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산둥보도) 2016년 9월 14일, 산둥성(山東省) 짜오좡시(棗莊市) 이청구(嶧城區) 어산진(峨山鎮) 교사인 왕옌(王岩, 여, 42)은 파룬궁(法輪功을 탄압하고 왕옌자신을 잔혹하게 고문 박해한 장쩌민을 법률에 따라 고소했다는이유로 중국공산당에 불법적으로 납치·감금되어 6개월 동안 짜오청구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4년형을 선고 받고, 현재 짜오좡시 제1구치소에 감금돼 있는데, 건강이 극히 좋지 않은 상태다.
왕옌은 1997년 3월부터 파룬궁수련을 시작하여 지병인 편두통 등이 없어지고 건강이 좋아졌으며, 마음도 평화롭고 성격도 차분해져 딴 사람으로 변한듯했다. 그는 파룬궁수련으로 좋은 사람으로 변해 무슨 일에서나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모두 너그럽게 참고 양보했다. 이처럼 변한 모습을 본 부모님과 가족들은 파룬궁수련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고, 가정은 더욱 단란해졌다.
왕옌은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2001년 3월 9일과 2004년 6월 11일 두 차례 중공에 납치되어 각각 3년과 1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산둥성 제1여자노동교양소에 감금되어(2002~2007년) 박해를 받음으로써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구치소와 노동교양소에서 고문학대를 받으며 보냈다.
왕옌은 불법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하고, 자신을 납치, 고문, 감금 등의 비인간적인 수단으로박해한 원흉 장쩌민(江澤民)을 2015년 6월 23일 최고인민검찰원과 최고인민법원에 고소하는 고소장을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러나 사악한 중공의 악인들은 왕옌이 장쩌민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구금한 후 재판에 회부하여 첫 재판이 2015년 3월 14일 개정되었다.왕옌은 법정진술에서, 파룬궁을 수련하여 건강해졌음을 말하고,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믿고 수련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항변했으며, 장촨리(張傳利)변호사도 파룬궁을 수련하는것은 합법적이며, 장쩌민 일파가 파룬궁을 박해한 것은 범죄행위이므로 이를 고소한 것은합법적이라면서 왕옌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했으며, 또 박해원흉 장쩌민의 범죄사실을 열거했다. 그러나 법원은 9월 14일 왕옌에게 불법적으로 4년형을 선고했다. 왕옌은 불복하고 상소를 제기했다.
고문 재연: 야만적인 강제음식물주입
왕옌은 법정에 나가 재판을 받는 중에도 콧구멍에 호스를 꽂고 있었는데, 그녀는 짜오좡 제1구치소에서 일주일동안 강제로 음식물주입을 당했으며, 강제노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치소장에 의해 족쇄와 수갑으로 손과 발을 18일 동안 묶여있는 고문을 당해 혈변을 보는 등 건강이 극도로 악화 되었는데도 풀어주지 않아 생명이 위중한 지경에 처해 있는 상태다.
왕옌의 고소장 내용의 일부>
1. 대법을 수련해 가정이 화목해지고 직장에서도 근면 성실하게 근무하다
나는 고등학교시절부터 강도 높은 학습의 압력으로 심각한 편두통과 신경쇠약증상으로 고통받아오며 성격도 민감해져 의심이 많아져서 매사를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대하게 되었다. 밤이면 늘 놀라 깨어나기 일쑤여서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여러 방면으로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어서 실의에 빠져 있었다.
