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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법제자 가족, 교도관도 탄복

글/ 중국대륙 파룬따파 제자 가족

[밍후이왕] 1999년부터 중국공산당은 파룬따파(파룬궁)를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이미 17년이 된다. 파룬따파 제자의 가족도 이번 재난에서 걸어지나왔다. 나의 경험을 말해보겠다.

나의 아내는 파룬따파 제자이다. 이번 박해에서 아내는 불법적으로 구류되었었고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을 받았으며 우리 온 가족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성(省)에서 1년간 유리걸식했다. 아내는 원흉 장쩌민을 고소하여 경찰에게 불법적으로 끌려갔다. 지금 돌이켜 보면 큰일도 아닌데 그땐 확실히 어려웠다.

두 손을 함께 잡았을 때 교도관은 오히려 웃었다…

아내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을 받았을 때 나는 변호사를 찾았다. 변호사는 아내가 이미 노동교양을 받은 걸 알고 이 사건을 받지 않았다. 나는 식품과 옷을 사서 노동교양소에 아내를 면회하러 갔다. 접수하는 사람은 한 달에 한 번밖에 면회할 수 없다면서 옷은 두고 가도 되지만 식품은 안 된다고 말했다.

일주일 후 나는 또 갔다. 큰 유리창을 사이에 둔 면회실에서 오랫동안 헤어졌던 아내를 만났다. 나는 첫 마디에 “당신 어때? 당신을 괴롭힌 사람이 있었어? 간단하게 사실 경과를 말해 봐. 내가 베이징에 가 변호사를 청할 준비를 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그때 아내를 감시하던 교도관은 깜짝 놀라더니 면회시간이 10분이라고 말했다. 나는 시간을 다그쳐 끊임없이 말했다. “돈이 필요해? 옷이 필요해? 난 당신 부모 집에 가 살고 있어. 집에는 내가 있으니 당신 걱정하지 마. 나, 매달 당신 보러 올 거야. 어려움이 있으면 말해.” 아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어설픈 웃음만 지었다.

나는 또 등록실에 갔는데 책상 옆에 창문이 있는 것을 보았다. 창문은 꽉 닫혀 있지 않아 아내가 그곳에서 옷을 가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책상을 에둘러 창가에 갔다. 등기를 책임진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여보세요.”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를 아는 체하지 않고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아내에게 말했다. “다가와 손을 잡아.” 아내 옆에 있던 교도관이 악하게 나에게 말했다. “당신 날아 들어오고 싶어요?” 나는 말했다. “나는 정말 날아 들어가고 싶은데 날개가 없네.” 아내는 손에 낀 낡은 장갑을 벗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 손을 함께 잡았을 때 그 교도관은 오히려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시름 놓으세요. 우린 이분을 괴롭히지 않고 잘 보살필 겁니다.” 이런 간단한 행동으로 이후에 아무도 아내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고 정말 그나마 보살펴주었다고 했다.

후에 우리 당시 이 행동은 교도관들 사이에 전해졌다고 한다. 그녀들은 배후에서 대법제자 가족을 평가했다. 그 교도관이 말했다. “이 평생 이런 남자에게 시집갔다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교도관이 어리둥절해져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찾아왔는가?”라고 말하다

변호사는 나의 사건을 받지 않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인터넷에서 일부 법률 지식을 배우고 행정심의 길을 걸었다. 공안국, 공안국 민원처리사무실, 공안 분국, 파출소를 찾아다녔는데 매일 몇몇 대법제자가 나와 동행하여 곳곳에 찾아다녔다. 한번은 공안국에 갔는데 300여 명의 대법제자가 모두 공안국 문 앞에서 나를 도와주었다. 한 경찰이 나를 접대할 때 주위 대법제자들이 모두 다가와 나를 도와 말했다. 그때 길거리 맞은편에 있던 사람은 이 정경을 보고 모두 이쪽으로 다가왔다.

순간 온 거리에 사람들로 꽉 찼다. 그 경찰은 당시 어리둥절해져 말도 약간 더듬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찾아서 왔는가? 민원청원은 다섯 명을 초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이 말을 할 때 길 맞은편에 있던 대법제자들이 모두 이쪽으로 걸어왔다. 어떤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순간 길이 다 막혔고 내 주위에는 모두 대법제자들이었다. 아무도 뒷걸음치는 사람이 없이 나의 주위에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는데 그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것은 힘이었다.

그 순간 나의 모든 억울함과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다 이런 따뜻함에 쫓겨 갔다. 그때 아내가 돌아오지 못했지만, 나의 마음에는 감격이 넘쳤다.

