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왕 통신원) 후난성 천저우(郴州)시의 47세 여성 파룬궁수련생 쉬천성(許郴生)은 2012년 5월 16일 오전에 천저우시 공안국 베이후(北湖)분국 런민시로(人民西路) 파출소 경찰에 의해 길거리에서 납치됐는데, 뒷짐결박으로 쇠의자 위에 채워져 12시간 동안 ‘심문’을 받은 후 사망했다. 그의 아들 양쉬쥔(楊許俊)은 어머니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길고 지루하게 4년 이상의 소송 끝에 마침내 국가 사망배상금 31만 9,600위안과 부양인의 생활비 5천 4백 위안을 받았다.
사진 설명 (왼쪽): 쉬천성(許郴生), (오른쪽): 쉬천성의 시신
경찰에게 납치돼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해 사망하다
쉬천성은 1965년 4월에 출생했고 후난 천저우시 담배공장 노동자였다. 파룬궁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던 이유로 예전에 여러 차례 ‘610’ 인원, 국가보안, 공안에게 납치, 감금, 가택 수색 등을 당했다. 박해 중에서 남편과 핍박에 못 이겨 이혼했다.
2012년 5월 16일 오전 10시, 쉬천성은 손에 파룬궁[파룬따파(法輪大法)] 진상 자료를 손에 들고 천저우시 궈칭난로(國慶南路) 둥젠디징(東健帝景) 호텔 옆에서 가게마다 배포했다.(감옥 감시카메라 중에서 보았음) 갑자기 천저우시 공안국 베이후 분국 런민시로 파출소의 경찰 몇 명이 경찰차를 몰고 와서 쉬 씨를 연속 끌고 잡아당겨 납치해 경찰차 위로 끌어갔다.
파출소에서 쉬천성은 전용 심문의자(쇠의자)에 뒷짐결박을 당해 심문을 받았다. 그 기간 12시간 동안 물을 마시고 밥을 먹으며 화장실로 가는 등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녁 10시에 베이후 분국에서는 쉬 씨에 대해 열흘 동안의 치안 구류처벌을 내렸다. 저녁 10시 39분, 경찰 세 명은 파출소에서 나와 쉬 씨를 경찰차에 압송해 태웠다. 11시 15분, 쉬천성은 천저우시 제1인민병원으로 보내졌는데 심박동, 호흡이 멈췄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가족이 억류당해 공정한 검시 못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이틀 후인 18일, 공안국에서는 그제야 쉬천성의 전 남편 양(楊) 씨에게 통지를 내렸다. 20일, 여전히 대학공부를 하던 쉬천성의 아들 양쉬쥔은 학교에서 돌아왔다. 가족과 친구마저 몹시 놀라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젊고 건강하던 쉬천성이 어떻게 되어 촉박하게 인간 세상을 떠났는가? 장의사 안에 누워있는 쉬천성의 눈은 완전히 감지 않고 반쯤 뜨고 있었으며 외모도 생전 모습과 같지 않았다.
21일, 천저우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공안국, 610사무실(파룬궁을 박해한 불법 조직) 등 정부 측 기구에서는 가족 협조회를 열었는데, 합해서 11차나 협조회를 열었으나 결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정부 측에서 줄곧 공갈 협박으로 일을 억제하고 책임을 미루려 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공정한 검시를 추구하려 했으나, 오히려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 측의 매우 많은 저항을 받았다. 천저우시 정법위, ‘610사무실’, 공안국, 검찰원, 법원의 많은 한 무리의 사람들은 동시에 출동했다. 탕(唐) 변호사는 엄격하게 “공검법에서 연합한 이것은 사건 처리 절차에 부합되지 않습니다”라고 지적했다. 변호사는 즉시 공로가 없이 광저우(廣州)로 되돌아왔다. 정부 측에서는 강제로 양심적인 검시관의 선임을 제지했다. 공산당 관리는 또 사망자의 형에게 나서지 말라고 직업으로 위협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은 딱 잘라 시신 화장 처리에 서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격노한 민중
5월 19일, 어떤 사람이 ‘후난도시보’ 등 신문사, TV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매체는 제삼자로서 공정하게 이 일을 보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언론사들은 파룬궁에 연루됐다며 취재할 수 없고 취재를 한다 해도 감히 보도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의 나팔수인 언론들은 침묵하며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고로 정의는 사람 마음에 있다고 했다. 쉬천성의 급사는 그의 가족, 친구들을 몹시 놀라게 했고 또 많은 일반 민중의 동정과 분노를 일으켰다.
아주 오랜 시간에 천저우시 골목골목에는 ‘흉수를 엄하게 징벌함을 호소한다’(사진과 같음)와 ‘공정한 검시를 추구함을 호소한다’라는 스티커를 붙이는 현상이 나타났고 많은 사람들도 그녀가 납치돼 파출소에서 사망했다는 전단지, 문자 메시지 혹은 MMS를 받았다.