1997년 3월 어느 날 톈진(天津)대학 교정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이 아침연공 하는 모습을 보았다. 연공동작이 간단해서 배우기가 쉽고 또 동작이 완만하면서도 우아한 파룬따파 5장공법을 보고 마음에 끌려 ‘나도 파룬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학습부담이 과중했을 때라 편두통이 심한 상태였는데, 단지 파룬궁을 수련해야겠다는 간단한 생각을 했을 뿐인데, 편두통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마음이 차분해져 자신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한 듯했다. 그래서 바쁜 시간을 내어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법 공부와 연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좋은 사람, 진정한 사람이 되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격이 상냥해져 무슨 일과 마주칠 때마다 참고 양보하며 너그럽게 대했다. 과거와 달리 동생들에게도 욕하거나 때리지 않고 상냥하게 대했다. 지금까지는 급하고 못된 성격 때문에 동생들이 말을 듣지 않거나 말썽을 피우면 야단을 쳤고, 심지어 공부를 가르칠 때 말을 듣지 않고 알아듣지 못하면 손찌검까지 해서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나고, 머리에 혹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파룬궁수련을 시작한 후 변한 내 모습을 본 부모와 가족들이 나의 파룬궁수련을 적극 지지했다. 우리의 가정은 더욱 단란해졌다.
나는 학업을 마치고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모든 학생들이 모두 나를 따르며 좋아했고, 내가 하는 수업에 참가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학교에는 이름난 불량학생 2명이 있었다. 그들은 자주 무단결석을 하면서 공부하기보다는 치고받고 싸우며 소란피우기를 일삼았기 때문에 감당하기가 어려운 담임선생님을 울리기까지 한 그런 학생들이었으므로 교장선생님도 무슨 대책이 없는 그런 처지였다. 그런데 그 2명의 불량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도 선생님의 수업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 수업에 참가한 그들은 비교적 성적도 괜찮았고, 한 학기 동안 열심히 공부하면서 성적이 올랐는데, 그들은 무난히 대학입학시험에도 합격했다.
파룬궁의 진선인(真善忍)의 법리는 수많은 수련생에게 건강과 평화를 가져다주고, 광명과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말없이 수련하며 실천하여 사회와 국가에 도덕심을 높였으며, 좋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2. 불법적인 3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다
나는 2001년 3월 9일, 3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산둥성 제1여자노동교양소에 감금되었다. 노동교양소 교도관들은 파룬궁을 모독하고, 파룬궁창시자의 간행물, 음향제품을 모독하면서, 기만적인 교육원의 거짓말로 감금된 파룬궁수련생에게 믿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일명 ‘5서’라는 걸 쓰라고 강요하면서 응하지 않으면, 독방에 감금하고 교육을 시킨다면서 24시간 동안 지키며 말을 했다. 그 기간 동안 조금도 신체적인 자유가 없었고, 또한 믿음의 자유도 없었으므로, 감옥 중의 감옥에서 고통 받았다. 나는 고문박해에 시달려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나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방에 1개월 넘게 감금당했는데, 매일 몇 명의 교육원이라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끊임없이 모욕과 욕설 그리고 구타했다. 그러면서 화장실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소변을 보지 못해 심장에 이상증상이 나타났고, 급기야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또 며칠 동안 밤잠을 재우지 않고 2시간만 재웠는데, 그나마 눕기만 하면 불러일으켜 세웠다. 어떤 때 선 채로 잠이 들면 교육원이란 사람이 사납게 밀치고, 찬물을 끼얹고, 무슨 연고를 바르고, 간지럼피고, 눈꺼풀을 후벼 파는 등등 온갖 고문학대를 가했다. 무더운 여름에는 작은 쇠 의자에 앉혀놓고 장기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사정없이 구타했다. 장기간 그런 자세와 혹심한 구타로 둔부의 살이 터지고 찢어졌다. 구토증으로 어지럽고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사리를 분간할 수가 없게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교양소에서 장기간 과부하 노역에 시달렸다
(1) 수공으로 이불 만들기 노역으로 바늘에 찔려 손을 크게 다쳤고, 손에는 굳은살이 박혔다.
(2) 재봉틀로 자수를 놓았다.
(3) 꽃병 공예품을 제작했다.
(4) 약품위조방지상표를 붙였다(베이징 솽허혈압강하0호(北京雙鶴降壓0號)).
(5) 옷의 실밥 자르기 등의 일을 했다.
