가책임자를 겨냥한 문장을 쓰지않는다는 것을 성명할 수 있는가? 둘째,따지웬 사이트에 문장을 발표하지 않는다고 보증할 것. 이에 대한 보답으로는 첫째,변호사 자격증을돌려받을수 있다. 둘째, 내가앞으로 개업하면 변호사 협회에서 나를 적당하게 배려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방법이 없어 문장을 썼다고 설명했으며, 또 마음을 어기면서까지 잘못했다고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첫 번째 면담은 결과가 없이 끝났다.

두 번째 면담은 다롄시 사법국에서 했는데, 부국장과 변호 공증처의 처장이 참가했다. 부국장은 먼저 내가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 문장을 보내지 말아야 하고, 문장을 써도 국가 책임자를 겨냥하지 말아야 하며, 말하는 기세가 그렇게 맹렬하지 말아야 하며, 더구나 파룬궁 문제를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질책했다. 그는 또 감옥 안에서의 파룬궁 수련생 상황을 말했다. 그는 “감옥 안에서는 파룬궁이 선전하는 것처럼 박해를 당하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당신을 다롄시 감옥에 가서 참관할 수있도록해주겠으니 그곳의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를 당한 사람이 있는지를 보라.”고 말했다.

부국장이 말을 다한 후, 나는 또 먼저 해외 인터넷에서 발표한 문장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다음 그의 견해에 대해 질의했다.

“첫째,아내는겨우 거리에서스티커로 된 종이쪽지 몇 장을 붙였다는 이유만으로 선고에 직면했다. 내가 상하이로 가서 경찰을 찾아 법률을 따졌으나 그 사람들은전혀 듣지 않았다. ‘상부에서 결정하므로 우리에게는 결정권이 없다.’는 한 마디 말을 하며 곧 나를 내쫓았다. 변호사임에도 법률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가족을 보호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인터넷에서 문장을 써 호소했다. 이것은 내가 어쩔 수 없이 한 것이고, 나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 둘째,나는단지 법률문제만 말하는 문장을 썼다. 당신은 사법계의 고급 공무원으로서 내가 제기한 질의가도대체 맞는지의 여부에만초점을 맞춰야 한다. 문장이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내보낸 것이고 누구를 겨냥했으며 말투가 어떠한지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셋째, 당신도 당연히 많은 법률 전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형법 전문가10명을 요청해 그들에게 내가 쓴 문장에 대해 견해를 발표시켜도 무방하다. 만약 그 중의 한 전문가가, 내가 허튼소리를 한다고 말한다면, 그럼 당신이 오늘 제기한 모든 요구를 나는 전부 동의하겠다.”

파룬궁을 박해한 불법성, 파룬궁수련생에 죄를 씌운황당함은체재 내에서 법률 조목을 조금 아는 모든 공무원은 모두마주할 방법이 없다. 부국장은 맨 마지막에 “가오즈성(高智晟)은 어떤가? 리더쥔(李德君)은 어떤가?당신보다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에게 붙잡혔다!”며공갈협박으로 우리의 면담을 끝냈다.

정치법률계의 사악한 세력은 바로 이러했다. 좋은 사람을 박해하는 것을 영광스러운 정치 임무로 여겨 완수했고, 정치 자본으로 삼아 자랑했으며, 죄악을 축적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로 삼아 공포감을 조성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오늘날의 관료 사회에는 또 이러한 사람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2008년 7월, 저우융캉(周永康)의 안정유지계통은 올림픽 안전 보장을 이유로 파룬궁수련생 납치를 진행했다. 당시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이미 꼬박 9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현행 법률의 틀에서 체계적으로 형법 300조로 파룬궁수련생에게 강압한 황당무계함을 논술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 곧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에 공개편지를 썼다. 게다가 전자 우편의 방식으로 최고 입법기관에 송달했다. 우편을 보냈으나 마치 함흥차사와 같이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2008년 8월, 다롄시 진저우구(金州區)법원에서는 파룬궁수련생 구리(谷麗), 추수핑(邱淑萍)에 대해 불법 법정 심문을 진행했다. 그러나 변호사증이 없어 나는 어쩔 수 없이 공민 대리신분으로 법정에 나섰다. 동시에다롄 진저우의 파룬궁수련생 옌서우린(閻壽林)을 변호했다.

