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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한 파룬궁수련자 가족의 자술

글/ 대륙 파룬궁수련자의 가족

[밍후이왕] 우리 아내는 경건한 파룬궁수련자다. 아내가 박해당할 때 나도 이해되지 않았는데 아내가 참을성 있게 진상을 알려 드디어 진상을 알고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온 가족은 모두 대법의 혜택을 받았다. 다음은 우리 집의 박해당한 가슴 아픈 과거와 대법 중 받은 혜택을 말해보려고 한다.

행복한 가정이 산산조각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인데 올해 57세다. 내성적인 아내는 1996년에 동료의 소개로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그 후로부터 그녀의 마음이 평화로워졌고 성격이 활발해졌으며 부지런히 일했고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책임진 반의 성적은 학년에서 줄곧 우수했고 연속 3년 교육국 우수교사와 교학 엘리트 칭호를 받았다. 교학 논문은 앞뒤로 1등상과 3등상을 받았고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좋은 반 주임과 좋은 교사였다.

집에서는 가사를 모두 책임졌고 노인을 모시고 아이를 잘 키웠고 빨래하고 청소했다. 가사를 하지 않아도 나와 따지지 않는 현모양처였다. 우리 집은 아주 화목했고 아주 따뜻했으며 아주 행복했다.

그러나 1999년 ‘7·20’이후, 장쩌민이 파룬궁에 대해 천지를 뒤엎듯이 탄압하고 비방하자 단번에 환경이 크게 바뀌어 여러 방면의 압력이 단번에 몰렸다. 이후로부터 우리 집의 생활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가정에서부터 산산조각이 난 가정으로 됐다.

처음에 학교에서는 아내를 ‘전향’시키려고 했다. 교장은 남편(국장)과 함께 직접 우리 집으로 찾아와 대법 수련을 포기하라고 아내를 설득하러 왔다. 두 지도자는 모두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여러 방면으로 아내에게 권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파룬궁의 아름다움과 깨달은 법리만 말했다. 3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은 아내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들은 실망스러워했지만, 파룬궁이 좋다는 것도 알게 됐다.

2000년 어느 날, 아내는 혼자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베이징 톈안먼에서 납치당했고 현지 경찰에 의해 압송돼 왔다. 그녀가 베이징 청원하러 갔기 때문에 교육국 지도자, 교육부문 지도자, 학교 지도자, 파룬궁을 주관하는 공안국 지도자가 연루 당했다. 많은 지도자가 벌금을 받고 검사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몹시 화가 났다. 공안국 부국장은 4명의 경찰을 데리고 그녀를 욕하고 때렸다. 소식을 들은 나는 걱정하기도 미워하기도 했다. 나는 사람에게 청탁하며 온갖 방법을 다해 아내를 구해내려고 했다. 2개월 후에야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담이 작고 연약한 사람이지만 체면을 극히 차리고 이익을 중시하고 아주 고지식한 사람이다. 화목하고 따뜻했던 집안이 원망하고 싸움하는 집안으로 갑자기 변했다. 국 지도자는 직장 상사에게 내가 집에서 시시각각 아내를 감시하도록 하고 직장의 일을 배치해주지 말라고 했다. 외부의 압력도 높았고 어떤 동료는 비웃었고 어떤 친척들은 날 원망했다.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면 모든 화를 아내에게 퍼부었기 때문에 가정의 불화가 끊임없이 생겼다. 나는 이혼을 이용했는데, 3일 단식하며 아내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협박했어도 타협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술주정으로까지 발전했는데, 술로써 근심을 해소하다가 어떤 때는 술주정을 부렸다. 대법과 리(李) 선생님을 비방하고 물건을 던지고 그녀를 욕했으며 어떤 때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녀를 때리고 대법 책과 리 선생님의 법상 등을 망가뜨렸다.

