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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4년 동안이나 감금당한 황민, 박해로 뇌출혈 증상 나타나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파룬궁이 무고와 모함을 당하고 박해당하는 진상을 텔레비전 스폿 방송을 통해 민중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전 자무쓰(佳木斯) 대학 전자공학과 강사 황민(黃敏)은 2003년 20년형의 불법적인 판결을 선고받았다. 지금까지 산둥성(山東省) 감옥에 14년째 감금돼 있다.

최근의 소식에 따르면, 황민은 뇌출혈 증상이 나타났는데 현재 병원에 있으며 의식이 절반 정도밖에 없는 상태다. 실어증세, 반신불수 상태가 나타났으며 상황이 위급하다고 한다.

현재 황민의 아내와 딸이 비행기로 산둥에 도착해 황민이 석방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감옥 측과 교섭하고 있다.

장쩌민(江澤民)이 1999년부터 파룬궁을 박해한 후, 황민은 국민에게 진상을 알리기 위해 텔레비전 스폿 방송을 통해 진상을 알렸다. 2003년 8월 15일, 20년형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다. 올해 74세인 황민은 지금도 여전히 산둥성 감옥에 불법 감금돼 있다. 그의 아내는 박해의 원흉 장쩌민을 고소했다.

다음은 황민 아내가 2015년 장쩌민 고소장에 진술한 내용이다.


황민(黃敏)

대법을 수련해 새 삶을 얻고, 교단으로 되돌아오다

황민은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전에 각종 질병—담낭염, 흉막염, 간염, 중증 신경쇠약을 앓았다. 그가 몹시 견디기 어려워했던 질병은 삼차신경통(三叉神經痛)이었다. 수업할 때면 늘 삼차신경통이 도졌는데, 너무 아파 그는 땀투성이가 됐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학생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고통으로 교단에서 물러나 집에서 쉬었다. 중의약, 서방 의약, 민간 처방을 다 써 봤으나 전부 효과가 없었고 매일 죽고 싶을 만큼 슬픈 날을 보냈다. 마지막엔 독일에서 수입한 ‘카르바마제핀’을 베이징에서 샀는데, 1정에 10여 위안(약 1,700원)으로 하루에 3알을 먹어야 견딜 수 있었다. 당시 월급은 매우 낮았다. 집안에 남았던 약간의 돈을 전부 그의 의약비로 썼다. 그는 8년 동안이나 출근하지 않았다.

1995년 5월, 황민은 운 좋게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게 됐다. 연마한지 3개월 만에 약을 전부 끊었고 건강도 차츰 회복됐다. 그가 정말 완쾌되자 가족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가족에게 “나는 완쾌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친척과 친구, 학생 제자에게 “나는 파룬궁을 연마해 완쾌되었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파룬따파 진선인(眞善忍)이 그의 마음속 깊이 뿌리박았다. 고별한 지 8년 만에 다시 교단에 서게 됐다. 그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대법 사부님께서 그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셨다고 말했다! 일부 학생과 동료들도 모두 따라서 연마했다.

각종 박해를 당했으나 여전히 바른 믿음을 견지하다

마침 수많은 사람이 파룬궁을 수련하고 연마할 때, 사악의 우두머리 장쩌민과 그의 추종자들은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사람들을 적대시했다. 황민은 대학에서 탄압하는 제1호 인물이었다. 세뇌반을 조직해 강제로 그를 전향하고, 이익을 빌미로 위협하며 각종 수단을 다 써 봐도 전부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황민은 정정당당했다.

1999년 7.20 이후, 황민은 대학에서 첫 번째로 공직에서 해고당했고 월급의 지급을 중지 당했다.

1999년 12월, 황민은 거듭 베이징에 들어갔다가 자무쓰 구치소로 납치돼 7개월 동안 감금당했다. 시달림으로 머리칼, 수염, 눈썹마저 희어졌다. 마지막엔 피골이 상접했고 전신을 떨며 서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가족이 강력하게 항의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천 위안의 급식비(옥수수떡 비용)를 쓴 뒤에야 풀려났다.

자무쓰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받다

2000년 6월, 거듭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들어갔다가 납치돼 구치소로 보내졌다. 자무쓰 대학 책임자 및 ‘610’, 보위처에서는 사악의 우두머리 장쩌민을 추종하며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자료를 긁어모았다. 전자공학과 서기 린징판(林景范)은 적극적으로 보위처, ‘610’과 공안국과 협력해 별의별 궁리를 다하여 황민에게 1년의 노동교양을 시켰다. ‘진선인’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을 수갑과 무거운 족쇄를 채워 자무쓰 노동교양소에 감금했다.