매일 부과된 할당량이 매우 과중했다. 오전 5시경 작업실에 투입되면 화장실 가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제한했는데, 모든 건 정해진 시간대로 시행했다. 휴식시간은 아예 없었으며,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점심식사시간은 30분이었고, 매일 자정까지 특근을 시킬 때가 많았다. 나는 잔혹한 고문박해로 건강이 나빠진데다가 혹독한 강제노역까지 하는 바람에 건강상태는 점점 나빠져서 늘 구토하며 화장실을 가야만 했다. 그러나 화장실 시간은 단 5분간이고, 목욕을 허락할 때는 10분간이라, 용변을 다 보지 못하고 중간에 불려나가기가 일쑤였는데, 그때 느낄 수 있는 처절한 심정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다.
2003년 10월 나의 불법적인 노동교양감금기한이 만료되어 귀가했다. 그렇지만 귀가해서도 여전히 속박당하고 있었는데, 소위 ‘사상회보자료’라는 걸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가족에게 책임을 맡겨 감시하게 하고, 직장에서도 역시 감시가 뒤따랐으므로 외출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3. 다시 2년의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을 받다
나는 2004년 5월 13일 재래시장에서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에게 진상 시디를 주었는데, 나를 미행하던 사람에게 신고당해, 경찰에 납치되어 가택수색으로 금품을 강탈당한 후 다시 웨러우(岳樓)구치소에 감금됐다. 구치소에서 조사받을 때 자백을 강요받으며, 잠 안 재우기, 쇠 의자에 앉히기 등의 고문을 여러 차례 당했다. 그곳에 감금돼 있는 동안 강제노역에 투입됐는데, 무방비 상태에서 독성이 있는 코일조립을 시켜 심신이 무력해졌고, 온갖 고문박해로 골수염이 다시 재발하여 다리통증이 왔다. 그랬어도 610은 나와 가족의 청원을 외면한 채 2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내렸다.
2004년 6월 11일 두 번째로 짜오좡 산둥성 제1여자노동교양소로 이송되어 작은 독방에 감금됐다. 날씨가 무더워 고문으로 상처 난 곳이 붉게 부어오르며 곪기 시작해서 통증이 심했고, 제대로 걷지 못해 벽을 잡고 걸어야 했다. 담당경찰관이 교육원이라는 사람들과 함께 강제로 나에게 무슨 약물인가를 주사했지만, 상처는 더욱 심해졌다. 그들은 내가 그곳에서 죽을 경우 책임문제가 뒤따를 것을 우려해서 지난(濟南) 무장경찰병원으로 후송해 검사를 받게 한 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감금된 지 19일 만인 2004년 6월 30일 지역 파출소 경찰관의 동행으로 아버지가 나를 인수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 경찰관들은 나를 동행한 비용을 내라고 요구했지만, 어머니가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에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단할 위기에까지 처했다가 살아났는데, 지금 멀쩡한 사람을 납치해서 감금한 후 고문박해로 쇠약해진 몸이라 병이 도져 위중한 상태로 될 까봐 몹시 걱정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병원에서는 수술을 받고 집중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고 파룬궁수련만을 했다. 수련을 다시 시작한 지 1개월 만에 걸을 수 있었고, 고름이 흐르던 상처가 아물었다. 파룬궁이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능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장쩌민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무리 비열하고 악독하게 박해를 하더라도 수련생의 믿음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련 박해기관 및 관련자 인적사항은 원문참조 바람)
원문발표: 2016년 11월 16일
문장분류: 대륙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16/337766.html
1. 대법을 수련해 가정이 화목해지고 직장에서도 근면 성실하게 근무하다
나는 고등학교시절부터 강도 높은 학습의 압력으로 심각한 편두통과 신경쇠약증상으로 고통받아오며 성격도 민감해져 의심이 많아져서 매사를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대하게 되었다. 밤이면 늘 놀라 깨어나기 일쑤여서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여러 방면으로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어서 실의에 빠져 있었다.