학교에서는 아내의 한 달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강직시켜 화장실을 청소하게 했다. 그리하여 더욱 그녀의 고집을 원망했고 그땐 많은 사람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왜 좋은 생활을 놔두고 굳이 사회의 압력, 직장의 압력, 가정의 압력을 무릅쓰면서 명리를 포기하고 믿음을 견지해 각 방면의 모욕과 찬밥신세를 당하는가, 나와 가정이 연루 당했는데도 왜 굳이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2000년 한 해 동안 그녀는 2번 수감당했다. 한 번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고, 다른 한 번은 여름방학 반달 전에 지역 경찰이 그녀에게 “베이징에 또 갑니까?”라고 물어봤을 때 “갑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수감했다. 그해의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은 다 구치소에서 지냈다. 그때 나는 곤경에 빠졌다. 노인과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었고 밥도 할 줄 몰랐고 일도 아주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비꼬는 잔소리도 들어야 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고 정말로 고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특히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에 중국공산당은 ‘올림픽의 평안’을 위해 대규모로 불법으로 무고한 파룬궁수련생을 잡아갔다. 7월 말의 어느 날밤 12시쯤에 잠자고 있던 나는 놀라 깨어났다. 한 무리 경찰이 우리 집으로 쳐들어오더니 나와 아내를 제압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그들은 집안을 뒤지고 난장판으로 만들었으며 아내가 경찰에게 잡혀가는 것을 두 눈으로 뻔히 보고 있었다. 경찰은 컴퓨터 등 적지 않은 물건을 가져갔는데 지금까지 되돌려주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재난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나는 견뎌내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잇따라 이 일을 들은 연세 많은 아버지는 혈압이 올라가는 바람에 돌아가셨다. 이중 타격으로 2개월 앓아누웠다. 여동생의 꼬드김에 막 설을 쉬고 정월 대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법원의 사람을 데리고 구치소에 가서 아내와 이혼 절차를 밟았다.

그녀는 내게 가져다준 고통을 보상해주기 위해 이혼해도 날 원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는 만면에 눈물을 흘렸고나는 그녀의홀쭉해진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아팠고 죄책감도 들었다. 그녀에게는 잘못이 없고 아주 착하고 현명한 아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움 속에 있는 그녀에게 비바람을 막아주기는커녕 밖으로 떠밀어냈다. 그녀는 5년 형을 선고받았고, 이혼당했으며, 교사직에서 해고당했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성격과 체격이 약한 그녀가 살아나올 수 있는가를 나는 몹시 걱정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 있는 그녀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고 이 한 차례 박해로 인해 나와 가정에 가져다준 고통을 생각했다. 그녀는 자책했고 밥을 해주는 사람을 다시 찾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교도소에 면회 간 아이에게도 “너의 아빠가 잘 지내면 우리 모녀의 마음이 놓인다.”라고 아빠를 미워하지 말라고 권했다.

2010년 여름, 교도소에 면회 갔는데 교도소에서는 면회하지 못하게 해, 울면서 교도소에서 걸어 나왔다. 이 한 차례 박해는 나, 노인과 아이 및 수많은 가정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상처를 가져다주었겠는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의 체득인데 그야말로 심신이 고달프고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때 살기도 싫었고 정말로 뒤돌아볼 수 없는 과거였다.

아내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진선인(眞善忍)의 믿음을 견지하는데 장쩌민 이 악한 원흉은 못 하게 했고 역사상 전례가 없는 박해를 발동했다. 원래 행복했던 집안을 박해해 산산이 조각나게 만들었다. 이 한 차례 박해는 얼마나 많은 가정이 흩어져 파산당하고, 그들의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에서 유랑하고, 노인을 돌볼 사람이 없게 만들고 고통 속에서 살게 했는가?

그녀와 동시에 3명이 불법 판결을 받았는데 모두 박해당해 사망했다!

건강한 그녀는 박해로 온몸이 병이었다.

교도소에서 나온 그녀는 돌아갈 집이 없고 갈 곳이 없고 경제적 수입도 없었다. ‘610’이 타지에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녀는 할 수 없이 현지에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고 후에 재혼했다.

