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청소년 파룬궁수련인이 박해로 사망한 일곱 사례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대륙종합보도) 혈기왕성한 시기는 세상물정을 잘 모르고, 미래에 대한 동경과 환상으로 가득 차며 미래와 희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중국 대륙의 일부 꽃다운 나이의 청소년은 진, 선, 인(真, 善, 忍)을 믿음으로 인해 혹은 부모의 믿음으로 인해 오히려 장쩌민(江澤民) 범죄 집단과 중공(중국공산당) 610 특무조직에 의해 학대적인 박해를 당했다. 어린 심령은 감당하지 말아야할 극심한 압력과 박해를 감당했으며, 심지어 박해로 사망했다.

다음은 청소년 파룬궁수련인이 박해로 사망한 사례이다.

1. 품행과 학문이 다 훌륭한 좋은 학생 천잉, 박해로 사망하다

천잉(陳英, 여, 당시 나이 17세)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자무쓰시(佳木斯市) 수런(樹人)중고등학교 1학년 2반 부반장이자 지리과 대표이다. 품행과 학문이 다 훌륭했고, 서예를 좋아했는데 학교 내에서 상을 받은 적도 있다. 1999년 7월, 장(江) 씨 범죄집단과 중공(중국공산당)이 잔혹하게 파룬궁을 박해한 후, 즉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는데 불법적으로 압송돼 돌아오는 도중에 박해로 사망했다.

천잉은 1982년 7월 1일 출생으로 부모는 그녀가 5개월 됐을 때 이혼했다. 천잉은 자무쓰시 수런중고등학교 고 1학년(2반)의 부반장이자 지리과 대표였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그녀는 사부님께서 가르치신 진, 선, 인(真, 善, 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었으며, 다른 사람을 즐겨 도와준 품행과 학문이 다 훌륭한 예쁜 소녀였다. 그녀는 각종 오락 및 체육활동을 좋아해 여러 가지 상을 받았다. 그녀는 특히 서예를 즐겼는데, 여러 차례 서예 영예증서를 받은 적이 있다. 학교 내외에서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그해 7월 19일, 학교에서는 또 그녀에게 ‘모범생’ 증서를 수여했다. 집에서 그녀는 더구나 어머니, 외할머니에게 좋은 아이였다.

1996년, 중공 대변인 ‘광밍(光明)일보’에서 다른 꿍꿍이셈이 있는 자의 문장을 발간해 파룬궁을 모독했다. 14세인 천잉은 즉시 ‘광밍(光明)일보’에 편지를 써서 자신이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후 이로움을 얻은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1999년 7월, ‘과학기술지광(科技之光)’에서 거듭 대법을 모독한 문장을 발간했는데, 천잉과 수련인은 연대서명하여 ‘과학기술지광’에 이메일 5통을 보냈다.

1999년 7월 20일, 장 씨 범죄 집단과 중공은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틀 후인 7월 22일, 막 만 17세가 된 천잉은 많은 파룬궁수련인과 마찬가지로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7월 29일, 가족은 톈안문 광장으로 가서 천잉을 찾아 그날 점심에 그녀를 데리고 자무쓰로 돌아왔다. 그러나 천잉은 마음속의 소원을 완수하지 못한 이유로, 기차가 친황다오(秦皇島)에서 정차했을 때 기회를 틈타 또 베이징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그녀는 3차례나 베이징의 경찰에게 납치됐는데, 두 차례는 모두 영리하게 벗어났다.

