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고 있는 아버지를 다시 냉동실로 밀어 넣었다
헤이룽쟝 퉁장(同江)시 진촨향 진촨촌 농민 청쉐산(程学善)은 2005년 4월 5일 오전 푸위안현 눙챠오향에서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경찰들에게 불법으로 납치됐는데, 그의 가족은 4월 12일 “청쉐산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의 처와 아들이 푸위안으로 급히 달려가 영안실에 안치돼 있는 청쉐산을 봤다. 그는 냉동실에 놓여 있었는데 상반신만 보이는 상태였다. 그의 장남은 ‘나의 부친에 대한 회억’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그날의 일을 적었다. “부친은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위로해서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코 좌측이 파열돼 있었다. 내가 부친의 머리를 감싸 안으려고 할 때 부친이 두 눈을 천천히 반쯤 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것을 본 순간 우리는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우리는 금방 경찰에 의해 강제로 밖으로 끌려 나갔다. 아버지를 우리가 모시겠다고 발버둥 쳤지만, 4, 5명의 경찰관에 의해 강제로 여관으로 끌려갔다. 나는 살아 있는 채 냉동실에 잠겨 있는 부친을 다시는 볼 수도 없었고 검사도 할 수 없었다.”
청쉐산
여러분, 생각해보라! 혹형을 당해 죽어가는 사람이 아닌 일반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냉동실에 가둔다면 얼마의 시간 동안을 견딜 수 있을까? 아들이, 아버지가 아직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도, 곧바로 응급처치를 취하지 않고, 반대로 아들을 강제로 끌고 나갔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그의 아버지를 냉동실에 냉동시켜 죽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몇몇 자녀들은 끌려나갔고, 체온이 있는 부친을 재차 냉동실에 밀어 넣었다
또 한 사례도 청쉐산과 매우 흡사하다. 2009년 1월 28일 충칭 장진(江津)시 지방세무국 아파트 301호에 거주하는 장진시 지방세무국에서 간부로 퇴직한 장시칭(江锡清)은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충칭 시산핑(西山坪)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어 경찰에게 구타당해 혼수상태에 빠지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라고 가족들에게 통지했다. 장시칭의 사위와 자녀들이(사위 장훙, 장훙빈, 장핑, 장리, 장다밍, 천치챵 등) 급히 시체보관실로 달려갔다.
장시칭 아내
시체 보관실에서 냉동실 문을 열고 장시칭의 시신을 밖으로 끌어냈을 때 장훙이 부친의 시신을 손으로 만지자, 아직도 인중(人中) 부위가 따뜻했다.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경찰들도 깜짝 놀랐으며 서로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훙빈의 외침 소리를 듣고 시신이 누워 있는 받침 철판을 밖으로 반 이상 당기고 가슴을 만져보니 역시 따뜻했다.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 가슴이 아직 따뜻하다.” 만약 죽은 지 7시간이 지났다면, 죽은 후 냉동실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다는 것인데, 아직도 몸이 따뜻하다는 것은 이론상 맞지 않는다. 이는 살아 있던 사람을 냉동실에 넣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신들도 와서 만져봐라!”라고 소리쳤다.
그때야 비로소 노동교양소 경찰들이 정신을 차리고 장시칭을 다시 냉동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 자녀들이 이를 저지하며 장시칭을 냉동실에서 빼내 바닥에 뉘인 후 “우리 아버지를 빨리 구해줘요, 우리 아버지를 구해줘요! 아버지는 죽지 않았어요.”라고 소리쳤다. 장시칭의 네 자녀가 장시칭의 몸을 만지며 110 경찰에 구조요청을 하라고 소리 질렀다. 그때 한 사복경찰관이 “소용없다. 공안요원이 이 자리에 있으니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장리는 휴대폰으로 110 경찰신고전화를 걸어 신고를 하자, 상대편에서는 10분 후에 도착할 거라고 했다. 장훙빈도 110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어느 지점인가를 물어서 ‘충칭 시공안국 베이페이 분국 시체보관소라고 대답하고, “우리 아버지는 죽지 않았는데 왜, 냉동실에 넣었는가? 나는 110에 이미 신고했다, 서둘러 사람을 보내라!”라고 했다. 상대방은 전화에서 “그들에게 냉동시키지 말라고 해라.”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장 공안요원들은 장시칭을 냉동실로 다시 밀어 넣었으며 장훙, 장핑, 장리, 장다밍 등의 자녀들을 강제로 밖으로 밀어냈다. 시산핑 7대대 노동교양소 경찰관은 장훙빈에게 삿대질을 하며 “당신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라며 소리쳤고, 장리에게는 “너는 집안을 망치는 자식이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노동교양소 측은, 그들이 밝힌 사인을 가족이 인정하지 않은 채 살아 있던 사람을 화장해 불에 태워 죽였다.
