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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정부의 범죄: 청원의 폭력적 차단과 악의적인 답방(중)

[밍후이왕]

얼마나 큰 죄악이 중공의 악의적 답방 중에 발생하는가?

중공은 청원을 위한 방문(상방-청원)을 폭력으로 차단하고 늘 답방하여(다시 찾아가서) 박해한다. 파룬궁의 청원활동을 폭력으로 차단하고 반복적으로 비난하기를 시작했는데 이후에도 악의적인 답방을 하며 계속 박해한다. 박해를 가중하고, 확대하고 또 반복적으로 박해하며 사람을 향해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저질렀다. 답방박해에 참여한 악당은 주로 각지의 610(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조직), 국가안전부, 국가보위부, 공검법사(公檢法司), 종합치안사무실, 당위정부, 기층 간부, 지역구 진(鎭), 촌(村)의 본바닥 불량배 등이다. 그들은 악의적인 수단으로 어떤 태도를 강요하고, 재산을 압수하고 납치하며, 잔혹하게 멋대로 형벌을 가하고, 경제적으로 약탈하며,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고, 억울한 재판을 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며 생명을 빼앗는 학살도 감행하였다. 이러한 죄악은 법률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중공악법의 비호 하에 조작해 낸 것이고, 정부의 행위와 명의상 공무집행으로써 행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모두 백주대낮에 발생한 것이다.

왕푸청(王付成)노인은 산둥성 멍인현 멍인진 둥루라이촌 사람이다. 그는 99년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러 북경에 청원을 갔다가 한 달간 불법적으로 수감되었고, 멍인진(蒙陰鎮)정부의 협박 하에 5,000위안(한화 약 82만원)을 강탈당했다. 그 후로도 진(鎭)정부 직원은 ‘답방’한다는 명의로 왕푸청의 집을 불법수색하며 체포한다고 계속 공갈·협박하였다. 왕푸청은 핍박을 견딜 수 없게 됐고 가출하는 수밖에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2004년 초 왕푸청은 납치됐고, 차펑파출소에서 사악한 경찰과 ‘610’직원에게 독하게 두들겨 맞고, 전기 쇼크를 당해 멍인현 병원에 입원하여 응급처치를 받았다. 비밀리에 구금당했으며 이후 멍인현 법원에 의해 12년의 불법적인 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7월 20일, 산둥 제1감옥에 수감됐고 다년간 교도관과 일반범죄자들로부터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심한 폭행에다 잠을 못 자게 하기, 벽을 향해 서있기, 엄격한 감시와 관리, 강렬한 불빛으로 자극하기 등의 박해를 당했다. 육체적 시달림과 정신적 박해, 생활상의 학대, 인격적인 모욕은 물론 용변 보는 것조차 보장할 수 없었다. 2012년 신년 기간에 왕푸청과 궁마오하이(公茂海)가 함께 불법 납치됐는데 현재 산둥성 교도소 11감구 5층에서 엄혹한 박해를 당하고 있다.