8월 15일, 천잉은 세 번째로 경찰에게 납치돼 베이징 주재 자무쓰 사무실에 불법 감금됐다. 베이징 주재 자무쓰 사무실에는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납치하는 경찰이 있었는데, 1개월에 한 무리씩 바꿨다. 당시는 자무쓰 공안국 ‘610’의 정법위원회 리춘유(李純友) 등이었다. 리춘유는 당시 천잉 등에게 수갑을 강제로 철관 위에 채워 박해를 했는데, 먹고 마시지 못하게 했으며 또 그녀의 학교,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소식에 따르면, 리춘유는 8월 16일에 직접 사람을 거느리고 천잉을 자무쓰로 압송해갔다고 한다. 도중에 이 경찰들은 천잉에게 모욕, 구타, 공갈협박으로 박해를 했다. 그녀를 수갑으로 차체에 채워두었다. 화장실에 갈 때는 수갑만 풀어주고 문을 못 닫게 했는데, 경찰이 문 앞에 서서 지키고 있었다. 17세인 천잉은 극심한 모욕을 당했다. 그녀는 화장실로 간 후 재빨리 문을 닫은 다음, 화장실의 작은 창문으로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소식에 따르면, 그날 오후 2시 34분에 기차는 20여 리를 달리다가 비로소 멈춰 섰다. 리춘유와 두 번째 승무원조의 여객 전무 등은 천잉을 눙룬(豐潤)병원으로 보냈다. 소식에 따르면, 그날 저녁 6시가 넘어서 리춘유는 “살 수 있을지를 봐서 산소를 뽑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목적은 숨이 붙어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에 또 직접 눙룬 화장터로 보내 냉동시켰다.

8월 17일 저녁, 천잉의 어머니, 외삼촌, 반주임 차이(蔡) 교사는 자무쓰시 공안국 국장 쿵(孔) 모에 의해 ‘눙룬 여관’으로 끌려갔다. 리춘유는 그들에게 이른바 사실 경과를 말했다. 그는 천잉을 3차례 붙잡으려 했으나 모두 붙잡지 못했으므로 직접 천잉을 베이징에서 끌고 돌아와 ‘공을 세워 과오를 메우려’ 했다고 말했다. 리춘유는 또 천잉의 가족에게 “당신의 아이를 내가 때렸습니다.”라고 스스로 승인했다.

그날 저녁, 중공 대변인 중앙텔레비전방송국에서는 톈진(天津) 텔레비전방송국 기자에게 지시를 내려 천잉의 어머니 천슈링(陳秀玲)을 취재하게 하여, 그녀에게 수련을 포기하도록 위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딸을 보지 못한다고 위협했다. 천슈링은 당시 죽고 싶을 정도로 슬펐다. 자신과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가던 딸은 짧은 26일 사이에 그녀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그녀는 딸을 마지막으로 간절히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을 어기고 거짓말을 하여 그날 경찰과 함께 화장터로 갔다. 그러나 경찰은 또 그녀에게 단지 딸의 시신을 한번 대충 보게 했을 뿐이다.

이튿날, 1999년 8월 19일, 중공 매체 대변인 중앙텔레비전방송국에서는 가짜 뉴스를 방송했다. 천잉이 정신이 흐리멍덩해 여러 차례 자살하려 했다는데, 가족이 한눈을 판 틈을 타서 기차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고 말했다. ‘싼장(三江) 석간신문’에서도 그대로 천잉에 대해 거짓말을 해 헐뜯었다. 천잉의 비정상적인 사망은 장 씨 깡패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해 조성된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 일을 저지른 자는 또 전력을 다해 진상을 똑똑히 알지 못하는 국민을 속였다.

천잉, 이렇게 젊고 예쁘며 영리하고 철이 든 좋은 아이는, 단지 베이징으로 가서 진실한 말을 했고, 단지 진선인을 믿어 좋은 사람으로 되려 했다는 이유로, 불분명하게 박해로 사망했다.

2. 지린(吉林) 소녀가 무참하게 구타로 사망

추충루이(初叢銳)는 꽃다운 나이인 19세이며, 지린성(吉林省) 수란(舒蘭) 톈더(天德) 쉬자촌(徐家村) 1사(一社)의 파룬궁수련인으로, 고향에서 그녀를 아는 사람은 모두 그녀를 좋다고 말했다.

