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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 바이산시 류자오젠, 약물 박해당해 사망 추측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지린보도) 지린성(吉林省) 바이산시(白山市) 장위안구(江源區) 파룬궁수련생 류자오젠(劉兆健)은 2001년 말, 납치돼 잔인한 시달림을 당한 후, 6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다. 2005년 박해로 생명이 위급해져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았다. 최근에 입수한 소식에 의하면, 이미 사망한 지 몇 해 된다고 한다.

류자오젠이 당시 출소할 때 폐, 위가 문드러져 구멍이 생겼다. 그 후 그는 외지로 가서셋집에 살다가 각혈해 사망했다. 며칠 후 수련생이 발견했는데, 피마저 얼었다고 한다.

류자오젠은 출소한 후 말하기를, 중공(중국공산당) 감옥 안에서 확고한 대법제자에게 일종의 약물을 주사했는데, 5~7년 후면 폐 부위는 천천히 문드러진다고 했다. 이것은 당시 본인은 모르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그에게 알려준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도 일종의 약을 주사 당해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말로는 그에게 ‘치료’해 준다고 했다.

바이산시 장위안구 파룬궁수련생 쉬후이젠(徐會建)은 출소해 4년 만에 역시 각혈해 사망했다. 쉬후이젠은 2001년 4월 12일 납치돼 10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아, 지린감옥, 창춘(長春) 톄베이(鐵北)감옥, 궁주링(公主嶺)감옥에 감금됐다. 1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 시달림을 여러 번 겪고 사람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으며, 심각한 폐결핵 증상이 나타났다. 감옥 의사는 그에게 약물을 주사했는데 말로는 ‘치료’한다고 했다. 2011년 4월 출소해 집으로 돌아온 후, 늘 각혈 증상이 나타났다. 그 후 흉강이 변형돼 어쩔 수 없이 좌측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고, 매일 새벽에 잠깐 잠잘 수밖에 없었다. 2014년 12월 24일 한 차례 매우 심각한 각혈 증상이 나타난 후, 호흡을 멈췄다. 당시 나이 겨우 41세였다.

류자오젠은 대학을 졸업하고 장위안현(江源縣) 지세국에 배치받았는데, 그 후 부국장을 맡았다. 1999년 3월, 대법을 얻었다.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했다가, 여러 차례 불법 구류, 노동교양, 판결 당했다. 장위안현 구치소 안에서 각종 고문, 학대당했고, 욕먹고 구타당했으며, 이쑤시개로 손, 발, 손톱 및 연한 피부를 찔러놓아 몸 위에는 이쑤시개에 찔려져 남긴 흉터가 남아 있었다.

2000년,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 때문에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류자오젠은 바이산시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당할 때, 강제로 쿠창거우(庫倉溝) 석회가마 안에서 힘든 노역을 했다. 무더운 여름날, 석회 연무로 한 쪽 근시 안경은 잠깐이면 보이지 않았다…… 연공한 것 때문에 류자오젠은 악독한 경찰에 의해 갇혀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했다.

2001년 말, 2002년 초 류자오젠은 파룬궁 진상현수막을 걸다가 바이산시 훙치(紅旗)파출소의 잠복 감시하는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됐다. 바이산시 형사경찰대와 구치소 안에선 악독한 경찰이 욕하고 구타하기, 장시간 동안 전기충격 가하기, 수갑, 족쇄, 수갑에 채워 매달기, 고무호스로 음식물 주입하기, 사인침대(死刑床)에 올리기 등 고문했다. 각종 형구가 가득한, 전문적으로 형을 집행하는 작은 방 안에서 그는 ‘대’ 자형으로 채워져 3박 4일을 벽에 붙어 매달렸다. 주야로 번갈아가며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세워져 매달린 사악한 곳은, 사람이 힘껏 몸과 두 팔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피로해져 몸이 처지면, 또 손은 수갑에 채워지는데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고, 손목은 끊어질 듯했기에 힘껏 지탱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 사람은 정력이 거의 다 소모하게 된다. 당시의 훙치 파출소 소장이 직접 형을 집행했다. 주먹과 발, 혁대로 구타하고, 뜻밖에 변태적으로 손으로 류 씨의 음부를 사납게 꼬집어놓아 류 씨는 거의 혼미해졌다.

