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신장 청년 거리쥔, 노동교양소에서 독극물 주사당해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신장보도) 신장(新疆) 출신 파룬궁(法輪功) 수련생 거리쥔(葛利軍)은 중국공산당에게 불법으로 3차례 납치되어 모두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신장 창지 노동교양소에서 6년 동안 감금돼 잔혹한 고문박해를 당했고, 나중에는 독극물주사를 맞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첫 번째 노동교양소에서 전기고문과 추위에 얼리는 고문당하다

거리쥔은 1976427일 신장(新疆) 후투비현(呼圖壁縣) 우유 농장 1대에서 출생했고, 1998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1999년 신장 대학 중문학과 졸업 후 몇 개월 되지 않아 중국공산당(中共邪黨) 장쩌민 집단이 대법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거리쥔은 한 광고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대법 책을 읽다가 사장에게 적발돼 핍박을 받다가 사직하게 되었다.

2000년 섣달 그믐날밤, 거리쥔은 대법자료를 복사업소에서 복사를 할 때 사복경찰관에게 들켜 주시당한 후 그날 밤 불법 가택수색을 당함과 동시에 납치되어 2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그는 창지(昌吉) 노동교양소로 이송 감금되어 온갖 잔혹한 고문학대를 당했는데, 전기충격과 영하 30여 도의 혹한 속에서 몸이 어는 등의 고문을 당했다.

2년 후 만기출소로 집에 돌아왔을 때는 허리, 다리, 발 부위에 아직도 고문당한 자색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매일 후투비현 둥취안(東泉) 파출소에 출두해서 소재확인 서명을 해야만 했다. 거리쥔은 며칠 후 고향을 떠나 난징(南京)으로 가서 일거리를 찾았으며, 그 과정에 여자 친구가 생겨 부모님이 난징에 주택을 구입해주었다. 거리쥔이 고향을 떠난 후 둥취안 파출소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부모에게 수차례 문의했지만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거리쥔은 악인에게 신고당해 다시 체포됐으며, 신장의 경찰에게 신병이 인계되어 고향으로 끌려가서 거주지 감시를 당했다. 목장에 배치되어 우유 농장 보일러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겨울에는 책임자 집의 눈까지 치우는 등 많은 잡역을 하여 월 400위안의 보수도 받았다.

두 번째 노동교양처분으로 전기충격, 매달기, 중지를 톱질 당하는 등 고문을 받다

거리쥔은 거주지 감시를 해제당한 후, 우루무치시(烏魯木齊市)로 이주해서 일을 했다. 2004년 대법자료를 배포하다가 우루무치시 톈산(天山)분국 경찰관에게 납치되어 가택수색을 당한 후 유치장에 감금됐는데, 당시 혹한에 눈까지 내렸지만, 그는 여전히 홑옷차림이었다. 가족이 겨울옷을 넣으려고 했지만 거절당하고, 그들은 거리쥔의 직장 상사, 거리쥔의 부모님의 직장 부서장(신장 수리청 서기)까지 동원해서 거리쥔에게 전향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전향하기만 하면 좋은 직장에 다시 배치해주겠다며 감언이설과 함께 위협을 가했으며, 심지어 그의 부친에게 아들을 전향시키라고 핍박했다. 그러나 거리쥔은 내가 대법을 수련해 몸이 건강해졌고, 또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런 나를 어디로 전향하라는 것인가? 나는 한평생 대법을 굳게 믿으며 수련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전향을 거부했다.

거리쥔은 2년의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역시 신장 창지 노동교양소에 감금돼 고문박해를 받았고, 그는 84일간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 했다. 그는 소위 전향을 거부하며 큰 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다. 그 일로 온갖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는데, 전기고문, 음식물 강제주입, 세워두기, 잠 안 재우기, 일명 카이페이지(開飛機) 고문, 쇠 우리에 가두기, 매달기, 양손을 뒤로 결박해서 창살에 매달아 혹한에 얼리기, 그 외 강제노역 등등 온갖 잔혹한 수법의 고문을 가했다. 한 번은 시멘트 공사 중에 왼쪽 중지가 시멘트 판에 깔려 3분의 1이나 살집이 떨어져 나가 손가락뼈만 남았다. 노동교양소 의사는 노출된 손가락뼈를 톱으로 잘라버리고 약도 바르지 않는 등 야만적인 처치를 했다.

불법적인 노동교양기간이 만료됐을 때 거리쥔의 발, 다리, 허리 부위에는 전기고문자국이 아직도 역력했다. 거리쥔의 신병을 인수하러 그의 부친과 함께 온 후투비 우유농장 당위원회 부서기가 노동교양소 소장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2년 동안에도 그를 전향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노동교양소 소장은 지금부터 당신들이 해보세요. 이 사람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하고 말했다.