사람을 고문하고 구타해서 실신상태로 만들어 놓은 다음, 죽은 사람으로 취급해서 냉동시켜 죽이고, 태워서 죽이고, 적반하장격으로 남의 자식에게 집안 망치는 자식이라고 하거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욕하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산 사람을 냉동시켜 죽이고, 불에 태워 화장시키는 것은 머리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응급처치는 가짜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진짜, 산 사람을 냉동실로 밀어 넣었다
이런 예는 많다. 헤이룽장성 지시(雞西)시 둥하이(東海) 18탄광 근로자인 양하이링(楊海玲)은 2002년 3월 경찰에 납치되어 구치소에 감금됐다. 그는 2003년 4월 11일 양하이링과 다른 4명의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감방 안에서 연공을 하고 있을 때, 헤룽장 미산(密山)시 구치소 소장 마보우성(馬寶生)이 수하 경찰과 남자 죄수 몇 명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와 구타하기 시작했다. 구치소장은 양하이링의 머리채를 잡고 힘껏 바닥으로 내리쳤는데, 양하이링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양하이링
다음날 정오 같은 감방의 파룬궁수련생들이, 양하이링이 호흡곤란증세를 보이며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즉시 마보우성 구치소장에게 치료를 해줘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당일 오후 1시 20분 양하이링의 호흡은 갈수록 미약해졌다. 양하이링의 상태가 정말로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구치소장은, 그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후 즉시 양하이링을 미산시 인민병원으로 이송해, 그곳 의사와 공모해 “양하이링이 심장쇠약으로 사망했다.”라는 허위 진단을 내린 후 즉시 영안실 냉동 관에 밀어 넣어 냉동시켰다.
연락을 받은 가족들은 당일 오후 10시경 병원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 한 경찰관이 가족을 영안실로 안내한 후 떠나 버렸다.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수상하게 여겨 양하이링의 시체를검사해서 사진으로 남기려고 생각했다. 양하이링의 옷을 벗기는 순간 좌측 겨드랑이 아래가 아직도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고, 오른쪽 겨드랑이도 체온이 남아 있었으며, 가슴에도 따스한 체온이 유지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결국, 가족들은 몇몇 번의 확인으로 신체 3곳에 체온이 유지되고 있는 등 몸 전체적으로도 정상인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극한적인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류이하링을 살릴 수도 있겠다’라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구치소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없었다. 새벽녘이 되자 양하이링의 체온은 점차 내려갔으며, 가족들은 그렇게 하염없이 양하이링의 죽음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양하이링이 병원으로 보내졌을 때 의사는 응급처치 등 합당한 조치를 취했는가? 그들은 책임을 떠넘기는 데에만 급급해 하면서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을 냉동실에 밀어 넣어 살해했다.경찰이 사람 목숨을 초개같이 알고, 병원의 의사마저 한 패거리가 되어 살해를 도와주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것이 어디 죽은 사람을 해부하는 것인가? 산 사람을 해부하고 있었다!”
또 한 사례도 34세 된 살아 있던 파룬궁수련생이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이름은 양리룽(杨丽荣)이다. 집은 허베이성 바오딩시 딩저우시 베이먼가에 있었다.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그녀 수차례 세뇌반에 납치되었고, 그로 인해 벌금형식으로 많은 돈을 강탈당하기도 했다. 2002년 12월 27일 오후 경찰이 그의 집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자, 그대로 가버렸는데, 정부부처 계량국 기사로 근무하는 어리석은 남편은 경찰들의 협박에 일자리를 잃을까 봐 걱정이 된 나머지 이튿날 새벽 집에 사람들이 없는 틈을 노려 아내 양리룽의 목을 졸랐다. 나약한 양리룽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기력을 잃자,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이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양리룽의 신체를 해부해 여러 개 장기를 적출했다, 내장을 꺼낼 때는 김이 모락모락 났으며 시뻘건 피가 줄줄 흘렀다. 딩저우시 공안국의 한 사람은 “이것이 어디 죽은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는 것인가? 분명히 산사람 신체를 해부하는 것이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해 양리룽의 어린 아들의 나이가 10세였고, 양리룽이 생체해부를 당해 죽은 날은 2002년 음력 12월 28일로 구정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양리룽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동물이라도 죽으면 혈액은 빠른 속도로 응고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양리룽을 해부할 때는 내장에는 열기가 있었으며, 피도 줄줄 흘렀다. 법의가 해부 할 때왜 그렇게 서둘렀는가? 그의 장기는 왜 빼 갔는가?