아내는 원래 아주 건강했는데 교도소에서 박해당해 상처투성이, 병투성이로 됐다. 자궁근종, 오른쪽 유방증식, 심한 림프결핵, 잇몸 염증 등 병에 걸렸다. 제일 심한 것은 림프결핵인데 목에도 어깨에도 큰 종양이 생겼고 목도 비뚤어졌고 기침에 늘 숨이 막히곤 했다. 친척들이 돈을 모아 교도소에서 그녀에게 절제 수술을 해줬지만 1년도 안 됐는데 잘 아물지 않은 칼자국 옆에 또 크고 깊은 림프종양이 자랐다. 심한 잇몸 염증으로 인해 8, 9개 이가 떨어졌고 늘 이가 아파 밥도 먹기 힘들었다. 더욱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왼쪽 눈이 세게 튀어 한쪽 얼굴에 경련이 생기고 따라서 입도 눈도 비뚤어지고 침이 흐르는데도 몰랐고, 시력이 흐릿해졌을 뿐만 아니라 눈이 튀어나와 눈가가 아팠고, 어떤 때 이가 아파 눈을 뜰 수 없고 머리도 아픈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유린당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어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교도소에서 신을 신발이 없어 쓰레기통에서 헌신을 주워 신었는데 발에 무좀이 생겨 발바닥과 발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아주 간지러웠으며 오른쪽 발뒤축에 까만 나무껍질 같은 것이 생겼는데 가려우면서도 아파 정말로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육체적 고통은 참을 수 있으나 정신적 고통은 더욱 뼈에 사무치는 듯 아팠다. 약간의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파출소, ‘610’, 지역사회, 인민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소란을 피우고 전화를 도청했기 때문에 나는 몹시 두려워했다. 그녀가 돌아온 후 나는 매일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입만 열면 풍자하고 비꼬았고 매일 도둑놈을 감시하듯이 그녀를 감시했다. 연공하는 사람이 그녀를 보러 오면 몹시 화난 표정을 지었고 그녀들이 가면 대판 싸웠으며 물건을 뒤지고 수련생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책과 MP3를 다 가져가고 숨겨놓았다. 그녀는 법공부하고 연공하고 싶었지만 나는 못 하게 했다. 그녀는 큰 교도소에서 나온 후 또 작은 교도소에 들어간 것처럼 매일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럽게 지냈다. 그녀는 자유를 위해 구속을 당하지 않기 위해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나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악당과 한패가 됐기 때문이다! 나와 아이의 여러 방면의 노력으로 그녀는 또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박해에 두려워 넘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의지가 더욱 강해졌으며 더욱 이지적이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 더욱 확고해졌다.

대법을 인정하니, 정신상태가 환골탈태

돌아온 후 그녀가 또 떠날까 봐 태도를 좀 개변했고 듣기 싫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법공부하고 연공해도 말리지 않았다. 환경이 느슨해지자 가정 분위기도 화목해졌다. 아내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하고 연공하자 신체의 변화도 아주 빨랐다. 하루하루 변했고 돈 한 푼도 쓰지 않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놓고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녀의 변화는 내게 큰 영향을 줬지만, 아내가 진상을 알려줘도 처음에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문장을 복사해 나에게 보라고도 했다. 처음에 감히 보지 못하고 보는 것을 꺼리자 그녀는 내게 읽어줬다. 천천히 내가 감히 보자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을 알려줬다. 인터넷에 접속할 줄 알자 텔레비전을 적게 보고 주동적으로 인터넷을 돌파해 밍후이왕의 문장을 봤다. 시간이 있으면 함께 ‘9평 공산당’, ‘풍우천지행’, ‘우리는 미래에 알린다’, ‘장쩌민 그 사람’ 등을 봤고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점차 내 생각이 변하고 관념도 개변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사악함을 알자 파룬궁을 박해하는 장쩌민이 아주 미웠고 아내가 왜 믿음을 견지하는 것도 이해됐다. 어떤 때 사부님의 설법도 듣는다. 친구가 오고 아내가 진상 동영상을 틀어주면 나도 옆에서 도와서 말했다. 장쩌민을 고소하는 일로 현지 국가보안 대대장과 인민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을 때 나는 대응할 수도 있었다.

2015년 장(江) 고소 대조 중 나도 인터넷에서 진짜 이름으로 장쩌민 이 악마를 고소했다. 착하고 무고한 파룬궁 제자를 박해하고 톈안먼 분신자살을 조작해 파룬궁에 뒤집어씌우고 잔혹하게 파룬궁 제자의 장기를 산 채로 적출해 이익을 얻는 것은 신과 인간이 다 분노하는 일이라고 그를 고소했다! 장쩌민은 또 우리나라의 넓은 지역을 러시아에 팔아넘겼다…… 죄악이 하늘을 치솟는다.