파룬따파 제자는 우리와 같은 이런 가족을 잊지 않았다. 설이 다가오자 어떤 대법제자는 큰 생선 한 마리를 사 왔고 어떤 사람은 나와 아이가 어려움에 부닥쳤다고 며칠에 한 번씩 따뜻한 만두를 가져다주었고 어떤 사람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사 주었다. 이런 정경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고 또 진심으로 그들이 고맙다.

안부편지

대법제자 가족으로서 감당한 압력은 한마디로 다 말할 수 없다. 어느 날 저녁, 엄마 없는 아이의 정서를 풀어주려고 나는 아이를 데리고 슈퍼에 갔는데 돌고 돌면서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우리 둘은 슈퍼 광장에서 멍하니 맞은편 전자 네온사인 스크린에서 방송하는 광고를 보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막차가 와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권했다. “아니면 이혼하시오.” 나는 말했다.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이혼을 제기하는 것은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내를 도와 평온하게 이 어려운 고비를 넘는 겁니다.”

이어지는 나날 속에서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한 통 또 한 통 정말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기쁜 일만 말하고 슬픈 일은 말할 수 없었고 좋은 말을 많이 했다. 내가 돈을 많이 버니깐 아내에게 돈 쓰는 것을 계산하지 말라고 말했다. 사실 실제 정황은 내가 이미 몇 달 동안 실업 당했었다. 아내에게 내가 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일부러 원 직장에 가 직장 명칭이 있는 원고지를 달라고 하여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편지 뒷면에 내가 지은 몇 마디 말을 썼다.

한번은 이렇게 썼다. “기억해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나와 몸 돌릴만한 거리에 있을 뿐이요.” 웃는 표정을 짓는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한번은 ‘기다림’이라는 작은 시를 썼다. “당신과 나 금생에 동반자가 되었는데 지금 아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네. 겨울이 가고 봄이 옴이 너무 늦구나. 남편이 어찌 관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남이 짧긴 하지만 몸조심하는 것이 우선이라오. 근심에 쌓인 아내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하니 남편인 내가 어찌 그리워하지 않겠소. 헤어질 때 한탄 소리, 당신과 나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서로의 마음은 이어져 있으니 남편인 내가 어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소.” 또 한 번은 이렇게 썼다. “행복, (내가 집에 있을 때 아내에 대한 칭호) 겨울이 왔는데 봄이 멀겠소?”

하루는 아내 편지를 받고 나는 빨리 집으로 향했다. 편지를 옷 깊숙한 곳에 넣었는데도 길에서 잃어버릴까 봐 자꾸 만져보았고 그것이 희망인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편지를 뜯어 읽어보고 나는 엉엉 울었다.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때 창밖에 있는 작은 새를 보고 새가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생각했다. 정말 새가 부러웠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데 나를 보면 이렇게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항쟁이 다 작용을 일으켰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노동교양소 전화를 받았다. 내게 아내에게 돈을 부치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아내가 직접 나에게 말하면 천 위안(약 17만 원)이 아니라 만 위안(약 174만 원)이라도 나는 당장 줄 겁니다.” 교도관은 강경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안에 전화가 없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럼 난 아내가 돈이 필요한지 모르는데 어떻게 돈을 줄 수 있습니까?” 사실 나는 아내와 한 번 통화할 기회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농촌에도 다 전화가 통하는데 당신 그곳에 전화가 없습니까? 누굴 속이려 듭니까?”

나는 상대방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속사포를 쏘듯이 말했다. “나의 아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노동교양 결정 통지서도 나에게 주지 않습니까?” 그녀는 나에게 주소지 검찰실에 편지를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그게 무슨 기구입니까? 허수아비나 다름없습니다. 나를 도와 아내에게 말 한마디 전해줄 수 있습니까?” 상대방은 된다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나의 아내에게 알려주십시오. 나는 베이징에 가 변호사를 청해 당신들을 신고할 겁니다. 기껏해야 죽는 일이겠지. 난 막나갈 겁니다!” 상대방의 태도는 즉시 완화되었다. “당신은 누굴 신고할 겁니까?” 나는 말했다. “파출소, 공안국, 610, 노동교도소를 다 신고할 겁니다!” 그녀는 말했다. “이 말은 전해줄 수 없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럼 당신이 나에게 떠들게 뭐 있습니까?!” 다음 나는 전화를 끊었다. 솔직히 나는 너무 두려웠다. 나는 나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내를 해칠까 봐 두려웠다. 그다음 일주일은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한동안 텔레비전에서 유사한 취조 장면이 나오면 난 놀라 식은땀이 났다. “아내도 이런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그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때 나는 매일 눈만 뜨면 기적이 발생하길 바랐고 아내 소식이 있길 바랐다.