리중천(李宗臣), 찌리영(紀立英)부부는 산둥 타이안시 신타이시 둥더우진 난보우촌 촌민이다. 두 사람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이고, 촌에서 인정받는 좋은 사람이다. 01년 9월 찌리영은 북경에 청원 갔다가, 사복을 한 특무(비밀경찰)한테 납치되어 텐탄파출소 악경으로부터 불법심문을 당했고 후에 신타이(新泰)시부시장, 610우두머리, 공안국 둥더우진파출소 소장 등에게 강제로 끌려왔다. 신타이시 구치소에서 한 달 넘게 박해를 당한 후, 또 산둥성 제1여자 노동교화소로 납치돼 불법노동교화 2년형을 당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부부는 현지 악당들에게 늘 소란과 답방박해를 받았다. 신타이시 국가보안대대 쑤보우췬(현재 신타이시 공안국 원난파출소 부소장), 악인 거머(葛某) 등은 진, 촌 등의 불법무리들과 함께 집에 쳐들어가서 소란을 피우고 집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연공할 때 쓰는 녹음기, 테이프, 대법서적<전법륜> 등을 빼앗아 갔고, 강박으로 보증서를 쓰게 하고, 집을 감시하고, 전화를 모니터링하고, 노인과 어린아이를 공갈 협박하였다. 경제적 궁핍으로 말미암아 리중천은 할 수 없이 외지로 나가 일할 수밖에 없었다. 2012년 3월 21일 오후 두시 남짓하여, 산둥성 타이안시 신타이 국가안보대대 악경은 또 천리밖에 있는 산시(陝西)성 쉰이(旬邑)현 헤이꼬오(黑溝)탄광에까지 쳐들어가서 한창 탄광에서 일하는 리중천을 납치했고 한 달 동안 불법 수감했다. 국가안보대대 악경 대장 펑따융은 사람을 파견하여 불법적으로 심문한 다음 산둥성 제2노동교화소에 집어넣고 노동교화 1년 반을 판결했다.

친웨밍[秦月明, 남, 생전에 헤이룽쟝 이춘(伊春)시 진산툰취(金山屯區)에 거주]은 성격이 솔직하고 선량하며 순박하고 강인한데다 의리가 있었고 또 무술을 몹시 좋아했다. 1997년 4월, 그는 파룬궁수련을 시작하였다. 1999년 10월, 파룬궁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불법노동교화 3년형을 판결 받았다. 2002년 4월, 이춘시 진산툰구 공안지국 경찰 캉카이(康凱)와 치유(齊友) 등이 ‘답방’을 빌미로 친웨밍(秦月明) 집에 불법적으로 쳐들어가서 납치하였다. 공안국에서 추위중(崔玉忠)과 ‘610사무실’주임 멍쇤화(孟憲華)가 직접 지휘하며 친웨밍을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게 하고, 밧줄에 매달리게 하는 등의 혹형을 가했는데 다리뼈와 갈빗대가 골절돼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고도 친웨밍은 불법적인 10년형을 선고받고, 자무쓰감옥에 수감되어 계속 박해를 받았다. 2011년 2월 21일 교도소의 집중훈련대에 의해 강제 ‘전향’을 받았으며 26일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의 시달림을 받다가 치사했다. 그해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27일 오후, 친웨밍 가족들이 시체를 보았는데 입술이 파랗게 죽어 있었고, 몸을 뒤질 때 그의 입과 코에서 많은 피가 흘러나왔으며 앞가슴 이외에 목, 등, 허리와 두 다리는 모두 짙은 자주색이었고 몸에는 많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자무쓰감옥은 치사한 진상을 덮어 감추려고 했다. 가족들은 자무쓰시 허쟝지역의 검찰원, 성감옥관리국, 성최고인민법원, 베이징최고인민법원에 고소를 제기하고 배상청구를 하였으나, 당국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친웨밍의 아내와 그의 작은 딸까지 불법으로 하얼빈시 첸진노동교화소에 가둬 분쟁을 막고 편안히 지내자고 하였다. 친웨밍의 시체는 지금까지 2년 남짓 보관해 두고 있다.