얼마 안 돼서 내 몸의 질병, 예를 들어 허리디스크, 신장결석, 위병, 정맥혈전, 불면, 고혈압 등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 나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 매일 NTD방송을 볼 뿐만 아니라, 이는 이미 내 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됐다. NTD방송은 많은 것을 알게 했고 미혹, 곤혹 속에서 정신을 차리게 했고 진일보 공산당의 사악함을 똑똑하게 알게 했다. 나의 사상, 관념, 생활은 모두 천지개벽의 변화가 생겼다.

내가 듣고 본 것을 동료와 친구에게 알려줬다. 중국 백성들이 모두 NTD방송을 보고 ‘9평 공산당’, ‘공산당의 최종 목적’을 보고 사악한 공산당의 거짓말에서 걸어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지금 대법이 좋고 사당이 악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건강하고 일도 순조롭게 됐다. 지금 나도 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읽으므로 좋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다. 작년에 전문자격증을 순조롭게 땄고 임금도 올랐으며, 올해에 만족스러운 일자리로 옮기기도 했다. 아내가 연공해 얼마나 많은 행복을 가져다줬는지도 모른다.

3차례 교통사고, 놀람은 있지만, 위험은 없다

오토바이를 타면서 3차례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데 모두 사부님의 보호로 무사했다. 첫 번째는 2007년 여름이었다. 오전에 일을 끝마친 후 동료들과 회식하고 오후에 오토바이를 타고 누나 집에 갔다. 아내가 이튿날 운전면허 시험이 있으니 술을 마시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지만, 동료들의 권유로 참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회식이 끝난 후 오후 2시쯤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다. 누나의 집이 현 시내에 있기 때문에 대략 3시간 걸려야 했다. 그땐 길을 아직 닦지 않았기 때문에 길이 좋지 않았다. 도중에 술기운이 올라오더니 어지럽고 눈을 뜰 수 없었다. 운전하면서 잠이 들은 것 같은데 속도는 여전히 빨랐다. 커브를 돌아야 하는 지역에 도달했는데, 그곳은 사고가 잦은 곳이었다. 흐리멍덩해져서 속도를 줄이고 커브를 돌아야 하는 줄도 몰랐는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돌기둥에 부딪혔다. 돌기둥은 바로 끊어졌고 반발력에 오토바이가 다시 튕겨 나와 나는 시멘트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머리가 먼저 바닥에 떨어지고 다리가 오토바이에 깔렸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머리가 맑아졌고 술기운도 없어졌다. 새로운 안전모가 박살났고 머리 꼭대기에 큰 상처가 생겼고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이마, 볼, 손, 팔에도 찰과상을 입었고 모래알 사이로 피가 스며 나왔다. 당시 다만 좀 두려워했고 아픈 감각은 없었다. 힘을 줘서 오토바이를 세우고 다리를 빼고 천천히 일어서서 팔다리를 움직여봤더니 큰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토바이의 브레이크 등이 망가졌고 기름탱크가 무슨 영문인지 안으로 오목하게 됐다. 오토바이는 망가져 탈 수 없었고 머리에서 피가 아직 흐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봤더니 아무도 없었다. 지나가는 차도 없었고 해가 곧 지려고 하자 좀 두려워서 바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내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녀들은 모두 많이 걱정했다. 외조카가 택시 타고 날 데리러 온다고 했다. 얼마 기다리고 있지 않았는데 대형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서더니 한 사람이 내려왔는데 아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넘어져서 오토바이가 망가졌다고 했다. 그도 현 시내로 간다며 그의 차에 타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가 나를 누나 집까지 데려다줬다.

