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후베이성 징저우시 펑펑, 억울한 8년형 판결당해

[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후베이 보도) 후베이성 징저우(荊州)시 사양구(沙市區) 파룬궁수련생 펑펑(馮峰)은 2016년 7월 4일에 억울한 8년 징역형 학대를 마치고 후베이 사양구 판자타이(范家台)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 펑펑은 독방에 76일 동안 갇혀 있었는데 그중 55일 동안 목욕과 양치질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의 아내와 두 딸은 각각 그를 면회하러 갔다가 감옥 측의 거절을 당했다.

펑펑은 2004년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2008년 7월 5일, 집에서 납치돼 불법적인 8년형 판결을 당했다. 판자타이 감옥에서 각종 고문 학대(혹독한 구타, 좌반(坐板), 추위에 떨기, 입안에 전기충격을 가하기, 1개월 동안 독방에 가두기, 7일 동안 족쇄를 채우기)를 당했는데 손가락은 지금도 마비되어 있다. 그리고 등은 여러 곳이 구타로 문드러졌고 발에 걷어채여 혈뇨를 보았으며 두 어깨는 학대로 4년이 넘어도 여전히 아프다.

펑펑은 말했다. “저는 판자타이 감옥에 7년 넘게 있었는데 걸핏하면 구타하고 욕설을 퍼붓고, 걸핏하면 하룻밤 못 자게 했으며, 걸핏하면 하룻밤 세워두는 고문, 작은 나무 의자에 앉히기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또 걸핏하면 화장실 가는 것을 제한했는데 이렇게 참으면 오전 내내, 오후 내내 참았습니다. 독방에 가두고 집중훈련실에 가뒀는데 이런 유형의 폭력으로 파룬궁수련생을 전향하도록 핍박하는 범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판자타이 감옥은 분명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인간 지옥입니다.”

펑펑은 그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자술했다.

나는 2004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지질 탐사에 종사했는데 야외에서 15년 동안 뛰어다녀 심각한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렸다. 그것은 죽지 않는 암 증상이다. 어머니는 관상동맥 질환, 고혈압, 빈혈 등 여러 질병을 앓았다.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짙은 한약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매일 약탕관으로 두 잔을 마셨는데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1996년에 부모님이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한 후 질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예전에 장염 증상이 있어 늘 화장실로 뛰어다녔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대변을 보았다. 게다가 쭈그려 앉기만 하면 한나절이나 앉아있어야 해서 몹시 괴로웠다. 병원으로 가서 치료해도 잘 낫지 않았고 각종 민간 처방도 효과가 없었다. 그 후 부모님의 권고를 거쳐 시험 삼아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완쾌됐다. 이 때부터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파룬궁수련생이 된 후 담배, 술, 도박을 모두 끊어버렸고 일을 함에 다른 사람을 배려했으며, 선의로 남을 도와주었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충돌이 발생했을 때 자발적으로 참고 양보해 큰일은 작게 하고 작은 일은 없앴다. 몸이 건강해지고 정신도 충실해졌다.

나는 2008년 7월 5일에 집에서 불법적인 납치를 당했다. 7월 7일에 후베이 사양시 제1구치소로 보내졌다. 이 기간 나는 변호사를 선임했으나 여전히 8년형을 당했다. 항소했으나 여전히 원 판결을 유지했다.

혹독한 구타, 좌반, 냉(冷) 고문

2009년 5월 7일, 나는 극히 악명이 높은 후베이 사양 판자타이 감옥으로 보내져 4감구 2분감구에 감금됐다. 파룬궁수련생 절대 다수는 모두 집중적으로 4감구에 감금됐다. 감구장은 샤오톈보(肖天波), 2분감구장은 쭈젠(祖劍)이었다.

내가 협력하지 않았던 이유로 경찰은 바오자(包夾, 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원)를 지시해 구타하고 욕설을 퍼부었는데 바오자를 몇 차례나 바꾸었다. 맨 마지막 바오자 한 팀이 구타하지 않아서야 진정됐다.