검찰관은 형법을 알고 있었고, 범죄를 구성하는 네 개 요소 이 문제에서 앞뒤가 모순돼 판사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법정 심문 후, 법정 경찰을 포함해 거의 모든 방청자의 눈빛에서 우리들에 대해 선의와인정하는 것이드러났다. 당사자가 유무죄한지에 관한 문제에서 그들은 분명 모두 똑똑히 들었다. 일부 가족의 태도도 분노에서 기쁨으로 바뀌었다. 나를 보는 눈빛은재판 전 경시에서 탄복으로 변했다. 한 당사자의 남편은 주도적으로긍정적인 소감을 말하고,재판 전 비우호적이었던 태도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나타냈다.

그날 저녁, 나는 ‘오늘 운 좋게파룬궁 신앙자를 위해 변호하다’라는 문장 한 편을 써서 대기원 인터넷 사이트에 발표했다. 8년이 지났다. 파룬궁수련생이 불법 재판을 당한 사건 중, 검사, 판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방청자 중 법률 무뢰한도 형법 300조의 죄명을 파룬궁수련생에게 뒤집어씌운 것은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집법자이면서도 오늘 여전히 양심을 잃어버려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고 있는범죄자는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것 같이 제멋대로다.

이 경험은 나에게, 저우융캉 통제하의 사법계에서 사건에 대한 개정(開庭) 효과와 선고 결과는항상 상반됨을 알려주었다.내가 대리한 그 파룬궁수련생은 4년형을 당했는데, 다른 한 명 보다1년이나 더 많았다. 게다가 진저우구 법원에서는 나에게선고문서 송달을 거부했고, 내가 법원으로 가서 주심 판사를 찾아 요구해도 주지 않았다.

법률을 적용하는 방면에서 모든 법률 조목은 파룬궁 문제를 언급하기만 하면 일률적으로 변형되고 성질이 변하는 화학 반응이 발생했고(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다른 사건이 얼마나 많이 공정하다는 것을의미하지는 않는다),지상공문이 되게 했다. 예를 들면, 법에 명시한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규정 및 상부에서 언급한, 마땅히 송달해야 할 선고문서의 절차적인 규정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끌며 규모화시켜남용하고 악용했는데, 예를 들면 형법 300조로 파룬궁수련생을 강압했다. 그리고 또 완전히 시비를 전도해 선을 징벌하고 악을 선전했는데, 예를 들면 잘못을바로 잡는상소나 제소하는 이런구조를 순전히 잘못을 강화하고 죄악을서로 돕는구조가 되게 했다.

2009년 6월, 파룬궁수련생 충르쉬(叢日旭)는 간징쯔구(甘井子區)법원에서 불법 법정 심문을 받았다. 나는 베이징의 변호사와 함께 법정에 나서서 변호를 했는데, 그날 곧 어떤 사람이 곁에 따라 다니며 미행하는 것을 발견했다.

2009년 7월 4일, 나는 친구의 집에서 점심밥을 먹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 집안의 모든 문과 창문을 열어놓았는데,밥을 먹다가 의외의 재난을 초래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때, 갑자기 신분이 불분명한 몇사람이 들어와서 낮은 소리로 “움직이지 마라. 우리는 다롄시 공안국 사람들이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수상하게 도처를 살펴보았다.

파룬궁수련생이 ‘모였다’는 명목으로 함부로 납치했는데, 이러한 내용은밍후이왕에 거의 매일 보도된다. 이런악행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모두에게 계속 밥을 먹자고 부르며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나의 말이 막 끝나자 그 중 한 사람이 나를가리키며 “그를 끌고 가라”고 말했다. 보아하니 내가 하찮게 대한 것이 온 손님을 노하게 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이내 뒤에서서 나에게 일어나서 자기들과 함께 가자고 했으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은내 어깨를 잡아당겨 붙잡은 후 힘껏 집어 던졌다. 나는의자에서 땅으로 내던져지고, 또 뒷방에서 상대적으로 넓은 바깥방으로 내던져졌다. 바깥방은 그들로 꽉 차 있었는데, 다리로 걷어차기, 디디기, 밟는 방식으로 수도 없이내 몸곳곳을 습격했다.

그중 한 사람이내 이름을 부르며 야단칠 때, 나는 그들이 나 때문에온 것이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모두연루된 것을알았다. 나는 “기왕 당신들이 나 때문에온 이상, 그들은 풀어주라.”고 한 마디 외쳤다.내말에 그들은 나를비난하고 더욱더 필사적으로 발기술을 보여주었다.