심장의 혈관이 잘리자 그는 한동안 경련을 일으켰다
생체적출을 당한 사례가 한 사람뿐이겠는가?
2009년 12월 파룬궁수련생 생체장기 적출현장에서 경비를 담당했던 무장경찰관의 증언에 의하면, 2002년 4월 9일 선양 군구(軍區) 종합병원 15층 한 수술실에서 두 명의 군의가 완전히 맑은 정신 상태에 있는 여자 파룬궁수련생을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개복하여 심장, 신장 등 모든 장기를 적출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 마취도 하지 않았어요. 칼이 가슴에 닿는 데도 그들의 손은 한 치의 떨림도 없었어요. 나라면 떨렸을 것입니다 … 먼저 심장, 이어서 신장을 적출했어요. 심장의 혈관을 자르는 순간 그는 한 동안 경련을 일으켰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그 비명소리를 흉내 낸다면, 흉내를 그렇게 똑 같게 낼 수도 없겠지만, 찢어지는 그런 비명, 그리고 아 … 아 … 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 다물지 못하는 그런 끔찍한 모습, 두 눈은 떠 있었고, 입은 벌린 채로. 아 … 더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는 그날 목격한 정황을 회억했다.
그는, “그 여성 파룬궁수련생은 중학교 교사로 나이는 30세였으며, 12살 난 아이가 있었다.… ”고 했다.
해외 여러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누구나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은 중공이 수만 명이나 되는 살아 있는 파룬궁수련생들의 장기를 빼내 장기이식에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들 파룬궁수련생들은 생체장기적출을 당할 때 대부분은 은밀하게 비밀장소에서 자행했다. 말하자면 수만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은 사람으로 취급돼 학살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방면의 보도는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파룬궁수련생이 장기적출대상으로 낙점되는 즉시 그들을 감옥에서 빼내기 때문이다. 감옥에 남은 사람들은 그가 다른 감옥으로 이감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생체장기적출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도사실 언제 그런 참변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장기적출에 참여하고 있는 의사들, 그들 역시 살인범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저지른 살인 만행을 누설할 수 없는 것은 뻔한일이다. 파룬궁수련생의 장기적출에 참여했던 한 의사의 부인이 해외에서 그 사실을 폭로했는데, 그의 남편도 자신이 직접 2천여 명에 달하는 파룬궁수련생들의 각막을 적출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휘발유 부어 생사람을 불태워 죽였다
그뿐만 아니라 중공도당들은 파룬궁수련생을 모질게 때려 기절하게 해놓고, 물증을 없애기 위해 산 사람을 태워 죽이는 방법을 쓰는데, 그런 일은 비일비재로 흔한 일이다.
후베이성 마청시 바이궈진 농부인 왕화쥔(王華君)은 2001년 4월 현지 정법위 당서기 쉬스첀(徐世前)에게 매를 맞아 정신을 잃고 기절해 쓰러졌다. 쉬스첀은 실신한 그를 진챠오(金橋) 광장으로 끌고 가서 그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산채로 태워 죽였다.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 분신자살했다.”라고 누명을 씌우면서 “파룬궁수련생이 도가 지나쳐 미쳐서 스스로 분신해 죽었다.”라고 대외적인 선전에 악용했다. 그렇지만 현장목격자가 증언했다. “불이 막 타오를 때 왕화쥔은 누워 있었는데, 잠시 후 불에 놀란 그가 몸을 움직여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다.”라고 했다. 그때 현장의 공안요원들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혹시 그 목격자가 살해내용의 진상을 외칠까 봐 당황해하더라고 전했다. 왕화쥔이 불태워 죽임을 당할 때 그는 고문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불에 탄 왕화쥔의 유해는 한쪽 귀가 없었고, 목구멍에는 칼자국에 의해 생긴 깊은 구멍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경찰당국이 그를 태워 그런 증거를 없애려 했던 소행이 분명했다. 그해 왕화쥔의 나이는 겨우 30세였다.
왕화쥔
산 사람을 냉동시키고 산 사람을 불태워 죽이고, 또 산사람 생체에서 장기적출하고, 산 사람에게 휘발유를 부어 불태워 죽이는 만행들, 중공이 파룬궁에 대해 저지른 만행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원문발표: 2015년 1월 2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례 종합서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26/3035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