네이멍구 훠린꿔러(霍林郭勒)시 쟈하이영(賈海英, 여, 47세)은 자영업자이다. 1996년에 파룬궁을 수련한 후 선천성 심장병, 천식, 부인병 등이 모두 사라지고 굽어진 등이 곧게 펴졌다. 박해가 시작된 후, 쟈하이영은 현지 악당에게 여러 차례나 답방(형식)의 박해를 받았다. 4차례 합계 8년의 불법노동교화를 당했고, 4차례에 걸친 합계 93일의 불법구치에다 또 4차례나 외지에서 현지로 압송됐는데 합계 25일이다. 불법으로 5차례나 집을 수색당해 털렸고, 직접적인 재물손실액만도 백여만 위안에 달하며 간접적 손해까지 하면 엄청난 규모이다. 지옥과도 같은 노동교화소에서 쟈하이영은 독하게 매질을 당했고, 전기충격 고문과 천장에 매달리기, 냉동당하는 등의 고문을 당하였다. 맨발로 유리 조각 위를 걷게 하고, 모기와 곤충에게 물리게 하고, 야만적인 음식물주입 등 최소 10가지가 넘는 혹형의 시달림을 당했다. 두들겨 맞아 신체의 7개 구멍에서 모두 피가 흘러나왔으며 그런 다음 또 태양을 쬐게 하여 말리게 했다. 그 기간 16명의 가족 즉, 시어머니 천위친, 남편 쑤더산, 시동생 쑤더린, 딸 쑤웨삐, 아들 쑤훙위, 어머니 왕엔, 다섯째 남동생 쟈둥워이, 셋째 여동생 쟈하이메이, 다섯째 제수 리워이초, 제수의 오빠 리워이, 제수의 형님 쇼오펑메이, 쟈하영의 셋째 이모, 여덟 번째 이모 왕펑란, 아홉 번째 이모 왕리, 열 번째 이모 왕위좬, 여섯째 이모부 리춘푸 등도 박해를 당했다. 어떤 이는 세뇌, 노동교화 판결을 받았고 어떤 이는 수감되고 벌금을 내야 했다. 그중 5명은 박해를 받아 세상을 떠났는데 시아버지 쑤친, 큰 삼촌 왕펑밍, 큰고모할머니, 둘째고모할머니, 그리고 쟈하이영 어머니의 수양어머니 왕냥 등이 모두 박해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챈파쥔(錢法君, 남, 미혼)은 산둥린이(臨沂)시 린강(臨港)구 좡강(壯崗)진 둥옌마(東演馬) 촌민이다. 원래 ‘예술장식’사업이 생업이었는데 거래처도 많고 평판도 괜찮았다. 하지만 성격이 급했고 ‘방탕아’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이후 어머님의 권유로 대법수련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서부터 환골탈태하게 됐다. 장 씨 불량배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하자 챈파쥔은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옌마향 파출소 악경 쉬헝넨, 한진청, 마중타오, 루슈텐 등으로부터 잔혹한 시달림을 받았다. 세차게 벽에 부딪치기, 두 손에 수갑 채우기, 각종 형구로 호되게 두들겨 패기, 전기봉으로 전기쇼크를 가하기, 따귀를 때리기, 눈 오는 날 눈보라 속에서 얼게 하기 등의 고문을 당하였다. 챈파쥔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팔, 다리, 발이 모두 부어올라 자홍색이 되었으며, 오른쪽 종아리에는 근육이 괴사하는 증상까지 생겼다. 이때부터 그는 종종 현지악당의 악의적인 추적과 비밀리에 찾아오는 답방을 당하면서 3차례 불법노동교화를 당했고, 교도관 리궁밍, 웨린쩐, 양펑, 왕윈브, 쉬파웨, 민화융 등으로부터 학대를 당했다.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으며 ‘십자가’에 오르게 하기, ‘강제로 밤을 지새우기’, ‘수갑에 매달리게 하기’, ‘구금실에 갇혀 쪼그리고 앉아있게 하기’, ‘엄격관리 반에 들여보내기’ ‘강제노예노동’ ‘벽을 향해 정좌하기’ ‘전기봉으로 전기충격하기’ ‘큰 바늘로 다리를 찌르기’ 등의 혹형과 학대를 당하였다.