2000년 8월, 추충루이는 대법을 실증하러 스스로 베이징으로 갔다가 강제로 납치돼 현지로 돌아와, 톈더향(天德鄉)에 불법 감금됐다. 정념으로 뛰쳐나온 후, 그녀는 수란시의 한 음식점에서 일을 했다. 추충루이의 일언일행이 대법의 상화함, 아름다움을 체현해 혼자서 두 사람의 일을 했으므로, 음식점 주인은 그녀에 대한 인상이 극히 좋았다. 그는 “이곳에서 일을 하세요. 그들이 또 붙잡으면 내가 보호해 줄게요.”라고 말했다.

2000년 12월 1일, 추충루이는 대법을 실증하러 또 베이징에 갔다가 톈안먼 광장에서 납치됐다. 대략 12월 13일에 베이징 하이뎬(海澱)감옥에서 사망했다. 베이징 경찰 측은 그녀가 단식해 사망했다고 말했는데, 의사는 승인하지 않았다. 검시를 거쳐 사망자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코가 구타로 납작하게 되고, 얼굴도 변형돼 완전히 정상적인 사람 모습이 없었다. 추충루이의 할아버지는 당시 사람을 식별하러 베이징으로 갔는데, 자신의 손녀의 얼굴이 구타로 변형되고 코가 납작하게 된 것을 발견하고 손녀를 안고 대성통곡했다.

추충루이의 고향 동네 노인은 그녀가 경찰에게 구타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극심한 놀라움과 분개를 나타냈다. 이렇게 좋은 아이가 무참하게 구타로 죽다니, 정말 벌 받을 짓을 하는구나! 추충루이의 아버지는 눈물을 너무 흘려 눈물조차 말라버렸다. 어머니도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당시 실성했는데,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 겨우 몸을 지탱했다.

3. 네이멍구 장이차오, 믿음 때문에 불법해고 당하고, 일하는 중 억울하게 사망

1998년, 네이멍구 훠린궈러시(霍林郭勒市) 파룬궁수련인 푸구이잉(符桂英)의 11세인 딸 장이차오(張毅超)는 어머니를 따라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1999년 9월, 푸구이잉은 대법을 실증하러 베이징으로 갔다가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2000년,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선동해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비난하는 서명을 하도록 했다. 13세인 장이차오는 자신의 합법적인 권리를 수호해 서명을 거부했다가, 오히려 당시의 학교 당위원회 서기 멍셴민(孟憲民)에게 불려가 지도를 받았다. 훠린궈러시 610 및 공안국에서는 또 학교에 압력을 가해 여러 차례 그녀에게 보증서를 쓰는 것에 서명하도록 요구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적하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장이차오는 집으로 돌아와 혼자 몰래 울며 감히 집에서 나서서 처리하지 못하게 했다. 반주임과 학교 교장 및 당위원회 서기가 더욱 호된 징벌을 내릴까 두려워서였다.

2001년 3월 1일, 훠린궈러시 제4중학교에서는 그녀의 부모가 모두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핍박해 학업을 중지시켰다. 그 후 집단회사의 협조를 거쳐 학교에서는 동의했다. 그러나 학교 당위원회 서기 멍셴민은 매주 그녀를 찾아 지도를 했고, 강제로 그녀에게 매주 서면자료를 쓰도록 했으며, 또 그녀에게 대법, 부모와의 관계를 단절하도록 핍박했다.

2001년 5월 25일, 장이차오의 부모는 또다시 납치를 당해 그녀 혼자 집에 있었다. 훠린궈러시 610 및 공안국 난광창(南廣場) 파출소의 친바오쿠(秦寶庫), 자오슈파(趙秀發), 디퉈(翟拓), 우리지(烏力吉) 등 10여 명의 악인(惡人)은 그녀의 집으로 가서 박해 증거를 수집하고, 구들을 뜯고 소파를 뜯으며 집안을 뒤져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남새움(야채를 넣어두는 움막)마저 석자나 팠다. 29일 저녁, 아이들이 그녀 집으로 가서 문을 부수고 유리창도 부쉈다. 장이차오는 더욱 더 공포를 느꼈다. 같은 해 9월 17일, 장이차오의 부모는 동시에 죄수호송차로 납치돼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소로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집안에는 장이차오 혼자만 남아있었다. 당시 푸구이잉은 “나는 딸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국가보안대대, 610의 악인 친바오쿠, 디퉈는 오히려 “당신들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을 아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억지로 그들 두 부부를 차로 끌어올렸다.