1997년 3월 어느 날 톈진(天津)대학 교정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이 아침연공 하는 모습을 보았다. 연공동작이 간단해서 배우기가 쉽고 또 동작이 완만하면서도 우아한 파룬따파 5장공법을 보고 마음에 끌려 ‘나도 파룬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학습부담이 과중했을 때라 편두통이 심한 상태였는데, 단지 파룬궁을 수련해야겠다는 간단한 생각을 했을 뿐인데, 편두통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마음이 차분해져 자신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한 듯했다. 그래서 바쁜 시간을 내어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법 공부와 연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좋은 사람, 진정한 사람이 되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격이 상냥해져 무슨 일과 마주칠 때마다 참고 양보하며 너그럽게 대했다. 과거와 달리 동생들에게도 욕하거나 때리지 않고 상냥하게 대했다. 지금까지는 급하고 못된 성격 때문에 동생들이 말을 듣지 않거나 말썽을 피우면 야단을 쳤고, 심지어 공부를 가르칠 때 말을 듣지 않고 알아듣지 못하면 손찌검까지 해서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나고, 머리에 혹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파룬궁수련을 시작한 후 변한 내 모습을 본 부모와 가족들이 나의 파룬궁수련을 적극 지지했다. 우리의 가정은 더욱 단란해졌다.
나는 학업을 마치고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모든 학생들이 모두 나를 따르며 좋아했고, 내가 하는 수업에 참가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학교에는 이름난 불량학생 2명이 있었다. 그들은 자주 무단결석을 하면서 공부하기보다는 치고받고 싸우며 소란피우기를 일삼았기 때문에 감당하기가 어려운 담임선생님을 울리기까지 한 그런 학생들이었으므로 교장선생님도 무슨 대책이 없는 그런 처지였다. 그런데 그 2명의 불량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도 선생님의 수업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 수업에 참가한 그들은 비교적 성적도 괜찮았고, 한 학기 동안 열심히 공부하면서 성적이 올랐는데, 그들은 무난히 대학입학시험에도 합격했다.
파룬궁의 진선인(真善忍)의 법리는 수많은 수련생에게 건강과 평화를 가져다주고, 광명과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말없이 수련하며 실천하여 사회와 국가에 도덕심을 높였으며, 좋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2. 불법적인 3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다
나는 2001년 3월 9일, 3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산둥성 제1여자노동교양소에 감금되었다.노동교양소 교도관들은 파룬궁을 모독하고, 파룬궁창시자의 간행물, 음향제품을 모독하면서,기만적인 교육원의 거짓말로 감금된 파룬궁수련생에게 믿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일명‘5서’라는 걸 쓰라고 강요하면서 응하지 않으면, 독방에 감금하고 교육을 시킨다면서 24시간 동안 지키며 말을 했다. 그 기간 동안 조금도 신체적인 자유가 없었고, 또한 믿음의 자유도 없었으므로, 감옥 중의 감옥에서 고통 받았다. 나는 고문박해에 시달려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나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방에 1개월 넘게 감금당했는데, 매일 몇 명의 교육원이라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끊임없이 모욕과 욕설 그리고 구타했다. 그러면서 화장실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소변을 보지 못해 심장에 이상증상이 나타났고, 급기야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또 며칠 동안 밤잠을 재우지 않고 2시간만 재웠는데, 그나마 눕기만 하면 불러일으켜 세웠다. 어떤 때 선 채로 잠이 들면 교육원이란 사람이 사납게 밀치고, 찬물을 끼얹고, 무슨 연고를 바르고, 간지럼피고, 눈꺼풀을 후벼 파는 등등 온갖 고문학대를 가했다. 무더운 여름에는 작은 쇠 의자에 앉혀놓고 장기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사정없이 구타했다. 장기간 그런 자세와 혹심한 구타로 둔부의 살이 터지고 찢어졌다. 구토증으로 어지럽고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사리를 분간할 수가 없게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교양소에서 장기간 과부하 노역에 시달렸다
(1) 수공으로 이불 만들기 노역으로 바늘에 찔려 손을 크게 다쳤고, 손에는 굳은살이 박혔다.