2011년 9월 23일, 집에서 한창 추수 중인 챈파쥔은 또다시 답방하러 온 악당에게 무고하게 납치돼 린이시 세뇌반에 감금 되었고, 린이 세뇌반 우두머리인 쑤워이 등으로부터 야만적인 음식물강제주입을 당하고, 후에 악당 마중타오, 좡강(壯崗)향 악경 펑쉐중, 리훙선 등에 의해 세 번째로 산둥제이 남자노동교화소로 압송되었다. 악경 왕신쟝, 뤄광룽 등의 음모 하에 챈파쥔은 교도소 의사 장모모(경찰번호: 3731063) 등으로부터 장기적으로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을 당했다. 학대로 사경에 이르게 되자 악당들은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게 했는데 그의 오른쪽 발에 출처불명의 약물을 주입하고는 잠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챈파쥔은 집에 돌아온 뒤 신체가 줄곧 호전되지 않았고, 장기간 걷지 못했으며 밤이면 온몸의 통증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악경과 교도소 의사가 83병원에서 불명의 약물을 주입한 후로, 그의 오른쪽 발 부위는 깊게 헐고 곪았다. 후에는 사지가 마비되는 상태까지 발전해 일상생활마저 전면적인 간호를 받아야 했으며 침상에서 일어날 힘도 없었다. 그의 신체는 점점 악화돼, 2013년 4월 17일 밤 9시,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해 나이 47세였다.

요차이워이(姚彩薇)와 남편 장타오(張濤)는 헤이룽장성 쐉청(雙城)시 시멘트공장 노동자였다. 원래 완전무결한 가정이 있었고 그녀와 남편, 딸 모두 대법을 수련한 후 한 가족 네 식구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한 질병이 신기하게 사라졌으며 신체가 깨끗이 정화됐다. 비록 부부는 모두 직업을 잃었고 살림은 청빈하지만 자그마한 장사로 생업을 유지하며 재미있게 살았다. 중공 장 씨 불량배집단의 파룬궁 박해로, 요차이워이와 남편, 딸은 여러 차례 북경에 들어가 청원하였다. 쐉청시 악당들은 공모하여 공안국의 파룬궁박해를 주관하는 악경 장궈푸, 진완즈를 중심으로 답방하는 형식으로 그들을 박해하였다. 식구들은 여러 차례 납치돼 세뇌반, 구치소에서 시달림을 받았으며 의지할 곳 없이 유랑할 수밖에 없었다. 2002년 장타오와 요차이워이는 차례로 불법노동교화를 당했다. 요차이워이는 완쟈노동교화소에서 소집한 소위 ‘학습반’으로 보내졌고, 장타오는 하얼빈 창린즈(長林子)노동교화소로 압송되었다. 장타오는 후에 박해로 병세가 위중하게 돼 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가, 또다시 악당한테 납치돼 결국 노동교화소에서 박해로 치사했고 시체는 비밀리에 화장됐다. 딸 장잰후이는 불법으로 중형10년의 판결을 받고, 하얼빈시 여자감옥에 감금됐으며 수련하지 않는 아들은 어디서 유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난속에서 요차이워이는 불법적인 납치기간을 지나오면서 신체가 망가졌다. 마음은 온종일 칼로 후벼내듯 아팠고 반신불수가 됐으며 두 눈까지 희미해져 자립할 수가 없었다. 2010년 5월18일, 요차이워이는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21일, 친구가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에 가서 요차이워이의 딸에게 어머니의 분상(奔喪)에 참가하도록 요청하였지만 감옥에서는 그를 문밖에서 거절하였다. 5월22일 친족들은 민간풍속에 따라 요차이워이와 남편 장토오의 유골을 합장하였다. 원래 행복하던 한 가족이 중공악당의 학대로 집안이 온통 망하게 됐다.