2002년 3월 1일, 훠린궈러시 제4중학교에서는 그녀의 부모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장이차오를 불법적으로 퇴학시켰다. 장이차오는 핍박에 못 이겨 유랑하며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모욕을 당했다. 어느 하루 밤, 한 나쁜 자가 베란다에서 2층으로 기어 올라가 유리를 부수고 그녀의 집에 들이닥쳐 장이차오를 성추행했다.

2002년 7월, 생명이 위급해진 푸구이잉이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장이차오는 어머니의 두 눈이 꺼지고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윈 모습을 보았는데, 심한 충격을 받았다. 중공 사당 610특무조직에서 만들어낸 공포를 피하기 위해 나이가 겨우 15세인 장이차오는 핍박에 못 이겨 고향을 떠나 선양(瀋陽)과 다롄(大連) 등지로 가서 일을 했다.

불행하게도 그 후 심신이 피곤해진 장이차오가 일을 하다가 또 폐결핵에 감염됐다. 그녀는 치료할 돈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여러 차례 현지 610의 잔인한 박해를 당하고, 현지 주변 환경에 대한 적대심과 공포 때문에 그녀는 매우 두려웠다. 장이차오는 외지에서 몇 차례나 기절했다. 부모가 장이차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2005년 4월 6일 아침 7시 20분에 훠린궈러시 인민병원 전염병과에서 겨우 18세인 꽃다운 소녀가 억울하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4. 류첸, 대법을 수련해 7일 만에 백혈병 완쾌, 핍박으로 학업 중단당한 그녀가 5일 만에 갑작스레 사망

류첸(劉倩, 여)은 허베이 슝현(雄縣) 거거좡촌(葛各莊村)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다. 2003년 11월 급성 백혈병에 걸렸는데, 병원에서는 병이 위급하다고 했다. 그녀는 수시로 생명 위험이 있었다. 가족은 그녀가 죽은 후 매장할 옷까지도 준비해 놓았다. 비통 속에서 어머니는 예전에 파룬궁 진상전단지에서, 백혈병에 걸린 15세 소녀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완쾌됐던 것이 생각나서 곧 딸을 데리고 파룬궁을 연마해 보려는 결심을 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후, 모녀는 함께 ‘전법륜(轉法輪)’을 공부했다. 일주일 동안 배운 후, 류첸은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류첸의 모든 친척은 파룬궁의 신기함을 칭송하였다.

류첸은 신바람이 나서 오랫동안 가지 못한 학교에 갔다. 하지만 교사, 교장은 그녀가 파룬궁을 연마했다는 것을 안 후, 강제로 그녀에게 연마하지 않는다고 보증하도록 했다. 류첸은 공부하러 학교에 가지 않을지언정 양심을 어기지 않았다. 어머니도 엄숙한 말로 교장의 요구를 거부했다. 류첸은 강제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어린 마음은 심한 충격과 압력을 받았다.

이튿날, 류첸은 그녀의 집에 온 초등학교 교장을 보았는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물을 흘리며 교장을 가리키며 분개해서 “그 사람, 그 사람, 그 사람…….” 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류첸의 정신, 몸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다섯 번째 날, 정월 22일에 박해 중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12세였다.