거리쥔은 출소 후 부모님과 함께 식용류 및 식품가게를 차렸다. 그는 장사를 도우면서 사람을 구도하기 위한 진상을 알렸다. 그래서 국가보안대 요원들은 늘 찾아와서 괴롭히며 귀찮게 굴었는데, 몇 차례씩이나 거리쥔의 머리칼을 잘라가고(DNA정보 확보), 사진을 찍어 가려고 했다. 그러나 거리쥔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으며, 부모들도 소리치며 거부했다. 그들은 나중에 몇 명이 달려들어 거리쥔을 강제로 잡고 사진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완강한 거부로 성공하지 못했다. 거리쥔은 출소하여 얼마의 기간이 지난 후 다시 정상적인 법 공부와 연공을 하자 절단됐던 손가락이 새롭게 돋아나 원상상태로 자라났다. 두 손을 폈을 때 불구의 손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이것은 대법의 기적인 것이다. 현대 과학으로는 무어라고 해석할 방법이 없다.

세 번째 노동교양처분을 받아 두 팔은 불구로 되고, 독극물 주사당해 사망하다

20073, 국가보안특무가 파룬궁수련생으로 사칭해서 함정을 파 놓았는데, 거리쥔이 걸려들었다. 그자는 미국에 근로자파견을 위한 출국수속을 해 주겠다며 접근했고, 이에 마음이 움직인 거리쥔이 그에게 미국행 수속을 맡긴 후 수속이 끝나서 출국하려고 할 때 미행하고 있던 공안에게 우루무치 열차 역에서 검표를 받다가 현장에서 납치됐다. 그는 당일 밤 후투비현 파출소로 끌려가 지하실에 감금되어 양손을 결박당해 10여 시간 동안 매달렸다. 매달 때 단지 한 쪽 발끝만 살짝 바닥에 닿도록 하는 고문이라 신체적 고통이 극심했고, 결국 그 고문으로 두 팔은 불구가 되어 쓸 수가 없었다. 2년 만기출소 후 집에 돌아왔으나, 불구가 된 팔은 낫지 않아 작은 가방도 들 수가 없었다.

거리쥔은 얼마 후 다시 공산당으로부터 가택수색을 당했는데, 주택은 물론 상점까지 온통 수색을 당했고 또 2년의 불법적인 노동교앙처분을 받고 감금된 후 2년 만기 출소로 풀려나 20093월 경찰에 의해 귀가했다. 이번에는 노동교양소에서 가족에게 신병을 인계한 것이 아니라, 직접 경찰이 집으로 데리고 와서 신병을 인계한 것이다. 그것은 거리쥔이 혹독한 고문으로 정신상태가 온전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거리쥔을 보고 얘야, 넌 나를 알아볼 수 있냐?”하고 묻자, 그는 당신은 상냥한 노부인입니다.”라고 말했다. 밥도 혼자 먹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먹여주어야 겨우 음식물을 삼켰다. 먹여주지 않아도 배고픔도 몰랐다. 그의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그가 노동교양소에서 출소한 직후에는 혼자 화장실 정도는 겨우 갈 수 있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걷지 못하게 되었는데, 대소변마저 가릴 의식이 없어졌다. 집에 돌아왔을 때 침대에서 잠을 잘 수는 있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고통을 호소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이제는 침대에 뉘여도 스스로를 깨닫지 못했다. 마냥 울면서 어머니만 찾았다. 어머니가 아들아, 엄마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로 엄마다라고 말해도, 그는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아닙니다라고 울면서 말했다.

거리쥔이 풀려나 집에 온 이후부터 경찰관들이 집 주위에서 낮이면 윤번제로 감시하다가, 밤이 되면 주택단지 경비에게 인계 후 감시하게 했다. 거리쥔은 며칠이 지나자 고열로 신음하게 되어 후투비현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2~3일마다 혈액과 골수를 채취해 검사를 하면서 치료를 했지만, 1개월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았고, 입원기간에도 경찰의 감시는 여전했다. 차도가 없자 부모님들은, 우루무치 신장병원 1부속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병원 129구급차의 기사와 간호사가 그 병원에 연락해서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자, 1부속병원에서는 입원을 거부해서, 다시 신장 흉부과병원에 연락해서 겨우 입원하게 되었고, 이곳에서도 역시 혈액과 골수를 채취하는 등 검사와 치료를 했지만, 2개월이 넘도록 차도가 없자, 병원 측에서는 퇴원하도록 명했다. 의사는 시종 무슨 병인지 말하지 않았고, 경찰은 여전히 일일이 과정을 체크하며 감시했다.

거리쥔은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온 후 4일 뒤 2009630일에 사망했다. 사망당시 그는 부모님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고 죽어갔다. 파출소에서는 의사의 사망확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거리쥔의 증상과 그 외 상황으로 보아 사망 원인은 독극물주사 때문이었다. 180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구에 힘이 넘쳐나던 33세의 젊은이가 중국공산당의 잔혹한 고문박해로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간 것이다.

원문발표2017516
문장분류대륙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16/3481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