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후난 보도) 우한시(武漢市) 파룬궁수련생 추이하이(崔海)는 5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학대받았다. 우한 여자감옥에서 나올 때는 머리카락이 말라 희게 변했고 피골이 맞닿을 정도로 여위었다. 출소 19일 만인 2018년 1월 1일 향년 69세로 억울하게 사망했다.
중공(중국공산당)이 1999년에 시작한 파룬궁에 대한 광적인 박해 중, 파룬궁을 수련하는 추이하이 여사는 핍박을 못 이겨 유랑생활을 했다. 2012년 10월, 우한시 공안국 국가보안처의 미행으로 납치되어, 세뇌반, 구치소, 안캉(安康) 병원 등 여러 소굴에 불법 감금되어 박해받았다. 극히 악명 높은 우한 세뇌반(외부적으로는 ‘법제교육소’라고 거짓말했음)에서의 2개월 넘는 기간에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약물로 인한 심신 손상, 가혹한 구타, 겨울에 냉수 끼얹기, 잠 못 자게 하기, 담배 연기 코에 넣기 등 고문 학대를 받았다. 2014년 1월 6일 5년의 불법 형을 선고받고 우한 여자감옥으로 이송되어 계속 감금되었다.
추이하이는 어릴 적에 후베이성(湖北省) 희곡(戲曲) 학교에 들어가 공부했고, 졸업 후 군에 입대했다. 전역 후 우한시 화학공업 수출입회사에 들어가 뛰어난 업무능력으로 외지에 파견되어 최고경영자를 맡은 적이 있다. 그녀는 다년간 피로가 쌓여 난치성 중증 간담 결석과 심각한 위장병 그리고 부인병까지 앓아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1996년, 그녀는 인연이 있어 파룬궁을 수련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고질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건강한 몸과 더욱 왕성한 정력 그리고 열정으로 업무에 뛰어들어 회사 책임자의 칭찬을 받고 동료들은 감탄했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해온 18년 사이, 추이하이는 진선인(眞善忍)의 원칙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거듭된 납치와 불법 감금을 당했고, 두 번의 불법형을 선고받았으며, 불법으로 공직에서 해고되어 모든 월급과 복리 혜택이 박탈되었을 뿐만 아니라, 늘 교란을 받았다.
납치, 강제 세뇌, 고문, 약물로 인한 심신 손상
2012년 9월 6일과 7일, 우한시 공안국 국가보안처 경찰이 우한시 한커우(漢口) 샹강로(香港路) 첸수이완(淺水灣)에 있는 추이하이의 집으로 와서 전기를 끊고 문을 두드렸다. 그해 64세인 추이하이는 핍박을 못 이겨 집을 떠났다.
2012년 10월 16일, 추이하이는 광저우에서 시외버스로 윈난(雲南) 쿤밍(昆明)으로 갔다. 셋째 날 낮 12시경 쿤밍에 막 도착하기 전, 스린(石林)에서 우한시 국가보안요원 (남자 2명, 여자 1명)에게 납치된 다음 우한 장한구(江漢區) 얼다오펑(二道棚) 법교반(法教班)으로 이송되어 불법 감금박해를 받았다. 당시 우한 공안국가보안대대의 차이헝(蔡恆, 대장) 등 경찰 7명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차이헝 등은 새벽 세 시가 넘을 때까지 교대로 추이하이를 심문했다. 그 후 법교반의 두목 취선(屈伸)은 그녀를 10여㎡의 작은 방에 배치했다. 잠자는 침대는 부러진 판자였다. 의자 몇 개로 떠받치고 있는 침대에는 악취가 나는 6kg의 이불 하나가 있었다(당시 20여 ℃였음). 방안의 문 옆에는 완쑹(萬松) 지역사회의 주임 2명이, 밖의 대청에는 법교반 요원 2명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보안대대의 경찰 2명을 보태면 모두 6명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대청에서 시끄럽게 굴었다.