이상한 것은 이튿날 뜻밖에 순조롭게 운전면허를 따냈다. 사후에 이 일을 생각해보니 두려웠고 자신이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중상을 입지 않았고 찰과상 정도였는데 온몸의 뼈도 별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온 후 이 일에 대해 말하자 아내는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신 것이라고 했다. 그땐 아직 믿지 않았다. 지금 그때의 장면을 회상해보면 정말로 리(李) 대사님께서 보호해주시지 않았더라면 넘어져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당시 대법에 대해 아직 아주 많이 꺼렸고 리 대사님을 비방한 적도 있지만, 자비하신 리 대사님께서는 나의 잘못과 무식을 따지지 않고 오히려 보호해주셨다. 안전모도 산산조각이 났는데 머리는 찰과상뿐이었고 오토바이도 망가졌지만, 몸은 무사했다. 리 대사님 감사합니다! 리 대사님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는 2013년 5월이었다. 동료와 함께 밖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졌으며 적은 비도 내리고 있었다. 동료의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바닥이 좀 미끄럽고 날이 좀 어두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튕겨 떨어졌는데 옷자락이 좌석에 걸렸다. 동료는 모르고 여전히 앞으로 달렸다. 시멘트 바닥 위에서 5, 6m 끌려갔고 오토바이와 동료가 모두 바닥에 넘어졌다. 동료는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나는 허리가 좀 아프고 손과 손목 여러 곳에 찰과상을 입었으며 피가 났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깜짝 놀랐다. 웃옷의 오른쪽 옷깃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생겼고 오른쪽 무릎에도 손바닥만 한 구멍이 생겼다. 사실 당시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 옷이 다 찢어졌지만, 사람은 무사했다. 아내는 “사부님께서 당신을 보호해주신 것이에요.”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믿지 않았으나 사실 앞에서 어찌 해명할 수도 없었다. 당시 난 정말로 바보였다.

세 번째는 2017년 여름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찍 일어나 오토바이를 타고 댐에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러 갔다. 산길이 좁고 달리기 좋지 않았는데, 가는 도중에 굽은 길이 있었다. 나는 브레이크를 잘못 잡아 사람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오토바이는 모래가 있는 진흙땅에 세게 박혔고 사람은 하마터면 작은 골짜기로 떨어질 뻔했다. 여름에 얇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얼굴, 손바닥과 팔 등 여러 곳에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나고 오른쪽 볼에 찰과상을 입었다. 오른쪽 눈 위쪽에 큰 상처를 입었는데 안팎에 모래가 묻어있었고 피가 흘러나왔다. 병원에 가서 상처를 씻고 몇 바늘 기웠고 약도 먹지 않았는데 며칠에 회복됐고 흉터도 남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아내는 여전히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셨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믿었다. 한 동료가 오토바이를 타고 커브를 돌 때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고 10여만 위안을 썼고 지금까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목숨을 구해주신 리 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딸이 대법 속에서 혜택을 받다

다음 우리 딸에 대해 말해보겠다. 2007년 6월, 그녀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고등학교는 외지에 있었다. 수능을 보기 이틀 전 동창과 함께 수능을 볼 물건을 사러 갔다. 그녀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빨리 달리는 오토바이가 그녀를 들이박아 전봇대에 부딪혔다가 다시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바로 졸도했고 의식을 잃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일어나더니 일이 없다며 병원에서 걸어 나왔고 사고를 낸 사람의 돈을 편취하지도 않았다.

딸은 어릴 적부터 아내와 함께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고 모두 진, 선, 인의 법리에 따라 했고, 언제나 ‘파룬따파하오’ 호신부를 지니고 다녔으며 사부님을 믿었기 때문에 무사했고 정상적으로 수능을 봤다. 수능을 본 후에야 전화로 그녀 엄마에게 이 일을 알려줬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학교에 붙었고, 졸업 전에 학교에서 와서 직원을 모집하는 회사에 직접 고용됐으며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그녀는 파룬따파하오를 믿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순조롭다고 했다. 지금 결혼했고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

리(李) 대사님 덕분에 지금 마음이 평화로우며 낙관적이고 건강하며 일이 순조롭고 가정이 화목합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높이 외칩니다.

제19회 세계 파룬따파의 날이 다가올 즈음, 우리 가족은 대법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구도에 감사드립니다! 사부님께서 생신을 즐겁게 보내시길 삼가 축원합니다!

(밍후이왕 2018년 ‘세계 파룬따파의 날을 경축’ 원고 모음)

원문발표: 2018년 5월 1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정의로운 이야기인심이 점차 밝아지다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5/12/3651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