자무쓰 노동교양소의 악독한 경찰들은 강제로 황민을 전향시키려고 독방에 가두기, 격리, 작은 걸상에 앉히기 등의 각종 수단을 쓰며 집중훈련대에서 5개월 동안이나 괴롭히며 믿음을 포기하도록 압박했다. 그는 전향하지 않았다. 그는 구치소에서 옴에 감염되어 전신에 검고 고름집이 생겼으며 매일 고름과 핏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얼굴 이외에는 전신에서 건강한 피부를 한 곳도 찾을 수 없었다. 심각할 때에는 옷마저 입을 수 없었으나, 노동교양소에서는 오히려 석방하지 않고 윤번으로 돌아가며 박해했다. 그의 이불 위에 비닐을 펴고 윗면에는 화장지를 펴서 사람의 신체 전부가 화장지 위에 누워있었다. 매일 커다란 주머니로 한 주머니나 되는 화장지를 사용했다. 고름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으나, 경찰은 여전히 그를 가만두지 않고 그에게 보고서를 쓰도록 했다. 그는 단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썼다. 그는 어느 방으로 가든지 모두 대법을 실증했고, 수련생에게 대법을 수련함은 잘못이 없다고 알려주었다. 사악은 그가 두려워 계속 그의 방을 바꿨다. 그가 걸을 수 없게 되면 네 명의 죄수가 이불귀를 서로 잡아당겨 들고 갔는데 얼마나 많이 방을 바꾸었는지 모른다. 6개월 후, 고름집은 모두 완쾌되었다.

2001년 8월, 불법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노동교양소에서는 그의 형기를 연장해 감금하려 했다. 그는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는데, 생활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게 되어서야 보석형식으로 마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경제적 박해를 당하다

그는 노동교양소에서 나와 생활 내원이 없었다. 중공(중국공산당)은 정말로 그의 경제내원을 끊었다. 그가 매일 찾아갔으나 그를 상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나는 대학 교수이다, 내가 일생동안 노동한 저축을 강탈당했는데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2001년 11월이었다. 그는 간단한 짐을 들고 대학 보위처로 가서 그들과 따졌다. 당연히 그는 대법의 신기함, 일신의 병이 완쾌된 것 등을 이야기했는데, 그를 상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진상을 명백히 알지 못하는 경찰이 그를 밀어내면서 “당신은 이미 해고당했습니다. 대학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저녁이 되자 보위처의 문을 닫고 황민을 강제로 대문 밖으로 밀어냈다. 황민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절대 사악이 이렇게 박해함을 허락할 수는 없다. 대학 관할 범위에 내가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큰길로 가겠다.” 큰길 인도의 작은 숲에서 간단한 짐을 펴고 잠을 잤다. 11월, 동북의 날씨는 이미 매우 추웠다. 그는 기아와 추위를 참으며 하룻밤을 그곳에서 누워 잤다. 이른 아침,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연이어 이곳을 지났는데, 한 사람이 그의 앞으로 걸어와서 큰 소리로 “당신은 죽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산 사람입니까?”라고 물었다. 황민은 큰 소리로 “나는 산 사람입니다! 나는 대학교수이며 나는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인데, 그들에게 해고당했습니다. 나에게 노동교양을 판결했는데, 내가 돌아오자 월급을 지급해주지 않아 나는 먹을 것도 거주할 곳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대학 측과 연락하여 먼저 가족에게 데려가도록 하면서, 우리가 꼭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돈을 찾아가라며 매달 500위안(약 8만 3천 원)의 생활비를 준다고 했다.

텔레비전을 통해 진상을 알리는 스폿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비밀리에 불법적인 20년 형을 선고하다

2002년, 몇 명의 어린 수련생이 여러 차례 그를 찾아 기술에 관한 일을 문의했는데, 그는 관리는 방화도 할 수 있지만, 백성에게는 등불을 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나아가 스폿 방송하는 방식으로 대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렸다. 2002년 그와 몇 명의 수련생이 함께 연구하여 현지 스폿방송에 성공했다. 국가보안과 공안이 전부 출동해 그들을 붙잡으려고 했기에 어찌할 방도 없이 유랑생활을 했다. 60세인 노인에 대해 말하면 얼마나 간난한 일인가.