이튿날, 국가보안대대의 왕옌(王燕, 대장, 여)이 왔다. 그녀는 추이하이에게 이 사건은 그녀가 책임진다고 말하며 협조하라고 했다. 추이하이는 “나는 나를 박해하도록 당신에게 협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옌은 “우리는 당신의 편지함을 열어 증거를 많이 확보했어요. 이것은 큰 사건입니다. 이곳(법교반)에는 이 건에 연루된 파룬궁수련생을 꽉 채워 가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중형 판결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했다. 며칠 동안 심문해도 추이하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자, 왕옌은 냉소를 지으면서 “당신이 지금 말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어요. 우리는 당신을 다른 데로 끌고 가서 당신의 입을 열게 할 것입니다”라고 위협했다.
10월 23일, 추이하이는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그날 오후에 ‘후베이성 법제교육소’(이하는 세뇌반으로 약칭함)로 이송되었다. 그곳에 도착해 그녀의 혈압이 220으로 나오자 당직 의사는 가두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후베이성과 우한시 ‘610’에 전화하여 한 시간 넘게 이야기해서야 수감했다.
이것은 2010년 전의 탕쉰후(湯遜湖) 후베이성 법제센터이다
이것은 2010년 후의 난후(南湖) 판차오(板橋) 후베이성 법제교육소이다
추이하이는 다음과 같이 하소연했다. “후베이성 세뇌반에서의 70일 동안의 잔혹한 박해 중, 나는 피골이 맞닿아지고 아래턱뼈가 몇 번이나 떨어질 뻔했어요. 혈압은 200이 넘었고, 원래 희끗희끗했던 머리카락은 거의 전부 희게 변했으며, 기억력이 감퇴했고 전신이 늘 떨렸어요. 그리고 오른손 새끼손가락 뼈는 지금도 부어 있으며, 새끼손가락을 한데 모을 수 없게 되어 물건을 들면 계속 떨려요……”
“내가 단식한 지 7일째에 그들은 내 손발을 의자에 묶어 놓고 주사를 맞혔어요. 8일째에 음식물을 주입할 때 나를 꽁꽁 묶어놓고 덩췬(鄧群, 후베이성 법교1팀 부대장)이 한 보안요원에게 나를 누르라고 지시했어요. 당시 방이 꽉 찰 정도의 경찰이 왔어요. 그중 1대대장 장리리(江黎麗), 2대대장 허웨이(何偉), 궁젠(龔健), 덩췬, 후가오웨이(胡高偉), 위(余) 씨 등 경찰 10여 명이 있었어요…… 이어서 내게 음식물을 주입했어요. 의사 완쥔(萬軍)이 지휘하고 샤오훙(小紅)이라는 간호사가 주입했어요. 길이 1m 정도의 굵은 고무호스였어요. 내가 ‘당신들은 내게 고문하는 것’이라고 하자, 덩췬은 ‘당신은 여기가 병원이라고 생각해요? 이곳은 고문하는 곳이오.’라고 했어요.”
“이튿날의 음식물 주입은 더욱 잔인했어요. 고무호스를 목구멍에 찔러 넣었다가 뽑아내기를 몇 번 반복했어요. 목구멍에서 피가 나올 때야 멈췄어요. 그런 고통은 차마 다시 생각할 수 없어요. 이 경찰들은 장기간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면서 인성이 전부 없어지고 사람마다 변태가 되었어요. 내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그들은 한쪽에서 비웃었으며, 심지어 감상하며 피해자의 몸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으로 그들의 짐승 같은 마음을 만족시켰어요. 당시 방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고, 복도에도 꽉 차 있었어요. 그 후 후가오웨이가 ‘장의사(葬儀社)에서 사람이 왔소. 당신이 죽으면 장의사(葬儀社)로 끌어가고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할 거요’라고 했어요.”
“덩췬, 후가오웨이, 위 씨 등 경찰 4명은 교대로 당직을 서며 내가 잠을 자지 못하게 했으며, 우한시 국가보안대대에서 내게 열거한 문제를 교대로 다루도록 했어요. 내가 협조하지 않자 후가오웨이는 ‘우리가 당신을 괴롭힐 방법은 많고도 많소. 당신의 입을 반드시 열게 할 것이오. 당신이 미칠 때까지 괴롭힐 거요.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말이오’라고 위협했어요. 내가 ‘당신은 망상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귀에 담을 수 없는 저질스러운 말을 했어요. 내가 ‘당신은 그야말로 깡패’라고 하자 그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가 깡패라면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할 거요?’라고 했어요.”