그날 동시에 납치당한 사람은13명인데, 다롄 수산학원 미술 교사 펑강(馮剛)을 포함한다. 펑강은 2009년 8월 14일에 세상을 떴는데, 현재 시신은 여전히 화장하지 않고 있다. 펑강의 사망은 의문점이 매우 많았다. 인터넷을 보면펑강은 그림, 조각 방면에서 조예가 매우 깊다고 평가되어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몸이 건강해졌고 사상 경지가 끊임없이 승화되어, 예술 창작에서 더욱 성숙되고 순정한 보기 드문 인재가 되었다. 펑강은 아주 많은 좋은 예술 구상이 있었는데, 줄곧 사회에 대해 세인에 대해 이로움이 있는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사망은 깊은 유감을 가져 왔고, 영원히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남겼다.

펑강은 나와 연루되어 사망했다.

오늘날 정권을 잡은 자는 펑강의 사망 원인을 똑똑히 조사해 세인에게 알려 줄 책임이 있다.

그 후에 알아본 상황에 근거하면,나를 납치한 것은저우융캉의 비밀 지령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오후, 납치자는 나를 진슈(錦繡) 주택 단지 파출소로 납치했다. 파출소 2층 홀에는 큰 회의용 테이블이 있었고, 주변에는의자가 10개 있었다. 그들은 나를 의자에 던졌는데, 사복을 입은 한 사람(그 후 그가 바로 장기간 파룬궁에 대한박해를 책임진 국가보안 자오젠(焦健)임을 알았음)이 옆에서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빈번히 전화를 받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가 조금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물었다.

“업무를 처리할 때는신분증을보여야 한다. 당신은 당신이 어느 부서 사람이며,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가?”

“나는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겠다.”며 그는 무시했다.

“사람을 붙잡는 데는이유가 필요하다. 당신은당연히왜 나를 붙잡았는지를 나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는 “이것도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겠다.”고한 마디 반복했다.

“나는 당신에게 협조할 필요가 없다!” 나는 한 마디 낮게 소리 지르며 의자에서 뛰어내려 신속하게 복도 입구로 향했다.

머리를 숙이고 아래를 보며 막계단 절반까지달려갔을 때, 1층 철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자오젠은 고함치며 나를 따라잡았다. 그의 고함소리에 2층에서다른 경찰 3명이 왔다. 총 이 4명은 나를계단 중간에서 2층 계단 입구까지 잡아당겨가서는 즉시 보복식으로 에워싸고 구타했다.

4명의 체격은 모두 괜찮았다. 그 후에자오젠은 축구를몹시 좋아하고, 키다리 부소장은 무더운 날에 단단한 경찰화를 신고 있었으며,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했고 또 한 사람은 체격이 튼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구타하다가 지치자 나를 회의용 테이블 옆으로 질질 끌어 당겼다. 나는 막대여섯 걸음을걸었는데, 갑자기 오른쪽 발꿈치가 마비되어 땅을 밟아도 감각이 없었다. 사실 당시 거의 내가 걸을 필요가 없이 두 사람이 나를 잡아당겨 회의용 테이블 옆의 땅에 던졌다. 자오젠은 여전히화가 풀리지 않아 계속 욕설을 퍼붓고 발로내 머리를 몇 번 걷어찼다

복통과 함께 오른쪽 복사뼈 부위가 천천히 붉어졌다가 자색으로 변했다. 저녁 무렵에 그들은 나를 끌고 1층으로 가서철 우리 안에 가뒀다. 그들은 내가 걷는 자세를 보고내가 발을 다친 것을발견했다.

그날 저녁, 그들은 나를 데리고 다롄시 중심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다. 의사는 나에게 “발을 왜 다쳤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구체적인 원인은 나도 모른다. 먼저 몇걸음 도망갔다가 그 후 한바탕 구타를 당했다.”고 대답했다.

“첫 번째 기록이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왜 상해를 입었는지 반드시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공정하게 논하면, 발에 부상을 입은데는 두 가지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납치당한 후, 그들이 나에게 신발을못 신게했기 때문이다. 나는 맨발로 그들에게 끌려 파출소로 갔고, 내가 2층에서 아래로 달릴 때, 계단 절반까지 달리는 과정 중, 보폭이 비교적커서발꿈치에 너무 큰 압력을 받아 조성된 것일 수 있다.