2003년 1월 23일, 황민은 산둥성 웨이팡시(濰坊市) 공안국 웨이팡 싼분국(三分局)에 의해 형사 구류처분을 받았고, 2003년 2월 19일에 산둥성 웨이하이시 공안국 횃불 첨단기술산업개발구(火炬高科技術產業開發區) 분국으로 옮겨져 형사구류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3월 24일에 웨이하이시 구치소로 납치돼 감금당했고, 2003년 8월 15일 20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아 2003년 9월 1일에 산둥성 감옥으로 보내졌다. 2003년 2월 18일에 가족은 황민이 납치당한 소식을 받았는데, 가족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산둥 웨이하이 구치소로 황민을 면회하러 서둘러 갔지만 소장 샤오진안(肖金安)은 기어코 각종 구실로 거부했다. 나는 매일 웨이하이 구치소로 갔다. 그때 황민 등 파룬궁수련생은 모두 단식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건은 웨이하이 첨단기술공안국에서 심리를 진행해 웨이하이 환추이(環翠) 법정에서 판결을 내렸다. 황민은 가는 김에 천 5백 위안(약 25만 원)의 돈을 어디에 압수해 놓았는지를 모르겠다며 고소했다. 공안국에서는 ‘610’을 찾으라고 했고, ‘610’은 사건과 함께 법원에 갔다고 알려주었다. 가족은 환추이 법원으로 가서 심판장 장샤오양(張曉陽)과 저우다카이(周大凱)를 찾아 돈을 요구했다. 게다가 그녀들에게 황민의 가족이 이미 도착했으므로, 개정사실을 반드시 가족에게 통지를 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전화번호까지 남겼다. 가족은 거의 매일 환추이 법원으로 갔다. 저우샤오양은 월요일에 개정하는데 큰 극장에서 진행한다고 알려주었다. 월요일을 기다렸다가 일가족은 큰 극장으로 다그쳐갔으나 동정이 없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공개 심리를 하지 않았으며, 금요일에 비밀리에 구치소에서 심판을 진행하여 유기형 20년을 언도했음을 알게 되었다!

황민 등 파룬궁수련생은 상소를 제기했다. 보름 만에 장샤오양, 저우다카이는 또 한 차례 거짓말과 속임수 등의 수단을 취하여 구치소 안에서 비밀리에 판결을 선고했는데 황민 등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유기형 20년을 선고했다.

천 5백 위안의 돈은 환추이 법원에 압수되어 있었기에 가족은 거의 매일 가서 요구했다. 장샤오양은 회피하며 만나주지 않았고, 아울러 기편, 거짓말 등 수단을 취해 돌려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 후 장샤오양은 숨어버리고 연세가 많고 여윈 늙은이를 시켜 만나게 했는데, 거짓말을 꾸며 “저우다카이가 출국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저우다카이는 전혀 출국하지 않았다. 황민이 2003년 9월 1일 산둥성 지난(濟南) 감옥으로 납치됐기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지난으로 다그쳐가는 수밖에 없었다. 웨이하이 환추이 법원에 압수됐던 천 5백 위안의 돈은 여태껏 돌려주지 않고 있다.

가족 면회, 감옥에서 책임을 미루다

황민은 줄곧 11감구역 전향 감구역에 있었다. 어느 파룬궁수련생이든지를 막론하고 들어오면 모두 먼저 엄한 관리 감구역으로 가야 했다. 세뇌, 전향한 후 기타 감구역으로 배치 받아 갔다. 황민은 단호히 전향하지 않고 늘 단식했다. 바오자, 쭈그려 앉히기 고문, 격리 등을 자행했고, 매일 사상보고서를 쓰도록 했다. 그는 전부 거부했다. 그는 이미 엄한 관리 감구역에 10여 년 동안 있었는데, 극도로 암담했고 견딜 수 없게 어렵고 고독했으며, 매일 취조당하며 괴롭힘을 당했다.

2004년 정월 초여드레, 나와 아들은 산둥성 감옥으로 면회하러 갔다. 모자 두 사람은 감옥 면회접수실로 서둘러 갔다. 접수인이 10시에 면회한다고 알려주었기에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0시 반이 되어도 동정이 없었고, 11시가 지나도 여전히 동정이 없었다. 모자 두 사람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랐고 마음이 무척 급했다. 왜냐하면 면회시간이 단지 반 시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1시 반이면 근무자는 곧 퇴근하려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11시 15분까지 기다려서야 황민을 면회하게 되었다. 부자는 4년을 만나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아들이 부친에게 위로의 말 몇 마디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단 5분 만에 한 차례의 비극이 상연됐다. 그 악독한 경찰 정(鄭) 씨는 큰소리로 “당신들은 규칙을 모릅니까.”라고 외쳤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즉시 4명의 형사범이 덮쳐들어 60여 세인 황민을 거꾸로 메고 끌어갔다. 신까지 벗겨졌다. 이 악독한 경찰 정 씨는 거짓말을 꾸미며 황민의 아들이 그의 옷과 단추를 잡아당겨 떨어뜨렸다고 말했다. 가족은 친인을 면회하러 왔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무리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사악한 경찰이 사전에 예모해 놓은 것이 분명하다. 아직 채 다 외치지도 않았는데, 그 4명의 형사죄수가 덮쳐들었다. 이후 다시는 내가 면회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11년 사이에 단지 나에게 4차례 면회 기회를 줬을 뿐이다. 어느 집에 부모형제가 없고, 어느 집에 아내와 아들딸이 없겠는가? 얼마 전 황민은 시달림으로 인해 소변보기도 어렵게 돼 산둥 경찰병원에 입원했다. 감옥측은 황민의 가족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지 않았다. 최근 혈압이 또 높아지기 시작했다. 70여 세인 노인을 이미 12년이나 감금했다. 즉시 석방해야 한다.