“며칠 후, 그들은 방에 파룬궁을 모독하는 만화를 가득 걸어 놓고 나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려고 했어요. 내가 만화 한 장을 찢어버리자 류(劉) 씨는 경찰을 불렀어요. 먼저 후가오웨이가 왔어요. 그리고 젊은 경찰 2명이 현장에 있었어요. 후 씨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잡아당겨 세워두는 고문을 가하고는 의자를 가져갔어요. 내가 땅에 앉자 후 씨는 나를 잡아당겨 책상 위에 엎어 놓았어요. 내가 머리를 책상 위에 떨어뜨리자 후 씨는 내 코에 담배 연기가 들어가게 했어요. 내가 또 땅에 앉자 후 씨는 다가와서 또 담배 연기를 코에 들어가게 했어요. 마지막에는 땅에 물을 끼얹었어요. 이튿날, 덩췬은 출근하자마자 내게 욕을 퍼붓고는 서 있으라고 했어요. 내가 땅에 앉자 덩췬은 구둣발로 나를 걷어찼어요. 그런 다음 그는 경찰 위 씨와 함께 땅에서 나를 끌었어요. 덩췬은 계속 나를 걷어찼으며, 두 사람은 나를 벽 구석으로 끌고 가 세우려고 했어요. 내가 서지 않자 덩췬은 계속 걷어차면서 그의 솜옷으로 내 머리를 감싸고 비틀었어요. 나는 숨이 막혀 얼굴색이 변했어요.”
“그 후 나는 온종일 머리가 흐리멍덩하고 두 다리에 힘이 빠졌으며, 기억력이 뚜렷이 감퇴한 감을 느꼈어요. 나는 그들이 내 밥과 반찬에 약을 넣은 것을 발견했어요. 나는 밥 먹으러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두 유다(배신자)가 나와 함께 먹었어요. 밥 먹을 때마다 야오(姚)라고 부르는 여성 유다가 밥을 위층으로 들고 올라왔어요. 처음에는 그 밥 중에서 내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내 것을 지정해 주었어요. 한 번은 내가 야오 씨와 반찬을 바꿨는데, 그녀는 즉시 반찬을 들고 나가 쏟아버렸어요. 그리고 한번은 내가 고기를 다른 한 유다(그녀는 약에 관한 일을 모름)에게 주었어요. 그녀가 막 먹으려고 하자 야오 씨가 빼앗아서 쏟아버렸어요. 나는 그 후부터 먹지 않고 반찬과 밥을 쏟아버렸어요.”
추이하이는 1년 넘게 잔혹하게 학대받은 후 피골이 맞닿아지고 몸무게가 40kg도 되지 않았다. 몸에는 심각한 중병 증상이 나타나 혈압은 200이 넘었고 원래 희끗희끗했던 머리카락은 거의 전부 희게 변했으며, 기억력이 감퇴했고 전신이 늘 떨렸다. 그리고 오른손 새끼손가락 뼈는 지금도 부어 있으며, 새끼손가락을 한데 모을 수 없게 되어 물건을 들면 계속 떨렸다. 추이하이는 생전에, 먹으면 토하는 증상은 후베이성 법제교육소에서 음식물 주입으로 생긴 후유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거듭된 불법형 선고로 우한 여자감옥에서 박해받다
2013년 12월 20일, 우한시 장한구 법원에서는 우한시 ‘610’의 조종으로 개정하여 추이하이 등 무고한 파룬궁수련생 4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게다가 불법 법정 심문을 진행했다. 법정에서 추이하이는, 자신은 죄가 없고 중국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은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박해와 이번 법정 심문은 불법이며 법 위반이라고 진술했다.