설이 지난 후 노동교양소에서 나에게 면회할 수 있다는 통지를 했다. 전날 저녁, 나는 한잠도 자지 못하고 뒤치락거렸다. 아내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할까? 마침내 내가 면회할 시간이 되었다. 아내를 만났는데 무슨 영문인지 눈물이 자꾸 쏟아져 십 분 동안 아내에게 몸조심하고 자신을 잘 돌보라 하고 아이, 노인은 다 잘 있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아내에게 위로를 해주었을 뿐이다. 면회가 끝나 나올 때 대장이라고 자칭한 사람이 나를 불러 왜 전화를 건 경찰을 욕했는가 물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욕하지 않았습니다.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왜 아내와 통화하지 못하게 합니까? 왜 노동교양 결정 통지서를 주지 않습니까?”기세등등하게 계속해 ‘왜’인지를 묻자그 대장은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직 아무도 우리를 욕한 사람이 없는데 당신이 처음입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닐 겁니다.” 그녀는 말했다. “가십시오, 이후 우리와 말할 때 이런 태도로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녀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어느 면회하는 날 나는 등기 수속을 했는데 면회하지 못하게 했다. 내가 왜 못하는가 물었더니 담당자는 아내가 기율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그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면회하러 온 사람입니다.” 상대방은 그녀가 기율을 위반하면 면회시켜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난 당신들 지도자를 만나보겠습니다.” 접견실에서 주임을 만났는데 그녀는 아내가 ‘전향’하기만 하면 바로 면회시켜주고 감형시켜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기껏해야 면회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고 한마디 말하고 몸을 돌려갔다. 뒤돌아보니 그 사람은 입을 벌리고 그곳에 멍하니 있었다.

또 한 달이 지나 면회하는 날이 되었는데도 면회시켜 주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 집사람에게 일이 생긴 거 아닙니까? 오늘 반드시 아내를 만나봐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법률위원회에 가 당신들을 신고하겠습니다!” 후에 반나절 기다렸더니 교도관이 나에게 쪽지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아내 필체였는데 건강하게 있으니 시름 놓으라는 말이었다. 쪽지를 전달해 주는 정황은 노동교도소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또 한 차례 면회하는 날인데도 아무런 구체적인 원인도 설명하지 않고 면회시켜주지 않았다. 나는 지도자를 찾았다. 키 큰 한 경찰이 나를 막고 악하게 말했다. “면회시켜 주지 않으면 만나 보지 못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건장하여 나는 약간 고개를 들어야 그를 볼 수 있었지만, 그때 어디에서 나온 힘인지 그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 법을 압니까? 면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나는 다 외치고 생각했다. 오늘 죽기 살기로 해볼 거다. 면회시켜주지 않으면 나를 때려죽이지 않고서는 안 된다. 뜻밖에 그 경찰은 울상을 하며 나에게 말했다. “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나를 욕해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치안만 관리할 뿐 다른 것은 관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느 면회하는 날 날씨는 무더운데 면회시켜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사전에 왕복 차표를 다 사놓았다. 그런데 수속할 때 면회시켜준다는 것이다. 아내를 만났을 때 정말 마음이 착잡하고 머리가 텅 비어 사전에 생각했던 말을 다 잊어버리고 노인과 아이만 말했다. 그때 아내 옆에 있던 교도관이 아내 귀에 대고 몇 마디 말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쓴 편지가 이 교도관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15분 더 면회하게 했다.

후에 아내는 나의 모든 항쟁이 다 작용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교도관들은 나의 성격이 몹시 나쁘니 아내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내가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그녀 남편이 우리와 목숨 걸고 달려들 것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들 말했다고 한다. 사실 나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어릴 때부터 커서까지 일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우리 대법제자 가족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위해 다 나서야 하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야만 이번 박해를 저지할 수 있다.

파룬따파 제자 가족이 다 나서길 바란다

아내가 노동교양소에서 나왔다. 한 달이 지난 후 나의 일자리도 해결되었다. 정말 꿈에서도 기뻐서 몇 번이나 깨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좋은 사람에겐 좋은 보답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많은 사람이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 나의 경험을 쓰는 것은 더 많은 대법제자 가족이 나서서 우리 육친을 보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 좋은 사람이다. 우리 함께 자유의 내일을 맞이하자!

원문발표: 2016년 12월 2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정의로운 이야기>세인의 정행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25/33935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