사악이 답방 중에 행하는 악 중의 악

중공은 청원을 폭력으로 차단하면서 직접 입수한 자료를 가지고 수많은 대법수련생들을 비밀리에 블랙리스트에 등록하고 부문별로 구분하여 ‘계급의 적’을 획정했다. 사망목표를 정한 후, 반복적으로 악독하게 답방하고, 계속 박해했는데 인류 역사상 제일 악독하고, 제일 불량하며, 제일 악렬하고 가혹한 혹형수단을 채용했다. 파룬궁과 같은 선량한 집단에 대하여 인성을 완전히 상실한 심각한 박해를 가하여 집단을 말살하는 전쟁을 실시하였다. 14년 간, 중화의 대지에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사건, 살인 사건, 학살사건들이 만들어졌는데 사건 중의 사건이요 악 중의 악이라 할만하다.

08년 4월11일, 산둥성 이수이(沂水)현 요덴즈(姚店子)진 파룬궁수련생 황청메이(黄成美)는 밭에서 한창 농사일을 하고 있을 때, 진의 정법위원회 ‘610’, 파출소 소장 우펑, 종합치안사무실 주임 리초양 등 7~8명의 사악한 자들이 ‘올림픽답방’을 구실로 집에 쳐들어왔다. 그녀가 집에 없자 그녀의 모친을 속여 ‘별일 없다. 우리는 그냥 명령대로 그녀를 보러왔을 뿐이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이 우리를 데리고 가서 만나게 하면 그만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녀의 모친은 악당들의 말을 믿고서,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제야 사악한 악당들은 본색을 드러내며 황청메이를 납치했고 얼마 지나 불법으로 노동교화를 시켰다. 황청메이의 모친은 자기가 속아 넘어간 것을 알고 후회 막급하였다. 그는 딸을 밤낮으로 그리워하며, 딸을 보기 위해 독약까지 먹었다. 하지만 그는 임종 때도 그의 딸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미안한 마음과 유감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주샤(祝霞)는 청두(成都)시 진뉴(金牛)구 광룽지역 파룬궁수련생이다. 장기적으로 푸친파출소(원 광룽단지파출소 후에 푸친파출소와 합병됨)에서 매일 24시간 모니터링하고 통제하였다. 젖 먹이는 기간이 지나자 즉시 불법적인 노동교화 1년 반을 받고 난무스(楠木寺)여자노동교화소에 수감돼 비인간적인 시달림을 당하였다. 불법노동교화기간이 차자 또다시 현지 610 우두머리 허웬후를 선두로 하는 악인에게 납치되어 반년 남짓한 시간을 피현(郫縣)세뇌반에 감금되고 박해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3개월도 되지 않아 답방박해를 받고 2003년 6월, 주샤는 또다시 허웬후 등 악인에게 납치되어 펑저우(彭州)시, 피현, 신진(新津)현 등 세 개의 세뇌반에서 10개월간 잇따라 박해를 받았고, 혹형의 시달림, 약물 박해, 악독한 구타, 강간, 길거리 조리돌리기, 연속 잠 못 자게 하기 등의 학대와 고문을 당했다. 32살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주샤는 박해를 받아 정신이상이 생겼다. 아는 바에 의하면, 주샤는 피현세뇌반에 감금된 기간에 약물박해로 인해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황 하에 류워이라는 불량배 특무와 다른 한 악당에게 여러 차례 강간을 당했다. 집에 와서도 주샤는 샤워를 하기도 싫어했는데 샤워를 하면 강간당한다고 소리치며 늘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대경실색하며 ‘너희들은 나를 강간하려고 하는가?’ (4살밖에 안 되는 아들이 배우겠다)라고 큰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루중화, 우브, 천영, 조오워이, 류워이 등을 저주하였다. 가족은 주샤를 외지 요양원에 보냈는데 핍박을 견딜 수 없었던 남편 왕스린(파룬궁수련생, 이전에 연속 3차례 불법노동교화를 당했다)은 그녀를 돌보기 위해 작은 가게를 폐점했고 아들도 핍박을 견딜 수 없어 학교를 중퇴하였다. 푸친 파출소는 그들이 외지로 나갈 때 파출소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랑탕(壤塘)현 문교국에 통지하여 주샤의 모친 니칭후이(倪清慧, 파룬궁수련생)의 월급지불을 정지시켰는데 한 가족의 생활은 더더욱 곤란해졌다.