2014년 1월 6일, 우한시 장한구 법원에서는 변호사의 강력한 무죄 변호를 무시하고, 더구나 파룬궁수련생이 무고하게 박해받은 사실을 무시한 채, ‘×교 조직을 이용해 법률실시를 파괴한 죄’(파룬궁은 사람에게 선을 행하도록 가르치고, 중공은 진정한 사교임)를 날조하여 불법으로 추이하이에게 5년 형을, 선쉐우(沈學武)에게 4년 형을, 자오후(趙虎)에게 4년 형을, 천강(陳崗)에게 3년 형을 선고했다.
2014년 1월 8일 오후, 추이하이는 우한시 안캉(安康) 병원에서 ‘판결서’를 받았다. 당시 추이하이는 구두로 상소를 제기하겠다고 했다.
1월 9일, 추이하이의 변호사는 우한시 안캉 병원에서 병이 위독해진 추이하이를 만났다. 허탈 상태에 이른 그녀는 미약한 목소리로 변호사에게 알려주었다. 12월 20일 불법 법정 심문을 진행하기 전 한 때 갑자기 위통 증상이 나타나 밥을 먹고 싶지 않았고 토했다. 불법 법정 심문을 진행한 후에는 점점 밥과 국수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단지 즙만 먹을 수 있었다. 안캉 병원에서는 책임 감당이 두려워 그녀를 지방 병원으로 가서 검사받으라고 강요했다. 추이하이는 12월 25일, 우한시 제11병원으로 끌려가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우한시 공안국 국가보안경찰은 반드시 세허(協和) 병원의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12월 30일, 추이하이는 우한 세허 병원으로 끌려가 검사받았다. 우한시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경찰 우(吳) 씨가 뒤따랐는데, 진단결과는 본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변호사는 안캉 병원 왕(王) 원장의 진술에서 검사결과를 알게 되었다. 십이지장이 협소하고 병변 폐색 증상이 있었는데, 병변 부위가 암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이 외에 또 담낭결석, 고혈압 증상도 있었다. 의사는 추이하이가 유동식을 먹는 데다 양이 매우 적기에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죽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2014년 4월 초, 우한시 중급인민법원에서는 추이하이가 상소서에서 장한구 법원의 불공정한 판결을 언급한 점과 파룬궁수련생이 무고하게 박해받은 사실을 무시한 채, 공공연히 원판결을 유지함으로써, 박해로 생명이 위급해진 추이하이를 후베이성 우한 여자감옥 입감대로 보내 박해하게 했다.
4월 중순, 추이하이의 가족은 후베이성 우한 여자감옥으로 면회하러 갔으나, 감옥 측은 거부했다. 감옥 측은 그녀에 대해 강제 세뇌를 진행하고 타인과 접촉하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가족과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으며, 가족과의 통신과 전화를 허락하지 않는 등 그녀를 엄하게 관리했다. 심지어 잠자고, 식사하고, 세수하고, 화장실 가는 것 등도 여러 명의 죄수에 의해 감시와 제한을 받았다.
7감구역 1분감구역에서 지도원 류젠잉(劉建鷹)은 죄수에게 하루 24시간 동안 그녀를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낮과 밤 두 팀으로 나뉘어 잠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말도록 함으로써 그녀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했다. 추이하이가 경찰의 요구와 명령, 지시를 거부하고 사악에게 협력하지 않으며,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기에, 경찰은 바오자(감시) 요원을 시켜 강제로 체벌을 가했다. 추이하이가 세워두는 고문을 거부하여 바오자 요원과 잡아당기는 과정에 혈압이 200으로 높아졌다. 어떤 때에는 180이 되었는데, 불법 요원은 그녀에게 혈압 낮추는 약을 먹으라고 했다.