류자오젠은 학대로 장시간 생활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 후 6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아 지린 감옥으로 납치됐다. 그는 줄곧 단호하게 사악에 협력하지 않아 ‘영창에 수감’ 돼 1년 넘게 엄한 관리 박해를 당했다. 심각한 박해를 당해 피골이 상접해지고 등이 굽었으며, 몸무게는 40kg도 되지 않아 말하는 것마저 기운이 없고 가래가 많아졌다.그러나 그는 굳게 대법을 수련해, 단호히 이른바 ‘전향’하지 않았다. 몸이 극도로 허약했을 때, 그는 또 수갑으로 침대 위에 여러 날 동안 채워져 있었다.

2005년 봄, 류자오젠은 창춘 톄베이감옥으로 옮겨져 계속 박해당했다. 당시 20명 대법제자가 창춘 톄베이감옥으로 옮겨졌다. 류자오젠은 마찬가지로 단호히 사악에 협력치 않고, 악인의 요구, 명령, 지시를 따르지 않아 죄수복을 입지 않았고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폐결핵 증상과 간병 증상이 나타났다. 그가 있는 감 구역(8감 구역)의 교도원은 죄수에게 지시해 강제로 그를 병원으로 들고 갔다.

톄베이감옥 610 사무실에선 류자오젠에게 생명 위험이 나타나 책임을 감당할까 두려워, 주동적으로 류자오젠에게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게 하도록 했으나 병보석의 조건은 ‘5서’를 쓰는 것이다. 류자오젠은 단호히 쓰지 않았다. 감옥 측에서는 그의 아내, 아이 및 외지의 언니를 찾아와서 권고하게 했으나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런 다음 며칠이 되어 류자오젠의 병 상황은 나날이 악화해 음식물을 먹지 못했고, 심지어 호흡도 어려웠다. 감옥 측에서 또 그에게 산소를 공급한 적이 있다. 이렇게 감옥에선 어쩔 수 없이 그를 공안병원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공안 병원에서 수감을 거부해 또 지린성 결핵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매일 대량의 의약비가 들었고 게다가 감옥 경찰은 반드시 매일 그를 간호하고 도시락을 사주어야 했는데, 겨우 2~3일이 지나서 감옥 측은 감당치 못해 병원, 검찰원, 법원을 찾았다. 관련 인원은 류자오젠에 대해, ‘보증서’를 쓰기만 하면 즉시 석방하겠다고 승낙했다. 비록 그들은 애걸하는 태도였으나 류자오젠은 여전히 단호히 쓰지 않았다. 또 며칠이 지나 감옥 측은 철저히 타협해 무조건으로 병보석 절차를 밟아 주었다. 그러나 바이산시 측에선 “이 사람을 우리는 담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접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2006년 5월, 류자오젠은 산둥성 자오난시(膠南市) 하이칭진(海青鎮) 고향으로 돌아갔다. 연공한 후 몸은 호전되기 시작해, 천천히 자신의 생활을 처리할 수 있었으나 폐 부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거의 그물 모양으로 됐던 이유로, 일 년 내내 기침했다. 이렇게 톄베이감옥에선 또 두 차례나 자오난시로 와서 그를 되찾아 가려 했다. 다시 박해를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유랑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류자오젠은 2008년 7월 16일 집으로 돌아와서 딸에게 입학 사항을 처리해 줄 때, 여러 날잠복해 있던 톄베이 감옥의 악독한 경찰과 자오난시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됐다. 자오난시 공안국에서 3일간 감금당한 후, 톄베이 감옥으로 납치돼 돌아왔다. 악독한 경찰은 가족에 대해 류자오젠은 톄베이감옥에서 감금 기한이 만기되지 않은 상황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았는데, 또 6개월 시간이 부족하다며 이 6개월 시간을 메워야 한다고 말했다.

류자오젠은 톄베이감옥, 먼저 엄한 관리 대대에서 8일 동안 감금됐다. 그 후 또 5감 구역으로 배치됐는데, 그는 박해를 저지해 ‘보고합니다’를 외치지 않고, 번호를 매긴 죄수복을 입지 않았으며,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다.

2009년 2월 25일, 바이산시 장위안구 610인원은 류자오젠을 산동 자오난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문발표: 2017년 1월 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8/34059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