2010년 겨울, 전 감옥에서는 명찰을 달아야 했는데 나와 파룬궁수련생 청더융(程德永), 장다오즈(張道志)는 협력하지 않았다. 결국 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작은 나무의자에 앉는 체벌을 당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았는데 한 겨울 동안 앉았다. 뜨거운 물로 발을 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이유로 보름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서있는 것마저 휘청거렸다. 그 후 뜨거운 물로 씻게 해서야 차츰 회복됐다.

中共酷刑示意图:罚坐

중국공산당 고문 설명도: 앉히기 고문

강제 노동을 거부했던 이유로 우리 몇 명 파룬궁수련생은 1층에서 2층 4감구 1분감구로 배치됐다. 나는 출석을 부를 때 상관하지 않은 이유로 작은 의자에 앉는 고문을 받았는데, 먼저는 류더위(柳德玉, 징먼 파룬궁수련생)였고 그 후에는 12명으로 늘어났다. 2011년 6월 1일부터 줄곧 2012년 2월까지 앉았는데 매일 아침부터 저녁 10시까지 앉았다. 이렇게 7개월 넘게 지속됐다.

전기봉을 입안에 꽂아 넣고 전기충격 가하기

酷刑演示:电棍电击

고문 재연: 전기봉으로 전기충격 가하기

2012년 2월 2일에 나는 8감구 1분감구로 보내졌다. 감옥장은 차이헝산(蔡恒山)인데 별명은 차이헤이쯔(蔡黑子)였다. 교도원은 판쥔루(范俊儒)이고 분감구장은 허카이(何凱)였다. 2월 25일, 감구장 허카이는 술을 마신 뒤 8감구 운동장에서 150명의 수감자들 앞에서 내가 출석을 부를 때 상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기봉으로 내 목에 전기충격을 가했다. 그 후 전기봉을 내 입안에 꽂아 넣고 전기충격을 가했다. 나는 큰 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친 후 19끼를 단식했다. 단식해 사흘이 됐을 때 판쥔루는 몇 명의 수감자를 거느리고 강제로 나를 병원으로 보내 링거를 맞혔다. 맨 마지막에 판쥔루가 다시는 사람을 구타하지 않겠다고 보증해서야 나는 단식을 중지했다. 4월 21일 오전, 허카이는 내 두 손을 거꾸로 채워 8감구 작업실에서 나를 단독으로 8감구의 숙소2층 작은 사무실로 끌어들였다. 작은 사무실의 문과 창문을 단단히 닫고 커튼은 빈틈없이 잡아당겨놓고 강제로 나를 전향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전기봉을 꺼내들고 전기충격을 가해 나를 땅 위에 넘어뜨렸다. 내가 땅바닥에 앉은 후 그는 끊임없이 전기봉으로 내 상반신에 충격을 가했다. 강대한 전류로 내 마음이 찢어지고 폐가 파열될 것 같았다. 대략 20~30분 동안 지속됐다. 내가 화장실로 가려하자 그는 그제야 나에게 한쪽 수갑을 풀어주었다.

독방에 가둬 학대를 가하다

내가 대소변을 본 후 강제로 아래층으로 향하게 했는데 그는 나를 바싹 뒤따랐다. 운동장에서 나에게 거꾸로 채우려 했으나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9감구의 뚱뚱한 경찰이 다가와 그 두 사람은 나를 거꾸로 채웠다. 그 후 허카이는 나를 8감구 작업실로 끌고 갔으며 그날 나를 독방으로 보내 가뒀다.

독방에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족쇄를 채웠다. 독방 길이는 2.5미터, 너비는 2미터, 높이는 6미터였다. 동쪽 벽을 가까이에 시멘트로 쌓은 침대가 있었다. 윗면에는 길이가 2미터이고 너비가 0.8미터인 널판이 있었다. 동북쪽 구석에는 변기 하나가 있었는데 실내의 유일한 수원이었다. 물을 마시고 대소변 보는 것을 모두 이곳에서 치렀다. 수갑은 침대 윗면에 있었다. 두 손은 양편으로 갈라서 따로따로 쇠고랑에 채웠는데 매 시각 두 손을 움직여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쇠고랑이 살 속에 패여 들어 매우 아팠다. 하반신은 널판 위에 앉았는데 두 발은 따로따로 족쇄에 채워져 자물쇠에 의해 고정됐다. 이렇게 사흘 동안 채워지고 보름 동안 갇힌 후 5월 5일 독방에서 나왔다.