자료를 붙인 곳에 한 무리 사람들이 와서 보았는데 다 본 후면 또 한 무리 사람들이 와서 보았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이 와서 보았지만 다음에는 한 무리가 와서 보았으며 모두들 발돋움 하며 보았다(사진과 같음). 어떤 이는 마음이 무겁게 “후, 이 세상은 큰일 났어요. 이 세상은 큰일 났어요”라고 탄식했다. 어떤 이는 공안국 경찰은 개나 도둑떼라고 호되게 꾸짖었다. 어떤 이는 격분해서 “다른 사람이 연공해도 그 사람을 괴롭혀 죽이지는 말아야죠. 신앙은 자유인데요. 공산당이 사람을 무참하게 괴롭혀 죽였다면 공산당은 바로 사악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어느 한 가게 주인은 와서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자기 집의 장사에 영향을 줄까 두려워 스티커를 떼어냈다. 즉시 어떤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라고 제지하자, 가게 주인은 즉시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스티커를 다른 위치에 옮기려고 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특수 경찰이 스티커를 찢자 한 사람은 그에게 “찢지 마세요!”라고 비난했다. 특수 경찰이 “구타해 죽은 것이 아니므로 함부로 전하지 마시오”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당신이 구타해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그럼 당신은 찢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세요. 국민들이 평가하게요”라고 말했다. 특수 경찰이 야만적으로 “당신은 나를 따라 파출소로 갑시다”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격노하며 “그 파출소는 당신 집에서 차린 것입니까? 당신 집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까? 당신은 또 나까지 파출소로 끌어가서 구타해 죽이려고 그러지요? 당신에게 알려주겠는데 꿈도 꾸지 마시오. 젊은이가 어떻게 약간의 자비심도 없습니까? 당신도 부모 자매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 집에서 이러한 일이 생겼다면 당신은 어떡할 겁니까?”라고 말했다. 특수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떠났다.
길고 지루한 몇 년간의 소송 끝에 마침내 국가배상을 받다
쉬천성의 시신은 줄곧 후난성 천저우시 장의사에 놓여 있었다.
2014년 8월 26일, 양쉬쥔은 공안국 베이후 분국에 국가배상을 신청했다. 같은 해 10월 24일, 베이후 분국에서는 배상해 주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양쉬쥔은 불복해 베이후구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양쉬쥔은 어머니가 붙잡히기 전에는 몸이 건강했는데 멀쩡한 사람이 호출당해 간 후 괴이하게 사망했다며 피고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2016년 12월 19일, 베이후구 법원에서 조정해 합의를 보고 조정서를 하달해 국가 사망배상금 31만 9,600위안과 부양인의 생활비 5천 4백 위안을 주게 했다. 이후 5일 안에 쉬 씨의 시신을 화장했다.(관련 문서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1. 베이후구 법원 조정서, 2. 검시관 감정 의견서)
쉬천성이 생전에 중국공산당에 의해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한 경력
2000년, 쉬천성은 정부에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가 천저우시 공안국에 의해 납치, 구류, 벌금을 당했다. 2001년, 쉬천성은 강제로 천저우시 베이후구 당학교 세뇌반에 의해 감금, 세뇌를 당했다.
2005년 3월, 천저우시 담배공장에서는 ‘610’사무실과 함께 음모를 꾸며 또 그녀를 세뇌반으로 보내 박해를 진행하려 했다. 쉬천성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핍박에 못 이겨 직업을 버리고 외지에서 1개월 동안 떠돌아다녔다. 천저우 담배공장에서는 기회를 틈타 그녀를 정직시켰다. 그 후 쉬천성은 어느 한 차례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납치돼 보름 동안 불법 구류처분을 받았다. 석방한 이튿날, ‘610’ 사무실에서는 유치장에 강제로 명령을 내려 그녀를 붙잡게 했다. 그녀를 찾지 못하자 인터넷에 올려 지명수배를 진행했다.
2008년 12월 24일 오후, 쉬천성은 천저우시 쑤셴구(蘇仙區) 공안분국에서 새로운 신분증 수속을 밟다가 납치됐다. 구치소에 몇 달간 감금당한 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는데, 바이마룽(白馬壟) 노동교양소에 의해 거부당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2011년 6월 11일, 쉬천성은 광저우에서 일처리를 마치고 기차를 타고 천저우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지니지 않은 이유로 열차 승무원에게 상세한 조사를 받았는데, 가방 안에 파룬궁 서적 한 권과 몇 장의 진상 자료가 있는 것이 발견됐다. 탑승 경찰은 곧 그녀를 창사(長沙)에 불법 구류를 시켰고 창사 철도공안처 경찰에게 맡겨 심문을 받게 했다. 며칠 후 쉬천성의 거주지는 조사를 받았다. 쉬천성은 창사 철도공안처 유치장에 감금당한 기간에 경찰에게 여러 차례 공갈 협박, 시달림과 학대를 당했다. 쉬천성은 줄곧 단식으로 박해를 저지해 몸은 몹시 수척하고 허약했다. 줄곧 집으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합해서 45일 동안 단식했다. 창사 철도공안처 경찰은 두 차례나 그녀를 천저우 바이마룽 노동교양소로 납치했는데 모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해 수감이 거부됐다.
관련 문서:
1, 베이후구 법원 조정서 (PDF 압축 파일, 882KB)http://package.minghui.org/mh/2017/7/30/tiaojieshu.zip
2, 검시관 감정 의견서(PDF압축 파일, 2.2MB)
http://package.minghui.org/mh/2017/7/30/jiandingshu.zip
원문발표: 2017년 7월 3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7/31/35188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