가족이 당한 연좌

2002년에 황민을 납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집안은 평안한 날이 없었다. 집안은 매일 24시간 동안 경찰이 초소를 서며 잠복 감시를 했는데, 그때 감히 우리 집으로 오는 사람이 없었다. 경찰은 윤번으로 가택수색을 했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늘 밤중에 우리의 아이와 나를 공안국으로 끌고 가서 심문했는데, 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전부를 미행했다. 전화 감시는 몇 년이 걸렸다. 가족에 대해 말하면 정말 ‘적군이 이미 성 아래까지 쳐들어왔는데, 마치 강적과 맞닥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가 저녁에 영어공부를 하고 돌아와 위층으로 올라왔는데, 문어귀에 서 있는 경찰을 보고 놀라 연속 소리를 질렀다.

우리 집 이웃은 심장병 환자가 있었으며 병세가 매우 심각했다. 경찰이 우리 집의 문을 두드린 것 때문에 이웃은 여러 차례나 놀라 병이 도졌다. 그래서 경찰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가족은 이웃이 놀랄까 봐 두려워 급히 문을 열었다. 우리 친척은 한 집도 빠짐없이 연좌를 당했다. 나의 남동생, 여동생, 언니는 여러 차례 교란을 당했다. 며느리의 친정집마저 빠뜨리지 않았다. 황민의 고향 허난(河南)의 모든 친척도 역시 한 집도 빠뜨리지 않았다. 형과 숙모마저 심각한 교란을 당했고, 전화도 물론 다 감시당했다. 이런 유형의 구족을 연좌시키는 사악한 정책은 그의 전 가족에게 극심한 압력과 정신적 상처를 가져다주었다. 몇 해 동안 친척은 서로 인정하지 않으며 감히 왕래하지 못했다.

연로하신 나의 이모는 무자식이다. 비록 70여 세였으나 그녀도 늘 경찰에게 교란을 당했다. 2002년 설 전야에 보웨이(保衛)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들에게 가택수색을 당했다. 노 부인의 대법 서적과 사부님의 법신상을 전부 강탈해 갔다. 71세의 고독한 노인은 이런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대량의 피를 토했다. 그리고 매우 빠르게 생활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게 됐고 결국 2003년 6월 억울하게 사망했다.

40차례를 초과하는 단식에도 여전히 산둥성 감옥에 불법 감금당하다

황민은 산둥성 감옥에서 10여 년 동안 불법 감금당했는데, 각종 박해를 헤아릴 수 없이 당했다. 단식횟수가 이미 40차례를 초과했으나 지금도 여전히 산둥성 감옥에 있다. 교도원 리웨이(李偉) 및 대대장 천옌(陳岩)은, 황민이 40여 차례 단식하며 폭력을 반대하자 엄한 관리, 독방에 가두기, 매일 작은 걸상에 앉히기 고문,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을 가했다. 사악한 교육원과 바오자 죄수에게 지시해 인성이라곤 조금도 엿볼 수 없는 각종 학대와 손상을 입혔다. 나이가 어린 무지한 죄수에게도 황민을 괴롭히도록 지시했는데 이 어린 죄수는 황민의 몸에 올라타 잔혹하게 맷돌질을 하고, 어깨에 앉기도 하며, 머리꼭지를 누르고 또 눈을 후벼 파고 코를 잡는 등 심지어 잠을 자지도 못하게 했다. 황민이 막 잠이 들면 갑자기 큰 소리를 질러 그를 깨웠다. 몇 달 동안 손상을 가했는데, 70여 세인 노인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겠는가.

황민은 여러 차례 악독한 경찰 리웨이와 논쟁했는데, 매번마다 모두 큰 소리로 호되게 사악의 죄행을 폭로했고, 정면으로 파룬따파를 널리 알렸다.

지금 황민은 몸 상황이 갈수록 나빠져, 혈압이 높아지고 소변을 보기 어려운 증상 등 노년의 병증이 나타났다. 그러나 산둥성 감옥은 여전히 석방하지 않고 있다.

원문발표: 2017년 3월 3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3/31/3449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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