中共酷刑示意图:手铐脚镣

중국공산당 고문 설명도: 수갑 족쇄에 채우기(手銬腳鐐)

등 여러 곳이 구타로 문드러지고 발에 걷어채여 혈뇨를 보다

5월 어느 날 밤중, 8감구 사무실에서 허카이는 두 손에 경찰봉을 하나씩 들고 내 등을 사납게 쳤다. 등은 여러 곳이 구타로 문드러졌다. 나는 큰 소리로 살려달라고 외쳤고 8감구, 5감구(매 한 동의 기숙사는 5층이며 2개의 감구 인원이 머물렀음)의 수감자들을 모두 깨웠다. 나는 경찰봉 2개를 빼앗았고 나는 그를 구타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한 경찰 위훙웨이(于紅衛)를 깨워 경찰봉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5월 어느 날, 8감구 작업실에서 허카이는 고의로 나의 흠을 잡고 구타했다. 내가 높은 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를 외치자, 그는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해 나를 구타해 땅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리고 발로 내 몸을 걷어찼다. 이로 인해 나는 소변에 혈뇨 현상이 나타났다.

1개월 동안 독방에 가두고 꼬박 7일 동안 쇠고랑에 채워 지금까지 손가락은 여전히 마비돼 있다

5월 31일, 두 번째로 나를 독방에 넣었는데 1개월 사이에 두 차례나 보내진 것이다. 첫 번째 감금시 신체 손상이 회복되기도 전에 두 번째로 감금됐다. 이번에는 1개월 동안 독방에 가두고 꼬박 7일 동안 족쇄를 채웠다. 나를 보낸 처음의 이틀 동안은 이미 꼬박 2일 동안 나에게 수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쇠고랑을 꼬박 6일 동안 채웠을 때 내 두 손목은 이미 피부가 찢기고 터졌으나 그들은 전혀 관심하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상부에서 명령을 발포하면 그들은 끝까지 집행해야 했다. 이로 인해 내 두 손목은 곪아 스스로 생활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4년이 넘는데 손가락은 여전히 마비되어 있고 오른쪽 손목은 쇠고랑 흔적이 남아있다.

이글거리는 한 여름에 실내는 마치 찜통 같았고 모기도 매우 많았다.

“널 예수로 만들겠다”

6월 29일, 허카이는 나를 독방에서 끌어내어 8감구 1분감구로 돌아가자마자 구타했다. 말로는 “내가 널 예수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는 두 손을 따로따로 쇠고랑에 채워 문 위에 팔을 벌리게 채웠다.

中共酷刑示意图:吊铐

고문 설명도: 매달기 고문(吊銬)

가장 심각한 한 차례는 저녁에 내 두 팔을 벌려서 8감구 복도 창문 위에 채워두고 두 발로 서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목 위에는 또 잡목으로 만든 두개의 팻말(나는 평소에 매일 세워두기 고문을 당할 때마다 이 두 개의 팻말을 걸어야 했음)을 걸었는데 매우 무거웠다. 두 명의 바오자가 지키면서 꼬박 하룻밤을 채워두었다. 팻말을 이동할 수 없었던 이유로 나는 두 어깨가 부러지는 듯 했다. 4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파 무거운 일을 할 수 없다.

약물 박해

7월 어느 날 오후, 8감구에서 허카이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 “내 모든 수단을 이미 다 사용했으나 당신에 대해 방법이 없다. 나는 당신을 미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양위(楊宇), 바오자 다이샤오쥔(戴小軍), 양바오자(楊保家) 등 5~6명은 강제로 한줌이나 되는 흰색 약을 내 입 안에 넣고 먹였다.

이튿날 오전 감옥장 저우훙[周宏, 별명은 저우바피(周扒皮)임]이 왔다. 그는 단지 먼 곳에서 나를 보았는데 그 후 다시는 강제로 약을 먹이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한 후 그는 8감구에서 집단적으로 결정했음을 시인했다.