허난즈우코(周口)시 화이양(淮阳)현 면방직공장 왕춘링(王春玲)은 원래 공장에서 노동자료과 부과장, 후에 방직공장 당위원회 사무실로 전근돼 근무했다. 그녀는 예쁘고, 일하는 것도 세련됐으며 글씨도 잘 썼고 사람을 친절하고 온화하게 대하였다. 가정생활은 풍족했고, 부부금슬이 좋았으며, 시부모님께 효도하였다. 왕춘링은 1996년도에 파룬궁을 접하고, 수련에 몰두하며 부단히 자기를 제고시켰다. 중공이 파룬궁박해를 시작하자, 왕춘링은 몇몇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화양현위원회에 찾아가서 이치를 따지며 대법을 실증하였다. 악인은 전혀 듣지 않고 그들을 청관(城關)진파출소로 납치했다. 1999년10월, 왕춘링은 파룬궁의 공정함을 되찾기 위해 북경에 상방 갔다. 방문을 차단당한 후, 여러 차례나 악한 경찰 런워이, 조오민, 조오쮜산, 천쟈창, 겅서우링 등에게 납치되어 학대를 당하고, 핍박에 의해 의지할 곳을 잃고 유랑하게 되었다. 2004년 2월 20일, 즈우코오(周口)시 악경은 여러 지방에서 통일적으로 18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을 납치하였다. 왕춘링은 타이캉현에서 납치를 당해 타이캉현 구치소에 납치되었다. 그해 7월 8일 오전, 허난성 즈우코시 법원은 촨후이구에서 비밀리에 개정하고, 왕춘링에게 억울하게도 10년형을 선고했다. 이후 허난성 신샹여자감옥으로 납치했고 최종에는 교도소의 박해로 식물인간이 됐으며 병보석으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한 동안 몸조리를 하자 그녀의 상황은 점점 좋아졌다. 이 일을 알게 된 감옥에서는 여러 차례 이런저런 답방의 명의로 그녀에게 소란을 피우며 기겁하게 만들고 구금하여 박해를 하려고 했다. 그녀는 또다시 뇌출혈이 생기고 몸은 갈수록 나빠졌으며 2013년 5월 3일 새벽 3시 40분,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조오더츙(趙德瓊) 노부인은 쓰촨성 난충(南充)시 정유화학공업공장 퇴직직공이다.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이후, 그녀는 중공당국자들에게 납치되어 불법감금되고 재물을 강탈당하고 심신은 엄중한 박해로 인해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으며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였다. 2009년, 조오더츙은 자기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박해당한 상소편지를 써서 쓰촨성 편지청원 상담부서에 부쳤다. 편지에는 현지 610, 경찰, 국가 안전부, 공장, 지역 사회 등 사람들이 법을 집행하면서 법을 어기고 그를 박해한 사실을 밝혔다. 예를 들면 쑨칭구 국보대대 부대장 뚜워이쟈는 조오더츙 집의 방범용 철문키를 강제로 뜯고 문을 열고 들어가 개인물품과 장식품 등을 가져갔으며 가족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그녀의 정의로운 청원에 대하여, 현지 악당은 그에게 악의적 답방을 실시하였고, 법원에서는 민가까지 출동하여 불법적인 판결을 선고했다. 2012년 3월 7일 오후 3시, 쓰촨 난충시 쑨칭구 ‘610’우두머리 장광샹, 쑨칭구 법원 법관 쉬원영(여), 쑨칭구 검찰원, 소재지 동사무소 및 공안국경찰 등 10여명의 사람들이 조오더츙집에 쳐들어가서, 쉬원영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조오더츙 앞에 다가가 ‘조오더츙 너는 고발하는 죄를 범하였다. ××조직을 이용하여 법률실시를 파괴한 죄를 범했고 쓰촨성 신방사무실에 상소편지를 썼으며 베이후공원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손에 ‘파룬따파는 좋다, 진선인은 좋다.’를 써줬다. 5분의 시간을 줄 테니 만약 당신이 우리에게 잘 협조하면, 3년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월급도 계속 지급하겠지만, 만약 당신이 협조하지 않으면 즉시 3년형을 판결·집행하고 월급도 몽땅 차압한다.”고 말하였다. 아무도 상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쉬원영은 계속하여 5분이 지나도 말이 없자 당신에게 3년형을 판결하며, 월급은 모조리 차압한다.”고 말하였다.