추이하이의 박해를 주관한 교도관 한제(韓傑, 30세)는 파룬궁수련생 여러 명을 박해하고 강제 전향에 참여했다. 그리고 배후에서 바오자 요원에게 대법을 모욕하게 하고, 악랄하게 추이하이를 공격하게 하는 등 추이하이의 혈압이 오르도록 유도했다. 그런 다음 강제로 혈압을 낮추고 매일 추이하이의 혈압을 쟀다. 추이하이의 혈압이 정상이 되면 또 같은 방법을 되풀이했다. 게다가 “이것은 당신의 생명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오”라고 큰소리쳤다. 교도관은 강제로 추이하이에게 매일 4층(4층에서 숙박함)에서 내려오게 했다가 8층(노동 지점)까지 서너 차례나 기어오르게 하여 그녀를 괴롭혔으며, 저녁 12시 이후에야 잠자게 했다. 그리고 200여 명의 죄수가 모두 세수를 다 한 후에야 그녀에게 세수하고 뜨거운 목욕물을 사용하도록 했는데, 7, 8시간이 지나서는 냉수가 되어버렸다.겨울에는 더더욱 이러했다. 그리고 다른 요원이 그녀와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오자 요원이 고자질했으며, 연루된 다른 요원도 감점이 되고 감형에 영향 받았다. 이 때문에 사람마다 위험했다. 감옥에서는 강제로 생산 노동을 시켰다. 매일 7시 반부터 8시 반까지 연속 13시간 동안 일했다. 점심과 저녁도 근무구역에서 먹어야 했고 휴식하지 못했다. 추이하이는 노동을 거부했다.
추이하이는 이번에 우한 여자감옥의 상황을 많이 알지 못했다. 그러나 2000년 5월 13일,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는 이유로 3년 형을 선고받고 2001년 5월, 우한 여자감옥 교외의 한시(漢西) 대대로 이송되어 박해받았다. 당시 천잉(陳英, 대장)이라는 교도관은 추이하이에게 체벌을 가했다. 늘 추이하이에게 세워두는 체벌을 가했으며, 한 번 서 있으면 꼬박 2일 동안이었다. 어떤 사람은 천잉이 추이하이를 낮에는 뙤약볕에 세워두고, 저녁에는 추이하이의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추이하이가 더운 것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모기에게 물리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긴 바지는 모기에게 물리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한의 여름은 매우 더웠다. 무더운 날에도 목욕하지 못하게 했고, 잠을 자지도 못하게 했다. 천잉은 추이하이를 꼬박 2일 동안 세워놓았음에도 추이하이가 타협하지 않자, 대법 사부님을 공격하고 욕을 퍼부었으며, 대법을 모독하는 표어를 벽에 붙여놓고 추이하이를 중간에 서 있게 했다. 추이하이가 서 있지 않으면 천잉은 추이하이를 철창에 매달았으며, 풀어준 뒤에도 여전히 그녀가 휴식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꼬박 8일 동안 잠자지 못하게 했다. 추이하이의 두 다리 무릎관절 이하는 심각하게 부어올랐고, 두 발도 부어올라 신발을 신을 수 없었으며, 위층으로 오르고 화장실 가는 것마저 매우 힘들었다. 이러한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어떤 수감자는 몰래 추이하이에게 40호가 넘는 신을 주었다. 그녀는 그제야 겨우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그 후 교도관은 강제로 추이하이에게 밭에서 힘든 농사일을 시켰다. 아침 6시에 일하기 시작했으며 점심때도 휴식하지 못하게 했다. 점심 11시, 12시가 되면 그녀 혼자서 전체 밭일을 뙤약볕을 무릅쓰고 했다. 교도관은 추이하이가 40도의 고온에서 일하는 것을 특별히 악랄한 죄수에게 나무 그늘 아래에서 감시하게 했다. 그 죄수들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도 더위를 견디지 못해 욕을 퍼부었다. 오후에도 계속 강제노동을 시켰다.
교도관은 점심때든지 저녁때든지, 아니면 밤중이든지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이 휴식할 때 죄수에게 대법을 모독하는 세뇌 프로그램을 강제로 보게 했다. 그때 ‘초점황담(焦點謊談)’을 방송해 대법을 공격하고 모함하는 내용이면 강제로 추이하이에게 보게 했다. 게다가 7, 8명의 죄수를 시켜 그녀를 공격했다. 그런 다음 한 번 또 한 번 이른바 ‘인식’을 쓰도록 협박했다. 매일 밤 2, 3시가 되어야 쉴 수 있었고, 이튿날 아침 5시가 넘으면 또 일어나 계속 반복해야 했다. 꼬박 한 여름 동안 4개월 이상 시달렸으며, 추이하이는 시달림으로 가죽밖에 남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녀는 뙤약볕을 쬐어 눈에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한시중대의 교도원 장(張) 씨는 추이하이에게 “당신이 전향하지 않으면 감옥을 나서지 못할 것이오. 지금은 죄수 4명이 당신을 감시하지만, 안 되면 6, 7명까지 늘여 밤낮으로 당신을 괴롭힐 것이오. 우리 이곳에는 죄수가 얼마든지 있소. 나는 당신이 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지 않소”라고 했다.