(2) 재봉틀로 자수를 놓았다.
(3) 꽃병 공예품을 제작했다.
(4) 약품위조방지상표를 붙였다(베이징 솽허혈압강하0호(北京雙鶴降壓0號)).
(5) 옷의 실밥 자르기 등의 일을 했다.
매일 부과된 할당량이 매우 과중했다. 오전 5시경 작업실에 투입되면 화장실 가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제한했는데, 모든 건 정해진 시간대로 시행했다. 휴식시간은 아예 없었으며,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점심식사시간은 30분이었고, 매일 자정까지 특근을 시킬 때가 많았다. 나는 잔혹한 고문박해로 건강이 나빠진데다가 혹독한 강제노역까지 하는 바람에 건강상태는 점점 나빠져서 늘 구토하며 화장실을 가야만 했다. 그러나 화장실 시간은 단 5분간이고, 목욕을 허락할 때는 10분간이라, 용변을 다 보지 못하고 중간에 불려나가기가 일쑤였는데, 그때 느낄 수 있는 처절한 심정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다.
2003년 10월 나의 불법적인 노동교양감금기한이 만료되어 귀가했다. 그렇지만 귀가해서도 여전히 속박당하고 있었는데, 소위 ‘사상회보자료’라는 걸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가족에게 책임을 맡겨 감시하게 하고, 직장에서도 역시 감시가 뒤따랐으므로 외출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3. 다시 2년의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을 받다
나는 2004년 5월 13일 재래시장에서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에게 진상 시디를 주었는데, 나를 미행하던 사람에게 신고당해, 경찰에 납치되어 가택수색으로 금품을 강탈당한 후 다시 웨러우(岳樓)구치소에 감금됐다. 구치소에서 조사받을 때 자백을 강요받으며, 잠 안 재우기, 쇠 의자에 앉히기 등의 고문을 여러 차례 당했다. 그곳에 감금돼 있는 동안 강제노역에 투입됐는데, 무방비 상태에서 독성이 있는 코일조립을 시켜 심신이 무력해졌고, 온갖 고문박해로 골수염이 다시 재발하여 다리통증이 왔다. 그랬어도 610은 나와 가족의 청원을 외면한 채 2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내렸다.
2004년 6월 11일 두 번째로 짜오좡 산둥성 제1여자노동교양소로 이송되어 작은 독방에 감금됐다. 날씨가 무더워 고문으로 상처 난 곳이 붉게 부어오르며 곪기 시작해서 통증이 심했고, 제대로 걷지 못해 벽을 잡고 걸어야 했다. 담당경찰관이 교육원이라는 사람들과 함께 강제로 나에게 무슨 약물인가를 주사했지만, 상처는 더욱 심해졌다. 그들은 내가 그곳에서 죽을 경우 책임문제가 뒤따를 것을 우려해서 지난(濟南) 무장경찰병원으로 후송해 검사를 받게 한 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감금된 지 19일 만인 2004년 6월 30일 지역 파출소 경찰관의 동행으로 아버지가 나를 인수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 경찰관들은 나를 동행한 비용을 내라고 요구했지만, 어머니가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에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단할 위기에까지 처했다가 살아났는데, 지금 멀쩡한 사람을 납치해서 감금한 후고문박해로 쇠약해진 몸이라 병이 도져 위중한 상태로 될 까봐 몹시 걱정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병원에서는 수술을 받고 집중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고 파룬궁수련만을 했다. 수련을 다시 시작한 지 1개월 만에 걸을 수 있었고, 고름이 흐르던 상처가 아물었다. 파룬궁이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능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장쩌민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무리 비열하고 악독하게 박해를 하더라도 수련생의 믿음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련 박해기관 및 관련자 인적사항은 원문참조 바람)
원문발표: 2016년 11월 1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16/3377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