루위핑(盧玉平, 남, 1958년 출생, 전문대학출신, 1995년 파룬궁수련)은 따싱안링(大興安嶺)지역 쑹링(松嶺)구지방세무국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청렴결백의 본보기였다. 1999년 루위핑은 파룬궁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법적인 3년형을 받았다. 석방 후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늘 답방으로 인한 소란과 감시를 받았는데 하는 수 없이 의지할 곳을 잃고 유랑생활을 하였다. 후에 쟈그다치(加格達奇)시에서 납치되었고 쟈그다치 구치소에 감금되어, 눈쟝(嫩江) 93악경에 의해 가죽 벨트로 때리기, 찬물 끼얹기,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히기, 옷을 몽땅 벗기고 혹독하게 때리기 등의 고문을 당했다. 콧구멍에 연기 나는 담배를 꽂고, 술을 강제로 들이먹이는 등의 혹형을 장장 14시간 동안이나 받았다. 독하게 폭행을 당해 몸은 성한 데가 없이 상처투성이고 시퍼랬으며 심폐기관은 질식돼 호흡도 곤란했고 걷기조차 힘들었다. 2002년 쨔거다치구 법원에서는 비밀리에 14년의 중형을 선고했고, 2003년 3월, 타이라이(泰来)감옥으로 납치돼 계속 박해를 받았다. 경찰은 루떵, 리룽 등 죄인을 시켜 그를 학대해 혼수상태에 빠지게 했으며 타이라이 감옥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에서는 사진을 찍어 ‘장염’과 ‘쌍폐 결핵혼합감염’이란 진단을 내렸다. 입원기간 범인의사와 죄인들은 늘 그를 때렸는데 신장도 파열됐으며 팔은 맞아서 불구가 됐고 신체 여러 기관도 쇠약해져 밥도 먹지 못했다. 잠도 잘 수가 없었으며 두 눈은 꼿꼿해지고 얼이 빠졌는데 키가 178cm인 그가 살이 빠져 뼈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교도소 경찰은 그를 핍박하여 ‘3서’를 쓰게 하였다. 2009년 5월 30일 오후 3시40분, 그는 타이라이감옥에서 박해를 받아 치사하였다. 그해 나이는 51세였다. 가족은 헤이룽장성 사법청에 가서 청원을 하였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결과도 없다. 오래된 억울함을 씻지 못했는데 루위핑의 시체는 오래 전부터 수년간 보관해 두고 있다.