볼 때마다 구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8감구에서는 나를 보내려 했다. 그러나 기타 각 감구(모두 9개 감구)에서는 나를 요구하는 감구가 하나도 없었다. 허카이는 판자타이 감옥의 5백 여 명의 경찰 중 가장 흉악한 사람인데 온갖 수법을 사용해도 나를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허카이는 거의 나를 볼 때마다 구타했다. 떠나가기 전까지도 나를 구타했다. 내가 상처투성이가 되면 나를 병원 감구로 보냈다.

2012년 8월 2일부터 2013년 5월 29일까지 병원 감구로 갔는데 이는 박해 릴레이였다. 병원 원장 둥커원(童克文), 교도원 펑화룽(彭華龍), 부원장 슝찬펑(熊燦峰)은 집단적으로 나를 밤 2시에 잠을 자게 하고 6시에 일어나게 했다. 4명의 바오자가 윤번으로 당직을 섰는데 그 외의 시간은 세워두기 고문을 가했다.

酷刑演示:纸棍抽打

고문 재연: 종이 몽둥이로 후려치기

얼마 되지 않아 부교도원 천전밍(陳珍明)이 휴가를 끝내고 돌아왔다. 저녁에 바오자 마샤오린(馬小林)에게 나를 사무실로 불러들이게 했다. 마샤오린이 내 한 쪽 손을 쥐고 천전밍은 손으로 내 얼굴을 구타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손이 아프다며 잡지를 감아쥐고 내 얼굴을 때렸다. 코는 구타당해 많은 피가 났다. 강제로 나를 4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게 했다. 그 후 5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도록 고쳤는데 이로 인해 나는 이미 설 수 없어 앉아있는 수밖에 없었다.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나는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1개월 동안 지속됐다. 나는 정말 지탱할 수 없었다.

2012년 2월, 감구장 저우바피는 직접 한 차례 또 한 차례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공견전(攻堅戰)’을 발동했다. 그가 교육과에 지시하면 교육과에서는 다시 각 감구에 지시했으며, 각 감구에서 다시 바오자에게 지시하며 층층이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박해를 진행했다, 목적은 백분의 백 전향률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걸핏하면 구타하고 욕하며 수면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세워두기 고문을 가하다

2013년 5월 29일, 나는 1감구로 배치되어 갔다. 그 후 1감구는 7감구와 합병돼 들어가게 되어 나는 7감구(3)에 배치됐다. 감구장은 리톈안(李天安)이고 교도원은 쑨촨쥔(孫傳軍)이었는데 강제로 나에게 노동을 시켰다. 내가 따르지 않자 내가 무엇을 하든지 모두 바오자에게 알리라고 했다. 나는 듣지 않았다. 오전 내내 밥을 나눠주기 전에야 나에게 화장실 가는 것을 허락했다. 오후 내내 역시 이러했는데 매일 세워두기 고문을 당했다. 이로 인해 내 허벅지에는 많은 혹이 생겨나 결국 세워두기 고문을 하지 않았다.

2014년 11월 하순, 집합할 때 인원을 보고하지 않고 쭈그려 앉지 않았다는 이유로[이때의 감구장은 마웨이빙(馬衛兵)이고 교도원은 왕슝제(王雄傑)이며, 분감구장은 딩화핑(丁華平)이고 지도원은 양강(楊剛)이었음], 악독한 경찰들은 곧 바오자에게 강제 명령을 내려 내 머리를 누르게 했다. 바오자는 “당신이 지난번에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쑨촨쥔 한 사람뿐인데, 이번에는 늑대 무리입니다. 모두 강력해서 당신이 하지 않으려 해도 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그 후 나를 누르기만 하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를 외쳤다. 12월 28일에 해제시켰고 12월 상순에 나는 엄정성명을 썼다.

2015년 1월 8일, 3관할 구역과 4관할 구역을 하나로 합병했다. 2015년 여름, 옥졸 황하이(黃海), 바오자 류쥔(劉俊)은 혹독하게 나를 구타했는데 나에게 노동을 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 후 황하이가 나에게 사과를 했다.

2016년 4월 2일, 나는 죄수복을 거부해 4월 3일에 독방에 보내졌다. 55일 동안 목욕과 양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76일 동안 갇혀 머리가 멍해졌다. 6월 17일에 독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문장발표: 2016년 9월 1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9/18/335176.html