추이하이는 박해로 사망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여전히 감옥에서 삼퇴를 권한 이름을 잊지 않고 써냈다. 19년 동안의 박해로 더욱 많은 사람이 중공의 사악함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사람에게 약간의 정의와 양심이 있다면, 박해의 사악함을 똑똑히 가릴 수 있고, 중공의 본질을 똑똑히 가릴 수 있으며 사악을 멀리할 수 있다.
우한시 여자감옥은 우한시 차오커우구(礄口區) 바오펑(寶豐) 1로 81호에 있으며, 외부에서는 ‘후베이 제1비단공장’이라고 부른다. 현재 수십 명의 파룬궁수련생을 불법 감금하고 있다.
관련 책임자
장리리(江黎麗), 허웨이(何偉), 궁젠(龔健)은 후베이성 사양(沙洋) 노동교양소 소속이었다. 그중 궁젠은 원래 사양농장(沙洋農場) 자제학교(子弟學校)의 체육교사였는데, 노개농장(勞改農場)을 감옥관리국으로 바꾼 이후 사법 편제로 전환되어 노동교양소로 들어갔다. 파룬궁을 악랄하게 박해하여 발탁되었다. 지금 그는 얼굴을 잘 내밀지 않고 배후에서 교사하고 있다. 교사 받는 사람 중에 아들 한 명이 있다.
장리리(30여 세)는 후베이성 법제교육소 2중대 부대장을 맡고 있다. 경찰학교를 졸업했고 원래 사양 노동교양소 2대대의 악랄한 경찰이다. 그녀는 다년간 전기충격을 가하고 구타하고, 여인의 머리를 잡아당기는 등 악행을 많이 하여 얼굴이 점점 추악하게 변했다.
후가오웨이(남, 30여 세, 키 172cm, 직업: 보디가드)는 원래 39군의 제대군인으로, 이혼했고 변태로 공인받았다. 그는 사람을 괴롭힐 때 흥분한다고 스스로 말하며, 후베이성 법제교육소에서 그를 초빙한 것은 바로 그가 심한 변태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1, 12세인 아들이 있으며, 그를 많이 닮았다.
덩췬(鄧群, 남, 30여 세, 키 178cm, 몸이 뚱뚱함)은 중난(中南) 재경정법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 분야에 들어가기 위해 전에 우한 여자감옥에서 실습한 적이 있다. 그러나 채용되지 못했다. 그 후 자비로 한 연구생 과정을 공부하러 다녔다. 후베이성 법제교육소에 초빙되었으며, 성격이 흉악하고 잔인해 2011년, 임시직원에서 사법 경찰로 전환되었다. 그의 아내는 샤오간(孝感) 주재 15군항공단 소속이었다.
샤오훙(小紅, 여, 20여 세, 키 150cm)은 간호사 학교를 졸업했으며, 자기의 잘못이 폭로되는 것이 두려워 지금껏 진명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바꾸어 말하면, 떳떳하지 못한 나쁜 일을 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후베이성 법제교육소에 초빙되었으며, 평소 덩췬과 함께 어울렸다. 나이가 어리다고만 보지 말라. 그녀는 음식물을 주입하고 사람을 구타할 때 참착하다. 음식물을 주입할 때는 호스를 파룬궁수련생의 코에 꽂았다가 뽑아냄으로써 사람을 괴롭히고 장기를 상하게 하는 목적을 이룬다.
완쥔(萬軍, 남, 50여 세)은 의전(醫專)을 졸업했다. 직장이 잘 돌아가지 않아 연줄을 찾아 후베이성 법제교육소로 가서 음식물 주입을 지도하고, 졸개를 교사해 구타했다. 아들 한 명이 있다.