파룬궁수련생 장즈친(張自琴, 55세)은 쓰촨(四川)성 구린(古蔺)현 스보오(石宝)진 가족기숙사에 있었고, 스보오진 정부직원 가족이다. 집식구들이 다년간 여러 차례나 중공의 박해를 받았다. 집안은 망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잔혹한 박해로 인해 장즈친 가족은 4대에 걸쳐 세 명이 목숨을 빼앗겼다. 99년 ‘7·20’ 중공 장 씨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하자 그녀와 몇 십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은 구린(古藺)현 정부에 한통의 파룬궁진상편지를 보냈고, 박해중지를 호소하며 진실한 정황을 알렸다. 뜻밖에도 구린의 당위원회와 정부는 진상을 박해의 근거로 삼고 장즈친 등을 중심인물로 보고 장기적으로 악독한 답방형식의 박해를 자행하였다. 다년간, 장즈친은 이전의 스보오(原石寶)진 사당서기 푸즈꼬오, 현 종합치안사무실 주임 양린, 구린현 ‘610’직원 천한조오 그리고 구린현 공안국, 구치소, 구린법원, 검찰원 등으로부터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여러 차례의 소란, 납치, 감금, 감시를 당했고 또 4년의 억울한 감옥살이를 당했다. 범죄자의 간판을 걸고 거리에 끌려 다니고, 체벌침대에 묶이고, 독약을 주입당하고, 심한 폭행을 당하고, 천장에 수갑을 채워 매달기 등의 고문을 당하였다. 나무줄기에 수갑을 거꾸로 걸고, 음식물강제주입, 거꾸로 세우기, ‘모심기’혹형, 밧줄로 묶고, 벌거벗겨 구타하고 하체를 때렸다. 끌어당기고, 후려치고, 육체를 괴롭혀 썩게 하고, 모기나 벌레한테 물어뜯기고, 무속행위로 정신을 교란시키는 등 여러 가지 혹형으로 학대하였다. 온 가족이 악당의 포위에 휘말렸는데 재난 중에 그녀의 남편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고, 부친은 비통해 하며 세상을 떠났으며, 큰 아들은 빈곤에 빠져 병들어 죽었고, 손자는 불행하게도 요절하였다

쉬랑저우(徐浪舟, 남, 나이 39세)는 쓰촨판즈화(四川攀枝花)시 제1대대 교통경찰이다. 1994년 파룬궁수련 후 매년 우수경찰로 선정됐고, 판즈화(攀枝花)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그에 대한 보도까지 하였다. 파룬궁이 박해를 당한 후, 쉬랑저우는 끝까지 수련을 견지하고,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려고 청원방문을 갔다가, 무리하게도 면직을 당하고, 답방의 박해를 받았으며 감금학대를 당하였다. 불법으로 노동교화 판결을 받았고, 판쯔화시 610계통의 악당 왕즈단 등과 국가안전보위대대 친강, 조우융쥔, 쑨지원 등 악경으로부터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체벌침대’에 눕히기, 수만 볼트의 전기봉으로 충격하기, 밧줄로 묶기, 묶어 뙤약볕에 쪼이기, 고온에서 노역하기, 폭력으로 신문하기, 모함하기 등의 혹형을 받았다. 압력 속에서 그의 아내는 그와 이혼을 하였다. 2004년 11월 1일, 쉬랑조우는 8년 6개월의 불법적인 형을 선고 받았다. 2005년 1월 쉬랑조우는 쓰촨성 광원(廣元)감옥으로 넘겨져 계속 박해를 받았다. 후에 러산 우마핑(樂山五馬坪)감옥으로 이감됐고 역시 박해를 받았다. 쉬랑조우는 형기만료로 집으로 돌아가게 됐으나 우마핑감옥장 쭈워이는 교도소의 죄수에게 지시하여 쉬랑조우를 7일간 밤낮으로 거꾸로 매달고 목숨이 위급할 때까지 때렸다. 그리고 그를 청두사법경찰관 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가족이 통지를 받고 병원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미 박해로 인해 2012년 3월 18일에 치사하였다. 시체 위 복부 쪽에 칼자국이 있었고, 신체 앞부분 허리와 복부 양측에 각각 두개의 작은 구멍이 있었으며, 앞가슴 옆구리안쪽에는 대량의 피가 뭉쳐 있었다. 독약으로 모살을 한 건지, 산체로 장기를 떼어낸 건지, 병원 측과 교도소 측은 지금까지 가족에게 쉬랑조우의 사망검증보고를 보여주지 않고 그의 가족에게까지 공갈·협박하며 위협하고 있다.

(계속)

원문발표: 2013년 5월 2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소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5/27/2745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