5. 품행과 학업이 훌륭한 14세 여중생 장청, 억울하게 사망

장청(張琤, 여)은 안후이성(安徽省) 차오후시(巢湖市) 취안탕(泉塘) 중학생으로, 품행과 학업이 다 훌륭했다. 1994년, 7세였던 장청은 아버지와 함께 파룬궁을 수련했다. 1999년 ‘7·20’이후 그녀의 아버지는 베이징으로 가서 청원했다가 2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그 기간에 현지 610은 여러 차례 가택 수색을 하여 대법 서적과 대법 사부님의 설법 녹음 비디오를 강탈했다. 학교에서는 이른바 폭로 비판을 했고, 현지 중공 악인(惡人)도 늘 집으로 찾아와 방해하며 강제로 그녀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했다.

아이는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이 감당할 수 없고, 흉악하고 잔인한 공포와 놀라움을 당해 심신에 극심한 상해를 입었다. 결국 2000년 11월에 백혈병 증상이 나타났다. 임종할 즈음에 현지 중공 악인은 전혀 인간성이 없이 노동교양소의 아버지가 아이를 보러 집으로 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듬해 2월, 장청은 눈물을 머금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겨우 14세였다.

'巢湖市初中生张琤'
차오후시 중학생 장청(張琤)

6. 14세 소녀 왕원란 억울하게 사망

왕원란(王文蘭, 여)은 헤이룽장(黑龍江) 솽청시(雙城市) 제8중학교 1학년 학생이다. 10세 때 수업을 받던 그녀는 헤이룽장성 솽청시 둥펑(東風)파출소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2000년 7월 19일, 합법적인 권익을 수호하고,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기 위해 11세인 왕원란은 어머니와 어린 언니를 따라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납치됐다. 베이징 주재 솽청 사무실에서 일주일 동안 감금당한 후, 강제로 현지로 끌려 돌아와 610에게 불법 심문, 위협을 당했다. 게다가 7백 위안(한화 약 12만원)의 벌금을 불법적으로 갈취 당했다. 여러 차례 악독한 경찰에게 교란, 심문, 위협을 당해, 아이는 심신에 극심한 상해를 입었다. 결국 2003년 9월 12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14세였다.

7. 대법을 수련해 심장병이 회복되었으나 박해 당해 지병이 도진 소년 탕스위, 억울하게 사망

탕스위(唐詩雨, 남)는 1989년에 출생했고, 랴오닝 단둥(丹東) 푸춘(福春) 초등학교 학생이다. 선천성 심장병을 앓았는데, 1995년에 병원에서는 그에게 병이 위급하며, 6개월쯤 살 수 있다고 말했다. 1996년에 파룬궁을 수련한 후, 몸은 하루하루 좋아져 학교에 다닐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적도 매우 좋았다.

1999년 7월, 세 식구는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다가 납치됐다. 그 후 부모는 계속 납치, 불법 감금을 당했다. 어머니 자오훙어(趙宏娥)는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온 후, 상태가 매우 나빴다. 어린 스위는 매일 어머니에게 ‘전법륜(轉法輪)’을 읽어 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또 박해를 당하고, 5차 불법 가택 수색을 당하여, 탕스위는 정신적으로 극심한 압력과 고통을 받아 심장병이 도져 2003년 5월 25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14세였다. 이때 그의 아버지 탕이칭은 여전히 감옥에서 박해를 당했는데, 아들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어린 스위가 사망해 1년도 되지 않아 그의 어머니 자오훙어는 학교에서 진상을 알려 고발당했다. 악독한 경찰이 납치를 하려고 하여 그녀는 유랑생활을 했다. 2007년, 두 부부는 또다시 납치를 당해 각각 8년과 9년 형의 불법 선고를 받아, 각각 번시 감옥와 랴오닝성 여자감옥으로 이송되어 박해를 당했다.

이 7명의 아이는 이번 박해 때문에 때 이르게 부모와 가정을 떠났으며 인간 세상을 떠났다. 박해에 참여해 죄를 저지른 주요 책임자는 현지 610과 학교 및 베이징의 610이며, 배후 흑수는 장(江) 씨 범죄 집단과 중공 및 610 박해 체계이다.

원문발표: 2018년 6월 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례총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6/4/3683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