저우쉐위안(周學元, 남, 후베이성 법제교육소 정치위원(政委)이며, 전 후베이성 사법청 계획재정장비처 부처장이다.
저우수이칭(周水慶, 남, 50여 세)은 후베이성 법제교육소장이다. 원래는 후베이성 사양노동교양소 정치위원(政委)이었으며,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후베이성 법제교육센터를 설립했다.
천(陳) 모(남)는 후베이성 법제교육소 부소장이다.
덩췬은 인터넷에서 ‘덩췬은 여성 파룬궁수련생 박해에 최선을 다했다. 적잖은 파룬궁수련생은 그의 박해로 생명이 위급해졌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덩췬은 학교 졸업 후 직업을 찾지 못했다. 사법 분야에 들어가기 위해 우한 여자감옥에서 실습했으나 채용되지 못했다. 처음에 후베이성 법제교육소에서 임시직원이었으나, 파룬궁 박해에 최선을 다하여 사법경찰로 바뀌었다. 그리고 스스로 돈을 들여 연구생 과정을 공부하여, 변태이던 작은 깡패가 자신을 사회의 엘리트 계층으로 포장하려고 했다. 게다가 가끔 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사업을 논했는데, 사정을 아는 사람은 모두 허풍 장사라고 비웃었다.
장젠(張堅)은 2003년 1월~2008년 2월에 후베이성 사법청장 겸 당위원회 서기, 성 감옥관리국 제1정법위원 겸 당위원회 서기를 맡은 적이 있는데, 2008년 2월부터 2013년 1월까지 후베이성 고급인민법원 상무 부원장 겸 당조직 부서기[정청급(正廳級)]를 맡았으며, 중공 후베이성 제9기, 제10기 성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2013년 1월부터 안후이성(安徽省) 고급인민법원 당조직 서기 겸 원장을 맡았다.
왕다오성(汪道勝)은 2008년 2월부터 2016년 5월까지 후베이성 사법청장, 당위원회 서기 겸 성 감옥관리국 제1정치위원(政委)를 맡았다. 현재 면직되었다.
탄셴전(譚先振)은 2016년 5월부터 지금까지 후베이성 사법청장 겸 당위원회 서기, 후베이성 감옥관리국 제1정치위원(政委), 후베이성위원회 정법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왕옌(王燕, 여, 40세 정도)은 우한시 공안국 국가보안대대장이다.
차이헝(蔡恆, 남)은 후한시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부대장이다.
우즈궈(吳志國, 남, 40세)는 우한시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소속으로, 후베이 첸장(潛江) 사람이다. 2000년 우한 대학 화학과를 졸업했으며, 당시의 ‘정치보안처’에 있었다. 이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류화(劉華, 남, 40여 세)는 우한시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소속이다.
류난화(劉南華, 남)는 우한시 공안국 국가보안지대장(직접 이 사건을 책임짐)이다.
자오젠(焦健, 남)은 우한시 공안국 국가보안지대 부지대장이다.
자오페이(趙飛, 남)는 후베이 사양 사람이다. 2011년 9월부터 2014년 7월까지 후베이성 우한시위원회 상무위원,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부서기, 시(市) 공안국 당위원회 서기, 국장을 맡았다. 2014년 7월부터 지금까지 톈진시(天津市) 정부 당조직 구성원, 시(市) 정법위 부서기, 시 공안국 당위원회 서기, 국장, 감찰관(겸)을 맡았다.
쉬커보(徐克波, 남)는 우한시 장한구 검찰원 대리 검사이다.
런창(任強, 남, 50세)은 원래 파출소장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우한시 ‘610’ 주임을 맡았다.
장창얼(張昌爾, 남, 62세)은 후베이 황스(黃石) 사람이며, 후베이성 위원회 부서기, 정법위 서기, 성 ‘610’ 책임팀장(2011년 11월~2012년 7월)이였으며, 2016년 1월에 후베이성 정치협상위원회 주석이었다.
야오중카이(姚中凱)는 후베이성 위원회 부비서장, ‘’610′ 사무실’ 주임이다.
원문발표: 2018년 1월 1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16/35967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