두 번째 원인은 바로 내가 도망쳤다가 보복성으로 에워싸여 구타당하는 과정에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나 개인은 첫 번째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를 막론하고 법률에서 ‘긴급 피난’의 규정에따르면,내가 당한 상해는 위험을 만든 자, 이를테면 나를 납치한 사람과 부서에서책임져야 한다.

나는 의사에게 “당신은 나 개인의 원인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기록하라”고 알려주었다.

의사는 거듭 “나의 이 첫 번째 기록이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반드시분명하게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나는 “분명하게 생각하고 말한 것이다.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 경찰은 나를 구치소로 보냈는데 구치소에서는 상처를 검사하고 수감을 거부했다. 7월 5일 오전, 그들은 나를 끌고 다시 중심병원으로 가서 깁스를 하고, 오후에 다시 구치소로 보냈으나, 구치소에서는 여전히 수감을 거부했다. 경찰이 전화로 통화한 후, 구치소에서는 규정을 어기고 나를 수감했다.

구치소 경찰은 감방의 죄수에게 나를 주시하라는 통지를 내렸는데,나에게 깁스를 감은 붕대를만지지 못하게 했다. 대략 1개월 후, 발꿈치는 에이는 듯이 아팠는데, 마침 자오젠이 이른바 심문을 하러 왔을 때에 마주쳤다. 나는 그의 앞에서 붕대를 풀었다가 발꿈치 피부가 문드러져 흰 뼈가 드러난 것을 보았다. 그 뒤로 구치소 측은파출소와 협조해 며칠에 한 번씩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약을 갈아주었다.

대략 8월 중순, 구치소에는 경찰 한 명을 배치해 함께 중심 병원으로 가서 약을 바꾸고, 아울러 주도적으로 엑스레이를 찍어 검사할 것을제기했다. 아마 구치소측은 파출소에서이 일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병원의 기술에 따르면, 구치소 경찰은 매우 화가 나서 그들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발에 부상을 입은 상태가 심각하다고 기술했다. 파출소에서는 나에게수술을 받게 해주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즉시 무조건 나의 자유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쌍방은 수술문제에서 서로 양보 없이 맞섰다. 어느 날, 중심 병원 정형외과 주임 량우(梁武)가 경찰과 함께 나를 찾아왔는데, 매우 사나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수술을 받는 문제에서 당신은무조건 협조해야 한다.여기는 공산당의 병원이다. 우리는 공산당의 말을 듣는다. 당신이 협조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의 전신을 마취시켜 강제로 수술을 받게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이렇게 흉악한 의사는 처음 보았다.

8월 25일 오전 8시 반, 나는 수술대에놓여졌다. 대략 1시간기다린끝에 량우(梁武)가 노기등등하게 들어와 “(공안국이) 우리를 핍박해 오전에 수술을 받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수술비용 계산서는 점심에야 줄 수 있다.우리 병원 규정에 따라 수술비를받지 않으면수술 기계를다쓸 수 없다.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수술을 받는 과정 중, 나는 량우와 그의 조수가 낮은 소리로,적당한형태의 사이즈인 강철로 된 못이 없어다른 유형의 사이즈로 된 것을 그런대로쓸 수밖에 없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 그들이 나에게 사용한 마취약은 허리 부위 이하를 마취시키는 것이었다. 강철로 된 못을 대략 다 박은 후, 수술대 위에서 엑스레이 기계로 검사할 때, 나는 그들이 낮은 소리로 “빗나가게 맞췄다.”고 한 마디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 뒤 그들은 또 나에게 마취약 한 대를 맞혔다. 다 주사한 후, 나는 의식을 잃었다.

(2010년 6월,우리 가족의 강력한 요구에 응해 선양 제1감옥에서 나를 데리고 외부 병원으로 가서 발을 진찰받게 했을 때, 중국 의과대학 부속 제2병원의 한 수염도 눈썹도 모두 새하얀 노 교수가 엑스레이 필름을 보고나서 내가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지를 물었다. 그리고“당신들 다롄의 의사는 그야말로 수준이 너무 높다!”라는 한 마디 말을 했다. 나는 그가 비웃고 있음을 알아듣고, 그에게왜 이렇게 말하는지를 물었는데, 그는 옆의 경찰을 보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원문발표: 2018년 7월 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7/9/3708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